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중 임시수도가 된 부산의 발전상을 담은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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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한국 전쟁 중 임시수도가 된 부산의 발전상을 담은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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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차장

부산지하철 토성역 2번 출구로 나와 한 블럭을 지나 구덕로 199번길을 따라 쭉 3블럭 올라간 뒤 북쪽으로 꺽으면 보이는 풍경입니다.

주차장은 오후 6시까지 열리며, 주차는 관람객인 경우만 기본 주차는 1시간이며 그 외는 주차 금지라고 합니다.

2. 정문

임시수도기념관 정문 모습입니다.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과 1월 1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관람시간 09:00~18: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관람료 무료

입구로 들어가서 바로 보이는 곳은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입니다. 여기서 뒤로 돌아가면 전시관이 나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부산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

1.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 1층 원래 '나라를 생각하는 집'이란 뜻의 사빈당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전)대통령관저인 부산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부산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을 찾아왔습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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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내판들(입구에서 전시관 입구까지)

임시수도기념관에는 다양한 안내판이 있고, 그 안내판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 피란수도 부산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피란수도 부산 이야기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은 부산으로 피란(避亂, evacuation)을 왔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왔고, 전쟁이 일어난 지 약 2개월 만인 1950년 8월 18일에 부산을 임시수도로 지정하였다. 정치, 경제, 외교, 행정, 교육 기능이 부산에 집중되면서 정치인, 공무원, 각 분야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부산으로 대거 모여 들었다.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전국에서 부산으로 들어왔다. 그 결과 광복 후 30만 명 정도였던 부산의 인구는 1951년에 이르러 84만 명에 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7월 이전까지 부산 임시수도대통령 관저에 머무르며 정치,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의 국정 현안들을 처리하였다.

부산으로 모여든 수많은 피란민들은 낯선 땅 부산에서 억척스럽게 일상의 삶을 이어갔다. 그 결과 부산은 정치인·공무원·예술인을 포함한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부산 곳곳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이 1,000여 일 동안 머물렀던 이곳 임시수도대통령 관저 역시 그 중 한 곳이다. 부산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먹는 밀면 역시 피란민들의 손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부산의 특징적인 경관으로 불리는 산동네와 산복도로 역시 한국전쟁 시기에 형성된 측면이 적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밀려와 늘어난 피란민들의 이야기와 판잣집의 난립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걸려있어요~

한국전쟁과 부산의 피란민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避亂)을 오기 시작했다. 이때 부산으로 온 피란민은 약 15만 명에 달하였다. 1950년 10월 8일에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한국정부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회복했던 서울을 다시 떠나게 된 사건인 1·4 후퇴를 전후해 대규모의 피란민이 발생하였다. 이때 약 26만 명이 아직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부산을 몰려들었다. 1951년 3월 기준으로 부산에 온 피란민들의 출신지는 서울(165,878명), 경기(32,599명), 이북지역(33,891명), 경남, 강원 등의 순이었다. 피란민들은 걷거나 수레와 소달구지를 이용하거나 혹은 배나 화물열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피란민의 증가와 판잣집의 난립
정부와 부산시는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해 극장, 공장, 여관, 심지어 일반주택 등을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피란민들은 일부에 그쳤다.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없고 셋방을 구할 수도 없는 피란민들은 스스로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주인이 없는 공터나 산비탈 그리고 해안가 등지에 땅을 대강 다듬은 뒤 도심 주변에서 구한 종이상자나 나무판자, 거적대기 등을 이용해 임시주거지를 만들어 살았다. 이러한 집들은 판잣집(barrack house)으로 불렸다. 도심, 부두, 대형 시장과 가까운 지역, 이를테면 용두산과 복병산,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그리고 보수천 및 영도 바닷가 주변은 우후죽순 건립된 피란민들의 판잣집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안내판을 따라 걷다보니 임시수도기념관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의 뒤쪽 모습이 보이네요~ 계속 안내판을 따라가다보면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나타납니다~

화마의 도시, 부산
부산은 '화마(火魔)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1950년대에 부산에서는 크고 작은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부산에서 발생한 대형화재로는 단연 '국제시장 화재', '부산역전 대화재', '용두산 화재'를 언급할 수 있다.

1953년 1월 30일에 일어난 국제시장 화재로 1,984개의 점포가 전소하고 13,235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1953년 11월 27일 저녁에 발생한 부산역전 대화재로 중구(中區)의 절반 이상 지역이 잿더미가 되었다. 1954년 12월 10일 새벽에는 용두산 피란민 판자촌에 불이 나서 용두산 동쪽 언덕 일대와 광복동, 창선동 일대의 판잣집 1,093채가 전소하고 6천 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이 화재로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잠시 옮겨져 있었던 소중한 궁(宮) 소유의 조선시대 문화재들이 불에 탔다. 부산에서 일어난 화재 대부분은 피란민들이 무분별하게 지은 불법 판잣집 등과 같은 건축물 때문이었다. 연이은 대화재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커지자 부산시에서는 화재가 발생한 지역의 판잣집들을 도시미관을 이유로 강제로 철거시키고 그 지역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피란민의 삶과 일상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의류, 담배, 초콜릿 등 미군 부대 등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내놓은 물자 그리고 외국에서 부산의 항구를 통해 유입된 밀수품 등 온갖 종류의 물품들이 모두 거래된 당시 최대 규모의 시작이었다. 한국전쟁기에 국제시장에는 부산시민뿐 아니라 각지의 피란민들이 몰려와 노점상을 운영하였다.
보수동 책방골목 한국전쟁기에 일부 피란민들이 보수동에서 부산 주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책과 만화책 그리고 고물상이나 피란민들로부터 수집한 헌책들을 팔기 시작하였다. 보수동은 각종의 행정 기관 및 피란학교들 그리고 시가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동네였다. 이들 기관의 직원 및 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피란 온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보수동에서 헌책의 주요한 공급자이자 수요자가 되었다. 그 결과 보수동의 한 골목에는 많은 책방들이 들어섰다.
피란학교의 운영 1951년 이후 타 지역 대학교뿐 아니라 타 지역 중학교와 초등학교도 부산에 피란학교를 세워 학사과정을 운영하였다. 부산의 피란 초등학교 수는 1951년 12월 기준으로 24개 학교에 2만 1,630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이를 24개 학교는 피란국민학교로 따로 간판을 붙이고 수업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존 부산의 초등학교에 서울 피란 아동만을 수용하여 학급을 따로 편성한 경우였다.

부산의 대표 음식 밀면이 냉면에서부터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지역 명물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밀면과 냉면의 차이도 알 수 있었죠~

피란민이 만든 부산 음식 '밀면'
밀면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들에는 겨울철에 집밖 항아리에 들어 있는 꽁꽁 언 동치미 국물에 국수뿐 아니라 채소와 과일 등 갖은 고명을 넣은 면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들 속 요리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냉면(冷麵)의 원조라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냉면을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밀면은 냉면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먼저 냉면과 밀면 모두 크게 육수, 면, 고명으로 구성된 데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냉면과 밀면의 육수 제조에는 쇠뼈, 사골, 돼지뼈, 닭뼈 등이 사용된다. 밀면은 크게 비빔밀면과 물밀면으로 분류되는데 이 점 역시 밀면이 냉면에서 파생된 음식임을 보여준다. 다만 냉면의 면이 메밀 및 고구마나 감자 전분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달리 밀면의 면은 대부분 중력분 밀가루로 반죽된다. 냉면과 밀면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양념이 있다. 밀면에는 냉면에 비하여 다진 양념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특히 다진 양념이 거의 쓰이지 않는 물냉면과 달리 물밀면에도 이 양념이 많이 첨가된다. 이러한 양념의 첨가는 경상도 사람들의 입맛과 기호에 맞춰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밀면은 냉면보다 훨씬 매콤하며 달고 짠 자극적인 맛을 특징으로 한다.

안내판쪽에서 바라본 관저의 모습입니다.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건물입니다.

피란민의 손에서 탄생한 밀면 밀면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밀면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온 피란민들에 의해서 탄생된 음식이란 설명이다. 냉면의 주재료인 감자전분이나 메밀가루는 이북 지역에서는 흔한 음식재료였지만, 남쪽 지방인 부산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 부산에서 판매된 냉면의 가격은 비쌌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미군이 구호품으로 밀가루를 한국으로 들여와 시민들과 피란민들에게 대량으로 배급하였고 일부 냉면집에서 대량 배급으로 가격이 저렴해진 밀가루를 사용해 면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냉면집에서 면 재료를 밀가루로 대체했던 것은 밀가루의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또 다른 고객층인 부산 사람들이 냉면의 질긴 식감을 별로 선호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밀면, 피란음식에서 지역 대표 음식으로 일부 냉면집에서 가격이 싼 밀가루로 밀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자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던 이북 지역 피란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냉면의 맛이 구현된 면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밀면이 우암동, 개금, 가야, 당감동 등 피란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에 위치했던 냉면집이나 음식점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식감의 면과 시원한 육수로 만들어진 밀면은 피란민뿐 아니라 부산 사람들의 입맛도 곧이어 사로잡았다. 그 결과 부산 지역 곳곳에 밀면을 파는 식당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값싼 냉면'으로 불리기도 했던 밀면은 피란시절 피란민의 향수를 달래주던 음식에서 고단하고 배고픈 서민들을 위로해 주는 지역 음식으로 바뀌었다.

안내판 외에도 다양한 사진들이 있어서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을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전시관

이제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으로 향합니다. 이 건물은 원래 1987년 9월에 개원한 부산고등검찰청의 검사장 관사 용도로 지어진 단층의 벽돌조 가옥으로, 지금은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죠.

다양한 벽보와, 국제전임을 알 수 있는 당시 여러 나라의 군물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구직(求職)'이란 나무판자를 목에 맨 상태로 직업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전쟁은 이렇게 한 사람의 직업까지 앗아갑니다.

당시 피란민들이 재활용해서 입었던 옷, 도구 등을 볼 수 있었구요. 판잣집 안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전쟁이라는 것은 안락을 뺏어가는 무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도떼기시장으로 그 다음엔 자유시장으로 이후엔 국제시장으로 불렸던 국제 시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고, 대한도기에서 만든 다양한 도자기 상품들도 볼 수 있었죠~

당시 피난민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들과 그 때 공부했던 교과서들도 볼 수 있었어요! 전쟁통이지만 엄청난 교육열을 보여줬다고 하네요.

미군부대 음식물쓰레기를 끓여만든 꿀꿀이죽(이후 부대찌개)과 냉면을 모티브로 밀가루면으로 만들기 시작한 부산 밀면도 이 때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온 허쉬초콜릿과 담배, 다양한 그릇들도 볼 수 있었구요. 들기름, 석유, 콩기름이 병에 담긴 것도 볼 수 있었어요!

이제 '다방전성시대'라는 전시관으로 들어갑니다. 짧고 붉은 회랑이 보입니다.

전쟁 당시 부산에서는 다방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학 활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미술 분야와 음악 분야도 마찬가지죠. 특히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물방아 도는 내력, 꿈에 본 내 고향, 비에 젖은 주막집, 부산행진곡 등 미도파레코드와 도미도레코드, 오리엔트 레코드 등의 음반회사에서 발패된 다양한 음반들도 등장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바로 흥얼거리실 정도로 유명한 노래들이 많네요.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 유엔한국재건단(UNKRA), 미국 대외활동본부(USA FOA) 등 한국 전쟁 이후 다양한 원조를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자금 지원, 교육 지원, 산업 지원, 시설 복구 및 확대 사업 지원, 건설 지원, 위생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지원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이후 5개년식량증식계획, 3개년산림녹화계획 등 다양한 국가 복구 작업에 착수했는데, 당시 가장 피해가 적었던 부산에 이런 것들이 집중되었죠. 부산항을 통해 원조물자가 들어온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대 부산의 주요 기업
업종 분야 기업명
(  표시는 2024.08. 기준 해산된 기업)
(? 표시는 2024.08. 기준 해산되었는지 확인 불가한 기업)
화학 고무 국제화학주식회사
삼화고무공업주식회사
신흥고무화학공업주식회사?
동양고무산업주식회사?
타이어/튜브 흥하공업유한회사(현 흥아타이어)
태화고무공업사
기아산업주식회사(현 기아)
화장품/비닐시트 락희화학공업사(현 LG생활건강)
섬유 면방직 조선방직주식회사
메리야스 대일섬유주식회사?
대한편물(주)?
삼전양행섬유공업사?
시대와이샤스?
요업 자기/도기 대한도기주식회사
식료 제빙 신한제빙주식회사?
목재 합판 성창기업주식회사(현 성창기업)
동명목재상사
철강 철강 대한제강(현 대한제강)
동국제강(현 동국제강)
극동철강(현 와이케이스틸(주))
조선 쾌속선/유조선 대한조선공사
선박수리 주식회사대선조선철공소(현 대선조선)

그렇게 부산은 산업도시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죠. 그렇게 부산에 연료 산업(고무, 섬유, 제분, 제당, 철강, 목재 부문), 생필품 산업(연단, 비누, 식료품 부문)이 발전했으며, 이를 통한 한국의 재건과 부흥에 큰 동력이 됩니다.

그렇게 서서히 대한민국과 부산은 상처를 회복해 나갑니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죠.

이러한 발판을 통해 1960년대에 접어들어 섬유 및 화학 기업 외에 자동차, 전차, 철강 분야의 기업들이 눈부신 성장을 보이며 부산 경제를 주도합니다. 이렇게 경제력이 높아진 부산은 지속된 산업 발전과 인구의 급격한 팽창 등 다양한 계기를 통해 1963년 1월 1일 대한민국 최초로 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죠. 그렇게 대한민국 제2도시로서 부산은 197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수출주도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으며 더욱 큰 대도시로 자리잡게 됩니다.

 

4. 전시관 뒷편으로 - 워타임 부산

2022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된 지 72주년을 맞이하여, <한국화보(pictorial korea, 1951~1953)> 속의 부산의 모습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임시수도 부산의 모습도 보여지고 있구요.

피란민의 생활도 물론입니다.

산업도시로서 부산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요. 당시의 다양한 기업 안내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동명목재와 제일제당 소유 공장의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송도해수욕장과 광안리, 범어사와 같은 다양한 관광 자원에 대한 사진들도 볼 수 있었어요.

전쟁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의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길 끝에는 포토존도 있으니 사진을 찍고 싶으시다면 찍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이제 전시관 뒤뜰로 향합니다~

5. 전시관 뒤뜰

전시관 뒤뜰에는 산업화와 산복도로의 형성 그리고 판잣집 철거와 산동네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어떻게 부산이 변해갔는지 볼 수 있죠.

뒤뜰의 전경입니다~

피란 시기 부산에 많은 예술가들도 찾았는데요. 그들은 부산 지역의 다방에서 많은 만남을 가졌으며, <문예>, <신천지> 등의 문학잡지와 김동리의 <밀다원시대>, 황순원의 <곡예사> 등의 작품이 등장했고, <경상도 아가씨>,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같은 대중가요들의 유행과 대한도기와 같은 도자기 회사의 설립 등 다양한 문학적 활동이 왕성해집니다.

피난행렬과 부산에 생긴 다양한 노점상들의 모습 앞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어요~

전시관 뒷뜰에는 피란학교를 재현해 놓았죠~ 

당시의 교육 및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소품들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를 했던 아이들은 이제 70~80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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