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를 내려오면서 만난 문학가들을 기리는 비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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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범어사를 내려오면서 만난 문학가들을 기리는 비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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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어사를 내려오면서 만난 문학가들을 기리는 비석들

범어사로

범어사로 갈 수 있는 범어사로 중 차량이 양쪽으로 다닐 수 있는 왕복차선이 있는 잘 닦인 넓은 길로 내려가다 보면 5명의 문학가를 기리는 비석들을 볼 수 있다.

 

1-1. 요산 김정한 문학비

요산 김정한 문학비 (출처 : 부산광역시)

범어사에서 바로 내려올 때 오른쪽에 세워진 비석 중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요산 김정한 문학비다.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문학비

<어딜 가도 산이 있고 그리고 인간이 살았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으레 나뭇가지가 있고 그 곁에는 코흘리개들이 놀곤 하였다조국이란 것이 점점 가슴에 느껴졌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08년 음력 9월 26일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663의 2번지에서 태어나셨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 범어사 부설 사립 명정학교를 거쳐 동래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교 문과를 다니셨다. 남해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농민 문학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사하촌> 이후 민족 문학으로 확장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 의지를 광복 후 독재 정권 하에서 민주 의지로 승화됐으니 요산 선생은 글과 행동이 다르지 아니하셨다. 언론인으로 또 교수를 겸하면서 선생은 작가로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으니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 <사밧재> 등 대표작들은 한결같이 우리 고장을 이야기하면서 민족 문학의 우뚝한 봉우리로 자리하고 있다. 선생이 태어나신 이곳에 작은 돌 하나를 세움은 인간 사랑과 나라 사랑을 지나가는 길손 모두가 한번쯤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1994년 4월 일

유정규 짓고
조영조 쓰다
금정구청장 세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1908~1996)은 수능 관련 교재나 시험에서도 <사하촌>, <산거족>, <모래톱 이야기> 등으로 모습을 보였을 정도로 현대 문학에서 매우 명성 있는 인물 중 한 분이다.

지금도 부산에는 그가 살았던 생가와 그 일대를 요산문학관을 세웠으며, 청룡초등학교에서 요산문학관까지를 요산문학로(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346)라고 칭하며 그를 기리고 있을 정도다.

 

요산 김정한과 그의 고향을 돌아보는 요산문학로

1. 요산문학로 전체 거리 2016년말에 문을 연 도시철도 범어사역 1번출구 인근 팔송로 기점에서 시작해 중간에 팔송사거리가 있는 큰 횡단보도를 건너 금샘로와 팔송로가 만나는 지점까지의 750m

mspproject2023.tistory.com

 

1-2. <감꽃> 시비(향파 이주홍)

상마마을로 빠지는 길로 가지 않고 쭉 내려오면 삼일운동유공비 바로 우측에 이주홍 시비가 있다.

감꽃

말갛게 쓸어 놓은
골목길 위에
감꽃이 떨어졌다.
하나 둘 셋

감꽃은 장난감의
황금 목걸이
실에 꿰어 목에 거는
자랑 목걸이

어디서 자박 자박
소리 나잖니
흔아야가 오기 전에
어서 줍자 얘
향파 이주홍 선생은 해방 공간, 전후의 혼란기에 부산 문학을 굳건히 지켜 일생을 마감하신 자랑스런 향토 문학가이시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정구에서는 부산의 대표적 정서 어린 이 길목에 이주홍 문학비를 세우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1995년 12월 일
강남주 짓고
조영조 쓰고
금정구청장 세움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 1906~1987)은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며 문학수업을 받았는데, 이때 <뱀새끼의 무도>를 시작으로, 다양한 작품을 쓰셨다가, 광복 후 <아름다운 고향>, <유기품>, <섬에서 온 아이>와 같은 풍자성과 재미성을 모두 잡은 아동용 소설을 많이 썼던 문학가다.

실제로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유락여중, 동래원예고, 부산전자공고의 북동쪽 작은 골목에 이주홍 문학관(이용시간 : 10:00~17:00, 입장료 : 무료)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1-3. <숲> 시비(고두동)

이주홍시비를 보고 조금 내려오면 좌측 인도변에 고두동 <숲> 시비가 있다.

숲 -금정산에서-

고두동

내 또한 숲이 되어
하늘을 이고 쉬고싶다


이따금 구름과 서로
천심(天心)을 가져도 보고

된 서리
단풍이 든 양
곱게곱게 타도 보고
황산 고두동 선생은 한국 시조문학의 중흥 발전과 올바른 민족사관의 정립을 위한 두 길을 향해 진력한 민족시인으로서 광복 후의 부산문단을 지키며 부산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향토시인이시다.
이에 금정구에서는 풍광이 수려한 범어로(범어사로)에 고두봉시비를 세워 그의 문학적 위업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1996.12.
오승희 짓고
이규남 쓰고
금정구청장 세움

고두동(高斗東, 1903~1994)은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으며, 1924년 <동아일보>에 시 <월야>, <추천(鞦韆)>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뛰어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인삼이나 담배의 전매를 담당했던 전매소와 전매청의 장으로 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정치계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거나, 부산 향토 문화와 고대사를 연구하는데도 힘썼으며, 시조 부흥에 앞장서 문학을 널리 알리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회문화적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그렇게 한국 시조 문학의 발전과 올바른 민족사관의 정립을 위해 노력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이 세워졌다.

 

1-4. 김대륜 그림비

오륜동공영주차장 도보 입구쪽(화장실쪽)을 살펴보면 김대륜 그림비가 있다.

김대륜 그림비 뒷면
김대륜 선생은 1934년 4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난 화가로서 그의 그림은 주로 민화적 소재를 데포름(déformer)하여 천개시키거나 캔바스(canvas) 위에 원초적인 인간상념의 형상같은 모양들이 소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간결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한 화가로 평가할만 한 인물이다.
선생은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 미술학과 교수로 지내다가 한국미술협회 제19, 20대 부산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부산여자대학의 제7대 학장으로 지역미술계와 교육계에 크게 기여를 하다가 1988년 향년 55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하였다. 계간지 <부산미술> 발간과 <영호남 미술교류전>, <바다미술제>, <문예기금조성초대전> 등은 미술계에 남긴 선생의 촉적이다.
여기 선생의 그림과 더불어 인간 김대륜의 따뜻한 인품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운다.

1997년 12월 31일
금정구청장
김대륜 그림비 정면 기준 우측면
제작 권달술
글씨 박다두
그림출연 고경숙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작품을 만들고 부산에서 떠난 화백 김대륜은 캔버스에 소박하게 우리 민족의 정서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낸 화가였다.

 

1-5. 김종식 그림비

조금 더 내려와 까페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 저 좌측 길 저편에 보면 김종식 그림비가 있다. 차로 지나다닌다면 정말 보지도 못하고 지나갈 정도로 다른 문학비에 비해 멀리 떨어져 있다.

현실과 현실너머의 세계를 소유도 포기도 어려운 이율배반의 와중에서 일흔 평생을 채필과 더불어 명정에 졸듯 스스로의 길을 찾아간 김종식, 치장하는 재간을 마다하고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 스가 그린 수없이 많은 그림에는 좀처럼 석연한 형상이 드러나지 않고 감정은 깊숙히 은폐되어 꿈틀거리는 선들과 파묻히는 색체들에 혼효되었다. 불탑이나 벽담의 돌, 목화의 솜, 산등성이나 구름도 그 형상이 석연치 않은 것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의 흔적 조차도 아닌 것이 다시 보면 바람을 타고 구름과 노니는 천마의 눈방울로 환생하여 일렁이고 있었다. 채필로 휘둘러댄 물감이 생동하듯 뒤엉켜있는 화포와 날씨줄을 무수히 그은 선들이 습묵처럼 여백을 메운 화첩에는 소시에 익힌 서예적 기운이 반영되어 밖으로 치달으려는 초서적 욕망과 안으로 침잠하려는 행서적 명상이 언제나 교차했다. 현실은 비켜 서면서도 언제나 산사를 직접 찾아 끝재는 구상도 추상도 아닌 불가사의한 이승저승의 풍경화를 토해낸 그의 그림에는 물아가 동화하는 의경의 경지가 자리했다. 산사가 비친 호수의 심연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꿈꾸는 불탑의 화신인가. 그의 그림에는 생명의 쇠북소리가 저승에서 들려오는 천마의 울음처럼 배움으로 우리들에게 언제나 메아리치고 있다.

김종식 화백은 단기 4251년(서기 1918년) 동짓달 열사흘 동래군 장전동에서 태어나 동래고보와 일본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하여 모교인 동래고보를 시작으로 개성중, 부산중, 진해중, 김해중 등 경남(부산) 일원의 중등교사(4278~4300)를 거쳐 동아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퇴직했다(4301-4316). 생전의 그는 왕성한 창작력과 쉬임없는 작업으로 제비, 소, 닭울음, 산정, 통도사, 불탑, 천마 등 300여점의 채필 작품과 1,000여권의 묵필 화첩을 남겼다.

4328.4.(1995.04)

1918년에 부산 금정구에서 태어난 김종식 화백은 미술을 배우다가 1945년부터 1967년까지 중등교사를 지냈으며, 1968년부터 1983년까지 동아대 미술과 교수로 있다가 퇴직해 그림을 계속 남기다 1988년이 되어서 세상을 떠났던 부산 화단의 거목으로 서양화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다.

김종식 그림비

손은 그의 영혼을 대신하여 움직였다. 영혼의 황홀한 전파를 손으로 전달받아 그리고 지우고 또 문질렀다. 끈적거리는 색채들을 마치 교향악처럼 울리어 놓을 줄 알았다. 잠자기 전까지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쉬지 않은 까닭이다. 찬란한 손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김종식 화백의 대표작 <부산항>

김종식 화백의 대표작 <부산항>이 그림비에 새겨져 있다. 남장(南藏) 김종식(金鍾植, 1918~1988)은 부산 동래구 장전동(현 부산 금정구 장전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나 의사가 되길 바랐던 한의사 아버지 탓에 결국 일본 제국미술학교(1929~1947, 현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하며 아버지에게 예술계 등단을 허락받게 된다. 이후 교직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 동아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19회의 개인전을 열고, 수많은 독자적인 화풍의 작품을 남겼다. 금정구청에서는 그런 그를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2. 범리단길

범어사에서 내려와 까페가 많은 하마마을. 이곳에 범리단길이라고 적힌 의자와 안내판이 있다. 이 범리단길은 청룡로 큰 길(범어사어귀 삼거리~금샘로 접속 구간)과 범어사와 직접 연결되는 범어사로를 아우르는 범어사 일대를 구경할 수 있는 길이다. 

자세한 지도는 이 안내판을 참고하자.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31)을, 범어사 등나무 군락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27)을 참고바란다.

이렇게 다양한 문학비가 세워진 범어사로의 끝에는 이렇게 '범어로'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범어사 드라이브를 간다면 한 번 쯤 카페에 들렀다가 이런 문학비를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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