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어린이대공원 성지곡수원지의 북쪽에 사명대사 호국광장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사명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일본을 어떻게 갔다왔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사명대사 일본행적 경유도 |
사명대사는 1604년 2월 오대산(五臺山)에서 스승 휴정(休靜, 서산대사 휴정, 1520~1604)의 부름을 받고 묘향산(妙香山)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강화사절로 임명받았다. 그 해 8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간 머무르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1605년 4월 임진왜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그 유래를 보기 힘든 외교력의 극치를 보여준 쾌거라 하겠다. 사명대사의 이 같은 업적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고자 부산불교계와 뜻있는 시민들이 합심하여 1985년 대사의 동상과 비각을 이곳 어린이대공원에 세우고 매년 추모제를 봉행하였으며, 2010년 5월 마침내 부산시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사명대사호국광장이 완공되었다. |
사명대사 | |
음력 8월 26일 추모대법회 | 사명대사 유정(泗溟大師 惟政, 1544~1610) |
부산광역시 불교연합회에서는 매년 사명대사의 열반일인 음력 8월 26일 이곳 초읍 어린이대공원 내 사명대사 동상 앞에서 대사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추모대법회를 봉행해오고 있으며, 2010년 5월 사명대사 호국광장 완공 후 이곳 사명대사호국광장에서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호국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泗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 출신. (임)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 여러 사람에게서 받는 촉망)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參究)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사느,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1611)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성벽처럼 둘러진 듯한 계단을 올라가면
계단 끝부분 왼편과 오른편에 사천왕 동상 2기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올라와 뒤를 돌아보니 입구 기준 왼편엔 정자 2개가 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상쪽으로 돌아보자 어떤 어르신이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뭐라 설명하진 못하는 마음의 떨림을 느꼈습니다.
사명대사 동상입니다. 그 크기부터 압도되었죠.
사명대사 동상 뒷편엔 사명스님의 발자취, 건립문, 동상건립 사주 방명록 등이 적혀 있으며,
글 양쪽에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에서 싸웠던 것과 전쟁 이후 일본으로 가 적장을 설득해 포로를 데리고온 것이 그려진 벽화가 있습니다.
사명스님의 발자취 |
우리겨레의 반만년 역사에 별처럼 빛나는 거룩한 분들이 많으나 사명스님은 더욱 찬란한 광랴를 드날린 어른이시다. 풍천 임씨로 이름은 응규이며 호는 송운 법명은 유정이라 하였으며 아버지 수성과 어머니 달성 서씨의 아들로 1544년(중종 39년) 10월 17일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개나리골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시다가 열다섯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경상북도 황악산 직지사 신묵화상에게 계를 받으셨다. 열여덟에 승과에 급제하여 명산대찰을 찾아 불도를 닦다가 묘향산에서 서산대사의 법도를 이어 받았다. 마흔아홉살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으며 적이 절에 침입하여 스님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보물을 약탈할 때 그들을 교화하여 곱게 물러가게 하고 강원도 고성의 적진에 들어가 왜장을 감화시켜 영동구읍의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였으며 칠백명의 숭병을 모집하여 명나라 응원군과 함께 평양을 점령한 왜적에게 치명상을 입힘으로서 적은 서울을 포기하고 삼남해변으로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울산 서생포의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 진중을 세차례나 들어가서 적정을 탐지하고 침략야심을 꺾어버렸으며 정유재침(정유재란)시는 울산과 순천싸움에서 큰 공을 거두는 등 구국의 공이 혁혁하셨다. 왜적이 다시 침략해 오리라는 풍문이 있자 예순한살의 노령으로 국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왜의 침략상을 성토하고 그들을 설복하여 강화를 맺고 잡혀간 동포 삼천오백여명과 도둑질 해간 보물즐을 찾아 오셨다. 조정에서는 그동안의 공을 가상히 여기어 선무일등공신에 봉했으며 그 후 해인사 홍제암에서 수도하시던 중 춘추 예순일곱에 입적하기니 자통홍제존자의 기호가 내려졌다. 세속의 부귀공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직 세상을 뛰어나는 불도를 닦든 몸으로써 모진 국난을 당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건저내고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국운을 바로 세운 거룩한 정신과 뛰어난 공덕은 이 겨례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횃불이 되리라. 1794년(정조 18년)에 서산 사명뇌묵 큰스님을 위하여 표충사와 수충사를 세우게 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향을 모시게 하였으며 국가와 민족에게 끼친 은덕을 표창하기위하여 행(行)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령(議政府領) 의정병조판서위(議政兵曹判書爲) 육군문도총섭령(六軍門都總攝領) 의병대장군(義兵大將軍) 사명당(四溟堂) 송운선사(松雲禪師)의 호를 제수하시었다. 서기 1981년(불기 2525년) 10월 17일 법운 이종익 짓고 고천 배재식 쓰다 |
건립문 |
허다한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육신이 사라짐과 함께 그 생명도 자취를 감추고 마는 법이지만 민족의 횃불이신 사명대사께서는 비록 육신은 수 백년 전 가셨으나 생명의 본체는 길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계시도다. 그 크신 모습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때로는 슬기를 일깨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게도 하시면서 우리와 같이 숨쉬고 함께 걱정하시고 이끌어가고 계시도다. 안으로는 깊숙하고 밖으로는 찬란했던 이 나라 불교가 근조(近朝, 이번 왕조)에 와서 단절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 대사께서는 안으로 감추신 불꽃이 튀기는 구도자의 슬기로 임진의 국난에서 애국 애족의 실천으로 불교를 소생시키지 않으셨던가. 구국성사 사명스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큰 별이시다. 그 지혜로 말하면 성에 통하셨고 사랑으로 말하면 만민의 어버이에 달하셨으며 용으로 말하면 장으로 뛰어나셨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킴에 임진의 국난과 왜구의 침략은 참으로 우리의 삶을 마구 짓밟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에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 끊이지 않고 오늘에 이르럼은 오로지 나라 사랑의 많은 횃불들이 빛났기 때문이리라. 그 크신 횃불 중에 사명대사의 행장을 살펴 보면 참으로 우러러 보이시고 고개가 숙어지고 나라 사랑의 마음이 간절해진다. 스님께서야 상이 있고 없음에 관계 없으시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크고 많을수록 이 땅에 통일과 평화가 앞당겨 지리라는 뒷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이번에 부산불교 새마을 복지회에 집약되어 사명대사동산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에 부산시의 협조로써 동상의 건립을 보게 되었으며, 아우러 비각을 마련하고 정공단에 있던 대사의 충의비를 옮겨 단장하니 비록 만시의 감이 없지 않으나 감격스럽고도 다행스럽도다. 우리는 동상을 건립하는 일로써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동상을 건립하므로써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호국사상을 확대해 나가는 일에 동상 건립의 참뜻이 있음을 알아야하겠다. 이 거룩한 일에 다함께 겸허한 마음으로 동참하여 화합과 단결로써 역사를 빛나게 하는 별빛이 되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서기 1981년(불기2525년) 10월 17일 법산 김용태 짓고 고천 배재식 쓰다 |
그 옆에는 동상건립 시주 방명록, 1981년 부산불교새마을복지회 사명대사동상건립추진위원회 집행부, 부산광역시 불교연합회(승가), 부산광역시 불교연합신도회(재가), 공로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동상이 있는 쪽에서 정면 기준 오른편에는 비각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유정대사충의비각(惟政大師忠義碑閣)'이죠. 그 안에는 원래는 정공단(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12)에 있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유정대사충의비가 있는데요. <부산금석문>에 따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비각 오른편에는 '동상건립 시주 방명록'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 앞면 |
유정대사 충의비(惟政大師忠義碑) |
비석 뒷면 |
오호라, 임진년의 변고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드높은 송운(松雲)이란 이름은 오랠수록 더욱 빛난다. 위급하고 어려울 때 승의병(僧義兵)을 일으킨 것은 필경 효와 충에서 근본을 추구하였던 것이고, 자비의 종교에서 도를 깨달은 것은 본래 경전과 역사서에 힘입었던 것이다. 세 차례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배로운 적장의 머리를 얻고자 하였으며, 멀리 사나운 파도를 건너가 외로운 혼령들을 널리 구제하였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서로 교린(交隣)하도록 하였으니 몇 천 년 지켜 나갈 조약을 미리 정해 놓았고, 온 하늘에 은혜 가득하니 수없는 생명들의 번식이 이것에 힘입었다. 옛일을 생각하여 벼슬자리에 있었던 것은 몸이 이미 깊은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요, 상소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한 것은 뜻이 부귀에 따라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야산에서 임금으로부터 내린 의약을 받고 사례하고, 죽음에 장차 순응하니, 상서로운 빛이 하늘을 비추었다. 밀양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성대한 제전(祭典)이 마련되니, 풍성(風聲)을 영구히 수립하였다. 네 곳의 진영을 축조하는 부역으로 부산성이 완성되고, 10년 동안의 공로 가운데 이곳이 가장 현저하다. 세월이 오래되어 지나간 자취는 아득하고, 흘러간 시간은 돌아볼 겨를 없으니, 사라지지 않도록 이 돌에 새겨 둔다. 당당한 충의는 유불(儒佛)에 같이 빛이 되리니, 아! 후생들은 이 글을 거울삼아 모범으로 삼을 것이다. 대사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요, 품계는 가의대부(嘉義大夫)이다. 호는 사명(四溟)·종봉(鍾峰)·송운(松雲)이다. 경진년 여름 부산 첨사 임형준 쓰다. |
한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전쟁, 임진왜란 속에서 민중을 위해 몸소 승병을 이끌고 일본군을 격파하고, 여러 성을 짓고, 전쟁이 끝나고는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잡혀간 포로들을 구출해온 전쟁 위인인 사명대사 유정. 그 민족적 영웅의 동상이 이곳 부산어린이대공원 성지곡수원지 호국광장에 서있습니다. 부산어린이대공원 성지곡수원지를 방문하신다면 꼭 찾아 가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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