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건설을 건의한 통제사 이지형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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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건설을 건의한 통제사 이지형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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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44.09.01

1-1. <인조실록><인조 22년 9월 1일 병술>

병술(丙戌) 삭(朔)
정시(庭試)를 베풀어, 문과(文科)로는 이경억(李慶億) 등 7인을 취하고, 무과(武科)로는 이지형(李枝馨) 등 1백인을 취했다.

이지형(李枝馨)은 특별 비정기 임용시험의 하나인 정시(庭試)에서 무과로 1644년 9월 1일에 뽑혔습니다. 이후 칠곡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임명과 관련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간접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1649.02.14

2-1. <인조실록><인조 27년 2월 14일 계묘>

간원(諫院)이 계(啓)하기를,
"칠곡(漆谷)은 새로 설치한 잔읍(殘邑)이고, 보장(保障)의 중지(重地)인데, 부사(府使) 이지형(李枝馨)은 나이가 젊은데다 교만하고 경망하여 직무를 삼가지 않고 군향(軍餉, 군량)을 포기하며, 잔민(殘民)을 침학(侵虐)합니다. 파직하소서."
상(上)이 따랐다.

그러나 1649년 2월, 사간원에서 인조에게 칠곡부사 이지형의 태만과 국방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판단하고 보고했고, 이에 인조는 이지형을 부사직에서 파직했다고 합니다.

 

3. 1649.03.07

3-1. <인조실록><인조 27년 3월 7일 병인>

병인(丙寅)
경상감사(慶尙監司) 이만(李曼)이 치계(馳啓)하기를,
"칠곡산성(漆谷山城) 수보(修補)의 역(役)은 전적으로 부사(府使) 이지형(李枝馨)에게 맡겼는데, 재목(伐材)을 베고 기와를 굽고, 영보(營堡)를 헐 즈음에 논박받아, 파직되었습니다. 지금 서투른 자에게 맡기면, 공역(功役)의 두서를 익히 알지 못하여 수습하고 요리하는 데에 허술함이 많을 것입니다. 이지형(李枝馨)을 군관(軍官)으로 자망(自望)하여 그대로 인신(印信)을 써서 호령할 수 있게 하소서."
상(上)이 하교(下敎)하기를,
"이 장계(狀啓)를 보니, 그에게 죄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본 직임을 도로 주어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라"
정언(正言) 이정영(李正英), 이정기(李廷䕫)가 이지형(李枝馨)을 논계(論啓)한 것이 실상을 잃었다 하여 인피(引避)하였다. 간원(諫院)이 체차하라고 처치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1649년 3월, 파면된 이지형과 같이 칠곡산성(칠곡 가산산성)을 중수하던 경상감사 이만이 장계(보고서)를 쓰고 인조를 급히 찾아와 서면으로 '이지형이 열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파직당했다며, 그가 아니면 이 일을 맡을 사람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인조는 다시 보고서를 훑어보곤 그에게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그를 다시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당시 그를 질책했던 정언 이정영, 이정기는 퇴임당하게 됩니다.

 

4. 1649.03.15

4-1. <인조실록><인조 27년 3월 15일 갑술>

지평(持平)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칠곡부사(漆谷府使) 이지형(李枝馨)은 처사(處事, 일처리)가 전도되어 인심을 크게 잃었고, 침학(侵虐)만을 일삼아, 온 경내가 시끄럽기에, 신(臣)이 간원(諫院)에 있을 때, 동료와 상의하여 논계(論啓)하였습니다. 접때 시소(試所)에서, 도로 본 직임을 제수하라는 분부를 보고, 신이 감사(監司)의 장본(狀本)을 얻어 보니, 지형(枝馨, 이지형)이 백성을 다스린 실적은 거론하지 않고 성보(城堡)에 관한 일만으로 곧바로 인신(印信)을 쓰도록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도신(道臣)으로서 어찌 국가의 체면이 지극히 중하고, 군관이 인신을 쓰는 것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몰라서 이런 치계를 한단 말입니까. 신이 논한 것은 그가 잘 다스리지 못해 풍문에 거론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이 참여했던 관원은 모두 실상을 잃었다 하여 갈렸는데[遞], 신이 어찌 감히 구차하게 버티고 있겠습니까. 갈아서 내치소서."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며칠 뒤, 지평 홍명하가 인조를 찾아와 '칠곡부사 이지형의 업무와 민심을 훑어보고 그를 파직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라 말하면서, '제가 그를 파직한 이유는 그가 정치를 잘 하지 못했기에 소문이 들렸고, 보고서를 봐도 백성을 다스린 내용이 하나도 없었던 연유 때문'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같이 참여한 이정영, 이정기 등이 퇴임당했으니, 자신도 갈아서 내쳐달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지평(持平) 홍명하(洪命夏)가 인혐(引嫌)하여 물러갔습니다. 수령(守令) 탄핵은 흔히 풍문에서 나오는데, 이지형(李枝馨)의 다스리지 못한 모양을 이미 말한 자가 있다면, 풍문에 따라 논계(論啓)하는 것은 그 직분일 것이니, 무슨 인피할 혐의가 있겠습니까?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소서."
답하시길,
"홍명하(洪命夏)가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그렇지 않은 양 꾸민 것은 매우 구차하니 체차(遞差)하라"

장령(掌令) 유준창(柳俊昌)은 처치를 잘못했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憲府)가 처치하기를,
"이천기(李天基), 원진명(元振溟), 조수익(趙壽益)은 출사시키고, 유준창(柳俊昌)은 체차하소서"
상이 따랐다.

지평 홍명하가 책임지고 사퇴합니다. 이에 사헌부는 인조에게 '홍명하가 그를 질책한 것은 그 전례에 따라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인조는 그 결정을 이어나갑니다.

 

5. 1652.04.24

5-1. <효종실록><효종 3년 4월 24일 을축>

을축(乙丑)
권우(權堣)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정기(李廷夔)를 부교리(副校理)로, 남용익(南龍翼)을 정언(正言)으로, 이지형(李枝馨)을 전남병사(全南兵使)로 삼았다.

효종이 왕위에 앉은 지 3년이 지날 때 쯤인 1652년 4월, 이지형은 전남병마절도사(전남병사)로 임명됩니다.

 

6. 1656.01.05

6-1. <효종실록><효종 7년 1월 5일 갑신>

김익희(金益熙)를 대사헌(大司憲) 겸 대제학(大提學)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권집(權諿), 박세견(朴世堅)을 장령(掌令)으로, 이은상(李殷相), 김우석(金禹錫)을 지평(持平)으로, 박세성(朴世城), 오두인(吳斗寅)을 정언(正言)으로, 윤강(尹絳)을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허적(許積)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이수인(李壽)을 집의(執義), 이지형(李枝馨)을 평안병사(平安兵使),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656년 1월에는 이지형은 평안병마절도사(평안병사)로 임명됩니다.

 

7. 1660.02.21

7-1. <현종개수실록><현종 1년 2월 21일 병오>

병오(丙午)
김만기(金萬基), 오시수(吳始壽)를  지평(持平)으로, 이지형(李枝馨)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삼았다.

현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660년 2월에는 이지형은 제주목사로 임명됩니다.

 

8. 1662.12.26

8-1. <현종개수실록><현종 3년 12월 26일 을축>

도목대정(都目大政)을 행하여, 이단상(李端相)을 사인(舍人)으로, 이홍연(李弘淵) 충청감사(忠淸監司), 이민서(李敏叙)를 교리(校理), 안후열(安後說) 수찬(修撰)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평안감사(平安監司), 민희(閔熙)를 승지(承旨), 이지형(李枝馨)을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견(李汧)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1662년 12월에는 이지형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경상좌병사)로 임명됩니다.

 

9. 1663.06.16

9-1. <현종개수실록><현종 4년 6월 16일 임자>

임자(壬子)
상(上)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제재(諸宰, 여러 재상)을 인견했다. 영상(領相) 정태화(鄭太和)가 상의 건강을 묻자, 상이 이르기를,
"몽우리가 생긴 곳[核處]이 참외만큼이나 큰데, 손으로 문지르면 쓰리고 아프다"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온수(溫水, 온천물)을 가져다 다시 씻어내면, 습창(濕瘡)에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상(上)이 이르기를,
"길어 온 물은 효험을 보기가 어렵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주부윤(全州府尹)을 다시 설치하는 일을 지금 의논해 정해야 합니다. 좌상(左相)은 두번이나 호남(湖南)을 안찰한데다, 전주부윤을 지냈으므로, 그 곳 민심을 잘 알아 항상 '부윤(府尹)을 다시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조귀석(趙龜錫)이 감사(監司)로서 지금 부윤을 겸하고 있는데 또 (부윤을) 다시 설치하고자 하여 치계(馳啓)가 있었으니, 부윤을 겸하는 폐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맞이하고 보내는 데 폐단이 있으니 가을을 기다려 다시 설치해야 할 듯합니다."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석류황(石硫黃)이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데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이 함창(咸昌), 상주(尙州) 등지에서 유황석(硫黃石)이 생산된다는 소문을 듣고 의성현령(義城縣令) 홍성귀(洪聖龜)로 하여금 시험삼아 채취해 가져오게 하였더니 쓸 만하다고 합니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지형(李枝馨)이 또한 이의립(李義立)을 시켜 제련하게 하여 유황(硫黃)을 취했는데 색과 품질이 같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상을 베풀어 장려하고 권면해야 하겠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이의립(李義立)이 먼저 제련법을 터득했다고 하니 가자(加資, 품계 상승)하고, 홍성귀에게는 말을 하사하라."

형판(刑判, 형조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강상(綱常) 죄인이 태어난 고을은 읍호를 강등하고 관장을 파직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 양구(楊口)에서 남편을 죽인 죄인은 스스로 포천(抱川)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포천 사람들은 본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그 어미는 금화(金化)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변별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죄인이 태어난 곳의 관장을 파직시키고 읍호를 강등하는 것이 비록 행해진 지 오래된 전례이지만 본래 법률에 실려 있는 조문은 아닙니다. 또한 그 고을 수령을 파직시키는 것은 교화가 밝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니 현재 거주하는 고을의 수령이 그에 해당될 듯합니다. 이후로는 현재 거주하는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키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야 합니다."
상이 따랐다.

한편 이지형이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있었을 때, 화약 제조를 위한 자체적 유황 광산 개발에 착수하게 되는데요.

이지형은 울산에 살던 이의립(李義立)이 발견한 황석(黃石)을 유황으로 제련하게 했고, 그 결과 조선의 광업이 조금 발달하게 되었으며, 화약과 같은 무기 개발도 조금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 1664.06.07(윤월)

10-1. <현종실록><현종 5년 윤6월 7일 정묘>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상진(李尙眞)이, 동래부(東萊府)가 마도(馬島,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변란을 대비해야 할 곳인데 성지(城池)의 설비가 없다는 것과, 동래부사(東萊府使) 이성징(李星徵)과 좌병사(左兵使) 이지형(李枝馨)도 읍을 설치하고 성을 쌓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치계(馳啓)하여 그렇게 하기를 청하였다. 비국(備局)이 회계(回啓)하기를, 읍을 옮기고 성을 쌓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니 새로 제수된 감사(監司)가 부임하길 기다려 다시 자세히 살펴 계문하게 한 뒤에 의논해 처결하자고 하였는데,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래(東萊)는 마도(馬島,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거하여 지킬 수 있는 높은 성과 깊은 (해자가) 없다. 그러니 험한 성지를 설치해 나라를 견고히 하는 도리에 있어 엉성하다고 할 수 있다. 상진(尙眞, 이상진)의 말은 채용할 만한 듯한데, 묘당(廟堂, 조정)이 어렵게 여기고, 또 새로 부임하는 감사(監司)가 다시 자세히 살피기를 기다리고자 해 지금까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 나라를 도모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성취가 있을 수 있겠는가.】

10-2. <현종개수실록><현종 5년 윤6월 7일 정묘>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상진(李尙眞)이,
동래부(東萊府)는 마도(馬島, 대마도)와 서로 마주보는 지역으로서, 아침저녁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하는 곳인데, 성지(城池)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래부사(東萊府使) 이성징(李星徵)과 좌병사 이지형(李枝馨)과 상의하여 그 경내에 읍을 옮기고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정하여 아룁니다."
비국(備局)이 회계(回啓)하기를,

"읍을 옮기고 성을 축조하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니, 새 감사(監司)가 부임한 뒤에 다시 잘 살펴서 계문하게 하고 그뒤에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그 일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1664년 윤6월, 당시 동래부사 이성징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좌병사) 이지형은 동래부의 성을 동래의 중심으로 옮겨 세우고, 성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논의한 경상감사(경상관찰사) 이상진이 비국(備局, 군국의 사무를 맡은 관아)로 올렸으나, 비국에선 '새로운 감사가 부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변만 받고, 결국 시행되진 못했다고 합니다.

 

11. 1665.01.03

11-1. <현종개수실록><현종 6년 1월 3일 경인>

민유중(閔維重)을 사인(舍人)으로, 이정(李程)을 집의(執義)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掌令)으러, 이익상(李翊相)을 정언(正言)으로, 민종도(閔宗道), 어진익(魚震翼)을 지평(持平)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석주(金錫冑)를 수찬(修撰)으로, 이지형(李枝馨)을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의주부윤(義州府尹) 강유후(姜裕後)는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로, 가선(嘉善)을 더해주었다.

1665년 1월, 이지형은 평안병사(평안병마절도사)가 됩니다.

 

12. 1666.10.19

12-1. <현종실록><현종 7년 10월 19일 병인>

병인(丙寅)
여성제(呂聖齊)를 집의(執義)로, 신명규(申命圭)를 정언(正言)으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12-2. <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10월 19일 병인>

병인(丙寅)
여성제(呂聖齊)를 집의(執義)로, 신명규(申命圭)를 정언(正言)으로, 유철(兪㯙)을 좌윤(左尹)으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지형(馨)은 일찍이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있을 때 청사(使, 청 사신)에게 행뢰(行賂, 뇌물을 줌)했으므로, 도신(道臣), 만윤(灣尹)과 같이 죄가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간원(諫院)이 파직시켰다.

1666년 10월, 이지형은 통제사가 되는데요. 그가 평안병사로 있었던 약 1년 9개월 중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통제사에서 파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래 기사를 보면 완전 파직은 아닌 듯 합니다.

 

 

13. 1666.10.21

13-1. <현종실록><현종 7년 10월 21일 무진>

무진(戊辰)
대사간(大司諫) 강백년(姜栢年), 정언(正言)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공신(韓公信)은 탐욕이 넘치고 방종하기가 더할 수 없습니다. 그 전세(田稅)와 대동(大同, 대동미)를 봉납할 때, 친히 창고 안에 앉아서, 바치는 자로 하여금 그 두량(斗量, 곡식을 셈)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이미 봉납한 후, 또 명령해 추가로 징수했습니다. 다시 두량해 남은 것은, 사용(私用, 사사롭게 씀)으로 돌렸습니다. 또 봄 동안 호적(戶籍)에 대해서, 지가미(紙價米)를 넘치게 징수해,  거의 4백여석(碩)에 다다랐습니다. 신(臣) 명규(命圭)가 호남(湖南)을 왕래하면서, 읍민(邑民)의 수화(水火) 속에 있는 것 같은 것을 목격했으니, 중률(重律, 엄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임실현감(任實縣監) 홍진(洪璡)과 진안현감(鎭安縣監) 이규명(李奎明), 모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리(평판)이 있고, 원망하는 백성들이 많으니, 나란히 파직(罷職)하소서. 근래 서참(西站)에서 지나친 행뢰(行賂)로 인해, 도신(道臣), 만윤(灣尹), 모두 벌을 받았습니다. 곧 병사(兵使) 이지형(李枝馨) 또한 그 죄를 지었으나 혼자 면해져, 지금 또 뽑혀 통제(統制, 통제사)에 임용하니, 상벌을 내림에 있어 조금도 원칙이 없는 것입니다. 체차(遞差)하소서."
상(上)이 모두 따랐으나, 지형(枝馨)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강백년과 정언 신명규가 현종에게 '뇌물을 바친 일로 도신, 만윤 모두 벌을 받았는데, 병마절도사 이지형은 통제사에 임용되었는데, 그를 파직해달라' 요청합니다. 그러나 현종은 거절합니다. 그렇게 이지형온 통제사로 뽑히게 됩니다.

 

14. 1666.10.23

14-1. <현종실록><현종 7년 10월 23일 경오>

경오(庚午)
간원(諫院)이 통제사(統制使) 이지형(李枝馨)에 대한 의율(擬律, 법률 적용)이 너무 가볍다고 비난하는데도, (그가) 인피(引避)만 한 채 퇴대(退待, 물러나 기다림)하지 않는다고 (아뢰고) 파직할 것을 청했다. 상(上)은 따르지 않고, 체차하라고만 명했다.

통제사로 뽑힌 이지형은 물러난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간원은 현종에게 그를 파직하라 명했지만, 그러지 않았죠.

 

15. 1667.01.10

15-1. <현종실록><현종 8년 1월 10일 을유>

을유(乙酉)
민유중(閔維重)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이시술(李時術)을 병조참의(兵曹參議)로, 김익경(金益炅)을 참지(參知)로, 이익(李翊)을 뽑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배(拜)하고, 오정위(吳挺緯)를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이정(李程)을 사간(司諫)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15-2. <현종개수실록><현종 8년 1월 10일 을유>

을유(乙酉)
민유중(閔維重)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이시술(李時術)을 병조참의(兵曹參議)로, 김익경(金益炅)을 참지(參知)로, 오정위(吳挺緯)를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이익(李翊)을 뽑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하고, 이정(李程)을 사간(司諫)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그렇게 1667년 1월, 이지형은 공식적으로 48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됩니다. 그리고 1669년 3월 만기를 다 채우고 퇴임합니다.

 

16. 1667.01.15

16-1. <현종실록><현종 8년 1월 15일 경인>

통제사(統制使) 이지형(李枝謦)이 사폐(辭陛, 떠나려 인사함)하자, 상(上)이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통영(統營)은 중요한 곳인데, 사고가 있어 주장(主將)을 수체(數遞, 벼슬아치를 자구 갊)하니 염려된다."
지형(枝馨)이 아뢰기를,
"허술한 폐단은 면할 길이 없을 듯 합니다."
하고, 해방(海防)의 형편에 대해 말하면서, 전선(戰船)의 제도가 너무 높다고 하였다. 좌병영(左兵營)을 영천(永川)으로 옮기는 일, 좌수영(左水營)을 염포(鹽浦)로 옮기는 일, 내주(萊州) 범어산(梵魚山)의 축성(築城), 이 3가지를 가지고 편리여부와 이해에 대해 매우 자세히 논했으나 끝내 시행한 바가 없었다.

16-2. <현종개수실록><현종 8년 1월 15일 경인>

상(上)이 통제사(統制使) 이지형(李枝馨)을 인견(引見)하였고, 상(上)이 이르기를,
"통영(統營)은 중요한 곳인데, 사고가 있어 주장(主將)을 자주 바꾸니 본영(本營)의 일이 정말 염려된다."
하고 해방(海防)의 형세를 물으니, 지형(枝馨)이 아뢰기를,
"신(臣)이 잠깐 좌수사(左水使)로 있을 때, 해부(海夫) 등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바다의 수세(水勢)가 갑자기 달라져, 마도(馬島, 대마도)와 통영(統營)이 직로(直路)가 되었는데, 지금은 수영(水營)이 직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말하기를,
"좌병영(左兵營)의 진(鎭)을 울산(蔚山)에 설치한 것은, 애당초 여러  섬의 왜인(倭人)이 번갈아 나와 노략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육군(陸軍)의 장(將, 장수)이 한쪽 모퉁이에 있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니, 영천(永川)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 말하기를,
"좌수영(左水營)을 부산(釜山)의 감안(甘安)에서 배를 정박하는 옛터[舊基]로 옮겨 설치한다면 상당히 편리하고 좋겠으나, 조수가 빠지는 상하현(下弦) 때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할 터이니, 울산(蔚山)의 해포(醢浦)에다 옮겨 설치하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금정산성(金井山城)은 형세가 매우 좋고 옛터가 완연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 수축하여 모여 살게 한다면 요새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배의 제도[船制]가 너무나 높아 개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아뢰니, 상(上)이 부임한 뒤에 자세하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가 공식적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근무지인 통영으로 발령나기 직전 현종을 알현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는 '일전엔 대마도와 통영이 직선상으로 바닷길이 나 있었으나, 바닷길이 바뀌어 대마도와 수영이 직선상으로 바닷길이 되었다는 사실'과 '좌병영의 진을 울산에 있는 것보다 영천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과 '좌수영을 부산의 감안에서 배정박지 옛터로 옮기는 것보다 울산 해포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을 냅니다. 거기다 '동래(현 부산) 금정산성을 복원하는 것조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는 등 경상도 군사와 관련된 사안들을 이야기 합니다.

 

현종은 듣고 있다가 이후에 이지형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있으면서 면밀히 정리해 자세히 보고하라고 하며 배웅합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략 23년간의 이야기 속에 많은 일들이 지나갔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지형의 직책
칠곡부사-전남병사(전남병마절도사)-평안병사(평안병마절도사)-제주목사-경상좌병사(경상좌도병마절도사)-평안병사(평안병마절도사)-통제사(삼도수군통제사)

칠곡부사와 평안병사 시절에 논란이 있었으나, 기록상으로는 칠곡부사 때는 큰 죄는 없었고, 평안병사 때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준 일이 있었지만, 현종은 그 일을 무시하고 그를 통제사로 임명합니다.

 

공식적으로 이 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직책만 봐도 중요한 행정, 군사적 직책을 맡은 이지형의 흔적은 지금 이렇게 '칠곡 가산산성', '부산 금정산성'과 같은 국방과 관련된 시설의 안내판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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