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공원 서막의 흔적인 동래금강원 표지석과 정현덕 부사가 지은 금강원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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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금강공원 서막의 흔적인 동래금강원 표지석과 정현덕 부사가 지은 금강원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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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 내 일제 시설물 위치도 13층석탑(후락탑)
금강연못(청룡담)
금강원표지석
황기 2600년 기념비

금강공원 정문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쪽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금강공원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과 작은 시비가 있다.

1. 동래금강원 표지석

금강원 입구에서 쭈욱 돌아 올라오면 왔던 길이 이렇게 보일겁니다. 물론, 이 길 말고도 중간에 산길같은 곳을 조금 걸어올 수도 있죠.

 

위치는 이쪽입니다.  금강공원 내 일제의 흔적이 어디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는 안내판도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일제의 잔재들만 또 둘러보고 답사기를 올리겠습니다. 

금강공원 스토리
일제 강점기 일본 자본가들이 부산에 대거 진출하면서 온천이 용출되는 곳에 여관을 지어 본격적으로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다.
금강공원 또한 일본인들이 부산을 식민도시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만들어졌다.

정착한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을 휴양지로 개발하였고, 자본가들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손님들이 온천장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주변에 즐길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처음 금강공원은 부산으로 건너와 담배 장사로 큰돈을 번 히가시바라(東原)의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1920년대 초 이곳의 계곡물을 이용해 청룡담(금강연못)이라는 일본식 연못을 만들고, 계곡의 바위 위에 13층 높이의 석탑도 세워 1931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금강공원으로 개칭되었고 현재 금강공원 내에 동래금강원 표지석, 황기 2600년 기념비, 13층 석탑, 금강연못, 우물터, 돌다리, 돌계단, 독수리상이 "일제강점기 잔존시설"로 남아있다.

이 표지석 정면에는 '동래금강원(東萊金剛園)'이라고 쓰여있습니다.

1920년대 초 담배 장사로 큰돈을 번 일본인 사업가 히가시바라 카지로(東原 嘉次郞)가 이곳에 금강원을 세우면서 이 표지석도 같이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2. 금강원 시비

 
원문 음독 해석
丁卯之年我馬東
此邦民物見繁雄
居人盡有昇平樂
守殊無捍蔽功
紅藕池臺歌扇月
綠楊城郭酒旗風
鷄林古事依然在
萬萬波波一篴中
越絶高城大海濱
百季煙火靜邊塵
朝廷以我爲民牧
政績如何似古人
敢道蒲鞭能化僞
羞言卉服與爲隣
君恩未報身空老
玉篴梅花又送春

知府 海所 鄭顯德
정묘지년아마동
차방민물견번웅
거인진유승평락
수수무한폐공
홍우지대가선월
녹양성곽주기풍
계림고사의연재
만만파파일적중
월절고성대해빈
백계연화정변진
조정이아위민목
정적여하사고인
감도포편능화위
수언훼복여위린
군은미보신공로
옥적매화우송춘

지부 해소 정현덕
정묘년(1867년) 내가 말을 타고 동(東, 동래)으로 오니
이 고을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고 씩씩하구나
주민 모두 태평하게 즐기고 있지만
수(守, 태수)만 막아가리는 공이 없구나
붉은 연못 대(臺, 정자)에 부채 부치며 달을 노래하고
푸른 버들 성곽에 술집 깃발 날리우네
<계림고사> 의연히 남아 있어
만만파파(만파식적) 한 피리 가운데
큰 바닷가(에의) 유난히 높은 성
백년토록 변진 봉화 고요하여라
조정에서 나를 민목(民牧, 목민관)으로 삼았으나
공을 쌓는 것이야 어찌 옛사람과 같을소냐
감히 부들 채찍으로 거짓을 교화한다 말하리
오랑캐의 옷(卉服)과 더불어 이웃한다 말하기 부끄러워라
임금의 은혜 갚지 못한 채 몸만 헛되이 늙고
옥피리와 매화꽃 속에서 또 봄을 보내는구나

지부 해소 정현덕

1867년, 조선 말기면서 개항기 직전일 때, 정현덕은 동래 부사가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그 해 9월에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가야했으나 임기가 끝나고도 계속 그 자리를 지켜, 1874년 1월에 승지에 임명되어 동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약 7년간 동래부사를 지냈었죠.

 

당시 '서계 문제'라고 불렸던, 새로 출범한 일본제국의 국서를 거부하는 사건에서 일본측 서계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고, 일본과 밀무역을 하던 박승달(朴承達)을 처형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조선의 국익에 반한다고 여겨졌던 것들은 강하게 다루었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동래읍성을 개축하고, 관아의 외대문이었던 독진대아문을 보수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등 내실도 완강히 다지기 시작했죠. 그 뿐 아니라, 선정과 교화, 그리고 교육에도 힘써서 민심이 그를 따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돌에 시 한 편을 새겼는데, 그 시가 바로 '금강원 시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시비입니다.

 

시에서 그는 동래가 태평성대를 이룬 듯 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옛 목민관들과 비교하며 겸손히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으로 여겨지는 오랑케와 더불어 이웃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에서 국방의 중요성을 늘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그래서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는 이 시를 '임금의 은혜에 걸맞은 정치를 펴는 목민관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생을 여유롭게 바라볼 줄 아는 정현덕의 풍모를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금강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을 지날 때면 그의 선정과 목민관 정신을 살짝 엿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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