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북조시대
일본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는 겐무 신정(建武の新政) 붕괴에 따라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 1305~1358)가 헤이안쿄에서 새롭게 코묘 덴노(光明天皇, 1322~1380)를 옹립한 것에 맞서 헤이안쿄를 탈출한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1288~1339)가 요시노 행궁(吉野行宮)으로 천도한 1337년 1월부터, 남조 제4대 덴노 고카메야마 덴노(後亀山天皇, 1350~1424)가 북조 제6대 덴노 고코마츠 덴노(後小松天皇, 1377~1433)에게 양위하는 모습으로 두 왕조가 합쳐진 1392년 11월까지를 말한다.
1-1. 겐코의 난(元弘の乱)부터 겐무의 난(建武の乱)까지
가마쿠라 시대 중반이던 1246년경, 고사가 덴노(後嵯峨天皇, 1220~1272)의 양위 후에 황통은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이카쿠지통(大覚寺統)과 지묘인통(持明院統)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의 중개로 인해, 다이카쿠지통과 지묘인통이 번갈아 황위에 오르는 양통질립(両統迭立)이 결정되었다.
1331년,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1288~1339)는 전국의 무사에게 막부 토벌(討幕)을 명하는 문서를 내렸고, 그렇게 겐코의 난(元弘の乱, 1331.06~1333.07)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 1308~1335)이나 카와치(河内)의 무사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 ?~1336) 등의 소수가 고다이고를 위해 싸웠을 뿐이었지만, 이윽고 아시카가 타카우지나 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 1301~1338) 등도 가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와 그 실질적 지배자였던 호조(北条) 토쿠슈가(得宗家)는 멸망한다.
1333년 7월,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라고 불리는 고다이고 덴노에 의한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 때 그를 도왔던 사람이 아시카가 타카우지였는데, 고다이고 덴노의 정책과 개혁은 꽤 선구적이었지만, 겐코의 난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불안했다. 한편, 전쟁에 대한 보상도 문신(文臣) 위주로 해주는 등 무사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결국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사들이 모였고, 결국 그들이 난을 일으키는데, 이를 엔겐의 난(延元の乱) 혹은 겐무의 난(建武の乱)이라 한다. 고다이고 덴노는 이 난에서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 항복하며 겐무 신정은 끝난다.
1-2. 북조와 남조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로부터 삼종의 신기를 넘겨받아 지묘인통 코묘 덴노(光明天皇, 1322~1380)를 교토에 덴노로 옹립했다(후의 북조(北朝)). 그 후 법학자 제엔(是円, ?~?)과 그의 동생 신에(真恵, ?~?) 등에게 자문해 1336년 12월, 막부의 시정방침을 정한 <켄무시키모쿠(建武式目,켄무 식목)>을 제정하고, 정식으로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코묘 덴노에게 넘긴 삼종의 신기는 가품이며, 진품은 내가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통 덴노는 나다!
- 고다이고 덴노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헤이안쿄를 탈출해 나라의 요시노(吉野)로 피신해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황위의 정통은 코묘 덴노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새롭게 요시노 조정(후의 남조(南朝))을 열고, 호쿠리쿠나 규슈 등 각지에 자신의 황자를 봉해 파견했다. 그렇게 수많은 무사들 간의 전투가 시작되며 남북조 시대가 열린다.
1-2. 남조(요시노 행궁)가 기울어지다.
처음엔 이런 명분 때문이라도 고다이고 덴노의 남조가 승세를 띄는 듯 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달랐다.
1338년 6월, 남조의 주력 무사였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 顕家, 1318~1338)가 이시즈 전투(石津の戦い, 1338.06)에서 사망해 헤이안쿄 입성에 실패했으며, 고다이고 덴노를 쭉 모셨던 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 1301~1338)도 후지시마 전투(藤島の戦い, 1338.08)에서 전사하며 급속히 힘을 잃어갔다.
그러던 중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같은 해 8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된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막부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 直義, 1307~1352)와 함께 양장군(両将軍)이라는 이두정치(二頭政治)를 행했다.
1-3. 칸노의 소란(観応の擾乱, 1350~1352)
바로 윗 문단에서 간단히 이야기 했지만, 초기 아시카가 정권에서는 아시카가 가문의 가재(家宰, 집안일을 맡아 돌보는 자)적 역할을 맡은 주종제라는 사적 지배관계를 묶은 시츠지(執事, 집사) 코우노 모로나오(高 師直, ?~1351)가 군사 지휘권을 가진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보좌하는 한편,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오로지 정무(소송, 공권적 지배관계)를 담당하는 이원적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는 코우노 모로나오를 필두로 혁신파라고 불리는 슈고가(守護家) 서자들이나 교토 주변의 신흥 어가인들이, 아시카가 타다요시에는 보수파라고 불리는 사법 관료, 슈고가의 적자들, 지방 호족이 붙어 있었다.
당시 쇼군 아시카다 타카우지와 그를 보좌하던 코우노 모로나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혁신적인 정권을 만들어가려고 했지만, 부장군(副将軍)이었던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보수적인 정권을 지향했기 떄문에 그 둘은 타협하지 못하고 점차 갈등이 심해져 갔다.
1349년 7월, 코우노 모로나오는 아시카가 타다요시를 토벌하기 위해 타카우지의 저낵을 에워쌌는데, 결국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를 출가시킨 뒤 자신이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이에 대항해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1350년 10월, 숙적인 남조에게 항복한 뒤 가와치노쿠니에서 거병했고 일시적으로 남조에 삼종의 신기를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하게 된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남조와 북조가 통합한 것을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라고 한다.
1351년 2월, 셋츠노쿠니(摂津国)의 우치데하마(打出浜)에서 남조에 붙은 타다요시군이 북조 타카요시군을 이긴 우치데하마 전투(打出浜の戦い)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타다요시당은 당시 집사였던 코우씨를 제거하는데 성공해 주도권을 빼앗았다. 이 전투에서 패한 타가요시당은 타다요시당과 일시적으로 화해를 했지만, 대립은 가라앉지 않았고, 양측은 다시 싸움을 시작한다. 멸망 직전까지 몰린 남조였지만, 타다요시의 항복으로 남북조의 동란이 더 길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후 스루가노쿠니(駿河国)에서 벌어진 삿타토우게 전투(薩埵峠の戦い, 1351.12)로,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큰 부상을 입었고 정세는 뒤집어진다.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52년 1월 가마쿠라로 진격해 타다요시당을 무장 해제 시키곤 동생을 쇼우묘우지(浄妙寺)로 유폐시켜버렸다. 그렇게 칸노의 소란은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1-4. 규슈의 정세와 '일본국왕(日本国王) 양회(良懐)'
규슈에서는 남조 세력과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지지하는 북조 세력의 싸움이 계속 되었다. 남조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 ?~1381)을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삼고 파견해 북조 세력과의 공방을 거듭했다. 이러던 중 앞서 말한 칸노의 소란(観応の擾乱, 1350~1352)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타다후유(足利 直冬, ?~?)가 가담해 세 세력이 항쟁하는 어지러운 상황이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흘러 1352년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살해되자, 아시카가 타다후유는 주고쿠(中国)로 떠났다.
1359년 8월, 치쿠고가와 전투(筑後川の戦い, 1359.08)에서 남조와 남조가 파견한 정서장군이 북조와 북조의 지킴이 무로마치 막부를 완패시키면서 약 10여년간 남조가 북조를 지배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한반도와 중국 연안 등지에서 왜구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1372년 카네요시 친왕은 왜구 단속을 조건으로 대명(大明, 1368~1644)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国王) 양회(良懐)로 책봉을 받아 명목상 일본국왕이 되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 1326~?)를 파견해 북조가 숨어있던 다자이후를 탈환하며 전세는 다시 북조에게로 돌아갔다.
1-5.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과 남북조합일
이후로도 계속된 전투로 지친 남조와 북조는 일시적으로 화해를 하려고 했으나, 그 화의를 추진하려고 했던 덴노나 고위 관리들이 사망하며 다시 전투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후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남조는 점점 쇠락하고 있었고, 북조를 보좌하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満, 1358~1408)의 잇단 유력 슈고다이묘 세력 삭감책으로 막부는 더욱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나가며 내실을 다지며 두 황조의 세력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1382년에는 겨우 쿠스노키 마사노리(楠木正儀, ?~?)가 남조로 돌아왔지만, 북조의 야마나 우지키요(山名 氏清, 1344~1392)에게 패배하는 등 더 이상 옛날의 명장으로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거듭된 패전으로 힘들어진 강경파 쵸케 덴노(長慶天皇, 1343~1394)는 황위를 평화파였던 동생 고카메야마 덴노(後亀山天皇, 1350~1424)에게 양위했다.
이후에도 히라오 합전(平尾合戦, 1388.08), 치하야 성 함락(千早城 落城, 1392.01) 등에서도 남조는 계속 지기만 했고, 결국 본거지였던 치하야 성까지 잃어버리자 북조에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1392년 11월, 남조와 북조는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을 맺게 된다.
[메이토쿠 화약의 주요 내용] 1.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가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後小松天皇, 1377~1433)에게 양국의 의(譲国の儀)로 신기를 인도할 것 2. 황위는 양통질립으로 할 것 3. 국아령(国衙領)을 다이카쿠지통의 영지로 삼을 것. 4. 장강당령(長講堂領)을 지묘인통의 영지로 삼을 것. |
이렇게 남북조가 합일되었고, 규슈도 가마쿠라 막부의 영토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쇼군직에서 물러난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새롭게 명나라에 책봉되어 일본국왕(日本国王)이 되었다.
1-5. 후남조(後南朝, 1410~1514)
남북조 합일은 이루어졌지만 양통질립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북조계(지묘인통)의 황통이 이어졌기 때문에 남조에 몸바쳤던 신하들은 황위 회복을 목적으로 여러 덴노와 황제(帝)를 옹립했는데, 이를 후남조라고 한다.
대수 | 후남조 대표자(덴노/황제) | 재위 기간 | 비고 |
1대 오구라노미야 | 오구라노미야 츠네아츠 (小倉宮 恒敦) |
1410~1422 | 고카메야마 덴노의 아들 |
2대 오구라노미야 | 오구라노미야 세이쇼우 (小倉宮 聖承) |
1422~1443 | 오구라노미야 츠네아츠의 아들 |
후남조 1대 덴노 | 콘조우스 (金蔵主, 금장주) |
1443 | 킨케츠의 변(禁闕の変)으로 사망 |
후남조 2대 덴노 | 지텐노우 (自天王, 자천왕) |
1443~1457 | 쵸우로쿠의 변(長禄の変)으로 사망 |
후남조 3대 덴노 | 난텐노우 (南天皇, 남천왕) |
1457~1459 | |
후남조 4대 덴노 | 니시진 난테이 (西陣南帝, 서진 남제) |
?~? | 오쿠라노미야라고 칭함 |
결과적으로는 1499년, 이즈노쿠니(伊豆国)의 미시마(三島)로 유배된 왕(王)을 호조 소운(北条 早雲, ?~1519)가 그 왕을 소슈(相州, 사가미노쿠니)로 퇴거시켰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2. 남북조시대의 사회 변혁
남북조시대에 일어난 내란에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변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농업면에서는 토양에 거름을 주는(施肥) 양이 늘어나고 논벼(水稲) 품종이 다양화해졌으며, 관개시설 정비가 이루어져 벼의 수확량이 높아졌다. 또 가마쿠라 시대에서 전래된 이모작(二毛作, 한 경작지에 2가지 농작물을 차례로 심어 거두는 농법)이 보급되는 등 농업 생산력이 현저히 향산되었다. 이를 통해 식량 생산이 충분해짐에 따라 실로 만들 수 있는 모시풀, 풀솜(真綿), 기름을 짜낼 수 있는 들깨 등의 원료 작물도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상공업면에서는 농업의 성과로 나타난 발(簾), 멍석(蓆), 기름, 소면(索麺) 등이 세상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경제면에서는 상공업이 발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 지폐였던 교초(交鈔)의 대량 유입, 동전(銅銭)의 널린 보급 등으로 인해 화폐 경제가 일반 민중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이러한 화폐 경제의 확대로 당시 일본에서 교환가능한 유가증권으로 쓰였던 할부(割符) 등의 어음 보급의 기반을 닦았다.
문화면에서는 앞서 말한, 농업, 상공업, 경제의 발달로 민중 세력이 증가하고, 대중 문화가 융성하며 노우가쿠(能楽)의 원형인 사루가쿠(猿楽), 렌가(連歌), 챠도우(茶道)의 원형이 되는 토우챠(闘茶), 카부키모노와 카부키의 원형이 되는 바사라(ばさら) 등이 생겨났다.
종교면에서는 오래된 절과 사원과 이어지는 남조나 쿠게(公家)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는 새롭게 일본으로 수입된 불교인 선종(禅宗)을 우대하고, 교토 5산(京都五山)을 정했다.
외교면에서는 앞서 말한 종교면에서 대두된 선종 승려가 중국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에 대명(大明)과의 외교 고문을 지내게 되는 등 민간 차원에서 외교적인 협력이 확대되었다.
학술면에서는 종교면과 외교면의 진전으로 유학(儒学)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 송학(宋学, 주자학)이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이 중 1343년에 쓰여진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 親房, 1293~1354)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는 남조의 정통화라는 집필 목적이 있긴 했지만, 혈연이나 신기(神器)뿐 아니라 덕(徳)을 가진 자가 황제의 자리에 걸맞다는 송학적(주자학적) 사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어 에도 시대 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수학은 한 때 쇠퇴했으나,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시대에는 선사(禅寺, 선종의 절)에서 수학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대표적인 당대의 수학자로는 린자이슈우(臨済宗, 임제종)의 츄우간엔게츠(中巌円月, ?~?)가 있으며, 그가 쓴 <휴단산법(觿耑算法)>은 사라졌으나, <치력편(治暦篇)>에 대분수 사용이나 번분수 계산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다.
문예면에서는 종교면, 외교면, 학술면의 발전으로 한시(漢詩)가 보급되고, 젯카이 츄우신(絶海 中津, 1334~1405), 기도우 슈우신(義堂 周信, 1326~1388)을 쌍벽으로 하는 고잔 문학(五山文学)이 선사(禅寺)에서 융성했다. 또, 상공업면의 발전과도 맞물려 선종 승려 슌오쿠 묘우하(春屋 妙葩, 1312~1388) 등에 의해 고잔반(五山版)이라고 불리는 목판인쇄술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송학(주자학)의 영향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 최대의 서사시라고 평가받는 <타이헤이키(太平記, 태평기)>는 그 정점을 이룬다.
예술면에서는 경제면의 내실화와 문예면의 고잔 문학의 영향으로 젠(禅) 사상이 실체에 반영되게 되어 젠테이(禅庭, 선정)라는 정원 양식이 완성되었는데 그 중 무소우 소세키(夢窓 疎石, 1275~1351)가 만든 텐류우지 정원(天龍寺庭園)과 사이호우지 정원(西芳寺庭園)은 현대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다. 또한 렌가(連歌)를 완성한 니죠 요시모토(二条 良基, 1320~1388), 노우가쿠(能楽)를 완성한 제아미(世阿弥, ?~?) 등에 의해 이전까지는 불교 사상의 일부였던 유현(幽玄, 사물의 이치나 아취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함)이 일본 예술의 심미적인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렇게 남북조의 내란은 생산력에서 미의식까지 다각도에서 새로운 일본을 형성해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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