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러시아 문학(11~17세기)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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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러시아 문학(11~17세기)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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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러시아 문학, 기독교와 함께 시작하다.

러시아의 문헌 문학은 크리스트교 도입과 함께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는 구비 문학이었고, 그 외 정치적 문서들이 있다곤 하지만,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원초연대기)>에 그러한 문서가 있었다는 식으로 전해지는 등 현전 하지 않거나, 이후 편찬된 책에 옮겨졌을 뿐입니다. 고대 러시아 문학의 처음에 등장했던 책들은 예배를 통한 믿음과 복음을 소개하는 종교적 수단으로 나타납니다. 루시 크리스트교 교회(Руси христианский церковь)에서 만들어진 고대 문헌 문학과 교회 문학이 만들어진 것이죠.

현존하는 최고의 루스 문학 작품인 <노보고로드 코덱스>(출처 : old.bigenc.ru)

학자들은 2023년 10월 기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대 러시아 문학 작품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지어졌다고 여겨지는 시편 등 다양한 크리스트교적 기록인 <노보고로드 코덱스(Новгоро́дский ко́декс)>로 보고 있으며,

1057년에 지어진 <오스트로미르 복음서>(출처: old.bigenc.ru)와 1073년에 지어진 <스뱌토슬라프 선집 1> (출처 : 핀테레스트)

1057년 부제(副祭, диакон, дьякон) 그리고리(Григорий)가 노보고르드 시장(Новгородский посадник) 오스트로미르(Остромир)에게 바친 <오스트로미르 복음서(Остромирово Евангелие)>와 1073년과 1076년에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야로슬라비치(Святослав Ярославич, 1027~1076)가 성경, 신학 관련 문헌을 발췌해 만든 2권의 <선집(Изборник)> 또한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오래된 고대 러시아 문학 작품으로 여깁니다.

 

어쨌든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에서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루스(Русь)는 루스 최초의 교회 지도자와 애서가(книжник)들이 불가리아인 혹은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자신들도 모르게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많은 종교적 문헌들이 이미 그리스어에서 불가리아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남슬라브어인 불가리아어와 문학은 고대 러시아 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탈리아어학자이자 슬라브어학자였던 리카르도 피치오(Riccardo Picchio, 1923~2011)에 따르면, 9세기부터 근현대 초까지 교회 슬라브어와 그 영향을 받은 변형 언어들(извод), 민족적으로 슬라브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들을 포함한 통일된 언어 환경 아래에 존재했던 슬라브 동방정교회 문학 통일성인 '슬라비아 오르토독사(Slavia Orthodoxa)'의 일부분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고대 러시아 문학은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정교회와 다르게 보수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대표적으로 그들의 금욕적인 크리스트교적 영향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동방정교회는 금욕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루스가 크리스트교를 자신의 민속 종교와 섞어 받아들이며 상황상 종교적 문헌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동방정교회를 먼저 받아들인 남슬라브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동슬라브족은 한 다리 건너 바깥 나라의 상황을 확인하긴 더 어려웠겠죠...

 

시간이 지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세속적인 문화와 문학이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이미 루스들은 이를 인간의 영혼에 해롭고 문학적 가치가 없는 이교적인 것으로 여겼고, 당연히 오락적인 내용은 점점 더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2. 모방(imitatio) 문학의 등장(교화 목적으로서의 기독교)

이런 종교성을 띄고 있던 고대 러시아 문학은 비문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중세 문학의 핵심인 '모방(imitatio)'은 은혜로운 은사(恩賜, 신이 준 재능)가 언어적 모델을 포함한 모델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획득된다고 가정했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써진 신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해 크리스트교적으로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고대 러시아의 애서가들(книжники)은 민중들의 영혼을 크리스트교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핵심 임무였던 것이죠.

 

이런 이유 때문에 <연대기>를 포함한 알려진 당대 문헌 대부분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교훈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읽기 모음집(четьи сборники)>과 같은 종류의 정교회 문학은 독자가 기독교 사역(使役, 하나님 혹은 예수로부터 받은 해야 할 일)의 기술을 형성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이고리 군기 (출처 : yarwiki.ru/article/1125)

역사 사가라고도 여겨지는 <연대기>에 기록된 역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실현으로 인식되었으며, 이 접근 방식에는 허구, 그러니까 예술적 상상에 대한 묘사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특징을 가지는 현전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이고리 군기(Слово о полку Игореве)>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고대 러시아 문학은 동로마 제국과 남슬라브 국가에서 가져온 문학적 전통은 이를 지속할만한 안정적인 작가 텍스트의 부재, 손에서 손으로 필사하다 보니 생긴 다양한 원고에서 동일한 텍스트의 높은 가변성(=변형이 쉽다는 말), 집단성, 그리고 '하나님(The God)'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토포스(topos, 공통 주제)에 대한 사랑과 전통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3. 몽골 침략 이전(키예프 러시아 시대, 11~13세기 중반)

11~13세기 고대 러시아 문학 대표 작품들
<노보고로드 코덱스(Новгородский кодекс)>
<오스트로미르 복음서(Остромирово Евангелие)>(1057)
<선집(Изборник)> 2권(스뱌토슬라프 야로슬라비치, 1073, 1076)
<율법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Слово о законе и благодати)>(11세기 중반)
<이야기(Слово)> (세라피온 블라디미르스키(Серапион Владимирский)(13세기)
<보리스와 글레프에 관한 이야기(Сказа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11~12세기 사이)
<페오도시 페체르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Феодосия Печерского)>(11~12세기 사이)
<수도원장 다니일의 여행기(Хождение игумена Даниила)>(12세기)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교훈(유훈서, Поучение Владимира Мономаха)>(1099,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원초연대기, Повесть временных лет)>(12세기, 네스토르)
<이고리 군기(Слово о полку ИгоревеМономаха)>(1180년대)
<유폐자 다니일의 간청(추방자 다니엘의 간청, Моление Даниила Заточника)>(13세기)
<러시아 땅의 파멸에 관한 이야기(Слово о погибели Русской земли)>(13세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고대 러시아 문학로마 문화 스타일과 유형적(typical)으로 가깝고, 실용주의적(혹은 비오락적)인 성향과 남부 슬라브어나 불가리아 정교회의 문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강한 남슬라브적 영향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대의 문학은 주로 종교 의례적이고 교훈적인 설교나 생애전(житие), 여행기(хождение), 연대기(летопись) 등의 장르로 대표됩니다. 그 외 '교훈 문학'이라 불리는 여러 교육적인 작품들과 성경의 <외경> 번역본 등도 유명하죠. 이때까지도 고대 교회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1240년경부터 타타르의 멍에(1240~1480)로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문학은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4. 14~17세기의 고대 러시아 문학

4-1. 14~15세기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고대 러시아 문학은 고딕 양식에 대한 유형학적 근접성, 개인과 국가의 과거에 대한 신비로운 관심, 그리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애서가들(книжники)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2번째 남슬라브의 영향)로 특징됩니다. 이 시기의 설교, 성인전(hagiography) 문학, 여행기(хождение)는 몽골 이전 전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몽골 침략을 받던 시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4-2. 15~16세기 중반

<드랴쿨라 보이보드에 관한 전설>(출처 : school48tmn.ru/literatura)

몽골로부터의 독립을 이뤄낸 15세기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드라큘라 보이보드(드라큘라 공작)에 관한 전설(Сказание о Дракуле воеводе)>과 같은 역사적 전설 장르가 등장했습니다. 또한, 이오시프 볼로츠키(Иосиф Волоцкий)나 대주교 다니일(Митрополит Даниил) 등의 논쟁적인 설교나 편지(서간)로 대표되는 논쟁 문학도 등장합니다.

 

4-3. 16세기 후반

(왼쪽부터) <성인대전>(출처 : https://www.prlib.ru/item/695546), <계급책>(출처 : scfh.ru/papers), <도모스트로이>(출처 : kulturologia.ru)

16세기 후반에는 <성인대전(성자대일력 독본, Великие Четьи-Минеи)>, <계급책(Степенная книга)>, <가정규칙(도모스트로이, Домостро́й)>와 같은 백과사전이 발달했으며, 논쟁적인 편지(논쟁 서간)도 활발해집니다.

 

4-4. 17세기 전반

4-4-1. 17세기 전반

17세기에 들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 장르가 점차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17세기 전반에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문학이 구별되고, С. И. 샤홉스코이(С. И. Шаховской, ?~1654/1655)와 같은 시인의 세속적인 시가 등장하며, 자서전의 요소를 담은 역사적 이야기나 흔히 민주적 풍자(민주풍자,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сатира)라고 불리는 유머러스한 풍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요르쉬 요르쇼비치에 대한 이야기> (출처 : dzen.ru/a/XgIXmt-URACxNTOZ)

특히 17세기 풍자소설은 <발가숭이에 대한 abc(Азбука о голом)>등에서 볼 수 있는 빈부격차, <버릇없는 난봉꾼들의 축일(Праздник кабацких ярыжек)>등에서 보이는 과음한 정부조직, <셰마키의 법정(Шемякин суд)>, <요르쉬 요르쇼비치에 대한 이야기(Повесть о Ерше Ершовиче)> 등에서 보이는 불공정한 법원의 판결, 그리고 <수탉과 숫여우에 대한 이야기(Повесть о куре и лисице)>, <(술꾼에 대한 비화(Притча о бражнике)> 등에서 보이는 성직자들의 형식적인 경건함을 주제로 쓰며, 특히 정부와 종교의 불합리한 행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4-4-2. 키예프 아카데미의 등장과 서양의 문학의 전래 시작

1615년, 키이우 동굴 수도원의 대사제 엘리세이 플레테네츠키(Елисей Плетенецкий, ?~1624)가 고전 언어, 수사학, 신학, 그리고 몇몇 초등 교육 과목을 연구하기 위해 키예프 형제 학교(Киевская братская школа, Kiev brotherhood school)를 세웁니다.

1900년대 초의 키예프 아카데미 건물 모습 (출처 : http://kdais.kiev.ua/)

시간이 흘러 1631년 동방정교회 키이우 관구장 표트르 모힐라(Пётр Могила, 1596~1647)는 앞서 세워진 키예프 형제 학교를 그가 설립한 학교와 합치며, '키예프 아카데미'라고도 불리는 '키이우 모힐라 아카메디야(Киево-Могилянская академия)'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렇게 이 학교는 러시아적인 것 외에도 폴란드, 루테니아 등으로 부터 받아들인 서양적인 학문들도 가르쳤는데요. 언어(슬라브어, 그리스어, 라틴어), 노래와 기본 음악 이론, 교리문답, 산수, 운문(시문학), 수사학, 철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칩니다. 또 토론 수업도 있었고, 다양한 언어나 문학적 기법을 연습하기 위한 문법, 비유, 작법 등도 가르쳤죠.

 

당연히 외국에서도 유학을 왔고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이 학교는 17세기부터 러시아인들에게 '유럽으로 열린 창'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고대 러시아 문학이 점차 희미해져간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죠.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위치와 정치적 변혁에 대한 이야기는 '16~17세기의 외래 문화의 유입' 챕터를 참고바랍니다.

 

4-5. 17세기 후반

아바쿰의 <성자전> (출처 : ngounb.ru/?p=14553)

17세기 후반에는 목사 요하난 고트프리트 그레고리(Johann Gottfried Gregorii, Иоганн Готфрид Грегори, 1631~1675)의 활동과 시메온 폴로츠키(Симеон Полоцкий, 1629~1980)가 설립한 시를 가르치는 학교(школа) 덕분에 가장 먼저, 전고전주의적(preclassical) 언어가 형성되며 문학적 언어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그 혁신은 러시아 정교회 구교도 세력의 대표자이자 한때 대사제장이었던 아바쿰 페트로프(Аввакум Петров, 1620~1682)의 <성자전>에서 언문일치 등으로 두드러집니다.

<고레와 즐로차스치에 관한 이야기> (출처 : coollib.net)

그렇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고대 러시아 문학의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변화는 <고레와 즐로차스치에 관한 이야기(Повесть о Горе и Злочастии)>나 <프롤 스코베예프에 관한 이야기(Повесть о Фроле Скобееве)> 등의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등장하는 모험 소설의 형태와 그 갈래 문학들의 출현으로 특징됩니다.

 

4-6. 16~17세기의 외래 문화의 유입

16~17세기 서구 문학의 유입 (지도 출처 : pixabay.com/ko/illustrations)

16세기와 17세기에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에서는 문학적으로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럽 문화의 유입으로 가속화되었죠. 이런 유럽 문화는 그 시기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건너 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의해 습득되기까지 합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면 당연히! 그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쪽(개방주의)과 거부하려는 쪽(보수주의)이 생기기 마련이죠. 17세기 모스크바도 유럽문화와 그 영향을 받은 서슬라브 문화에 대해서 그러했습니다.

 

특히 보수주의적인 편에 속함과 동시에 고대 러시아 문학의 중심이었던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러시아의 교회슬라브어만 유일한 문학어이며, 루테니아 지역에서 쓰는 ' 단순한 언어(Проста мова, 루테니아어)는 교회슬라브어의 변이형일 뿐'이란 입장을 취해 서러시아(루테니아) 문학의 '우리 루테니아어와 러시아의 교회슬라브어는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란 입장과 대비되며 문학 교류는 점차 힘들어집니다.

16~17세기 루테니아와 러시아의 종교적 논쟁을 잘 보여주는 <담화>와 <교훈복음서> (출처 : wiki-media)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는 이 흐름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의 종교적 논쟁으로 여기는데,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라브렌티 지자니(Лаврентий Зизаний, 1550~1634)의 <대교리문답(Большой катехизис)>이라고도 불리는 <담화(Беседословие)>나 키릴 스타브로베츠키(Кирилл Ставровецкий, 1570~1646)의 <교훈복음서(Учительное Евангелие)>등으로 발생한 이단 논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대 러시아에서 서러시아(루테니아) 문학을 보고 '저거 진짜 (교회슬라브어 기준) 잘못 쓴 글잔데?'라고 봤던 입장은 매우 오랫동안 견고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인식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오래전부터 러시아 모스크바 문화의 민족적 특수성의 발달 과정과도 관련이 있죠.

 

모스크바는 서유럽의 성장과 그로 인해 강성해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역을 보며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괴물이 되었을 땐 그들을 슬라브의 피에 다른 피가 섞인 정신과 글자 체계와 문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게 되었고, 더더욱 그들의 문학과 문헌은 순수한 '교회슬라브어'의 것과는 형태만 비슷한 이상한 것이라 치부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모양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대제사장 아바쿰으로, 그는 그러한 이상한 것에 물든 서러시아의 문학을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다만, 모든 종교인들이 그 서러시아의 것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라틴식의 신식 문물의 도입을 적극 도입하길 바랬죠.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자로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Епифаний Славинецкий, ?~1675)와 시메온 폴로츠키가 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개방주의적인 입장에선 '왜 저런 신식 문물을 도입하지 않는거지?'라며  아바쿰을 오히려 이상하게 봤습니다.

멜레티 스모트리츠키와 라브렌티 지자니 (출처 : wiki-media)

이런 과격한 문학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많은 작가들은 '간단한 언어(루테니아어)'로 쓰여진 책을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덕에 '멜레티 스모트리츠키(Мелетий Смотрицкий)의 <문법>, 인노켄티 기젤(Инноке́нтий Ги́зель)의 <키예프 시놉시스(Сино́псис Ки́евский>' 등 몇몇 서러시아(루테니아) 작가들의 작품은 모스크바 문학사의 표준을 형성했다는 의의를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의 일부 작품들은 라브렌티 지자니, 니콜라이 디레츠키(Николай  Дилецкий, ?~?), 바르라암 야신스키(Варлаам Ясинский, 1627~1707) 등 모스크바 문학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고대 러시아 문학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러시아 문학은 1721년 표트르 대제의 제국 선포(러시아 제국의 시작)라는 역사적 계기로 점차 새로운 문학의 시대로 돌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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