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사적공원의 동쪽의 산봉우리에 부산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올라가는 길 이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부산 3.1독립운동기념탑 1919년에 동래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일본에 맞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96년 3월 1일 공사를 마쳤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화산처럼 타오르던 만세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동래구 명장2동 산 93-10번지 일대의 동래사적공원 안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는 마안산 정상 동쪽의 산봉우리에 있다. 이 탑은 부지 2,310m2에 높이 21.6m이며,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동상의 높이는 6m이다. 이 기념탑의 모서리 부분에는 기념탑 취지문,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과 독립운동의 간략한 역사 등이 새겨져 있다. |
조금 더 올라가보면 정식 안내판이 나온다.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 관리번호 : 40-1-19 관리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 93-10번지 이 기념탑은 1919년 부산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착공, 1996년 3월 1일 완공하였으며, 만세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마안산에 세워졌다. 부산광역시에서는 3.1 독립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나라사랑을 드높인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 선열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부산지역의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 이 탑은 부지 2,310m2에 높이 21.6m, 좌대는 842m2이며,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높이 6m의 원추형 군상에는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이, 탑 기둥에는 건립취지문, 독립운동 약사(간략한 역사)가 새겨져 있다. |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이다. 기념탑 자체도 높지만, 이 땅에 조선백성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그 뜻도 높았으리라고 본다.
기념탑의 우측에는 이렇게 현충시설임을 알리는 태극기도 게양되어 있다.
앞면 | 뒷면 |
부산 3.1 독립만세운동가 구수암 권철암 김귀룡 김기삼 김달수 김도엽 김반수 김봉추 김성조 김애련 김영규 김영서 김옥겸 김용구 김윤희 김인호 김한기 박두턴 박성봉 박영준 박영환 박정국 신두성 심순의 양수근 양태용 엄병영 엄진영 오기원 윤경봉 윤삼동 윤장수 윤정은 이갑이 이상덕 이수열 임명조 임봉래 정성언 정호종 차상명 추규영 허영조 허영호 허치옥 허희중 김윤길 박성해 최익수 여기 천지를 뒤흔드는 '대한독립 만세' 이 함성은 침략자 일제에 항거한 우리 겨레의 피맺힌 절규였다. 민족자존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선언이었다. 님들은 오직 한길 나라사랑에 온 신명을 바쳐 위대한 조국광복을 이룩하였나니 올곧은 그 정신 그 뜻 고이 받들어 여기 새겼사오니 영광스러운 대한의 이름으로 길이 빛나소서! 영원하소서! 솔뫼 최해군 짓다 |
부산 3.1독립만세운동에 수많은 분들이 참여하였으나 여기에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분들의 이름을 새겨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2008년 2월 1일 국가보훈처 |
기념탑 가운데에 독립운동을 하는 부산 민중들의 모습이 새겨진 6m의 원추형 군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기미 독립 선언서(1919)>가 적힌 비도 있다.
기미 독립 선언서 공약 3장 하나、금일 오인(吾人, 우리) 의 차거(此擧,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尊榮, 지위가 높고 영화로움)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 도망쳐 달아남)하지 말라. 하나、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하나、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비문을) 이영상(李英相) 쓰다 |
이 비석의 뒤쪽에서 찍은 사진.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고, 눈을 감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즈막히 건넸다.
원뿔형 기념물 위 천장에는 이렇게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기념탑의 앞쪽에서 좌측벽에는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한 취지를 밝힌 글이 새겨져 있다.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취지문 여기 이 탑은 내고장 내겨레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깨우쳐 주메 있다고 하겠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 총칼 앞에 나라가 넘어지고 10여 성상(星霜, 세월)이 지나도 끈질긴 민족의 저항은 멎지 않았으니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었으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사의 새 흐름을 타고 온 민족은 가슴에 한을 품고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월 1일 드디어 일어서니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는 서울 하늘에 메아리치고 태극기는 온 거리를 뒤덮었으며 의거의 소식은 이내 백두 대간을 타고 남북으로 내리치달았다. 10일에 이르러 만세 운동은 부산 전역으로 퍼져갔고 항쟁은 고장을 옮겨가며 이어졌다. "일본은 물러가라, 대한 독립 만세" 피와 먹으로 얼룩진 깃발을 앞세우고 민중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거머쥐고 만세를 외쳤다. 총칼 앞에 죽음을 무릅쓴 민중의 분노는 성난 파도와 같았으며, 산마루의 봉화는 삼천리를 누볐고 만세꾼은 동서로 줄달음쳐 항서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져 독립의 의지는 불꽃처럼 타오르니, 이 어찌 한겨례의 승리가 아니랴. 총칼과 맨주먹의 싸움이 어찌 단판에 이길 수 있으랴만, 일제는 마침내 통치 방법을 바꾸었고, 겨레는 이로써 독립의 기틀을 마련 했나니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 우리는 이 탑 앞에서 자주독립과 조국번영의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1996년 3월 1일 박지홍 짓고 배재식 쓰다 |
기념탑의 앞쪽에서 우측벽에는 부산 3.1 독립운동의 간략한 역사가 적혀져 있다. 서울에서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3.1운동은 3월 11일 부산으로 전해졌고, 이 독립운동은 5월까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부산 3.1 독립운동 약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가 우리의 자주독립을 온 천하에 선언하자 부산 각처에서도 격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1일 밤 일신여학교 학생이 좌천동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 의거는 부산지방 3.1독립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3월 13일 동래 장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며, 3월 18일과 19일 동래 시장의 시위에는 범어사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 구포 장날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수많은 군중의 대규모 집회와 경찰 파출소 습격이 있었고, 4월 5일 기장읍 장날 1천여명이 궐기하였으며 잇달아 장안면과 일광면 정관면에서도 농민과 장꾼이 합세한 가두 시위가 있었다. 4월 10일 명지의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이 밖에도 부산상업학교, 부산진보통학교, 영도옥성학교 학생들의 구국거사와 의열청년들의 열차투석, 전차운전자들과 철도직공들의 항일동맹파업 및 시민들의 항쟁이 5월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산 각 지역의 독립투쟁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2백명이 넘었고, 실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백 50명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민족투지는 조국독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6년 3월 1일 이태길, 최해군 짓고 조영조 쓴다. |
조형물 사진을 끝으로 오늘 탐방을 마치겠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우연찮게 오늘 삼일절에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 답사기를 쓰게 되었는데,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삼일절을 다시 기억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부산에서도 많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섰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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