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 일광면의 일제강점기 때 지은 광산 마을과 일본인 관리자 청사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부산 기장군 일광면의 일제강점기 때 지은 광산 마을과 일본인 관리자 청사

728x90

광산마을
광산마을에는 20여 채의 집이 있었다. 1900년대 초 대부분 광산 노동자의 사택이었으며 현재 47가구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작고 소담한 마을이다.모서리가 각진 석축, 처마 밑에 눈썹처마를 내달거나 현관을 달아낸 집, 비늘처럼 촘촘하게 덧댄 합판 등 특유의 건축 양식이 낯선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강제 노동을 당했던 노동자들은 마을을 떠나갔지만, 일제의 국내 자원착취 흔적은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1) 일광광산(닛코광산) 2) 일본인 관리자 청사 3) 우물 및 빨래터 4) 광산마을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조선인 강제노동현장으로 1930년, 스미모토 광업 주식회사에 의해 개발된 구리 광산이다.

6·25 전쟁 이후 중석(重石, tungsten)을 캐기 시작하여 규모가 커졌지만, 채산성이 떨어져 90년대 말 폐광하였다.

현재 광산입구는 굳게 닫혀 있으며 입구 앞 수질정화시설만이 남았다.
스미모토 광업 주식회사의 사무실 및 간부급 사택으로 이용된 공간이다.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건설되어 현대에도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일광 광산의 개발에 따라 일본인 간부와 조선인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한 마을이 조성되었다.

당시 축대를 중심으로 주택가가 형성되었는데 본 빨래터 또한 생활기반시설로 조성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57가구가 있으며 실제로 사람이 사는 가구는 45가구 정도이다. 

일본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촘촘히 붙어있는 경관은 쉽게 볼 수 없는 광산마을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의 달음산과 갈미산 아래에 광산마을이 있습니다.

일광 광산(鑛山) 마을 이야기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 일대-
일광 광산은 조선 5대 구리광으로 일본의 대표 기업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住友鑛業株式會社)에서 운영하였다. 광산 마을은 일광 광산이 개발되며 형성되었는데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터를 조성하여 사무실과 간부급 사택을 지었고, 주변에는 일반 사택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은 자원 약탁을 목적으로 한 광산 개발에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는데 일광 광산도 그런 광산 중 하나였다. 당시 근로자의 증언에 의하면 1944년 4월 1일 선광장(選鑛場)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징용되었고, 휴일도 없이 2교대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일광 광산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채광과 휴광을 거듭하였고, 1970년대 광산이 서서히 폐광되면서 광산마을도 탄광촌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뭔가 근대 일본식 가옥 느낌이 나는 허름한 집들이 보입니다. 이 집들이 1930년 3월 11일부터 달음산 일광 광산을 개발하면서 지어진 집들이죠.

집들이 있는 곳에서 달음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등산로가 아닌 폐허가 된 집이 있는 쪽으로 가면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지도상 위치는 '일광읍 달음길 43-28'입니다. 낮이지만 으스스한 곳입니다.

이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일본인 관리자 청사'입니다. 지금의 스미모토금속광산(住友金属鉱山, 1952~)의 전신인 스미모토광업주식회사(住友鉱業株式会社, 1937.06~1946.01)가 이곳에서 발견된 일광광산(닛코 광산) 개발하기 위해 세운 건물 중 하나였죠.

1590년, 스미토모가(住友家)의 사위로 있던 소가 리에몬(蘇我理右衛門, 1572~1636)이 구리 정련(精錬) 및 세공(細工)을 하는 이즈미야(泉屋)를 세웁니다. 그리고 남만불기(南蛮吹き)라는 기술을 개발해 동업자들에게 전수해 일본의 광산업을 크게 부흥시킵니다. 이후 그는 교토에서 오사카로사업을 확장하고 여러 사업소를 짓습니다.

 

시간이 지나 스미토모 토모모치(住友友以, 1607~1662)의 손자이자, 스미토모 토모노부(住友友信, 1647~1706)의 아들인, 스미토모 토모요시(住友友芳, 1670~1720)이 1691년 이요(伊予) 지역의 벳코 동산(別子銅山) 개발해 발굴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이 광산은 당대 최대의 산출량을 자랑하는 광산으로 성장해 일본 주요 수출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가문의 규모와 입지도 커집니다. 그래서 현대 그 후손들을 토모요시를 중흥조로 여깁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미토모가가 스미토모 합작회사(住友合資会社, 1921~1927)를 세울 정도로 강성해졌을 때즘, 대일본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그들의 시선도 외국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렇게 일본의 식민지에 여러 구리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1927년 스미토모 합작회사가 해산되며 거기서 벳코광업소(別子鉱業所, 1927)도 분리되었고, 같은 해 그 광업소는 스미토모벳코광산주식회사(住友別子鉱山株式会社, 1927~1937)가 설치 됩니다. 그 때쯤인 1930년 이 지역에 구리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닛코광산이라 명명해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마을이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광산 입구 실개천에 다리를 짓고,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터를 조성해 앞서 소개한 일본인 간부급 사택과 사무실을 지었으며, 그 주변에는 일반 사택을 지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더 가다 발견했는데, 길 한편에 이렇게 작은 물길도 흐르고 있네요.

그렇게 한바퀴 빙 돌고 큰 도로로 나왔습니다. 이 도로에서 쭉 올라가면 지금은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일광광산이 나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