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암 위쪽에 있는 나옹당 능가 대종사를 기리는 탑과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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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암 위쪽에 있는 나옹당 능가 대종사를 기리는 탑과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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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원암에서 2개의 석조기념물까지 가는 길

범어사에서 조금 올라오거나 사배고개에서 범어사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관음도량 제일선원'이란 타이틀을 단 조계종 사찰 '내원암' 입구가 보입니다.

이 길로 올라가줍시다. 가는 길에 옆을 보니 깨끗한 계곡물이 내려오고 있네요~

좀 더 가니 또 다른 계곡물도 보입니다. 보는 제가 다 시원했습니다.

내원암 주차장이 보입니다. 주차장에서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내원암이 나옵니다. 비석을 보기 위해선 입구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합니다. 차량 출입은 통제된 곳입니다.

2개의 돌조형물이 있습니다. 크기도 큽니다! 위치는 여기입니다.

 

2. 나옹당의 탑

왼쪽엔 '나옹당의 탑'이란 뜻의 '나옹당지탑(奈翁堂之塔)'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옹당 능가 스님 (출처 : 현대불교)

찾아보니, 나옹당(奈翁堂) 능가(能嘉) 스님(1923~2020.05)을 기리는 탑이었습니다.

그는 1923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61년에는 경주 불국사 주지로 있었고, 1963년엔 조계사 주지로, 1968년엔 범어사 주지로 역임했죠. 그러다 내원암에 계시다가 2020년 5월 29일, 이 땅을 떠나셨던 스님이셨습니다.

 

3. 선찰 대본산 범어사 나옹당 능가 대종사 비명

비 정면
선찰 대본산 범어사 나옹당 능가 대종사 비명(禪刹大本山梵魚寺奈翁堂能嘉大宗師碑銘)
청산부괘검(靑山祔掛劍) 괘검물인지(掛劍勿人知)여! 흰 구름[白雲]은 종일토록 금정산(金井山)에 기대어 비벼대지만 금정(金井)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구나. 무심무사(無心無事)의 선가진풍(禪家眞風)이로다. 엎드려 감히 생각하니 동산노사(東山老師)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하신 유희가풍(遊戲家風)이시고, 지효선사(知曉禪師)는 향상파주문(向上把住門)의 절대자리시며, 능가(能嘉) 스님은 향하방행문(向下放行門)으로 중생시장(衆生市場)을 넘나들며 보살도(菩薩道)를 실천(實踐)하시니, 이는 행장(行狀)에서 드러나는 바다. 누가 찾아오려나 무슨 상서(祥瑞)러운 일이 있으려나. 지효선사는 간밤 꿈에 원효암(元曉庵)을 오르다 경허선사(鏡虛禪師)가 지으신 원효진객(元曉眞客)의 선시(禪詩)를 음조(吟調)하며 평소보다 더 깊은 감회(感懷)에 젖어 있었다. 조사(원효대사)의 입멸이란 전언은 모두가 거짓말[祖師入滅傳皆妄]  오늘도 또렷하게 이 대(원효대)에 앉으셨네[今日分明坐此臺] 주장자에 눈이 있어 밝기가 칠흑인데[杖頭有眼明如漆] 산하대지를 눈부시게 비추어 깨뜨렸네[照破山河大地來] 라는라는 시공(時空)이 떨어져 나간 본분선사(本分禪師)의 절창선갈(絶唱禪渴)다. 다음날 지효선사는 방선(放禪) 후 보행 중 우연히 원효성사(元曉聖師)를 닮은 듯 기골이 장대하고 소쇄발속(蕭灑拔俗)한 청년을 만나니 확연히 법기(法器)인 줄 알고 강력히 출가(出家)를 권하였다. 이 청년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법화경(法華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진실한 불자였다. 그날로 동산노사를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화천(和泉)이란 법명(法名)을 받으니 신라 화쟁성사(和爭聖師)인 원효(元曉)를승계하라는큰뜻이 법명에 담겨 있었다. 화천(和泉)과 지효선사와의 관계는 전생의 법연(法緣)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장을 살펴보니, 스님은 1923년 7월 15일 충북 괴산군(槐山郡) 도안면(道眼面) 석곡리(石谷里)에서 아버지[父] 전주 이씨 기탁(起鐸)과 어머니[母] 밀양 박씨 영하(英夏) 사이에서 5녀 1남으로 출생하니 속명(俗名)은 영근(榮根)이다. 부친은 늦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아침저녁[朝夕]으로 불보살(佛菩薩)님께 열심히 기도 중에 도솔천(兜率天)에서 서상(瑞象)이 내려오는 태몽으로 영특출중(英特出衆)한 아들을 얻으니 불전(佛前)에 감사하며 그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사(儒士)인 엄친(嚴親) 슬하(膝下, 무릎 아래)에서 정훈교육(庭訓敎育)을 돈독(敦篤)히 받았으며 신구학(新舊學)을 겸하기 위하여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당ㅅ히는 일제 식민 강점기로서 세상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망국의 한이 골수에 사무치는 젊은 지식인의 아픔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일본 유학 중 타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의 생명의 실상(生命の實相)을 접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강의(講義)를 계기로 <법화경>과 함께하니 제월광풍(霽月光風, 갠 날의 달과 맑은 바람)이라, 망국의 아픔은 먹구름이 걷히듯 일제하의 현실과 법계일상(法界一相)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크게 깨달아 법화(法華)의 진학인(眞學人)이 되었다. 해방 이후 경주, 대구 등에서 교직에 임하였으며, 1948년 경주 

비 정면 기준 좌측면
분황사(芬皇寺)에서 보살계법회(菩薩戒法會)에 참례(參禮)하여 처음으로 동산노사를 친견(親見)했다. 1953년 경주 고등학교와 경주 공업고등학교 교감직에 종사하였으며, 1955년 범어사(梵魚寺)로 출가, 1956년 동산율사(東山律師)를 계사(戒師)로 비구계(比丘戒)를 수지(受持)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비구대처(比丘帶妻)의 정화분쟁(淨化紛爭)의 와중에 있었다. 화천(和泉)은 법학을 바탕으로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선봉장인 동산(東山)과 청담(靑潭) 양사(兩師)를 보필하였다. 조계사(曹溪寺) 분쟁현장에서는 대처(帶妻)의 부당함을 피력 할복(割腹)으로 그 결의를 보인 지효(知曉)사형을 아침저녁[朝夕]으로 극진히 조리(調理)하여 회복을 도왔다. 동산과 청담 양사께서 초발심(初發心)의 정진(精進) 능력을 격려(激勵)하고 장차 선문(禪門)의 대종사(大宗師)가 되라는 의미로서 능가(能嘉)라는 법명을 다시 지어주셨다. 스님은 법화(法華)와 금강(金剛)을 두루 섭렵(涉獵)하였으며, 더불어 불철주야 화두의 끈을 놓치지 않고 선문(禪門)의 본래구족(本來具足) 본래청정(本來淸淨)의 당처(當處)를 조철(照徹)하였다. 예컨대, 목단(牧丹, 모란)은 화엄(華嚴)하여 화중지왕(花中之王)이지만 열매가 부실(祔實)하고, 대추는 꽃은 작고 초라하지만 열매가 실하다. 지효선사는 돌 속에 감춰있는 주옥(珠玉)이다. 본분선승(本分禪僧)으로서야 꽃과 열매를 논할 것이 없지만 능가(能嘉)스님은 꾸밈이 없는 탈속선승(脫俗禪僧)을 만나 세속적 명리(名利)를 털어버리고 진납자(眞衲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지효선사의 권유로 1958년 석굴암(石窟庵) 주지(住持)로 부임(赴任), 포항(浦項) 보경사(寶鏡寺) 주지, 1961년 경주 불국사(佛國寺) 주지로 취임하였다. 당시 선리(禪理)의 대가인 장설봉(張雪峰) 선사(禪師)를 모시고 선학연수법회(禪學硏修法會)를 개설하여 <벽암록(碧巖錄)>과 <전등(傳橙)>, <염송(拈頌)>을 교재로 실참실오(實參實悟)의 선리기반을 다졌다. 법화(法華)의 구원실성(久遠實性)을 화엄(華嚴)의 법계일상과 금강의 구경무아(究竟無我)로 묵정조철(默靜照徹)하였고, 나귀가 우물을 보고 우물이 나귀를 보는 진소식(眞消息)을 깨달아 일상생활에서 조사선(祖師禪)의 이로사로(理路事路), 본래구족(本來具足) 철청정(徹底淸淨),제법실상의 선창(禪窓)을 활짝 열어 내면을 조철(照徹)하는 일도상(一圖相)을 철견(徹見)하였다. 이어서 대승(大乘)적 설통(說通)을 얻어 말세법화보살(末世法華菩薩)로서 법화경설법(法華經說法)과 포교에 원력(願力)을 세웠다. 1966년 다시 포항 보경사 주지로 부

비의 뒷면
임하여 법화경 강의를 시작, 1969년 한국선불교(韓國禪佛敎) 선양활동(宣揚活動)으로 재일홍법원(在日弘法院)에 교법사(敎法師, 교리교사)로 강의하였다. 1970년 3월 6일,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 주지로 취임, 세계불교지도자대회(世界佛敎指導者大會)를 개최하였다. 한일불교친선협회장(韓日佛敎親善協會長)으로서 범어사에서 세계고승합동법회(世界高僧合同法會)를 개최하고 세계연합보살계단(世界聯合菩薩戒壇)도 개설하였다. 1976년 일본조계종(日本曹溪宗) 개산(開山, 설립), 교토부(京都府) 소재 코우라이지(高麗寺)를 총본산(總本山)으로, 오사카(大阪) 소재 후겐지(普賢寺)를 포교당(布敎堂)으로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일본에 전파(傳播)하였다. 1982년 범어사 내원암(內院庵) 회주(會主, 법회지도자)로서 중창불사(重創佛事). 1996년 이웃돕기 삼보재단(三寶財團) 설립, 이사장으로서 불우이웃돕기 등 복지사업 추진, 알기쉬운 법화경강설(法華經講說)도 포교 책자로 배포하였다. 2002년 동산문도회(東山門徒會) 문장(門長)으로 추대(推戴), 2004년 나옹불교전도협회(奈翁佛敎傳道協會) 재단법인 설립, 이사장으로서 불교성전(佛敎聖典) 포시운동(布施運動)을 전개하였다. 2006년 동산스님의 구술증언자료집, 동산대종사(東山大宗師)와 불교정화운동, 범어사와 불교정화운동의 역사 발간에 후원, 동년(2006년), 조계종포교대상을 수상하였다. 2015년 동산대종사 열반(涅槃) 50주년 기념으로 사진집 감인대(堪忍待)를 발간하여 봉헌사(奉獻詞)를 서술하였다. 2020년 음5월 29일 새벽에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불조도장(佛祖道場)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 무슨 옷을 입고 가야하나. 열파고금(裂破古今) 탈각오음(脫却五陰)이여 본분나인(本分那人) 의발(衣鉢)로 도솔천에 오르니 아-아 창천창천(蒼天蒼天)이여 라고 임종의 말씀을 남기고 엄연(儼然)히 입적(入寂)하시니 법랍(法臘, 입법 후 나이)은 70세요 세수(世壽, 세상 나이)는 97세다. 능가스님은, 출가길로 인도한 지효선사를 사형 겸 스승으로 모시면서 문중의 대소사를 논강(論講)해 왔으며, 선문의 수행에서도 법은(法恩)을 많이 입어 항상 불망비를 세워 모셔야 한다고 법연(法緣)을 잊지 못했다. 만년의 나옹(奈翁)이란 자호(自號)는 사미(沙彌) 시절의 화천(和泉)이란 법명과 함께 되새겨 보면 시공이 허물어져 백발이 청춘이요 청춘이 백발이라는[원문 : 백발이리는] 선구(禪句)이니 원효, 경허(鏡虛), 지효로 이어진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반추하게 한다. 덕민(德旻)은 사미 시절 능가스님을 처음 뵈었으나 운(雲, 구름)과 니(泥, 진흙)의 격차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 후 26년 전 범어사 강주(講主)로 있을 때 내원암으로 부르시기에 찾아뵈었더니 선차(禪茶)를 건네시며 무엇을 강의하나 물으셨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강의한다고 하니 금강경(金剛經)의 여시여시(如是如是)를 물으셨다. 이에 우이성문(偶爾成文)이라 대답하니 "역시 너는 강종(講種)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종용종용(從容從容) 조리정연(條理整然)한 말씀 속에 법화유현(法華幽玄)의 법미(法味)가 스님 방에 풍김을 감지했다. 소납(小衲) 덕민(德旻)은 비문을 낙초언구(落草言句)들을 모아 엮으니 둔재필단(鈍才筆短)으로 부족(袝足)함을 통감할 수 밖에 없다. 참으로 동산문도의 질정(叱正)을 기다리면서 명(銘, 비문)을 짓는다.
명왈(銘曰) 금정산에 석양이 깔리니 노을 속에 조는 학(鶴)의 자태(姿態)가 차갑고 무심한 개울은 푸른 하늘을 품고 저리도 바다로 달리나. 오늘은 도솔천 내원궁에 오르시려나. 아-아! 처처(處處, 이곳저곳)가 도솔천인 것을 소조(蕭條)한 내원암 그 누가 법화경을 읊조리나! 달뜨자 텅 빈 골짜기에 산새가 슬피 운다. 일구흡진강동수(一口吸盡江東水)여! 내원(內院)에 새로운 꽃술 터지고 목단(牧丹, 모란)은 누구의 얼굴인가요. 일구흡진강동수여! 꽃밭에 숨어서 노래하는 까투리는 누구의 원음(圓音)인가요? 주지소임(住持所任)은 천장(千嶂)의 달이 잘 살아주고 조석(朝夕)의 가사 자락은 아침 안개요 저녁 구름이니 이것이 동산과 지효의 선풍(禪風) 가풍(家風)이요 범어(梵魚)의 정맥(正脈)이라. 목에 메여있는 문도(門徒)의 밧줄을 누가 풀어주려나. 금정(金井)에 정민(貞珉)이 세워지니 벌써

나옹당 능가 대종사가 일본 세웠다는 고려사(코우라이지)에 대한 정보는 이 사이트(https://www.kouraiji.com/)에서, 오사카에 세웠다는 보현사(후겐지)에 대해서는 이 사이트(https://www.hugenji.com/)를 참고하길 바랍니다.

비의 정면 기준 오른편
소나무 가지 비질하고 흰 구름이 배회하네.
문중질(門中秩)
상좌
(上座)

지명(志明) 인각(仁覺) 인걸(人乞) 종훈(宗薫) 종선(宗宣) 석공(石公) 화공(華公) 우담(優曇) 종덕(德) 원공(公) 상운(祥雲) 지암(智庵) 무작(無作)
손상좌
上座)    
수불(修弗) 법상(法常) 관일(觀一) 운엄(雲嚴) 공마(空摩) 무관(無關) 길상(吉祥) 법수(法修) 법융(法融) 관오(觀吾)경진(慶進) 현혜(玄慧) 현담(玄潭) 도경(度鏡) 도경(圖鏡) 천경(天慶) 광조(光祚) 광목(光睦) 동광(東光) 동선(東) 범해(梵海) 대진(大進) 효경(曉鏡) 효정(曉頂)
조계상좌
(曹溪上座) 
보산(寶山) 긍산(肯山) 석산(昔山) 회산(會山) 영산(靈山) 눌산(訥山) 서산(瑞山) 홍산(弘山) 학산(鶴山) 웅산(熊山) 담산(湛山) 허산(虛山) 현산(睍山) 장산(將山) 약산(若山) 함산(含山) 내산(來山) 화산(和山) 벽산(碧山) 남경(楠京) 묘중(妙仲) 허산(虛仲) 원덕(垣德) 만덕(滿德) 정명(頂明) 정원(頂圓)
불기 2566년((서기) 2022년) 12월 1일

한 때 이 내원암에 계셨던 나옹당 능가 대종사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2020년 입적 후 약 2년 뒤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죠.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불교 정화 운동, 포교 운동, 일본 진출 등 불교의 조계종 속에서 많은 일을 해 오신 불법(佛法)을 위해 몸 바치신 분이였단 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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