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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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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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이안 시대(794~1185)

1-1. 헤이안 시대의 특징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칸무 덴노(桓武天皇)가 오늘날의 교토부 교토시에 있었던 헤이안쿄(平安京)에 천도한 794년부터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한 12세기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통상 고대의 끝자락에 위치하지만 중세의 태동기로 보기도 하며, 최근엔 장원공령제(荘園公領制)가 확립된 원정기(院政期, 1100년경 이후) 혹은 율령제에서 왕조국가체제로 바뀌는 헤이안 시대 중기(900년경 이후)를 중세 초기로 포함하는 견해가 유력해지며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로 이해되고 있다.
 
이 시기는 귀족정치의 전성기로 보며, 특권계급인 공가(公家)과 사사(寺社)가 지배하는 장원(莊園)의 시대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방의 군사귀족과 무사단의 대거 형성되며 이후 막부 시대를 여는 열쇠 같은 시대였다.
 

1-2. 후지와라씨(藤原氏)의 대두

후지와라씨(藤原氏)아스카시대 때 일어난 다이카 개신의 공헌자였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를 시조로 하는 성씨로, 나라 시대에는 남가(南家), 북가(北家), 식가(式家), 경가(京家)의 4 가문으로 나뉘었는데, 이 중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가 헤이안 시대에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며(9세기 후반~11세기 후반의 덴노의 모계는 모두 후지와라씨였을 정도였다!) 섭관정치(摂関政治)를 펼쳤다. 북가 중에서도 권세를 자랑했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 道長)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자손들(흔히 섭가(摂家)라고 부름)이 섭정(摂政)과 관백(関白)을 세습적으로 거의 독점하면서 신하로서 최고의 가문의 격을 유지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후지와라씨 가문이 성장함에 따라 덴노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덴노의 힘이 약해지게 된다.
 

1-3. 원령(怨霊)과 어령신앙(御霊信仰)

1-3-1. 원령

<근세괴담상야지성(近世怪談霜夜星)>에 등장하는 원령(怨霊). 좌측에 칼을 잡고 휘두르고 있는 귀신이 바로 원령이다. (출처 : 葛飾北斎)

한국에서는 영화 <원령공주(怨霊)>로 대중에 알려진 원령(怨霊)남에게 받은 처사에 원한을 품고 재앙을 일으키는 사령(死霊) 혹은 생령(生き霊)을 말하며 악령(惡靈)의 한 종류로 분류된다.

[부유령과 지박령]

전사하거나 사고사를 당했거나, 자살하는 것과 같이 제 목숨보다 일찍 죽게 되는 경우 영과 육이 함께 갖추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육체만 으스러지는 상태가 되는데, 이 때 그 사람의 영혼은 갈 곳을 잃고 공중을 헤맨다고 여겼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 곳을 잃고 공중을 떠다니며(浮遊) 헤매는 영(霊)들을 부유령(浮遊霊)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부유령 중 특정 장소나 건물에 눌러앉아 버린 령을 '땅에 묶인 령'이라는 뜻으로 지박령(地縛霊)이라고 부른다.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미움이나 원한을 가진 사람이나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사람의 생령(生霊)이 살아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사회에 재앙을 준다고 해서 두려워하게 되었다. 원래 영혼 신앙에서는 영혼이 육체 안에 안정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을 살아있을 수 있다고 본다. 흔히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면 죽는다'라는 말이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한 사람의 원한이나 미움과 같이 감정의 정도가 심해지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생령이 되어 주변에 혹은 특정인에게 재앙을 준다고 여기는 것이다.
 

1-3-2. 일본 3대 원령

일본에서는 이런 원령 중 TOP 3에 꼽을 만한 무서운 세 원령을 정리했는데, 말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 스토쿠 덴노(崇徳天皇)로 뽑는다. 이 세 명 모두 헤이안 시대의 인물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그림

우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는 천재면서 충신으로 명성이 높아 우다 덴노(宇多天皇)에게 중용되어 간표의 치(寛平の治)를 도왔으며, 다이고 덴노(醍醐天皇) 때는 우대신(右大臣)까지 올랐지만 모반을 계획했다는 소문으로 좌천된 쇼타이의 변(昌泰の変)으로 한직에 머물렀던 비운의 정치가였다. 그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30년 7월의 대낮에 헤이안쿄의 청량전에 천둥번개가 내리쳐 많은 관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일어났다(청량전 낙뢰 사건(清涼殿落雷事件)). 그리고 그를 좌천시켰다고 여겨진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 時平)의 자식들도 대대로 요절하게 되며, 그 집안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후지와라씨는 그를 계속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역병이나 자연재해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982년에는 요시시케노 야스타네(慶滋保胤)가 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고, 그제야 큰 재해는 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학문의 신이 되었기에 지금은 입시철이 되면 그를 모신 신사에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이 찾아와 그에게 기도를 올리곤 한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그림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 903~940)는 헤이안 시대 간토 지방의 호족으로, 타이라씨 일족의 다툼을 간토 전역을 휩쓴 대전쟁으로까지 확산시켰으며, 국부(国府)를 습격해 인약(印鑰, 인장과 자물쇠)을 빼앗고는 스스로를 신황(新皇)이라고 선포해(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平将門の乱)) 일본 조정에서 반역자로 낙인찍은 사람인데, 결국은 조정의 진압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사망한 시신을 헤이안쿄로 가져와 효수(목을 매다는 처형)한 뒤 베어버렸는데, 몇 달이 지나도 그의 잘린 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도노로쿠 사콘(藤六左近)이라는 가인(歌人, 시인)이 그 잘린 머리를 보며 시를 읊자 그 머리는 "몸을 붙여서 한판 싸우자! 나의 몸통은 어디 있는가?"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흰 빛을 발하면서 그 잘린 머리는 동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외에도 지옥에 갔다는 전설이나 그가 지은 성에 대한 전설이나 여러 명이 있었다던가 원래 부처의 심복이었다던가 하는 다양한 전설들이 전해 내려 온다.

스토쿠 덴노

마지막으로 스토쿠 덴노(崇徳天皇, 1119~1142)는 75대 덴노였다.
중궁(中宮) 후지와라노 다마코(藤原 璋子, 1101~1145)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쿠 덴노는 1123년에 황태자가 되었으며, 그날 바로 그러니까 그가 5살이 되자마자 덴노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황위를 넘겨준 도바 덴노(鳥羽天皇, 1103~1156)는 그때 20살이었다. 이제야 정치 좀 해보려고 하는데,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기 때문에 도바 덴도는 스토쿠 덴노에 대해 그리 좋은 아들로 보진 못했나 보다.

토바 덴노를 중심으로 스토쿠 덴노와 주변 가족 (출처 : skawa68.com)

그는 후지와라노 세이시(藤原聖子, 1122~1182)를 중궁(中宮)으로 맞았지만, 그녀 보단 후궁 효에노스케노 츠보네(兵衛 佐局,? ~?)를 좋아해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황비가 아닌 후궁이 먼저 자신의 아들을 낳게 되었고, 그의 아들이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 1140~1162)였다. 그러자 황비와 그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다타미치(藤原忠通, 1097~1164)는 현 덴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던 상황에서 1139년, 그의 아버지 도바 상황은 후지와라노 토쿠시(藤原得子, 1117~1160)와의 정을 통해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3살이 된 1142년에 도바 상황이 스토쿠 덴노에게 양위하라고 명령하면서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코노에 덴노(近衛天皇, 1139~1155)다. 집안싸움 땜에 몇 번의 덴노를 갈아치우는 거냐ㅡㅡ

도바 덴노부터 니조 덴노까지의 족보... 족보가 아주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그리고 도바 상황은 노에 덴노의 인세이(院政, 원정, 살아있는 상황의 섭정)를 했으며, 스토쿠 상황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스토쿠 상황 또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친아들 시게히토 친왕을 아버지 도바 상황이 좋아했던 후지와라노 토쿠시의 양자로 들어가게 했다. 그렇게 되면 병약한 노에 덴노가 사망하면 그 2순위인 시게히토 친왕이 덴노가 되며 스토쿠 상황이 다시 인세이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1155년, 코노에 덴노가 사망하고 그의 후사가 없자 누구를 덴노로 옹립할지를 두고 많은 회의가 오갔다. 결국은 스토쿠 덴노가 저주를 퍼부어 코노에 덴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을 덴노로 앉히는데 그가 고시라카와 덴노가 된다. 이 기세를 몰아 토바 상황은 스토쿠 상황가 역모를 꾀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그를 강제로 유배 보냈고(호겐의 난), 스토쿠 상황은 그렇게 그렇게 죽게 된다.
아버지에게도, 새어머니에게도, 부인에게도, 시아버지에게도, 측근에게도, 거기다 친동생에게까지 버림받은 그는 처참하게 죽고 만다...
이후 엔랴쿠지(延暦寺)의 강소(強訴), 안겐 대화재(安元の大火),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鹿ケ谷の陰謀) 등 잇따라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는 스토쿠 덴노의 원령이 일으킨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고시라카와 덴노는 1184년 봄에 그를 스토쿠인(崇德院)이라는 원호를 올렸으며, 그를 위한 사당도 세웠다. 이후 일본의 제국기 시절 메이지 덴노와 쇼와 덴노도 그에게 제를 짓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덴노가에서 그를 위한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1-3-3. 원령이 된 사와라 친왕

사와라 친왕 그림

칸무 덴노의 동생이었던 사와라 친왕(早良親王)은 나가오카쿄 천도를 준비하던 중 화살로 암살당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藤原 種継)의 죽음에 연관되었다고 여겨져 폐위된 뒤 오토쿠니데라(乙訓寺)에 유폐된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무고함을 호소하기 위해 약 10일간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이후 다른 지역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 분사(憤死, 화병으로 사망함)해버렸다고 전한다. 그 이후 그 주변 지역에서 많은 재앙이 일어났다고 했으며, 이 때문에 칸무 덴노가 나가오카쿄가 아닌 헤이안쿄로 천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실제로 기록에 따라 항의를 위한 단식을 하다가 죽었다는 설과 칸무 덴노가 일부러 그에게 음식물을 주지 않고 아사시킴으로써 직접 손대지 않고 죽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1-3-4. 어령신앙(御霊信仰)

어령신앙(御霊信仰)일본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연재해나 역병의 발생을 원한을 품고 죽거나 비명횡사한 인간의 원령(怨霊)의 소행으로 간주해 그 대상을 경외하면서 진정시켜 어령(御霊)으로 삼음으로써 재앙을 면하고 평온과 번영을 실현하려는 신앙을 말한다.
 
앞서 말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학문의 신으로 삼아서 제를 지낸다던가, 사와라 친왕을 덴노가에서 계속 제사를 지낸다던가 하는 것들이 바로 이 어령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대부분 굿의 형식이나 위령제의 형태로써 행해지는 데에 비해 이 어령신앙은 일본 자체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1-4. 귀족사회의 국풍 문화(国風文化)

대륙의 영향이 강했던 나라시대의 당풍(唐風)에 대비해 일본 고유의 야마토식 문화를 국풍(国風)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국풍 문화(国風文化)는 10세기 초부터 11세기 섭관 정치(摂関政治) 시기를 중심으로 한(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번성한) 온화하고 점잖은 일본식 귀족 문화로, 궁정 여성들에 의한 가나 문학(仮名文学), 침전츠쿠리(寝殿造り, 침전조), 야마토에(大和絵), 불상 조각 등 여러 분야에서 그 특색을 찾을 수 있으며 11~12세기의 원정기 문화(院政期文化)에도 널리 영향을 주었다.
 
바다를 드나들며 장사하던 해상(海商)이 활발해지던 9세기경부터 일본은 굳이 견당사를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해 견당사의 빈도가 줄어들었고, 10세기엔 당, 발해, 신라 멸망하자 대외관계 자연스레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 이전부터 조금씩 생각해오던 일본적인 가치 모색에 대한 큰 촉발제가 되어 대륙 문화를 일본의 풍토나 사상과 조화시키려 하는 국풍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풍 문화
와카(和歌)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
<화한랑영집(和漢朗詠集)>
모노가타리(物語, 이야기)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작자 불명)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작자 불명)
<우츠호모노가타리(うつほ物語)> (작자 불명)
<오치쿠보모노가타리(落窪物語)> (작자 불명)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작자 :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일기, 수필 <도사 일기(土佐日記)>
<카게로우 일기(蜻蛉日記)>
<이즈미 시키부 일기(和泉式部日記)>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사라시나 일기(更級日記)>
<소우기(小右記)>

<어당관백기(御堂関白記)>
사전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

 

1-5. 장원(荘園)의 등장

일본에서의 장원제(荘園制)8세기(나라 시대)부터 16세기(전국 시대 중)까지, 특히 일본의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중앙 귀족(공가와 무가), 절과 신사라는 권문세가에 의한 사적 대토지의 도시적, 귀족적 영유 체계를 말한다. 개인의 개간이나 타인의 기진(기부)으로 커졌으며, 가마쿠라 말기 이후, 무 사들에게 침범당해 쇠락하여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과 태합검지(太閤検地, 1582~1598)로 소멸했다. 이 장원이야말로 헤이안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6-1. 율령제 이전의 대토지 소유

율령제가 있기 전에는 오오키미와 그 일족은 둔창(屯倉), 각지의 호족은 전장(田荘)이라 불리는 영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외, 호류지(法隆寺, 법륭사)와 같은 사찰의 영지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율령제 성립 후 사찰로 계승되었다.
 

1-6-2. 율령제 시기

7세기에 들어서면서 개혁적인 움직임과 함께 율령이 성립할 배경이 만들어진다. 645년부터 시작된 다이카 개신으로 646년, <개신의 조>가 발표되면서 기존의 둔창과 전장은 폐지되고, 토지는 이념상 모두 중앙으로 몰수된 뒤 다시 구분전(口分田)으로 나누어주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율령제 이전부터 그 토지를 소유하던 호족이나 일족에게 위(位)를 가진 사람에게 나눠주는 위전(位田)이나 직(職)을 가진 사람에게 나눠주는 직전(職田)으로 분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지공민제도 시행되어 이를 기반으로 반전(班田, 국가의 농지)을 백성에게 지급해주고 세금을 거둬들인 <반전수수법>도 시행되었다.
 
율령제 내에서는 모든 대토지 소유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며, 일부 황족이나 귀족은 직접 관리를 파견해 지배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긴 했는데, 이러한 율령제 내의 유사 장원 같은 토지를 고대장원(古代荘園)이라고도 부른다.
 

1-6-3. 개간 장려와 초기 장원

나라 시대 초기에는 율령에 따라 중앙정부에 의한 토지 및 민중 지배가 실시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걸쳐 국가주도의 경작지 개발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이 토지가 <반전수수법>에 근거해 대체적으로 평등하게 분배됨에 따라 일본의 인구는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8세기 초반에 국가 주도의 경작지 개발은 한계를 맞았고, 게다가 율령제에서는 개간한 토지의 세습 제도가 없었기에 새로 토지를 개발할 동기가 농민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점차 구분전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722년 나가야 왕(長屋王, 676~684) 정권에 의해 <백만정보 개간계획(百万町歩開墾計画)>이 책정되었는데, 이 계획에서는 국사(国司) 및 군사(郡司)가 농민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지급하고 10일간 개간 작업에 종사하도록 명함과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해 일정 이상의 수확을 올린 것에 대한 보상(훈위나 위계)을 정하는 등 백만정(百万町)의 양전(良田, 좋은 밭) 개간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작지의 총면적이 89만 정보라는 목표 총면적 보다 부족한 상황과 10일이라는 단기간에 경작을 해야 했다는 점, 그리고 보상이 단순히 토지가 아닌 훈위나 위계였다는 점 등에서 이 계획은 비현실적이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이듬해에는 보다 현실적이었던 농지 개간을 한 사람부터 3세대까지 개전(墾田)의 사유를 인정해 준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발표되었고, 그 결과 각지의 군사(郡司), 관리, 사원, 유력 농민 등에 의한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만 기간제였기 때문에 기간이 다 끝나갈 때쯤에는 경작 의욕이 줄어들어 조세 부담 등으로 농민들이 도망가며 세금 수입도 줄자 밭과 땅이 다시 황폐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추진책으로 743년, 간전(墾田)의 오랜 사유를 인정한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을 발표했다.

[간전영년사재법의 주요 내용]

1.
<삼세일신법>에서의 기한적 소유로 경작 의욕이 감소해 이후 간전(墾田)의 사유재산(私財)으로서의 영구적 소유를 인정함.
2. 개간 의사가 있는 자는 국사(国司)에게 신청할 것.
3. 다른 백성들에게 방해가 되는 장소의 개간은 인정치 않음.
4. 3년이 경과해도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자가 해당 땅을 개간하는 것을 인정함.
5. 위계(位階)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간전의 면적은 제한됨.
6. 국사(
国司)가 개간한 전지는 임기가 종료되었을 때 정부가 수공(収公, 공지로 가져감)함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을 가진 중앙귀족, 큰 절이나 신사, 지방의 부호(옛 호족층), 지방에 내려간 하층귀족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활발하게 개간해 대규모 토지의 사유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영구적 대토지들을 초기 장원이라고도 부른다.
 

1-6-4. 섭관정치기(摂関政治期)에서의 장원

중앙귀족, 큰 절이나 신사, 지방의 부호나 지방으로 내려간 하층귀족들이 장원을 가지며 장원의 영주가 되었는데, 이런 장원 영주 중에서 중앙 정부와 관계를 맺어 불수(不輸, 전조(田租, 전답에 매기던 조세) 면제)를 인정받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조(田租)와 관련된 권한을 가진 태정관(太政官)과 민부성(民部省)이 발행한 부(符)에 의해서 불수가 승인된 장원관성부장(官省符荘)이라고 한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호적이나 <반전수수법>에 의한 조세제도가 거의 붕괴되고, 국사(国司)가 조세납입을 청부하면 세금을 내야 하는 자가 제출하는 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국사의 역할이 강해졌다. 그중 이해관계에 얽혀 국사(国司)가 불수권(전조(전답 세금) 면제권)을 인정하는 장원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장원을 국사가 세금을 면제해준 장원이라는 뜻에서 국면장(国免荘)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 국면장은 이를 승인한 국사가 재임하던 중에만 유효했다.
 
이러던 중 농민층 중에서도 중앙정부와 결탁해 조세를 내지 않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10세기 후반부턴 국사는 전도(田堵, 유력농민층)에게 관물이나 잡역 등의 조세를 전보다 더 많이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도(田堵)는 국사와 일정한 계약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요리우도(寄人)라고도 불렀다. 한편, 조세의 대상이 되는 농지는 명전(名田)이라는 단위로 나누어 메겨졌다. 전도 중에는 국사로부터 면판(免判, 조세 면제를 해주는 판)을 발행받아 나다를 면전(免田, 조세 면제된 토지)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부담 경감을 꾀하는 사람도 나왔다. 이렇게 국사와 계약을 맺은 일부 전도가 국사로부터 조세가 면제됨을 인정받은 토지면전기인형 장원(免田寄人型荘園)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원은 전도별, 명전별로 인가되었기 때문에 영역적인 확장 없이 비교적 소규모로 경영되었다.
 
한편 이 국사라는 직책은 중앙 정부로부터 검전권(検田権)을 부여 받게 되는데, 그 결과 막강한 권한으로 치전(治田, 전도(田堵)가 개발한 소규모의 개간된 논밭)과 공험(公験, 정식으로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문서)이 빠진 장원과 사령(私領, 군사(郡司), 향사(郷司) 등의 지방 영주의 영지)를 차례차례 몰수해 국아령(国衙領, 장원이 되지 않은 정부 소유지)에 편입시켜 세수를 확보하려고도 했다. 이 역시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허다했기에 민가에서도 지방 정부에게서도 많은 고통을 떠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세입을 다른 곳에서 채워야 하는데, 당연히 힘이 약한 농민층에게 이런 세금 압박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11세기쯤부터 관료의 압박을 피해 토지를 중앙 정부의 유력 권력자에게 전지를 기진(寄進, 기부)하는 민중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기나이에서는 유력 사찰에 전지를 기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는 모두 조세 면제를 목적으로 한 움직임이었는데, 그로 인해 불수권(不輸権, 전조 면제권) 뿐 아리나 불입권(不入権, 전지 조사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되는 검전사(検田使)의 출입을 불허할 권리)을 얻는 장원도 나타난다. 이러한 권리의 확대에 의해 토지나 민중의 사적지배가 시작된다. 이는 명확히 <공지공민제>에 반하는 움직임이었다.

전도(田堵)는 면전(免田)을 중심으로 논밭을 개발해 영역적인 토지 지배를 해나갔다. 이러한 전도는 개발 영주에 포함된다. 개발 영주는 중앙의 유력 권력자나 유력 사찰에 전지를 기진(기부)하는데, 그렇게 기진(기부)받은 장원 영주는 영가(領家)라고 불렀다. 한편 전도에 의해 개발된 토지는 영주로부터 왕족이나 섭관가들보다 유력한 귀족에게 기진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기진받은 최상위의 장원 영주는 본가(本家)라고 불렀다. 이런 본가와 영가 중 장원을 실효 지배하는 영주를 본소(本所)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기진에 의해 중층적으로 소유 관계를 수반하는 장원기진지계 장원(寄進地系荘園)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장원은 기진을 받을수록 영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개발 영주들은 국사(国司)의 요리우도(寄人)로 재청관인(在庁官人, 지방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지방관료)이 되어 지방 행정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본소(本所)에서 하사(下司), 공문(公文) 등의 장관(荘官, 장원 관리직)을 맡아 소령(所領)에 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개발 영주 중에는 지방으로의 국사(国司)로 하향해 정착한 하급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 아즈마노쿠니(東国)에서는 무사 신분의 하급 귀족이 다수 개발 영주로서 토착화되어 소령(所領)의 다툼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점차 무사단(武士団)을 형성해 결속을 다져 나가 이후 막부(幕府) 정권 수립의 토대를 마련해 나갔다.
 

1-6. 무사(武士) 세력의 성장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사 중 한 명인&amp;amp;nbsp;나스노 요이치(那須与一)

부시(武士, 무사)는 일본 10~19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부케(武家, 무가)라는 전투를 가업으로 삼은 가계 혹은 혈족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종가(宗家)의 주인을 중점으로 한 가족공동체를 구성했으며, 이러한 무가(武家)의 장(長)이자 통솔자인 군사귀족을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이라고 부르며 높이 세웠다.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무사가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0세기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와 관련있다.

[무사(武士)의 유의어]

- 부시(武士, 무사) : 옛날 무예를 얻어 군사(軍事)에 종사한 신분의 사람. 중세~근세에는 지배계급이 되었다.

- 무샤(武者, 무자) : 무예에 종사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사람. 혹은 그런 집단.
- 부케(武家, 무가) : 무사(
武士) 혹은 무사(武士) 가문 (쿠게(公家, 공가)에 대응하는 말)
- 모노노베(武士) : 무용(武勇)으로써 주군(主君)을  섬기고 싸움터에서 싸우는 사람
- 고우노모노(豪の者) : 무용(武勇)에 능한 사람
- 사무라이(侍) : 무예로써 귀족이나 무가를 섬긴 자의 칭호
-
츠와모노(兵) :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전투를 업으로 삼는 자)

무사는 헤이안 시대에 발생했는데 이후 그 군사력으로 무사가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하는 사회를 구축했으며, 막말(幕末)까지 일본사를 이끄는 중심적 존재였다. 근대에 들어와 무사라는 존재 자체를 폐지했지만, 초기 메이지 정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전직 무사들이거나 그러한 공동체의 중심적 존재였었다.
 
사실 무사(武士)라는 말 자체는 헤이안 시대에 쓰이지 않았다. 대신 그와 비슷한 무샤(武者)라는 말은 헤이안 시대 중기에 편찬된 <고산사본고왕래(高山寺本古往来)>에서 보이고, 12세기에 발간되었다고 알려진 <금석이야기집(今昔物語集)>에서는 그런 사람을 츠와모노(兵)나 고우노모노(豪の者)라고 불렀다. 겐페이 전쟁(1180~1185)이 있었던 12세기 말에도 그들을 주로 무샤(武者)나 큐센노하이(弓箭の輩)라고 지칭했다. 이후 무사들이 세운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서도 이들은 조정에서 일하는 쿠게(公家, 공가)에 대응해 부케(武家)라고 불렀지, 무사(武士)라는 말은 꽤 뒤에 나타났다.
 
이러한 무사의 기원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개인땅을 가진 개발 영주가 농업에 저항하는 휘하 농노와 해당 땅에 개입하려는 수령에 대응하기 위해 무장한 농원주에서 기원했으며, 일부 상급 무사나 조정과 원(院, 상황(皇)) 등의 권문세족과 밀접한 무사는 원래 무예를 닦는 고위 직군에서 유래했다. 한편 이런 직군 중 국아군(国衙軍)가 같이 지방에서 활약한 세력도 있었는데 이런 지방 유력가문의 기마병과 같은 직군에서 지방 무사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중 지방 무사단은 7세기 중앙집권제 강화를 위해 조직된 걸로 보여지며, 여기엔 농민 출신의 보병과 지방 유력 가문의 기마병 등이 합세한 것으로 본다. 한편, 중앙의 고위 직군에서는 원래 무예를 닦던 사람들이 후에 상급 무사가 된 것으로 본다.

지방에서의 무사 중앙에서의 무사
후지와라씨를 피해 지방으로 온 귀족의 호위무사
지방에서의 반란을 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군사귀족
10~11세기 전국에서 진행된 토지 개발을 계기로 지방의 영지를 지배하는 유력한 개발영주(재지영주)로 변모

-> 무사는 직업적 전사이자 토지를 개발 경영하는 지방영주
10세기 중엽 이후 지방에서의 대규모 반란 발생. 이를 무사 세력을 동원하여 진압. 그 진압한 자 중 공을 세운 자들은 수도에 올라와 국정의 경비나 귀족의 호위를 담당하게 됨.

사무라이(侍)는 '귀족을 호위한다'는 뜻인데, 이 말이 일본의 무사 자체를 뜻하는 말로 굳어짐.

 

1-7. 인세이(院政)의 시작과 무사의 중앙 진출

인세이(院政, 원정)덴노가 황위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상황(태상천황)이 되어 정무(政務)를 덴노 대신 직접 행하는 형태의 정치를 말한다. 사실 중국에서 당 현종이 안사의 난으로 황태자 당 숙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거나, 조선 고종이 다 커서도 흥선대원군이 정무를 본다던지 하는 일들이 다른 동아시아에도 있었지만, 일본의 인세이는 하나의 관례였다는 특징이 있다. 
 
덴노가 황위를 물려주면 그 덴노는 상황(上皇)이 되고, 상황이 출가하면 법황(法皇)이 된다. 이 상황(上皇)을 원(院)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래서 이 원(院)이 정무(政)를 대신 본다는 뜻에서 원정(院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인세이 시대(원정 시대)

1086년, 시라카와 덴노가 양위해 시라카와 상황이 된 날부터 헤이케(平家)가 멸망한 1185년경까지를 인세이 시대(院政時代, 원정 시대)라고 부른다.
 
원래 황위는 종신제로 되어 있었고, 황위 계승은 덴노의 붕어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헤이안 시대 이전 코교쿠 덴노(皇極天皇, 594~661) 이후 지토 덴노(持統天皇, 645~703), 겐쇼 덴노(元正天皇, 680~748), 쇼무 덴노(聖武天皇, 701~756) 등 황위를 생전에 양위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으나, 이는 당시 황위 계승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위라는 의사 표시를 통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황자에게 황위 계승을 시키기 위해 취해진 방법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인세이(院政)라는 정치 방식이 등장할 수 있었긴 했다.

참고] 코교쿠 덴노, 지토 덴노, 겐쇼 덴노, 쇼무 덴노의 생전 양위 이유

코교쿠 덴노, 지토 덴노, 겐쇼 덴노 : 모두 여제(女帝)이었으며, 황위계승자로서의 성인 남성 황족이 나타나기까지의 중간계투에 불과했다는 사정이 있었음.

쇼무 덴노 : 국가적 계획이었던 도다이사 건립에 전념하기 위한 사정 등이 존재했음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도 사가 덴노(嵯峨天皇, 786~842), 우다 덴노(宇多天皇, 867~931), 엔유 덴노(円融天皇, 959~991) 등의 사례에서도 생전 양위를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아직 덴노를 후견한다며 국정에 관여하긴 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조직이나 재정적, 군사적 뒷받침이 불충분 했기에 인세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이 또한 인세이가 나타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던 중 1068년, 고산조 덴노(後三条天皇, 1034~1073)의 즉위는 이런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헤이안 시대를 통틀어 황위 계승의 안정이 큰 정치적 과제로 여겨졌고 이 가운데 황통(皇統, 덴노의 계통)을 이치조 덴노계(一条天皇系)로 통일하는 흐름 속에서 고산조 덴노가 즉위한 것이다. 고산조 덴노는 우다 덴노 이후 섭관가(摂関家)였던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를 외척으로 두지 않은 170년 만의 덴노였기에 외척 지위를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던 섭관 정치가 여기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외척에 섭관가가 없는 강점을 가지고 즉위한 고산조 덴노는 1072년, 시라카와 덴노(白河天皇, 1053~1129)에게 생전 양위를 하고 인세이를 하려고 했으나 결국 병사하여 일찍 죽고 말핬다.
 
시라카와 덴노의 어머니는 간인류(閑院流)로 섭관가가 아니었으므로, 시라카와 덴노 또한 아버지처럼 섭관가의 힘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8살이 되었을 1087년에 호리카와 덴노(堀河天皇, 1079~1107)에게 덴노의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이 직접 태상천황(太上天皇, 상황)이 되어, 어린 덴노의 후견인으로서 스스로를 시로카와인(白河院)이라고 부르며, 계속 정무를 맡으며 실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인세이의 공식적인 시작이다.
 
중앙정부의 유력한 지배자를 의지한다는 것이 장원이 형성될 때의 대원칙이었다. 여기서 중앙정부의 유력한 지배자로서 가장 고위에 군림하는 자를 상황(上皇)이 된다. 그 덕에 상황의 밑에는 전국에서 많은 장원이 기진(寄進, 기부)되었다. 다만, 덴노는 율령(律令)에 명시된 공시공민(公地公民)을 구현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덴노는 사유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덴노 자리를 양위해 상황이 되었다고 한들, 직접적인 사유지인 장원을 스스로 축적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황은 홋쇼지(法勝寺)와 같은 대사원을 건립해 이 대사원을 통해 장원을 축적했다. 물론, 이러한 대사원의 재산을 지배하는 자는 상황이었으니 사찰의 장원은 곧 상황의 장원이나 다름없다. 이리하여 엔세이를 행하는 상황(上皇)은 최대의 장원영주가 되었고, 이후 그 장원을 관리하는 근신과 무사들에게도 그 대가로 토지를 하사하는 식으로 분배하며 권력을 표현했다. 한편, 상황은 당시 후지와라씨의 우지데라였던 고후쿠지(興福寺)나 장원을 확장해 부를 축적한 엔랴쿠지(延暦寺)와 같은 대사원의 무장세력 대항을 위해 무사를 고용하여 경호와 진압을 맡겼다.
 
잘만 운용되면 덴노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제도였겠지만, 황실의 사정으로 오히려 이 인세이는 현재 덴노와 상황과의 갈등 문제로 번져 결국 헤이안 시대의 종말과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을 맞이하는 덴노나 천황가로서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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