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고골은) 1828년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골리는 허영심과 불타는 야망에 가득 차서 뻬쩨르부르그(페테르부르크, Петербург)로 갔다. 이러한 기대는 곧 심하게 좌절되었다. 그는 문학적인 명성을 갈망하여 매우 하잘 것 없고 유치한, 독일적 목가생활을 그린 <한스 뀨헬리가르텐(한스 큐헬가르텐, Ганц Кюхельгартен)>이라는 시로 데뷔하였다. 그는 이 시를 '베 알로프(V. Alov)'라는 가명으로 자비 출판하였다. 그러나 여러 잡지들은 한결같이 조소를 보냈다. 그는 이 시집을 모두 사서 불태워 버렸다. 이러한 환멸 상태 속에서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미국으로 건너갈 목적으로 갑자기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 <러시아 문학사(D.P 미르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제5장 고골리의 시대> |
1. <한스 큐헬가르텐(Ганц Кюхельгартен)>이란?
부제 <그림 속의 전원시(장들(chapters)로 된 목가, идиллия в картинах)>로도 알려진 <한스 큐헬가르텐(Ганц Кюхельга́ртен)>은 시인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1809~1852)이 요한 하인리히 보스(Johann Heinrich Voss, 1751~1826)의 전원시(иди́ллия) <루이제(Luise)>를 모방해 1827년에 네진 김나지야(니진 김나지야, Нежинская гимназия)에서 썼던 18장의 시(поэма)입니다. 이 낭만주의적인 시는 1829년에 В. 알로프(В. Алов)라는 가명의 작가 이름으로 출판되었죠.
2. 어떻게 쓰이게 되었을까?
2-1. 시를 푸시킨에게 보여주러 갔으나 실패
문학평론가 파벨 바실리예비치 넨코프(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Анненков, 1813~1887)는 '고골이 182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직후 푸시킨을 찾아갔는데, 그가 밤새도록 '카드놀이'를 해서 피곤한 채로 잠든 모습만 보고 나왔다'라고 하네요.
한편, 문학평론가 이고르 졸로투스스키(Игорь Золотусский, 1930~)는 '고골은 푸시킨에게 보여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 <한스 큐헬가르텐>을 가지고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푸시킨이 잠을 자고 있지 않았고, 고골이 가져온 그 시를 봤다면 승인해 줬을지 의문'이라고 평가했죠.
2-2. 발표 그러나 냉렬한 조소, 불태움
1829년 6월, 아돌프 알렉산드로비치 플류사르(Адольф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юшар, 1806~1865?)의 인쇄소에서 이 시를 처음 출판합니다만, 이후 여러 부정적인 비평을 받게 됩니다. 특히, 당대 유명한 잡지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전보(Московский телеграф, 1825~1834)>에 그 시에 대한 비꼬는 견해들이 많이 실리며 고골은 큰 충격에 휩싸였죠. 참고로 이 <모스크바 전보>는 푸시킨의 <벨킨 이야기>를 두고도 '실패한 소설'이라고 비평할 정도로 19세기 초반 문학 비평으로 유명했던 잡지였습니다.
이에 고골은 그의 하인 야킴(Яким)과 함께 자신의 시집을 모두 사서 그의 방에서 불태워버립니다. 당연히 책 자체가 거의 다 불탔기에, 그 초판본은 서지학적으로 희귀본에 해당한다고 하네요. 그래도 존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왜냐면 고골이 친구 미하일 페트로비치 포고딘(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Погодин, 1800~1875)과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플레트네프(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етнёв, 1792~1866)에게 1본씩을 줬다는 И.В. 라자렙스키(И.В. Лазаревский)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죠.
2-3. 다행히 당시 시의 작가가 고골인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한스 큐헬가르텐>은 고골의 필명 중 하나인 В. 알로프(В. Алов)의 이름으로 쓰여졌는데요. 고골은 이 시의 서문에서 '이는 돈이 부족한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문학계에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에 익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갓 졸업한 경제적으로 힘든 대학생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목적도 이 시를 쓴 계기 중 하나인듯 합니다.
고골 전체의 생애 동안 재출판되지 않은 짧은 전원시 <한스 큐헬가르텐>은 판텔레이몬 알렉산드로비치 쿨리시(Пантелейм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лиш, 1819~1897)가 익명의 비망록에서 1852년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의 전기에 대한 몇 가지 특징들(Несколько черт для биографии Николая Васильевича Гоголя)>를 통해 처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고골과 네진 김나지야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프로코포비치(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Прокопо́вич, 1810~1857)의 증언을 바탕으로, П. А. 쿨리시는 Н. Я. 프로코포비와 고골의 하인 야킴을 제외하고는 당대의 그 누구도 <한스 큐헬가르텐>을 지은 진짜 작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1829년이면, 러시아 문학계에서 낭만주의적 시가 쇠퇴하면서 소설과 같은 산문이 널리 읽히기 시작하고, 사실주의(리얼리즘)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이 때 고골이 처음 썼던 '낭만주의 시'는 당연히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냉소받을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그 냉소가 오히려 고골을 '사실주의로의 각성제'가 되어, 그는 앞으로 사실주의(리얼리즘)적 작품을 많이 편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또 한 시대를 휩쓸었던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고골이 문학계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고골과 19세기의 다른 대표적인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대해선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276)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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