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중요했던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 등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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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소박하지만 중요했던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 등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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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등산기 : 미륵사-고당봉-북문] (등산 시간 : 약 16:00~18:17)
1. 미륵사-고당봉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482

2. 고당봉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484
3. 고당샘-금정산성 북문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485

4. 금정산성 북문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487

고당봉에서 고당샘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금정산탐방지원센터 광장을 지나 북문 입구로 내려오면

이런 이정표와 함께 금정산성 북문이 나타납니다.

금정산성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 8.2km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마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8) 통제사 이지형(李枝謦)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이 성을 쌓았고, 1707년(숙종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中城)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8)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자리에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육축(陸築) 상부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익공계(翼工系) 우진각지붕 단층문루이며,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성문 광장 세심정(洗心亭)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국청사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 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 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성이 쭉 고당봉 방향으로 이어지네요. 그 길목에 금정산성 북문이 있습니다.

성 내부에서 찍은 북문입니다.

한번 올라가봤습니다.

북문에서 서남쪽(금성동쪽)으로 바라봤습니다. 동북쪽(범어사쪽) 길도 잘 닦여 있네요. 저 길로 조금 가면 보이는 저 큰 건물이 화장실이랍니다.

양쪽으로 쭈욱 돌로 된 산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 북문'이라고 적힌 비석이 보이고, 그 뒤로 범어사쪽에서 본 북문 입구가 보입니다.

그리고 내려왔습니다.

내려가다 보면 아까 올라왔던 미륵사로 가는 길이 보이네요. 등산은 약 18시 17분에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역사 깊은 미륵사를 갔다가 고당봉을 돌아 금정산성 북문으로 돌아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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