시조 문다성부터 중시조 문익을 거치면서 남평 문씨는 10대파로 분파됩니다.
그 중 고려 말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했던 학자 문익점은 충선공파(강성군파)의 시조가 되었죠.
문익점의 조카 문가학이 1406년에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잡히게 되었고, 화를 피하기 위해 문익점의 아들 중 문평은 경상남도 단성을 떠나 두 아들과 가족을 데리고 사천으로 이사를 갑니다.
이후 문평은 첫째 아들인 문어동(文圄仝)은 사천에 두고, 둘째 아들 문우원(文遇元)을 데리고 동래 초읍동로 이사 오게 되었죠. 그렇게 문평은 자연히 '남평 문씨 충선공파 의안공파 동래입향조'가 되었습니다.
부산 금정구 금사동에 위치한 남평 문씨 의안공파의 안공평파 금사파문중의 재실, 금성재를 찾았습니다.
'남평 문씨 충선공파 의안공파 동래입향조'인 문평(文苹)의 현손 문심(文沈)이 임진왜란 전에 현재의 금사동으로 이사오면서 '남평 문씨 충선공파 의안공파 안공경파 금사입향조'가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문심의 고조할아버지인 문평이 먼저 현재의 부산 땅에 도달했고, 이후 분파되었음을 알 수 있죠.
입구의 오른편 벽에 '남평문씨 의안공파 동래종중회 금사문중재실'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남평 문씨 안공평파 동래종중 금사문중'이라고 적힌 현판이 보입니다. 대들보에는 한 쌍의 봉황이 마주 보고 있죠! 1976년에 건립된 재실이죠.
문 뒤로는 금성재(錦成齋)라는 현판이 걸린 목조 한옥 재실이 보입니다. 이 안에는 남평 문씨 안공평파 동래문중 계보와 금성재 사적기, 충선공 문익점 초상화 등이 부착되어 있으며, 금사입향조 문심을 포함한 약 8대 98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남평 문씨 후손 100여 명이 제향에 참석한다고 하죠.
동래 지역의 향반이었던 남평 문씨 금사파문중의 재실은 아파트 사이에서 세거한 긴 역사와 함께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재실의 뒷편에 남평 문씨의 시주로 운영되는 보운사(寶雲寺)도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같이 찾아가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위쪽의 부산 금정구 회동동에는 이 금성재에서 이름을 딴 남평 문씨 의안공파 동래종중 금사문중의 묘원인 금성묘원도 있어 금정구 윤산 아래쪽 지역은 이들 후손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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