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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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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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마쿠라 막부 이전(~1185)

1-1. 8색의 카바네(八色の姓)

680년, 텐무 덴노는 일본 최초의 령(令)으로 알려진 <아스카키요미하라 령>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84년 조(詔)를 내려 8색의 카바네를 내렸는데, 이렇게 오래전부터 이어진 씨족중심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국가 체제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제 창조의 움직임을 보였다.

(덴노가) 조(詔)로써 말하길, 모든 씨를 고쳐 8색의 카바네(八色の姓)를 만들어 천하의 모든 성(万姓)을 섞는다. 첫번째는 마히토(真人), 두번째는 아소미 혹은 아손(朝臣), 세번째는 스쿠네(宿禰), 네번째는 이미키(忌寸), 다섯번째는 미치노시(道師), 여섯번째는 오미(臣), 일곱번째는 무라지(連), 여덟번째는 이나기(稲置)다.

- <일본서기 덴무덴노 13년(684년) 겨울 10월조>

이 때 주어진 카바네는 보통684년에 텐무 덴노가 제정한 8색의 카바네(八色の姓) 위주로 수여되었는데, 여기에는 마히토(真人), 아소미 혹은 아손(朝臣), 스쿠네(宿禰), 이미키(忌寸),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지(連), 이나기(稲置)가 포함된다.

[팔색의 카바네를 실제로 받은 기록들]

683년 9월, 야마토노아타이(倭直) 등 38개씨에게 무라지(連) 카바네를 하사했다.
684년 10월, 모리야마노키미(守山公) 등 13개씨에게 마히토(真人) 카바네를 하사했다.
684년 11월, 오오미와노키미(
大三輪君) 등 52개씨에게 아손(朝臣) 카바네를 하사했다.
684년 12월, 오오토모노무라지(大伴連) 등 50개씨에게 스쿠네(宿禰)
카바네를 하사했다.
685년 6월, 야마토노무라지(大和連) 등 11개씨에게
이미키(忌寸) 카바네를 하사했다.

위와 같은 기록을 토대로 실제로는 마히토(真人), 아손(朝臣), 스쿠네(宿禰), 이미키(忌寸) 정도의 상위 4개의 카바네를 수여받았고, 그 이전부터 전해온 오미(臣), 무라지(連), 토모노미야츠코(伴造), 쿠니노미야츠코(国造)라는 신분 질서에 대해 덴노 일족과 관계가 깊은 카바네만 빼서 마히토(真人), 아손(朝臣), 스쿠네(宿禰) 등의 카바네를 수여해 새로운 신분 질서를 만들어내고 황족의 지위를 높였다. 또한, 상급관인과 하급관인의 가문을 명확히함과 동시에 중앙귀족과 지방호족도 확연히 구별했다. 이렇게 8색의 카바네로 신분 질서가 새롭게 층층으로 정해지게 된다.

이후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아손(朝臣)을 칭하는 미나모토씨(源氏), 타이라씨(平氏), 후지와라씨(藤原氏), 타치바나씨(橘氏)의 4성(四姓)이 융성해지고, 또한, 스가와라씨(菅原氏), 토모씨(伴氏)와 같이 다른 카바네에서 새롭게 아손 카바네(朝臣姓)를 받는 카바네 자체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카바네(姓)는 덴노에게 하사받은 층계적 직위라는 의미가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메이지 시대에 본성(本姓, 혼세이)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카바네(姓)를 자처하는 관습 자체는 남아 있었긴 했다.
 

1-2. 신적 강화와 군사귀족 겐페이(源平, 건평)

신적강하(臣籍降下) 혹은 사성강하(賜姓降下)황족이 신분을 벗어나 성(姓)을 하사받아 신하의 적(臣籍)으로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한편, 황족 여자가 신하에게 시집가서 황족이 아니게 된 경우에는 신적강가(臣籍降嫁)라고 한다. 신분제가 폐지된 현대 일본 헌법에서는 어떠한 경우로든 황족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황적이탈(皇籍離脱)이라고 표현한다.

황통 유지를 곤고히 하려 했던 나라 시대의 교훈을 이어받은 헤이안 시대에는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위해 많은 황자를 낳기 시작했다. 이는 덴노의 친족 세력을 조정 내에 만들어내려는 천황의 의도로, 혈족을 관인(官人)화 시켜 정치의 중추 장악하려 했던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황위 계승이 가능한 황자는 극소수였고, 헤이안 중기까지 황위 계승의 길이 막힌 황족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자 많아진 황족에게 주어지는 소득도 늘어나 재정이 압박되기 시작했으며, 일부 황족은 국가를 등에 업고 말썽을 피우기도 했다. 이런 복합적인 계기로 인해 황위 계승 가능성이 없어진 황친들에게 카바네(姓)을 주어 신적강하(사성강하)를 실시하게 된다.

겐페이(源平) 8세기 이후 덴노가 만들어낸 성씨(8색의 카바네) 중 아손(朝臣)을 카바네로 하사받았던 미나모토씨(源氏)와 헤이라씨(平氏) 두 귀족 씨족을 말한다.

  源氏 平氏
음독 겐지 헤이시/헤이지
훈독 미나모토우지 타이라우지
겐지(源氏, 원씨) : 미나모토(源)를 카바네로 명받은 씨족
겐케(源家, 원가) : 겐지(源氏)의 일족


헤이시(平氏, 평씨) : 타이라(平)를 카바네로 명받은 씨족
헤이케(平家, 평가) : 타이라(平)를 카바네로 명받은 일족
: 특히,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정권을 쥔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일족

1-2-1. 미나모토씨(源氏)

미나모토씨의 가문, 조릿대와 용담(笹竜胆)

미나모토씨/겐씨(源氏)사가 덴노(嵯峨天皇, 786~842) 이후 신적강하(황족이 성을 하사받아 신하의 적으로 내려옴)해 미나모토(源)라는 본성(本姓)을 받은 황자나 황손의 씨족을 말한다. 카바네는 아손(朝臣)으로, <신찬성씨록>이나 ㅈ종족제(宗族制, 화족(華族)을 가계의 일족으로서 종족(宗族)으로 분류하는 제도)에서는 황별(皇別)로 분류한다.

앞서 말했듯 황족이 신적강하할 때 미나모토/겐(源)이라는 사성(賜姓, 내려준 성)을 받은 집단으로, 사가 덴노로부터 갈라진 사가겐지(嵯峨源氏), 세이와 덴노(清和天皇, 850~881)으로부터의 세이와겐지(清和源氏)부터 에도 시대에 성립한 오기마치겐지(正親町源氏)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21계통(21류)가 있다고 되어 있지만, 문헌에 따라 겐지21류(源氏二十一流)에 포함되지 않는 준나 덴노(淳和天皇, 786~840)의 후손이 부여 받은 준나겐지(淳和源氏) 등이 존재한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 미나모토씨는 타이라씨(平氏), 후지와라씨(藤原氏), 타치바나씨(橘氏)와 함께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 원평등귤)으로 묶는 사성(四姓)에 포함된다.

많은 미나모토씨(겐지)가 1~2대 중 조정에서 고위직을 차지하진 않았지만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 926~967)의 자손인 무라카미겐지(村上源氏)의 나카노인케(中院家, 중원가)는 상류 귀족의 지위를 계속 차지해 겐큐7년의 정변(建久七年の政変, 1196)으로 섭관가(摂関家, 섭정과 관백을 대대로 맡은 가문)를 넘는 권력을 손에 넣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源 通親)나,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1288~1339)의 최측근으로 남조(南朝)를 지휘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 메이지 정부의 요직에 앉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1825~1883) 등을 배출했다. 이 밖에도 우다겐지(宇多源氏), 세이와겐지(清和源氏), 카산겐지(花山源氏) 등 일부 가계도 당상가(堂上家, 무로마치 시대 이후의 공가(公家)의 가격(家格)의 하나)로 존속하고 있다.

또한 미나모토씨(겐지)의 자손 중에서는 수령(受領), 재청관인(在庁官人, 공무원)이 되어 토착 세력화된 뒤 무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세이와겐지(清和源氏)나 카와치겐지(河内源氏)는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 1147~1199)를 배출했다. 또한 카와치겐지의 흐름을 잇는 유력씨족 아시카가씨(足利氏)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 1305~1358)가 무로마치 막부를 열면서 무가의 동량(무사 가문의 장이면서 통솔자인 군사귀족)으로 인식된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3~1616)를 배출한 마츠다이라씨(松平氏) 또한 카와치겐지의 후손이라고 칭했다. 이렇게 이후 막부의 문을 열었던 무사들에게까지 이 미나모토씨(겐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1-2-2. 타이라씨(平氏)

타이라씨의 가문, 호랑나비(揚羽蝶)

타이라씨/헤이씨(平氏)타이라(平)라는 사성(賜姓)을 받은 일본의 황별(皇別) 씨족으로, 카바네는 미나모토씨와 마찬가지로 아손(朝臣)이다. 헤이안 기대 전기에 창설된 씨족으로 칸무헤이시(桓武平氏)를 포함해 4개의 유파(분파)가 있다. 이 타이라씨는 미나모토씨(源氏), 후지와라씨(藤原氏), 타치바나씨(橘氏)와 함께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 원평등귤)으로 묶는 사성(四姓)에 포함된다.

타이라씨는 크게 칸무 덴노(桓武天皇, 737~806)에서 나온 칸무헤이시(桓武平氏), 닌묘 덴노(仁明天皇, 810~850)에서 나온 닌묘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덴노(文徳天皇, 827~858)에서 나온 몬도쿠헤이시(文徳平氏), 고코 덴노(光孝天皇, 830~887)에서 나온 고코헤이시(光孝平氏)의 4개의 유파(분파)가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칸무헤이시(桓武平氏)인데, 이 중 타이라노 타카모치(平 高望, 839~911)의 자손은 무사로, 타이라노 타카무네(平 高棟, 804~867)의 후손은 당상가로 활약했다.

무가헤이시(武家平氏)라고도 불리는 타카모치왕류(高望王流) 칸무헤이시의 시초지인 아즈마노쿠니(東国)는 당연히 무가(武家)가 된 타이라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무가가 된 타이라씨의 조상인 타이라노 타카모치와 아즈마노쿠니에 독립 정권을 수립하려다 실패한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 ? ~ 940), 그리고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쓰러뜨린 타이라노 사다모리(平 貞盛, ? ~ ?) 등이 유명하다. 반도우하치헤이시(坂東八平氏)나 호조씨(北条氏) 역시 반도우(坂東)에 정착한 칸무헤이시 타카모치왕류의 후예였다. 즉, 무사가 된 타이라씨는 현재의 간토 지방에 근거지를 잡았다.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 935~940) 중 동쪽에서 일어난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平将門の乱) 이후 간토 지방에서는 사다모리류(貞盛流)와 타이라노 요시후미(平 良文, ? ~ ?)의 후손들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28년, 타이라노 타다츠네의 난(平忠常の乱)으로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 頼信, 968~1048)가 타이라노 타다츠네(平 忠常, ? ~ 1031)를 항복시킴으로써 카와치겐지(河内源氏)가 간토 지방의 무가의 동량적 존재가 되어 칸무헤이시 요시후미류(良文流)의 치바씨(千葉氏)나 칸무헤이시의 미우라씨(三浦氏) 등의 평성(平姓)을 가진 혈족은 미나모토씨의 케닌(家人, 가인, 하인급) 취급을 받게 되었다.

한편,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타이라노 코레히라(平 維衡, ? ~ ?)는 이세(伊勢) 지역에 기반을 쌓아 이세헤이시(伊勢平氏)가 만들어졌고, 그 후손들은 주로 서국(西国, 사이고쿠, 세이고쿠)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이라노 타다모리(平 忠盛, 1096~1153)은 주로 서국(西国)에서 수령을 역임하며 세력을 키웠고, 그의 아들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 1118~1181) 역시 다양한 직위를 역임하며 서국에서 큰 위세를 떨쳐나갔다. 한편, 아즈마노쿠니에서 타이라씨를 먹었던 미나모토씨의 후예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 1123~1160)이 강고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의 난들을 거치며 미나모토씨의 군사력 해체 -> 타이라노 기요모리가 이끄는 타이라씨의 군사적 우위가 확정

+ 수백 개의 장원 소유, 다자이후(太宰府)의 장관으로 송과의 무역거점 장악

한편, 1156년에 있었던 호겐의 난(保元の乱)으로 고시라카와 덴노파가 이기게 되며, 이때 겐도파였던 일부 타이라씨가 강해지기 시작했으며,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1160)에서 덴노파였던 타이라씨가 승리하면서 상황파였던 미나모토씨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베어죽여졌는데, 그러면서 타이라씨의 힘이 커지게 되며 미나모토씨의 군사력이 해체된다. 참고로 이런 정치적 싸움에 이들이 끼게 된 이유는 미나모토씨와 타이라씨가 인세이(院政)와 결탁하여 승진해 각각 무사단을 꾸렸기 때문이다.

1167년에는 덴노의 이름으로 타이라노 시게모리(平 重盛, 1138~1179)에게 도산도(東山道), 도카이도(東海道), 산요도(山陽道), 난카이도(南海道)의 치안권을 맡긴다는 선지(宣旨, 덴노가 내려 전하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혹은 이후 간단히 정의할 지쇼3년의 정변을 시작으로 헤이시 정권(平氏政権, ~1185)라는 군사독재정권이 성립된다.

12세기말의 정변으로 인세이 폐지 ->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군사독재정권 수립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재압(겐페이 합전)

1179년 11월, 이세헤이시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 1118~1181)가 군대를 이끌고 헤이안쿄를 제압해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 1127~1192)의 인세이(院政, 원정)을 끝낸 지쇼3년의 정변(治承三年の政変)이 일어났고, 이후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아즈마노쿠니의 지배권 강화에 나섰으나,

겐페이합전도 병풍(源平合戦図屏風)

카와치겐지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봉기한다(1180~1185, 겐페이 합전). 그러자 많은 아즈마노쿠니에 있던 헤이시는 신하로서 굴복하게 되어 헤이케(平家)와 싸우게 되었다. 결국 몰락하고 멸망한 헤이케의 영지였던 헤이케 몰관령(平家没官領)은 모두 몰수되는데, 그 장원의 수가 500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1-3. 겐페이 합전(源平合戦, 1180~1185)

1-3-1. 모치히토왕의 거병(以仁王の挙兵, 1180.06)

1180년, 안토쿠 덴노(安徳天皇, 1178~1185)의 즉위로 황위 계승이 좌절된 모치히토왕(以仁王, 1151~1180)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 頼政, 1104~1180)의 협력을 받아 헤이씨(平氏) 토벌, 안토쿠덴노 폐위, 신정권 수립을 계획한 밀령을 적어 보냈다. 그 문서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 行家, 1141~1186)에 의해 전국 각지의 겐씨(源氏)나 하치죠인(八条院, 쇼시 내친왕, 1137~1211)의 지배하에 있는 무사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거병 직전에 키이쿠마노(紀伊熊野) 지역에서 어떤 다툼이 있었는데, 이 때 승려 탄조우(湛増, 1130~1198)가 헤이씨에게 헤이씨를 뒤쫓아가서 무찌른다는 밀고가 발각되었다. 결국 모치히토왕 일행은 타이라노 토모모리(平 知盛, 1152~1185), 타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7~1185)가 이끄는 대군의 공격을 받아 그해 5월 우지(宇治)의 뵤도인(平等院, 평등원)에서 전사하는데, 이 거병은 앞으로 일어날 약 6년간의 내란의 계기가 되었다.
 

1-3-2. 아즈마노쿠니(東国)에서의 거병

모치히토왕이 사망할 무렵에도 밀서는 각지의 무사들에게 배부되고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당연히 그 밀서를 받았는데, 그는 곧 주변 쿠니의 무사단에게 협력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리는 8월에 거병하게 된다. 여러 싸움에서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가, 칸무헤이시의 미우라씨(三浦氏) 세력과 합류했고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점점 힘을 모아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재밌는 건 앞서 밝혔듯 그 세력의 대부분은 반도우에 있던 타이라씨들이었다는 것... 사실 그 전부터 일부 타이라씨가 다른 가문을 탄압한 일도 있었는데 탄압받던 일부 타이라씨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붙은 것으로 본다. 실제로 잉카 제국의 타민족 탄압으로 일부 아메리카계 원주민이 에스파냐군에 붙은 것과 비슷한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에게 적군의 토지를 은상(恩賞, 임금이 내린 상)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그 인기도 드높았다. 이렇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주군으로 해서 그를 섬기는 무사단이 등장했는데, 이 무사단이 바로 아즈마노쿠니 무사단(東国武士団) 혹은 간토 무사단(関東武士団)이다.
 
이 아즈마노쿠니 무사단(간토 무사단)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권력 기반이었으며, 당시 아즈마노쿠니 지역의 평야가 넓고 컸기에 무사층의 주요한 진원지가 되었다. 한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주군으로 하고 그를 따르는 종자 간의 강한 사적인 유대가 생겼고, 이로 인해 고케닌(御家人) 제도가 생기게 된다.

쇼군과 고케닌의 관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외에도 타게다노 부요시(武田 信義, 1128 ~ ?)를 도량으로 하는 가이겐지(甲斐源氏)의 일족이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 1154~1184) 등 다른 미나모토씨들도 거병하기 시작했다.
 

1-3-3. 후지카와 전투(富士川の戦い, 1180.11)

아즈마노쿠니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필두로 한 미나모토씨들의 거병이 늘어나 승세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헤이시 정권은 타이라노 코레모리(平 維盛, 1159 ~ ?), 타이라노 타다노리(平 忠度, 1144~1184)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이츠마노쿠니로 파견했다. 토벌군은 도카이도(東海道)를 내려갔고, 당시 스루가노쿠니(駿河国)의 후지카와(富士川)에서 미나모토씨와 대치하게 된다. 그런데 미나모토씨의 대군을 본 헤이시 정권의 토벌군은 크게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버렸다.... 결국 이 일대까지도 미나모토씨가 차지하게 된다.

한편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 기회를 필두로 서울(수도)로 올라가자고 했지만 주변 상황을 잘 이해해 판도우 경영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칸무헤이시의 카즈사씨(上総氏)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선은 세이와겐지의 사타케씨(佐竹氏)와 교전하게 되고(카나사성 전투(金砂城の戦い, 1180.11))를 벌여 승리해버린다.

쇼군의 지배기구 및 직위명

이후 그는 같은 해 카마쿠라(鎌倉)로 돌아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세우고 와다 요시모리(和田 義盛, 1147~1213)를 사무라이도코로의 장인 벳토우(別当, 별당)로, 후에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 景時, ? ~ 1200)를 쇼시(所司, 소사)로 임명했다.

아즈마노쿠니 이외에도 타이라씨에 반대하는 세력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
미나모토노 마레요시(源 希義, 1152~1180)를 비롯한 카와치겐지의 옜 본거지였던 카와치이시카와(河内石川)의 미나모토노 요시모토(源義基, ~1180), 미나모토노 요시카네(源 義兼, ?~?) 부자, 세이와겐지인 토키씨(土岐氏)나 야마모토 요시츠네(山本 義経, ?~?), 우다겐지였던 사사키씨(佐々木氏), 그 외 승려 탄조우(湛増), 카와노씨(河野氏), 키쿠치 타카나오(菊池 隆直, ?~1185), 호쿠리쿠도(北陸道)의 많은 관리, 기나이 일부 지역 등 많은 세력에 의한 거병이 일어난 것이다.
 

1-3-4.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사망(1181.03)

이렇게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1181년, 당시 엔세이를 하던 타카쿠라 상황(1161~1181)이 붕어했고, 결국 타이라씨가 막으려 했던 고시라카와 상황(1127~1192)의 엔세이가 시작되었다. 곧 당시 실권을 지고 있던 타이라노 기요모리도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헤이시 정권은 강력한 지도자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어찌저찌해서 동쪽에서 진격해오는 미나모토씨를 스노마타가와(墨俣川)에서 막긴 하는데(스노마타가와 전투(墨俣川の戦い, 1181.03)), 그로 인해 헤이시 정권은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아즈마노쿠니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1-3-5.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헤이안쿄 상륙(1183.07)

1183년 4월, 타이라씨는 호쿠리쿠도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타이라노 코레모리와 타이라노 미치모리(平 通盛, 1153~1184)를 파견해서 전투에 임했으나 초반엔 잘 이기다가 결국 국경의 쿠리카라토우켄에서 시나노겐지(信濃源氏)에게 패배한다(쿠리카라토우겐 전투(倶利伽羅峠の戦い, 1183.06)). 7월에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엔랴쿠지(延暦寺, 연력사)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그는 헤이시 정권의 보급로를 차단해 도카이도로 진격해 헤이안쿄에 다다랐다. 그런데 수도의 방위를 단념해버린 타이라노 무네모리(平 宗盛, 1147~1185)는 안토쿠 덴노와 삼종의 신기를 들고 서국(西国)으로 도망간다. 이 때 고시라카와 법황은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탈출한 뒤 낙향에 동행하지 않았기에 안토쿠 덴노를 받드는 헤이시의 정통성은 약화되었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가뭄에 지쳐 수도를 약탈하거나 새로운 덴노로 호쿠로쿠노미야(北陸宮, 1165~1230) 옹립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덴노 재위기간
안토쿠 덴노(安徳天皇) 1180.03~1185.04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1183.09~1198.02
1183년 9월부터 1185년 4월까지(약 1년 7개월간) 일본 열도에는 2명의 덴노가 있었다..

결국, 타카쿠라 상황의 넷째 황자가 즉위해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1180~1239)가 된다. 이렇게 원래 덴노였던 안토쿠 덴노가 있는데 고토바 덴노가 즉위해 천하에 덴노가 2명이 존재하게 된다....
 

1-3-6. 주에이 2년 10월 선지(寿永二年十月宣旨, 1183.10)

<교쿠요(玉葉)>에 기록된 주에이 2년 10월 13일 선지
도카이, 도산, 호쿠리쿠 3개 도(道)의 장원, 국령(国領, 쿠니의 영지), 본디처럼 영지(領知, 여지 소유 및 지배)해야 함에 따라, 선언되어야 하는 지(旨), 요리토모(頼朝)에게 말해 청한다.
따라서 선지를 내리는 바, 호쿠리쿠도만은 요시나카(義仲)가 두려우므로 그 선지를 행하지 못했는데 요리토모가 이를 들으면 필시 우울을 맺을까. 몹시 불편한 일이다. 
<햐쿠렌쇼(百錬抄)>에 기록된 주에이 2년 10월 14일 선지
(주에이2년) 10월 14일, 도카이, 도산에 있는 모든 쿠니의 연공(年貢, 해마다 바치는 공물), 신사와 불사(절) 및 왕, 신하의 가령(家領, 가문 소유지)의 장원, 본디처럼 영가(領家, 기진 받은 장원 영주)에 따름을 말미암아 (덴노께서) 선지를 내려주셨다. 요리토모(頼朝)의 분부에 의하는 바다. 
<교쿠요(玉葉)>에 기록된 주에이 2년 10월 22일 선지
또 묻는다. 요리토모의 사자, 이세국에 온다 해도 모반의 예법은 아니다. 일전의 선지에 '도카이, 도산도 등의 장토(庄土, 개인 소유지)를 되돌려 받는 무리라면, 요리토모에 접촉해 소식(沙汰)을 보내라'고 말했다. 따라서 선지를 시행하지 않기 떄문에 또한 온 나라에서 우러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는 바를 말한다.

<주에이 2년 10월 선지>라는 사료의 원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위에서 예시를 든 <교쿠요(玉葉)>나 <햐쿠렌쇼(百錬抄)>에 그 요지가 간단하게 담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 사료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1. 아즈마노쿠니(東国)의 장원, 공령(公領)의 영유권을 옛날처럼 장원영주, 국아(国衙)로 회복시킬 것을 명한다.
2. 그 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즈마노쿠니에 대한 행정권을 승인한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출병해 부재중인 사이,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상경을 재촉받았지만, 오히려 도카이도, 도산도, 호쿠리쿠도에 대한 국아령(国衙領, 장원이 되지 않은 정부 소유지), 장원을 원래와 같이 국사(国司), 본소(本所)에 반환시킨다는 내용의 선지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결과, 덴노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배려하기 위해 호쿠리쿠도는 제외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요청한 내용을 거의 인정하는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보내 도카이도와 도산도의 장원과 국아령을 원래대로 영가(領家)에 종속게 카는 권한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인정해주었다. 그렇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조정으로부터 아즈마노쿠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 인해 1160년에 일어난 헤이지의 난 이후 유배나 귀양을 다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다시 종5위하(従五位下)라는 위계로 복귀하게 된다. 이번 선지를 받음으로써 이미 실질적으로 아즈마노쿠니를 지배하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조정에게 공인받아 그 지역의 지배자로서의 정통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그들 무리는 더이상 반란자로 간주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1-3-6.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멸망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근거로 아즈마노쿠니의 연공(年貢) 납입을 실행한다고 말하며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 1159~1189) 등을 상경시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미마모토노 요시나카는 타이라씨와의 싸움을 끝내고 헤이안쿄로 돌아온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군이 헤이안쿄로 가는 길에 아군의 배반도 있어 점차 고립되어 가다가 1183년 11월에 헤이안쿄 동쪽의 호쥬지(法住寺)를 습격해 북면무사(北面武士)와 승병 세력과 싸워 고시라카와 법황과 고토바 덴노를 유폐한 뒤 정권을 장악해 괴뢰 정권을 수립한다(호쥬지 합전(法住寺合戦)).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다가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는데, 조정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오의 세력 확대 때문에 위협을 느껴 1184년 1월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정동대장군(征東大将軍)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그 무리는 형식적으로는 관군의 체면을 갖추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 範頼, 1150~1193)를 새로 지원군으로 파견했고, 1184년 1월 20일경, 노리요리군와 요시츠네군은 각각 세타(勢多), 타하라(田原)에서 총공격을 개시한다. 한편, 같은 날 요시츠네군은 요시나카군과 교전해 우지(宇治)의 방어선을 돌파하고(우지가와 전투(宇治川の戦い)), 그대로 상경해 덴노의 신병을 확보했다. 미타모토노 요시나카는 도망치다 아와즈 전투(粟津の戦い, 1184.01)에서 전사하고 만다...
 

1-3-7.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の戦い, 1184.03)

&amp;lt;이치노타니 전투&amp;gt;(야수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사망에 이를 동안 타이라씨는 세력을 재건하고 한창 다른 지역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던 1184년 1월에는 셋쇼국(摂津国)의 후쿠하라쿄(福原京)로 돌아왔다. 그 무렵 헤이안쿄에서는 고토바 덴노 즉위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삼종의 신기는 안토쿠 덴노에게 있으며, 삼종의 신기를 고토바 덴노쪽으로 받아오기 위해 타이라씨와 평화를 가질 것인지, 교전을 벌여 무력으로 탈취할 것인지를 가지고 의견이 나뉘었으나 결국 무력 탈취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이윽고 헤이안쿄에 주둔하고 있던 노리요리군과 요시츠네군은 후쿠하라쿄에 진을 치고 있던 타이라씨를 2개의 조로 나눠 공격했다. 결국 이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타이라씨는 패배하고 미나모토씨가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타이라씨는 많은 유능한 무장들을 잃었고, 이어지는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8. 3일 헤이시의 난(三日平氏の乱, 1184.07~1184.08)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총지휘자로 해서 기나이(畿内)와 서국(西国)에서의 군사 체제를 정비한다. 토히 사네히라(土肥 実平, ?~?)와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산요도에, 오오우치 코레요시(大内 惟義, ?~?)와 오오이 사네하루(大井実春, ?~?) 등은 이세(伊勢) 지역과 이가(伊賀) 지역에 배치되지만, 기나이와 서국에 파견된 토히 사네히라와 카지와라 카케토키가 타이라씨의 반격에 시달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총대장으로 해 서국에 원정군을 보내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화살촉인 1184년 7월, 타이라노 히에츠구(平 家継, ? ~ 1184)와 후지와라노 타다키요(藤原 忠清, ? ~ ?) 등 이세와 이가 지역의 타이라씨 가문이 군사봉기를 일으킨다. 격전 끝에 반란은 진압되지만, 사사키 히데요시(佐々木 秀義, 1112~1184)가 전사하는 등 가마쿠라측 고케닌에게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난의 영향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기나이의 치안 유지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고, 대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서국 원정 지휘를 맡게 된다.
 
한편 아즈마노쿠니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가이겐지(甲斐源氏)의 이치죠 타다요리(一条忠頼, ?~1184)가 살해되고, 카이(甲斐)와 시나노(信濃) 지역에 대해 군사력이 행사되었다.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은 자격으로 원래 독자적으로 거병한 가이겐지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정책이었다.
 
또 이 무렵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대해 독립성이 높은 케이무샤(京武者, 기나이 주변의 군사 귀족)에게 통제를 가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1-3-8.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 1185.02)

&amp;lt;야시마전투병풍&amp;gt;(야수파)

1184년 3월에 일어난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패한 타이라씨는 사누키노쿠니(讃岐国)의 야시마(屋島)에 진을 치고 다이리(内裏, 덴노가 사는 대궐)를 두었다. 이후 1184년 8월 서국으로 향한 노리요리군은 처음엔 순조롭게 산요도를 제압했으나, 곧 길게 전선이 늘어지게 되는데, 이에 타이라씨 수군이 이 중간을 잘라버렸다. 또한 타이라노 토모모리가 칸몬 해협(関門海峡)을 봉쇄시키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겨 노리요리군의 진군이 정체된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1185년 1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서국 출진을 알려 이를 허가받는다. 같은해 2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아와(阿波) 지역의 카츠우라(勝浦)에 상륙 한 뒤, 현지 무사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뒤쪽에서 야시마를 기습해 타이라씨를 완전히 몰아냈다(야시마 전투(1185.02))
 

1-3-8.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 1185.04)

야지마 전투(1185.02) 이후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잃은 타이라씨는 나가토(長門) 지역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쿠마노벳토(熊野別当) 탄조우(湛増)가 이끄는 쿠마노 수군(熊野水軍)과 카와노 미치노부(河野 通信, 1156~1222)가 이끄는 이요노 수군(伊予水軍)을 비롯한 츄고쿠(中国), 시고쿠(四国) 무사가 잇달아 요시츠네군에 가담했다. 결국 노리요리군이 규슈를 제압함으로써 타이라씨는 완전히 포위된다.
 
1185년 3월 말, 칸몬 해협의 단노우라(壇ノ浦)에서 최후의 전투가 열렸는데, 바로 이 전투가 단노우라 전투다. 초반에는 타이라씨가 우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세를 띈다. 아와노 수군(阿波水軍)의 배신도 있었고 그래서 타이라씨의 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타이라씨의 무장들은 하나 둘 바다로 투신했고, 안토쿠 덴노와 그녀의 외할머니 타이라노 토키코(平 時子, 1126~1185)도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타이라씨는 멸망하고 만다...
 

1-3-9. 겐페이 합전의 의의

1. 일본사 최초의 전국적인 내란
2. 헤이시 정권 제거
3.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겐페이 합전은 위에서 정리한 3가지 의의를 가진다.
 
우선, 겐페이 합전은 일본사 최초의 전국적인 내란이었다.
일본에서는 겐페이 합전 이전에도 대규모 내란이 있었지만, 대규모라고 해도 변경 지역에 머물렀거나, 중앙 지역(기나이 주변)에서 단기간으로 일어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겐페이 합전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오슈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가 지배했던 도호쿠 지방 이외의 당시 일본 국토 전역에서 약 5년동안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군사제도는 어디까지나 헤이안쿄와 그 주변의 단기간 소요, 해적 무력화에는 최적화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대규모 내란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다. 헤이시 정권도 그 성립의 계기가 된 호겐의 난(1156)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1160)에서 선조 대대로 내려온 가인(家人)들로 구성된 소수의 직속 부대에서 승리를 거두고,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필요에 따라 공권력을 발동함으로써 여러 쿠니의 병사를 동원해 보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겐페이 합전에서는 당초 소규모 세력이면서 동시에 반란궁 취급을 받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세력은 현재의 간토 지방의 지배권 확보와 그 후의 헤이시 정권 타도라는 장기적, 영역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산하 무사에 대해서 독자적인 본래의 영지에 대한 영유권을 막부 등이 인정하는 본령안도(本領安堵)나 점령한 땅을 내려주는 등 부하들에게 인정을 해주며 성장해 나가 결국 장기전에 견딜 수 있는 군사 제도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헤이시 정권은 조정내의 구세력(왕가, 귀족, 사찰)과의 겸비로 이러한 대담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곤란했고, 그 결과 헤이시 정권은 고전을 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전까지의 전투는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린 정규 무사가 이름을 말하고 시작하는 일정한 예절이 있는 전투였으나, 이번 겐페이 합전에서는 전투가 대규모화됨에 따라 정규 무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만으로는 인원이 부족해 동원 대상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미숙한 무사나 본래 무사가 아니었던 촌락의 영주급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기마술이나 궁술, 전투의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거 참가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규칙 위반으로 여겨졌던 상대의 말 공격, 말을 이용한 몸싸움 등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원래 활을 다 쓰거나 말에서 내린 뒤 쓰는 칼을 말을 타면서 쓰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로써 이전엔 궁기병(弓騎兵, 말을 타면서 활을 쓰는 사람)이 줄고 활대신 칼을 드는 기병으로 변해갔다.
 
 
그 다음, 겐페이 합전은 헤이시 정권 제거를 이루어냈다.
겐페이 합전 이전, 헤이시 정권은 군사, 경찰권을 쥐고, 많은 지행국(知行国, 영주가 지배하는 쿠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헤이시 정권에 권익을 빼앗긴 왕가, 귀족, 절과 신사와 같은 구세력에 의해 헤이시 정권 제거가 꾀해지기도 했다. 결국 성공했지만 구세력은 헤이시 정권이 보유하던 권익을 모두 탈환하진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마지막으로, 겐페이 합전은 가마쿠라 막부의 수립을 이끌어 낸 계기가 되었다.
왕가, 귀족, 절과 신사와 같은 구세력에 헤이시정권을 제거할  군사력은 없었고, 그 힘은 무사층이 가지고 있었다. 당초 아즈마노쿠니나 호쿠리쿠에서 발흥한 반 타이라씨 세력은 타이라씨 토벌을 명분으로 내세우고는 있었지만, 본심으로는 스스로의 권리 확보, 그리고 중앙 정부로부터의 일정 범위에서의 독립을 진정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구 세력은 타이라씨 타도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실제로 토벌에 종사하는 간토 정권(아즈마노쿠니 정권)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실제로 <주에이 2년 10월 선지> 발급이라는 대폭적인 권한 이양의 길을 열어 버린다.
 
그 결과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초창기 가마쿠라 막부는 아즈마노쿠니 지배권을 가질 뿐이었지만, 그것은 당시 막부를 구성하는 무사들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 만들어질 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조정은 많은 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원공령제 유지라는 점에서 이해 관계가 일치하게 된다. 그래서 119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상경으로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협조적인 체제가 확인되었다. 그렇게 일본에는 서쪽의 조정과 동쪽의 막부라는 이원적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이러한 체제가 쭉 가다가 약 30년 뒤인 조큐의 난(承久の乱, 1221)에 의해 조정과 막부가 정면충돌하게 되었고, 호조 도키마사(北条 時政, 1138~1215)가 싯켓(執權, 집권)이 된 뒤부터 대대로 호조씨가 싯켓을 계승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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