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0/1183/1185/1190/1192~1333)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 1147~1199)가 창설한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이며, 봉건적 유대에 기반한 무사들이 보좌한 일본 역사상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부였다. 이 시대를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라고 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막부를 섬긴 판도우 무사(坂東武士)인 고케닌(御家人, 어가인)의 권력 투쟁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고, 그 이후 호조씨(北条氏)에 의한 싯켄(執権, 집권)으로 호조 요시토키(北条 義時, 1163~1224)의 직계 혈통이 토쿠슈(得宗, 득종)가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으며, 헤이안쿄의 조정을 군사적 보호 아래 두어 실질적 경찰권, 군사권을 장악했다. 이 무가 정권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로 계승되었다.
여기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황통(皇統)의 군사귀족이었으며, '무위(武威)'는 조정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체제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막부를 건립한다. 이는 곧 명목적으로는 막부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왕조국가인 조정을 지키는 공권력자라는 의미가 된다.
1-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1-1-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과정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1180년 12월 가마쿠라의 오오쿠라향(大倉郷)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관저였던 오오쿠라고쇼(大倉御所, 大蔵御所, 오오쿠라 어소)가 설치되었고, 또한 막부 통치기구의 원형이라고 하는사무라이도코로(侍所, 시소)가 설치되어 무가 정권의 실제 모습이 형성되었다.
이후 1183년 조정은 <주에이 2년 10월 선지(寿永二年十月宣旨)>를 통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아즈마노쿠니(東国)의 장원과 공령으로부터 관물(官物)과 연공(年貢) 납입을 보증함과 동시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한 아즈마노쿠니 지배권을 공인(합법적 인정)했다.
1184년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쿠몬죠(公文所, 공문소)와 몬츄죠(問注所, 문주소)를 설치해, 행정과 재판 기구를 성립하게 된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로 타이라씨(平氏)를 멸망시키고, 같은 해 조정은 분지의 칙령(文治の勅許)을 내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수여된 쿠니들에 지방 치안 경찰관인 슈고(守護, 수호)직과 지방 조세 행정관인 지토우(地頭, 지두)직 설치와 임명과 면직을 허가했다.
그리고 119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권대납언(権大納言)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으로 임명되어, 공경(公卿, 국정을 맡는 직위를 받은 고위관직)에 참석해 장원영주의 가정기관(家政機関, 가산을 관리하는 조직)인 쿠몬죠(公文所, 공문소, 공문(公文)관리 조직) 개설권을 얻음으로써 이른바 통치기구로서의 합법성을 띄게 된다.
1192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덴노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된다. 그리하여 그가 다스리던 권력은 명실상부한 무가정권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슈고(守護) 설치로 가마쿠라 막부는 여러 쿠니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처음엔 막부들은 한정적인 지배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점차 범위를 확대했고, 결국 죠큐의 난(承久の乱, 1221)과 겐코우(元寇, 1274,1281)를 거쳐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2. 가마쿠라 막부
1-2-1. 호조씨의 대두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9년 1월 갑자기 사망한다.
그 뒤를 이어 가마쿠라도노(鎌倉殿, 카마쿠라 막부의 동량)이 된 자는 그의 아들이자 당시 18세였던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 頼家, 1182~1204)였다. 그러나 막부의 유력 지배층은 젊은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에게 정무를 맡기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유력한 고케닌이 그를 대신에 재판과 정무를 집행하는 13인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 1199~1200)라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이 합의제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막 즉위한 가마쿠라도노의 외척이었던 호조씨(北条氏)였는데, 이 중 호조 토키마사(北条 時政, 1138~1215)와 그의 아들 호조 요시토키(北条 義時, 1163~1224)는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변(梶原景時の変, 1199~1200)이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 能員の変, 1203)과 같은 정변을 통해 다른 유력 가문을 차례차례 멸족시켜 나갔다.
1203년, 큰 병을 앓은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외할아버지였던 호조 토키마사의 손에 의해 이즈(伊豆) 지방의 슈젠지(修禅寺, 수선사)로 유폐되고,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 実朝, 1192~1219)가 3대 가마쿠라 도노와 쇼군(将軍)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듬해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사망하게 되었는데, 호조 토키마사를 중심으로 한 호조씨의 손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호조 토키마사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보좌하기 위해 싯켄(執権, 집권)이라는 자리에 올라 정치의 실권을 쥐게 된다. 1205년, 호조 토키마사는 그의 사위인 히라가 토모마사(平賀 朝雅, 1182~1205)를 쇼군으로 만들려고 모의해, 그와 대립하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 重忠, 1164~1205)를 살해하고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위시키려 했다(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畠山重忠の乱, 1205.07)). 그러나 호조 토키마사의 아들 호조 요시토키와 딸 호조 마사코는 이에 반발해 다른 유력 가문과 연대해 아버지 호조 토키마사를 은퇴시키고 히라가 토모마사를 말살시켰다(마사씨 사건(牧氏事件, 1205.07))
그 이후 호조 요시토키가 싯켄이 되어, 호조씨 권력 확립에 힘썼는데, 사무라이도코로 벳토우(侍所別当)였던 와다 요시모리(和田 義盛, 1147~1213)가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호조 요시토키는 계략을 꾸며 1213년 와다씨 일족을 멸족시켜버린다(와다 합전(和田合戦, 1213.05)). 이처럼 무력 분쟁이 끊이지 않는 막부 내 상황은 1219년 1월 당시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이어졌다... 이 암살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가 단절되자 막부는 곤혹스러워해서 조정에 친왕(親王) 쇼군(将軍)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치천의 군(治天の君) 고토바 상황(1180~1239)은 이를 거부해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먼 친척 중 섭관가(摂関家)의 후지와라노 요리츠네(藤原 頼経, 1218~1256)를 4대 가마쿠라도노로 영입했다. 그리하여 막부의 실권은 싯켄이었던 호조씨가 장악하게 된다.
1-2-2. 조큐의 난(承久の乱, 1221.06)
고토바 상황은 치천의 군으로써 전제정치를 지향했는데, 당연히 막부의 존재를 역겹게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1219년 3대 가마쿠라도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일어난 막부의 혼란과 약화를 본 고토바 상황은 정권을 조정으로 되돌리려 했다. 이후 1221년 5월 고토바 상황은 곧 호조 요시토키가 토벌되고 반토우무사들이 조정으로 귀순할 것을 예상하고 호조 요시토키 토벌 원선(院宣, 상황이 내린 선지)을 내렸다. 그러나 막부측은 호조 마사코를 중심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그의 은혜를 호소하며 고토바 상황을 모시던 몇몇 무사들까지도 아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수세가 적었던 조정군을 막부군이 무찔러 버리고 헤이안쿄를 점령한다(조큐의 난).
막부측의 주도로 전후 처리가 진행되어 주모자였던 고토바 상황, 그리고 그의 계보에 있던 상황이나 황자들은 유배된다. 당시 덴노였던 주쿄 덴노(仲恭天皇, 1218~1234)도 퇴위했고, 조정측의 귀족과 무사들도 참형을 당했다. 당시 사람들은 치천의 군을 비롯한 조정 측의 상황, 덴노, 많은 신하들이 처벌받는 사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그 당시 사회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정의 위신은 글자 그대로 땅에 떨어져 버렸고, 막부는 조정 감시를 위해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로쿠하라 탐제)를 두어 조정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고케닌들의 서국 지역 대거 진출을 허가했다. 조큐의 난 이후 조정은 차기 덴노를 누구로 할 지 막부에 자문했는데, 이후에도 조정은 치천(治天)이나 상황을 결정할 때 반드시 막부의 뜻을 확인해야 했으며, 이는 막부와 조정의 입장이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1-2-3. 싯켄정치(執権政治)의 확립
1224년에는 호조 요시토키가, 1225년에는 호조 마사코와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 広元, 1148~1225) 등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 세대가 사망하고, 호조 요시토키의 아들 호조 야스토키(北条 泰時, 1183~1242)가 싯켄이 된다. 호조 야스토키는 세대 교체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숙부였던 호조 토키후사(北条 時房, 1175~1240)를 싯켄의 보좌역이라고 할 수 있는 렌쇼(連署, 연서)와 함께 정치 의사 결정 합의 기관인 효죠슈(評定衆, 평정중)을 설치해 집단 지도 체제를 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도노(쇼군)과 개별 신하의 주종관계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호조씨도 가마쿠라도노의 신하 중 한 무리에 불과했고, 수많은 신하 중 1인자라 하더라도 주군은 아니었다.
조큐의 난(1221.06) 이후 급증한 소송사건을 공평하게 처리하기 위해 호조 야스토키는 명확한 재판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어성패식목)>이라 불리는 법전(무가법)으로,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에서도 이 법령을 원칙적으로 계승할 정도로평이하고 실제적인 법령으로 평가된다. 또한 호조 야스토키는 식목(式目, 통치 규범 법률) 제정하는데 있어 조정의 사법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이러한 호조 야스토키의 여러 정책은 싯켄정치의 확립으로 파악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가마쿠라도노의 개인적 자질에 의존하는 바가 컸고, 그 조직도 가마쿠라도노의 가정기관을 발전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호조 야스토키가 확립한 집단 지도 체제와 명시된 법령에 의한 사법 체제는 개인적 자질과 같은 불안정한 요소에 좌우되지 않고 안정된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호조 야스토키의 손자인 호조 토키요리(北条 時頼, 1227~1263)는 호조 야스토키의 싯켄정치를 계승해 나갔다. 호조 토키요리는 사법 제도의 내실화에 주력해 1249년 재판의 공평화를 위해 히키츠케슈(引付衆, 인부중)를 설치했다.
그러는 한편 싯켄 권력 강화에도 힘썼다. 1246년 호조 도키요리 제거를 기도한 전 장군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와 호조 미츠토키(北条 光時, ?~?) 일파를 막부에서 추방하려고 하고(미야 소동(宮騒動, 1246)), 1247년에는 유력 고케닌인 미우라 야스무라(三浦 泰村, ?~1247)의 일족을 토벌했다(호우치 합전(宝治合戦, 1247). 1252년 막부 모반에 가담했던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츠구(藤原 頼嗣, 1239~1256)을 폐위시키고 대신 무네타카 친왕(宗尊親王, 1242~1274)를 새로운 쇼군으로 맞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친왕 쇼군(親王将軍) 혹은 미야 쇼군(宮将軍)을 대대로 맞아들이면서 친왕 쇼군은 막부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그리하여 친왕 쇼군 밑에서 전제를 강화해 나간 호조씨는 권력을 호조씨의 종가로 당시 토쿠슈(得宗, 득종)에 집중시켜 나갔다. 호조 토키요리는 병 때문에 싯켄직을 호조 나가토키(北条 長時, 1230~1264)에게 물려줬으나, 실권은 계속 잡고 있었다. 이에 따른 정치의 실권은 싯켄의 지위와 괴리되어 가기 시작한다. 호조씨의 종가를 당시 토쿠슈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 체제를 토쿠슈 전제(得宗専制)라고 부른다.
1-2-4. 겐코우(元寇, 원구, 1274, 1281)
겐코우(元寇, 원구) | |
분에이의 역( 文永の役, 1274) | 코안의 역(弘安の役, 1281) |
분에이(文永) |
1264(분에이 원년)~1275(분에이 12년) |
1268년 1월에 고려의 사절단이 다자이후(大宰府, 대재부)에 도래했다. 다자이후의 진서봉행(鎮西奉行)이었던 쇼니 스케요시(少弐 資能, 1198~1281)는 <대몽고국황제봉서(大蒙古国皇帝奉書)>와 <고려왕서장(高麗国王書状)> 등의 3통을 받아 가마쿠라 막부로 전달했다. 이후 호조 토키요리 사후 토쿠슈(得宗)의 지위를 이은 그의 아들 호조 토키무네(北条 時宗, 1251~1284)가 1268년 3월 싯켄에 막 취임했다. 원래 외교는 조정이 담당하는 것이었지만, 조정은 이 사절에 대한 답을 막부에 일임해버렸고, 막부는 이에 대한 응답하지 않겠다고 결정함과 동시에 서국 지역의 방어를 준비했다.
이후 1269년과 71년에도 몽골로부터 국서를 받았다. 이 땐 조정에서 답서를 줘야하지 않느냐고 막부에 제안했는데, 막부는 당초 방침대로 그 국서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1271년 9월,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三別抄)가 스스로를 고려왕조라고 칭하며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신을 일본에 보냈다. 일본 조정은 이미 고려에서 가져온 국서에 대해 이번에 가져온 고려왕조를 자처하는 편지가 몽골 제국을 비난하고, 진도(珍島)로의 천도를 알리고, 나아가 몽골 제국과 맞서기 위해 수만 명의 군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기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그러나 이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일본측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몽골 제국이 일본을 침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림짐작했을 가능성은 높다.
1271년 12월, 중국 대륙에서는 쿠빌라이 칸에 의해 대원(大元)이 건국되었다. 새롭게 건국되었지만 대원(구 몽골제국)은 일본국의 답서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1274년 10월, 대원은 3만여 명에 달하는 한군(漢軍)과 고려군과 함께 규슈의 하카타에 상륙한다. 이후 히라도(平戶)·다카시마(鷹島)의 마츠우라(松浦)를 전멸시켰으나, 중국쪽의 강남군이 늦게 도착했고, 지금은 카미카제(神風)라고 부르는 계속된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거기다 아카사카 전투(赤坂の戦い)와 토리카이가타 전투(鳥飼潟の戦い) 등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원군(元軍)은 야간에 철수하고 귀환한다. 그러나 한반도로 돌아가던 중, 계속되던 큰 폭풍우를 맞아 많은 배들이 고향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수몰했다고 전한다(분에이의 역(文永の役, 1274)).
당시 막부는 조정과 일체되어 일본국을 지키는데 임하기로 하고, 서국의 공고를 재강화함과 동시에 그 동안 막부의 지배가 미치지 못한 조정의 지배지와 본소일원지(本所一円地, 혼죠(本所)에서 하나의 영지만 가지고 있는 영주의 땅)로부터 인원과 군량 조달을 인정받았다. 이는 막부의 권력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이러던 중에도 막부는 반대로 대륙을 침공할 계획(제1차 고려 정벌 계획)을 세웠지만 도중에 좌절된다.
이 첫번째 분에이의 역을 통해 신(神)의 위력에 의해 부는 강한 바람(風)이 일본을 지켜준다는 카미카제(神風)라는 신화가 등장하게 된다.
켄지(建治) |
1275(켄지 원년)~1278(켄지 4년) |
코우안(弘安) |
1278(코우안 원년)~1288(코우안 11년) |
대원은 1281년 다시 15만 명에 달하는 몽골군, 한군, 고려군을 보내 규슈 북부를 중심으로 다시 일본을 침공했다. 이 때도 시카노시마 전투(志賀島の戦い), 이키 섬 전투(壱岐島の戦い), 다카시마노오키 해전(鷹島沖海戦) 등의 2개월 가까이에 걸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침공이 정체되었는데, 이 때 또 한 번 태풍이 불어닥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여기에 미쿠리 해상합전(御厨海上合戦)이나 다카시마 소탕전(鷹島掃蕩戦)과 같은 일본군의 총공격을 받아 원군은 궤멸해버렸다(코안의 역(弘安の役, 1281)). 분에이의 역 이후 때처럼 막부는 대륙으로 출병해 반격할 계획을 다시 세웠으나 이 계획(제2차 고려 정벌 계획) 또한 실행되지 않았다.
그동안 호조 토키마사는 비상 사태에 대한 신속한 대처를 명목으로 그때 그때 관료들(특히 미우치비토(御内人))과 의논해 정책을 결정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미우치비토(御内人, 가마쿠라 시대에 싯켄 호조씨의 카토쿠(家督)나 토쿠슈)의 우두머리인 내관령(内管領)이 점차 권력이 커져갔고, 코안(弘安) 때(1278~1288)에는 내관령 타이라노 요리츠나(平 頼綱, ?~1293)와 유력한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安達 泰盛, 1231~1285)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다치 야스모리는 호조 토키마사의 이해도 얻어 막부의 경제 기반 확충을 도모하면서도 고케닌의 지위를 보장하는 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조 토키마사가 1284년 급사하자 이듬해(1285년), 타이라노 요리츠나는 아다치 야스모리를 기습해 살해하고 야스모리파(泰盛派)의 고케닌들을 토벌했다(시모츠키 소동(霜月騒動)). 이 사건으로 토쿠슈 전제가 완성되게 된다. 한편, 원구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 정권의 기반 또한 균열되기 시작한다.
1-2-5. 토쿠슈 전세의 전성과 쇠퇴(13~14세기)
1284년에 호조 토키마사를 이어 집권한 호조 사다토키(北条 貞時, 1272~1311)를 타이라노 요리츠나가 보좌해 토쿠슈 전제 강화에 힘썼다.
쇼오(正応) | 에이닌(永仁) |
1288(쇼오 원년)~1293(쇼오 6년) | 1293(에이닌 원년)~1299(에이닌 7년) |
원구(元寇) 방어에 힘쓴 규슈고케닌을 위한 보상과 기타 분쟁에 관한 소송을 판정하기 위해 아다치 야스모리는 규슈에 합의제 봉행(奉行)인 친제이 담의소(鎮西談議所)를 두고 있었지만, 타이라노 요리츠나는 그 대신에 토쿠슈파(得宗派)로 확고히 다진 친제이 단다이(鎮西探題, 친제이 탐제)를 설치했다. 요리츠나 정권은 이 기관을 통해 서국의 장원, 공령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반면 또 다른 원구가 쳐들어올 가능성을 근거로 고케닌들에 대한 보상 지급은 근소하게 그쳤다.
1293년, 성인이 된 호조 사다토키는 타이라노 요리츠나 일족을 토벌해버렸다(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 1293.05)). 호조 사다토키는 정치의 실권을 내관령에서 되찾아 실질적인 토쿠슈 전세를 한층 강화해 나갔다. 우선 요리츠나 정권 하에서 정체되었던 소송들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합의제 히키츠케슈(引付衆, 인부중)를 폐지하고, 판결을 모두 호조 사다토키가 내리기로 했다. 당초 고케닌들은 소송 진행을 환영했지만, 곧 독재적 판결에 대한 반발이 커져갔다.
그리고 1297년, 큰 혜성이 나타나자 세상은 불안감에 휩싸였고, 당시 덕정관념(徳政観念, 덕으로 어질고 바르게 정치해야 한다는 관념)에 따라 호조 사다토키는 재물을 원래 주인에게 무상으로 귀속시키는 영인 덕정령(永仁の徳政令)을 반포했다. 이 덕정령은 당시 보급되던 화폐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 사회에 큰 동요를 가져왔다... 뭔가 좀 잘해보려 한건데 결과가 나빴다...
이후 싯켄직은 호조 사다토키를 대신해 호조씨 지류의 4명이 차례로 계승했지만, 호조 사다토키는 토쿠슈로서 막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사다토키의 때에는 호조의 한 분파의 지행국이 현저히 증가했다. 그런 한편, 일반적인 고케닌층에서는 이국경고번역(異国警固番役, 국경에서의 군역 중 하나)과 나가토 경고번역(長門警固番役, 나가토노쿠니) 등의 새로운 부담을 안고 있으며, 화폐경제의 보급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분할 상속에 의한 소령(所領, 영지)의 세분화 등이 일어나고 있어 급속히 계층 분화가 진행되어 갔다. 그 중에는 소령(所領)을 늘리는 고케닌도 있었지만, 몰락하는 경향이 큰 고케닌들이 늘어나 무족고케닌(無足御家人, 소령(所領)을 잃은 고케닌)도 크게 증가했다. 한편, 그들로부터 소령을 매수, 취득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개중 비고케닌(非御家人)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러한 무족고케닌과 힘을 기른 비고케닌은 반더러 불법적인 일에 손대는 경우도 있었기에 사회 변동을 한층 진전시켰다.
카겐(嘉元) |
1303(카겐 원년)~1306(카겐 4년) |
그러던 중 1305년, 호조 사다토키는 호조씨 서가(庶家, 비적자 가문) 중 중직에 있는 신하인 렌쇼(連署) 호조 토키무라(北条 時村, 1242~1305)를 주살하고 토쿠슈가(得宗家)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려 했으나 호조씨의 한 가문의 저항을 받아 실패했다(카겐의 난(嘉元の乱)). 카겐의 난 이후 호조 사다토키는 술에 빠져 정무를 던져 버리고, 호조씨 서가나 미우치비토(御内人) 등에 의한 요리아이슈(寄合衆, 기합중)이 막부를 주도하면서 토쿠슈의 지위 또한 쇼군과 같은 형식적인 지위가 되어갔다.
오초(応長) | 쇼와(正和) |
1311(오초 원년)~1312(오초 2년) | 1312(쇼와 원년)~1317(쇼와 6년) |
1311년 12월, 호조 사다토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호조 타카토키(北条 高時, 1304~1333)가 호조씨 토쿠슈가의 뒤를 이었다. 호조 사다토키의 유언에 따라 9세였던 호조 타카토기의 보좌역으로 타이라노 요리츠나의 일족인 나가사키 엔키(長崎 円喜, ?~1333)와 아다치 야스모리의 일족의 생존자인 아다치 토키아키(安達 時顕, ?~1333)가 취임했다.
1316년 7월, 호조 타카토키는 14세에 싯켄이 되어, 전년부터 렌쇼였던 호조 사다아키(北条 貞顕, 1278~1333)가 그의 보좌를 맡았다.
1-2-5. 고다이고 덴노의 도막운동(倒幕運動)
한편 호조 토키무네가 조정에 개입하면서 분열된 황실의 지묘인통(持明院統)과 다이카쿠지통(大覚寺統)은 다시 다이카쿠지통 내에서 적류(본가의 혈통)였던 쿠니요시 친왕(邦良親王, 1300~1326)파와 또 하나의 고다이고 덴노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정의 각 분파는 이러한 분쟁의 중재를 막부에 요구했기 때문에 막부 또한 조정 내의 분쟁에 같이 휘말리게 되었다.
1318년, 고다이고 덴노가 즉위하고, 1321년 12월, 고우다 상황으로부터 정무를 이양받아 친정을 시작한다.
1324년 10월, 고다이고 덴노가 토막 계획(倒幕計画, 막부 토벌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의심되어 그 관계자로서 토키 요리카네(土岐 頼兼, ?~1324)의 아들 토키 요리아리(土岐 頼有, ?~1324)와 타지미 쿠니나가(多治見 国長, 1289~1324)가 토벌되었다(쇼츄의 변(正中の変, 1324)). 또한 당시 덴노의 심복이었던 쿠게(公家, 공가) 히노 스케토모(日野 資朝, 1290~1332)와 히노 토시모토(日野 俊基, ?~1332)를 체포했다. 공식 판결에서는 고다이고 덴노와 히노 토시모토는 누명을 쓴 것으로 판결났지만,
히노 스케토모는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사도가시마(佐渡島)로 귀양보냈다. 사실 덴노는 토막(倒幕, 막부 토벌)을 기도하고 있었지만, 막부가 그에 대한 처분에 소극적이어서 처벌받지 않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후 1331년, 덴노의 지위와 왕조에 위를기 느낀 고다이고 덴노는 토막을 기도했다. 그러나 이는 요시다 사다후사(吉田 定房, 1274~1338)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었고, 결국 고다이고 덴노는 오키노시마(隠岐島)로 유배되었고 곧 지묘인계 덴노를 즉위시킨다(겐코의 난(元弘の乱, 1331.06~1331.07)). 그러나 이를 계기로 막부와 토쿠슈(得宗)에 불만을 가진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 ?~1336)와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 則村, 1277~1350) 등 각지의 지배층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무사들이 각지에서 반막부 병사를 모으게 된다.
1333년 4월, 반막부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헤이안쿄에서 파견된 유력 고케닌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高氏, 1305~1358)는 호조 타카이에(北条 高家, ?~1333)가 코가나와테 전투(久我畷の戦い)에서 전사한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고다이고 덴노 측에 붙었고, 결국 5월에는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를 공격해 그 직책 자체를 없애버렸다.
1-2-6.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로쿠하라 단다이가 함락되면서 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 1301~1338)가 코즈케노쿠니(上野国)에서 군사를 일으켜 150기였던 군세는 간토 고케닌(関東御家人)의 지지를 얻어 며칠 지나지 않아 하나의 군대가 되었다. 이에 막부는 호조 사다쿠니(北条 貞国, ?~1333), 나가사키 타카시게(長崎 高重, ?~1333) 등을 장으로 한 토벌군을 조직해 대군으로써 이를 막게 했으나, 코테사시가하라 전투(小手指原の戦い, 1333.06), 쿠메가와 전투(久米川の戦い, 1333.06)에서 대패하고 만다. 호조 야스이에(北条 泰家, ?~?)의 원군이 가세한 후에도 부바이가와라 전투(分倍河原の戦い, 1333.06), 세키도 전투(関戸の戦い, 1333.06)에서도 패배해 막부군은 가마쿠라로 패주하고, 이를 닛타군이 쫓아갔다.
1333년 6월 말, 닛타 요시사다의 대군은 가마쿠라를 공격해 막부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날 궁지에 몰린 싯켄 호조 모리토키(北条 守時, 1295~1333)가 자결하기도 했으나, 지형을 이용한 막부군의 거센 저항에 닛타군 또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며칠 뒤, 닛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군대가 썰물을 이용해 이나무라가사키(稲村ヶ崎)를 돌파해 가마쿠라 시내로 침범했다. 양측은 시 안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그 격전을 벌이는 동안 7월 초까지, 호조 사다나오(北条 貞直, ~1333), 호조 사다유키(北条 貞将, 1302~1333), 호조 모토토키(北条 基時, 1286~1333)와 같은 유력 무장이 잇따라 전사하거나 자결한다. 이제 막부의 명이 다다른 것을 느꼈는지,
호조 타카토키, 호조 사다아키, 나가사키 엔키, 그리고 아다치 토키아키 일족과 가신 283명은 보다이지(菩提寺)였던 토우쇼우지(東勝寺)에 모여 절에 불을 질러 자멸했다(토우쇼우지 합전(東勝寺合戦, 1333.07)). 이 날 가마쿠라 막부의 모리쿠니 친왕(守邦親王, 1301~1333)은 쇼군직에서 물러나 출가했다. 이 모든 가마쿠라에서 일어난 전투들을 가마쿠라 전투(鎌倉の戦い)라고 부른다.
이후 친제이 단다이(鎮西探題)도 반막부 세력으로 돌아섰던 쇼니 사다츠네(少弐貞経, 1272~1336), 오오토모 사다무네(大友 貞宗, ?~1334), 시마즈 사다히사(島津 貞久, 1269~1363) 등에 의해 함락되며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지배 기관도 사라지게 된다.
1-3. 가마쿠라 문화(鎌倉文化)
가마쿠라 문화(鎌倉文化)는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12세기 말부터 멸망한 14세기 초반까지에 걸친 일본의 문화로, 왕조 국가로부터의 자립을 지향하는 본격적인 무가 정권이 아즈마노쿠니에 열렸던 시대이며, 각 방면에서 새로운 문화적인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정기 문화(院政期文化)는 수도의 다양한 도시민과 기나이 주변의 다양한 직능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헤이안'이라는 독자적인 문화의 중심이 생겼다. 한편, 서민과 무사가 등장하며 기존의 왕조 국가의 틀을 훨씬 넘는 다양한 문화적인 것들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겐페이 합전(1180~1185)을 거치면서 동쪽에 있던 사가미노쿠니(相模国)의 가마쿠라(鎌倉, 현재의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본격적인 무가정권이 성립한 가마쿠라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차츰 무가가 공가(公家, 귀족)를 압도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문화적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에도 전통문화의 주역은 여전히 헤이안쿄와 그 근방에 거주하던 공가(公家)나 난토(南都,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 지역), 호쿠레이(北嶺, 교토의 엔랴쿠지(延暦寺) 지역)을 비롯한 불교 사찰이었으며, 이들은 동시에 봉건 영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의 무사들도 교토 오오반야쿠(京都大番役, 교토의 황거와 사원 경비직) 등으로 상경했을 때 이런 전통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다시 각자의 고장으로 돌아갈 때 이러한 문화를 고스란히 가져가게 된다. 한편, 유력 무사의 도움을 기대하며 수도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귀족이나 승려도 나타나 이들이 귀족문화의 전파자가 된다.
그리하여 가마쿠라를 비롯해 슈고(守護)의 관청이 있는 코쿠가(国衙) 주변이나 유력무사의 거주지 혹은 교통의 요지 등에는 이런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무사와 서민의 기풍을 반영한 소박하고 꾸밈없이 진지하면서도 힘찬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무사와 농민이 전면에 등장하는 전환기 속에서 등장한 문화였다.
이전부터 시작된 민간 상호간의 일송무역(日宋貿易, 일본-송 간의 무역)을 통해 선종(禅宗)을 비롯한 대륙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전파된다. 물론, 중국 대륙에서 금(金)과 원(元)의 남하로 송이 멸망할 쯤, 정복 왕조의 푸대접을 꺼려 일본으로 망명한 남송의 유민들이나 승려들도 새로운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송풍(宋風)이라고 부르던 문화에 있어서는 '동국국가(東国国家, 아츠마노쿠니 지역에 독립적인 국가적 세력을 구축하는 것)'를 지향한 가마쿠라 막부는 이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막부가 선종, 주자학과 같은 송풍 문화를 보호해주기도 했다.
원구(1274, 1281) 이후에도 원과의 민간 상호적 왕래는 끊이지 않았고, 켄쵸지(建長寺)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막부의 명을 받고 1325년 일본 상인이 원에 파견한 켄쵸지부네(建長寺船)를 비롯한 민간 상선에는 많은 유학승들이 편승해 새로운 중국 문화 이입에 힘썼다.
이 시기에는 가론(歌論), 사론(史論)과 같은 각종 논설이 등장했으며, 민족종교가 이론화되고, 철학적 사색을 표현한 수필 문예(随筆文芸)와 주자학(朱子学)의 전래와 같이 일련의 이론적 저술의 출현과 확대라는 큰 특징도 가지고 있다. 한편, 불교도 융성했는데, 이 불교는 당시 서민을 포함한 넓은 계층의 내면적 요구에 부응하는 종교로 변화하게 된다.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 > 어원과 표로 보는 세계사, 세계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사 - 겐코의 난부터 겐무의 난까지 (0) | 2022.12.31 |
---|---|
일본사 - 남북조시대 (0) | 2022.12.31 |
일본사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0) | 2022.12.29 |
일본사 - 헤이안 시대 (0) | 2022.12.25 |
일본사 - 나라 시대 (0) | 2022.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