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오씨 판관공파의 임진왜란 공신을 모시는 기장군의 구산단·의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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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오씨 판관공파의 임진왜란 공신을 모시는 기장군의 구산단·의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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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교와 철마파출소 사이의 삼거리에서 조금 올라가 큰 2차선 오르막 차도 말고 옆의 샛길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빠지면 구산단·의용당이 보입니다.

주차장도 있기에 차로도 쉽게 갈 수 있는데요. 지도 상 위치는 '철마면 와여길 75-4'라고 치면 됩니다.

 

저 사실 이거 찾는다고 마을 한 바퀴 삥 2번이나 돌았어요ㅠㅠ 가다가 무서운 길도 가고... 또 안내판 따라 가다가 똑같은 곳도 나오고 그래서 '헉! 또 잘 못 온건가..'싶기도 했구요ㅠ 그래서 여기 가보실 분들이라면 꼭 길을 잃지 않게 이렇게 지도로 상세히 위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큰 삼거리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가면 나옵니다. 그런데 돌에 새겨진 화살표를 잘못 이해하면 저 차도로 올라가라고 하는 듯 하죠ㅋㅋㅋㅋ 그래서 올라가봤는데 와여마을 입구가 나오길래 놀랬어요ㅋㅋㅋㅋ 이 직전에 방문했던 의열사가 구산단·의용당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샛길로 이렇게 들어가면,

이런 주차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사당이나 제단같은 건물이 보이는데요, 저 곳이 바로 구산단·의용당입니다! 이 길로 올라가줍시다.

입구에서 또 한 컷 찍어봤습니다. 집 앞에는 2개의 비문이 있었습니다.

구산단·의용당 설명비 앞면
구산단(龜山壇)·의용당(義勇堂)
구산단·의용당해주(海州) 오씨(吳氏) 판관공파(判官公派- 판관(判官) 휘 필경(弼卿) 공은 시조 고려군기감 휘 오인유(吳仁裕) 공의 11세손이며 입향조(入鄕祖) 휘 경선(慶先) 공의 아버지) 15세손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 휘 홍(鴻) 공과 공의 재종제(再從弟, 육촌아우) 휘 춘수(春壽) 공 두 분의 순국의병장(殉國義兵將)을 모시는 단소(壇所)이다.

원정공의 자(字)는 치화(致化), 호(號)는 연파(蓮坡)로서 1566년(명종 21년) 철마에서 태어났으며 부(父)는 증병조판서(兵曹判書) 휘 연국(連國) 공, 모(母)는 증정부인(貞夫人) 김해 허씨(許氏)이다.

1588년(선조 21년) 23세 때에 장사랑(將仕郞)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올랐다.

첨정공의 자(字)는 치범(致範), 호(號)는 죽강(竹崗)으로서 1573년(선조 6년)에 노포동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 사원(仕遠)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관직인 오위부장(五衞部將)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의 발발로 부산포와 동래성에 이어 기장현까지 무너지매 향토가 유린당하고 무고한 향민들이 살육을 당한다는 첨정공의 급보에 원정공은 구국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섰다.

두 형제는 의기투합하여 창의(倡義)하니 이내 300여 의병을 모병하여 4월 20일 경사라동(만화리) 계곡에서 큰 함성을 지르며 수많은 횃불을 휘둘러 대군의 위세처럼 위장하고 야간 기습 전술로써 왜적 470여 명을 도륙(屠戮)하고 기장읍성을 탈환하였다.

두모포(豆毛浦·竹城浦)에서는 김일덕 의병장 휘하의 병들이 왜군에 포위되자 인근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왜적들을 토적하고 의병들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양산 조평(鳥平) 전투에서는 왜적들을 장방골짜기로 유인하여 범람하는 덕계천(德溪川) 가교를 건너게 하는 위장전술로써 100여 명을 수장(水葬)하고 달아나는 700여 명을 추격하여 편야(片野)와 삼여(三呂)에서 완전 소탕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전진하여 남창의 대운산(大雲山) 요새에 설진(設鎭)하고 특전술로써 울산으로 공급하던 적의 무기와 군량미를 빼앗고 소각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고는 전라도 순천으로 가서 일족 오응정(吳應鼎) 부사의 관군과 합세하여 운봉(雲峯)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에 재참전하여 1597년 1월 24일 전라도 남원(南原)의 서성(西城) 전투에서 100여 의병을 지휘하여 성밖 왜군들을 기습 토적하던 중 매복한 왜적의 습격을 받아 그날 인시(寅時)에 장렬히 순국하니 32세 때이었다.

전공포상으로 임란동래24별전공신(壬亂東萊24別典功臣)에 오르고 1709년(숙종 35년)에 <의용(義勇)> 편액을 하사, 1769년(영조 45년)에 통훈대부장악원정(정3품)에 증직되었다.

첨정공은 1595년(선조 28년) 3월 13일 서생포(西生浦) 전투에서 순국하였으며 임란동래24별전공신에 오르고 1737년(영조 13년)에 사재감첨정(종 4품)에 증직되었다.

임란 이후 안락서원에 이어 동래 충렬사에서 춘추로 두 충신의 제향을 올려오고 있다.

여기에 원정공(院正公)은 1918년 3월에 첨정공(僉正公)은 1975년 3월에 각 설단(設壇)하였으며 유림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구산과 나라에서 내린 편액 <의용(義勇)>을 상징하여 구산단·의용당이라 한다.

2009년 3월 일

오른쪽에는 구산단·의용당을 세운 계기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여기서 모시고 있는 오홍(吳鴻)과 오춘수(春壽)의 일화를 간단히 적은 비가 있습니다.

구산단·의용당 설명비 뒷면
후손 재국(載國) 글을 쓰고
정석(正錫) 비를 세우다

구산단·의용당의 입구 왼편에는 '구산단(龜山壇)·의용당(義勇堂) 건립기적비(建立紀績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구산단·의용당을 세운 1918년과 그 건립 형제들과 부계에 대한 이야기 실려 있습니다.

건립기적비 앞면
구산단(龜山壇)·의용당(義勇堂) 건립기적비(建立紀績碑)

건립기적비 앞면 기준 왼쪽면
해주(海州) 오씨(吳氏) 판관공파(判官公派) 24세손 추파(秋波) 휘 기영(璣泳) 공의 자녀 중에서 세 아들의 충효사상(忠孝思想)과 숭조정신(崇祖精神)이 특출하였다.

장남 휘 덕근(悳根)공의 자는 원백(元伯), 호는 벽초(碧樵)로서 1857년(철종 8년) 8월 14일에 출생하여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1901년(고종 38년)부터 신녕(新寧, 경북 영천군), 토산(兔山, 황해 금천군), 영산(靈山, 창녕군), 명천(明川, 함북 명천군)의 군수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비서감승(祕書監丞)을 역임하고 1936년 7월 5일에 별세하였다.

2남 휘 창근(昌根)공의 자는 중백(仲伯), 호는 소파(小波)로서 1863년(철종 14년) 5월 20일에 출생하여 1898년(고종 35년)에 장릉참봉(章陵參奉)

여기서 '오기영(吳璣泳)'이란 분은 <장전구곡가>를 지었던 분입니다. 그는 1902년 높은 관직을 지내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던 중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요. 그 때 그가 부른 노래를 적은 '장전구곡가비'가 회동수원지에서 철마면으로 오는 길목 작은 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건립기적비 뒷면
을 거쳐 승훈랑(承訓郞)을 지내고 1940년 12월 28일에 별세하였다.

3남 휘 봉근(奉根)공의 자는 형백(亨伯), 호는 소오(小塢)로서 1868년(고종 5년) 8월 3일에 출생하여 1900년에 장릉참봉을 거쳐 승훈랑을 지내고 1944년 4월 17일에 별세하였다.

이곳 문중은 임란순국충신의 가문이 되고도 입향 내력을 알지 못하다가 벽초공(덕근공)이 부지간(不知間)이던 서울의 족숙 휘 익영(益泳- 전 판서(判書))공께 도움을 청하여 12세손 휘 경선(慶先)공께서 철마로 낙향(落鄕)하신 사실(史實-조선 중종)을 밝히자 소오공(봉근공)은 서울과 안성(安城)을 찾아 대문중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등 가문일 추스르기에 앞장섰다.

한편 추파공(기영공)의 9대조로서 자 치화(致化), 호(號) 연파(蓮坡) 휘 홍(鴻-시조 고려군기감 오인유(吳仁裕) 공의 파조(派祖) 필경(弼卿)공의 현손이며 입향조(入鄕祖) 휘 경선(慶先) 공의 증손-15세손)공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기장읍성 탈환 및 양산, 울산, 순천 등지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월 24일 전라도 남원(南原) 서성(西城)에서 왜적 토벌 전투 중 순국함으로써 임란동래24별전공신(壬亂東萊24別典功臣)에 오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정3품)에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철마면 구칠리 점현산에 모셨다.

임란 후에는 안락서원(현 동래 충렬사)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려 오고 있다.

그러나 순국하신지 300여년이 넘도록 문중에는 반듯한 단소(壇所)를 설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3남 소오공(봉근공)이 순국조상의 충절을 기리는 단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 사업에 소요될 큰 재원 문제는 물론 때마침 1910년 한일합방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사활을 건 대한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 만행이 극에 달하고 임진왜란 순국충신 추모사업은 곧 대한독립운동의 한 방편이므로 일제의 극악한 탄압으로 성사가 더욱 어려웠다.

다행히 공의 열성적인 호소에 두 형이 흔쾌히 참여함으로써 마침내 삼형제가 사재를 출연하여 이곳 구산(龜山) 자락에 터를 잡아 1917년 10월에 단소 공사를 착공, 이듬해 3월에 준공하여 나라에서 하사받

건립기적비 앞면 기준 오른쪽면
 은 <의용(義勇)> 편액을 걸어 원정공(院正公)을 설단하고 구산단·의용당이라 하였다.

나아가서 경향(京鄕)의 유림에선 대의 순국 공훈과 단소 설단 사실을 널리 홍보하였다.

설단 이후 부터는 유림에서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내오고있다.

늦ㅇ나마 단소를 설단하고 선대의 순국 충절을 기림으로써 가문의 긍지를 드높인 삼형제분의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나니 그 얼은 자손만대에 귀감이 될 지어다.

2009년 3월 일

후손 재국(載國) 글을 쓰고 판관공파 문중에서 비를 세우다

이곳은 '와여길 75-4'란 도로명 표지판도 붙어져 있는 건물이구요. 건물의 오른편엔 '해주 오씨 판관공파 종중(海州吳氏判官公派宗中)'이라고 적힌 문패가 있습니다. 저 문패는 <부산역사문화대전>에도 실려 있드라구요. 문패에 대한 설명이 적힌 사이트(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403&contents_id=GC042P20728)에 따르면 저 문패는 '1918년 건립된 일제 강점기 오홍과 오춘수의 사당인 구산단·의용당의 입구에 있는 해주 오씨 판관공파 종중의 문패'라고 하네요.

문이 닫혀 있어 틈으로 사진을 찍었는데요. '구산서당(龜山書堂)'이라고 적힌 집이 보이고, 그 집 내부의 현판에는 '의용당(義勇堂)'이라고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정면 사진을 찍은 것을 뒤로 하고 이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구산단·의용당에서 내려와 삼거리를 본 모습입니다. 이렇게 기장군 와여 마을 답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임진왜란 때 이 땅을 지켜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전에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제 생각을 적었던 적이 있는데요. 그 때 '그냥 그들은 자기 집, 자기 마을,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왜병을 무찔렀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기 가족, 자기 집, 자기 마을'을 확대하면 결국 '자기 국가'가 되는 거고, 그렇게 '자기 국가'를 결국 지켜낸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 당대는 힘들었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조금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곳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의 자유와 평화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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