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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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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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스카 시대 정리

아스카 시대
(6세기~7세기 말)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왕조 시대
한반도 도래인이 집단 거주하며 지역 개발 주도
유력 호족 세력을 배경으로 한 권력 집중 발생 
야마토 왕조
(야마토 왕권)
4세기 초, 긴키 지방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수장 세력 형성
6세기 초, 게이타이 대왕 때 본격적인 전제 왕권 수립
게이타이 대왕 사후 발생한 분열을 긴메이 대왕이 잠재우고 호족 세력을 이용
오오미 소가씨 + 무라지 모노노베씨의 연합체제
불교 수용을 두고 소가씨 vs 모노노베씨
씨성제도 우지(氏) : 씨족 집단 명칭
카바네(姓) : 야마토의 대왕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신분/집안의 격

우지 + 카바네
불교 수용 6세기 중반 백제에서 전래
소가씨의 불교 수용 노력
아스카 문화(귀족 중심의 불교 문화) 등장
소가씨 불교 수용 항쟁에서 승리 후 조정의 대표자격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
(스슌 대왕 추존 및 폐위, 스이코 대왕 추존 및 쇼토쿠 태자 보좌역으로 세움)
7세기 중엽까지 조정의 실질적인 지배자
친백제 노선 (백제 도래계 씨족이라는 가설 존재)
견수사를 파견해 대중국 관계를 재개
아스카 문화 불교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관련 도래 문화
우지데라(氏寺) 건립
6세기 말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 건립
고류지 목제 반가 사유상
호류지 금당 벽화
다이카 개신 을사의 변(645)  -> 소가씨 타도 -> 고토쿠 덴노의 국정 쇄신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의 주도
친백제 노선 -> 친당/친신라 노선
공지공민제
대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 성립
한반도와의 관계 한반도 국가들의 갈등 상황은 야마토 왕조에도 영향(친백제 노선파 vs 친신라 노선파)

백(촌)강 전투(663) : 백제, 왜 vs 신라, 당 -> 참패 후 많은 백제 유민들의 망명

나당 연합군 막기 위해 망명한 백제인의 기술을 이용해 요충지마다 산성 축조
초창기 고대 일본은 한반도 등의 주변 국가의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적 후진국처럼 보이지만 독자적 문화 형성해 나아감

고대 일본은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이었음
절대군주로서의 덴노 임신의 난(672) 제압한 텐무 덴노는 스스로를 신격화함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덴노가의 우지가미(氏神, 씨신), 역사 정리 사업(<고사기>, <일본서기>)
또한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체제 정비에 필요한 율령 지식을 전수받음
덴노를 세습 군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군주제 국가 완성
일본 국호의 성립(다이호 율령(701)로 공식화)

 

1.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되며 아스카 시대가 끝나다

1-1. 임신의 난(672) 이후의 텐무 덴노

텐지 덴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오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와 그의 아들로 막 즉위한 고분 덴노(弘文天皇)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이 672년에 일어난 임신의 난이다. 이 싸움은 지방 호족의 힘을 얻는 오오아마 황자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곧 텐무 덴노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 정비에 힘쓰게 된다.

 

이후 잠시 임신의 난을 정리하기 위해 원래 수도인 오우미노오오츠노미야(近江大津宮)에 잠깐 있다가 곧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로 천도했고, 이곳에서 이전에 텐지 덴노가 세웠던 관인(官人)등용과 관련된 법이나 내세 개혁을 위한 <갑자의 선(甲子の宣)> 등을 폐지하고, 귀족과 신사, 절이 가지고 있는 땅(산, 섬, 항구, 수풀, 못 등)을 국가의 것으로 반환시켰으며, 기나이(畿内) 바깥의 호족과 재능이 있는 백성을 관직으로 등용시키는 등의 제도 개혁을 진행했다.

 

681년에는 율령 편찬을 지시하고 후에 만들어질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원전이 될 <제기(帝紀)>, <구사(旧辞)> 등의 역사서를 편찬할 것도 지시하게 된다. 그러나 텐무 덴노는 686년에 사망하게 되었다. 이후 689년, <아스카키요미하라 령(飛鳥浄御原令)>이 발표되어 고대 일본의 율령 중 령(令)의 기초를 닦는 준비도 마치게 된다. 이후 덴노의 자리에 690년에 그의 황비였던 지토 덴노가 앉게 된다.

 

1-2. 지토 덴노의 후지와라쿄로의 천도

690년에 즉위한 지토 덴노는 경인연적(庚寅年籍) 작성을 시작해 본격적으로 백성을 통치할 기준을 확대했으며, 692년경에는 다이카 개신으로 제정된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를 기초로 한 반전수수법(班田収授法, 정부가 토지를 양인, 노비에 나눠주고 6년에 1번 세금을 걷는 제도)을 실시했다.

[조방제(条坊制)와 조방(条坊)]

조방제(条坊制)중국, 한국, 일본의 궁성(宮城) 도시에서 보이는 남북중앙에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두고, 조(条, 동서로 난 큰 길), 방(坊, 남북으로 난 큰 길)을 바둑판의 눈 모양으로 조합한 좌후대칭 사각형(方形) 도시계획을 말한다.

앞서 말했듯, 조(条)동서로 난 대로를 말하며, 방(坊)남북으로 난 대로를 말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텐무 덴노(天武天皇)가 새로운 성을 쌓을 것을 착수했고, 이후 경사(京師, 서울)로 순행했다는 기술이 종종 보인다. 실제로 텐무 덴노가 순행하거나 성을 지으라고 한 곳이 어디인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규격이 다른 조방(条坊) 등으로 미루어 후지와라쿄(藤原京)의 축조가 텐무 덴노 때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입장이 유력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의 천도. 694년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에서 후지와라쿄로 천도했고, 710년에는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세이쿄로 천도했다. (출처 : sankei.com)

한편 수도 부문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텐무 덴노 사후에 일단 중지된 궁정 축조 공사는 690년 즈음 재개되어 694년에 지토 덴노(持統天皇)가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에서 새로운 성으로 천도했는데 이 때부터 그 새로운 성을 후지와라쿄(藤原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천도한 후지와라쿄에서 지토 덴노, 몬무 덴노(文武天皇), 겐메이 덴노(元明天皇)가 거주했다. 후지와라쿄가 세워질 때까지 덴노마다 혹은 1대의 덴노가 여러 번 천도가 이뤄졌던 관례가 있었는데, 후지와라쿄가 수도로 자리잡은 뒤부터 덴노 3대간 천도가 없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시대 수도 재위 덴노(재위 기간)
아스카 시대 오우미노오오츠노미야(近江大津宮, 667~672) 텐무 덴노(673~686)
아스카노키요미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 672~694)
지토 덴노(690~697)
후지와라쿄
(藤原京, 694~710)
몬무 덴노(697~707)
겐메이 덴노(707~715)
나라 시대 헤이죠쿄(平城京, 710~740/745~784)

 

1-3. 몬무 덴노의 치세

지토 덴노가 사망하고 그 자리에 몬무 덴노(文武天皇)가 앉게 된다. 그가 즉위해 있던 701년에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제정되어 처음으로 율(律, 형벌규정)과 령(令, 행정규정)으로 이뤄진 일본 고대 국가의 기본법의 근간을 만들게 된다. 참고로 이 <다이호 율령>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는 일본(日本), 지도자는 천황(天皇)이라는 개념이 공식 확정되었다.

 

이듬해 당에 견당사를 보내 일본 국호의 한자 표기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꿨다고 전하며, 공식적으로 이때부터 이 일본 열도를 핵심적으로 이끌던 국가의 이름이 일본국(日本国)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외 그때 그때 분위기따라 기록된 원호(元号)도 공식화, 문서화시켜 오늘날의 일본의 연호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혼란스러웠던 관위 12계(冠位十二階)를 고쳐 새롭게 관위제(官位制)로 개편했다.

 

2. 나라 시대(710~784/794)

2-1. 나라 시대의 범위와 특징

나라 시대(奈良時代)현재 나라현에 있었던 헤이조쿄(平城京)를 도읍의 중심으로 삼았던 시대를 말한다. '도읍이었다'라고 하지 않고 '도읍의 중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라 시대에도 천도가 잦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좁은 의미에서는 겐메이 덴노가 헤이조쿄로 천도한 710년부터 칸무 덴노가 나가오카쿄로 천도한 784년까지를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710년부터 칸무 덴노가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까지를 말한다.

 

707년, 몬무 덴노 때부터 이미 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707년에 즉위한 겐메이 덴노는 결국 710년 중국 장안을 본뜬 도읍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정비가 된 헤이조쿄로 천도하게 된다. 이미 헤이죠코 천도 직전엔 일본이 율령국가,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나라 시대에는 덴표 문화(天平文化)와 같은 독자적 불교 문화가 꽃피게 된다.

 

이 시기 율령국가로서 호적과 계장(計帳, 호적식 대장)으로 백성을 파악하고, 조용조(租庸調)로 군역을 부과하며 백성과 역무를 정립했다. 외교적으로는 견당사를 보내거나 신라, 발해와 교류하며 새로운 국제적인 문물을 이후의 다른 시대보다도 많이 접하기도 했다. 전국에 고쿠분지(国分寺, 국분사)를 세워 불교적 덴표 문화가 번성해 종교적으로 큰 번영을 이루는 한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엽집(万葉集)>과 같은 현존하는 일본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사서나 문학이 등장하기도 해 역사, 문화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정치적 분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도호쿠 지방에서는 에조(蝦夷)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분쟁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스카 시대 말기, 나라 시대의 덴노

한편 왕위는 덴무 덴노와 지토 덴노의 직계 후손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져 덴노의 신성함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근친혼이 반복되었다. 그 결과 덴무 덴노와 지토 덴노의 직게 황자들은 상당수 병약하고 잇따라 일찍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덴무 덴노의 직계 후손들에 의한 왕위 계승 불안정은 8세기에 다양한 정치적 분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덴무 덴노의 직계의 단절이 일어나 스스로 붕괴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2-2. 잦은 천도

시대 수도 재위 덴노(재위 기간)
아스카 시대 후지와라쿄(藤原京, 694~710)
(현재의 나라현)
지토 덴노(690~697)
몬무 덴노(697~707)
겐메이 덴노(707~715)
나라 시대 헤이조쿄(平城京, 710~740)
(현재의 나라현)
겐쇼 덴노(715~724)
쇼무 덴노(724~749)
쿠니쿄(恭仁京, 740~743)
(현재의 교토부)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743~744)
(현재의 시가현)
나니와쿄(難波京, 744~745)
(현재의 오사카부)
헤이죠쿄(745~784)
(현재의 나라현)
코켄 덴노(749~758)
준닌 덴노(758~764)
쇼토쿠 덴노(764~770)
코닌 덴노(770~781)
칸무 덴노(781~806)
나가오카쿄(長岡京, 784~794)
(현재의 교토부)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平安京, 794~1180/1180~1868)
(현재의 교토부)
헤이제이 덴노(806~809)

나라 시대 때는 천도를 꽤 자주 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사건들을 겪어 위축된 왕권의 강화를 위한 전략적 천도였다고 보거나 신도(神道)적 관념의 영향, 자연 재해 등이 복합적으로 엮여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헤이조쿄 이후의 첫 천도는 쿠니쿄(恭仁京)였다.

740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가 정권에 불만을 품고 규슈의 다자이후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래 진압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藤原広嗣の乱)이 일어나 그 이후 쇼무 덴노는 당시 우대신(右大臣)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의 권고로 그의 본거지였던 쿠니쿄로 천도하게 된다.

 

쿠니쿄에서 약 3년을 있다가 곧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다시 천도했는데, 이 때는 불교적 목적이 강했다. 특히 이 지역에 세워진 도다이사의 노사나 대불은 더더욱 당시 불교를 깊게 믿었던 쇼무 덴노에게는 최고의 도읍 선택지였을 것이다.

 

744년에는 나니와쿄(難波京)로 천도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야마토 왕권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미약한 발굴 조사 결과(비정지가 현재 거주지이기 때문에 큰 발굴 조사를 못하고 있음), 해자와 같은 시설이나 많은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계획적인 도시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 1년 정도 있다가 다시 헤이죠코로 환도한다.

 

2-3. 나라시대의 불교 융성

여러 지역에 세워진 고쿠분지(국분사)와 도다이사(동대사)에 지어진 노사나 대불

8세기 중반 잦은 천도와 역병, 천재지변, 중앙 황족 및 귀족들의 불만 등으로 사회 불안이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불교를 깊게 믿었던 쇼무 덴노는 불법으로서 국가를 안정시킨다는 진호국가사상(鎮護国家思想)에 빠져 사회의 동요를 불교로써 막으면서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741년에 전국에 고쿠분지(国分寺, 국분사) 건립을 명했고, 743년에는 도다이사에 노사나 대불(盧舎那大仏)을 지을 것을 명했다(대불은 752년에 완성). 물론 이로 인한 과중한 조세부담으로 조정의 공적 재원이 고갈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들은 나라 시대에 불교가 거의 국교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4.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과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이 사이 코묘 황후(光明皇后, 쇼무 덴노의 황후)의 신임을 얻은 후지와라 남가(藤原南家)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 仲麻呂)가 대두되어 황후를 위한 자미중태(紫微中台)를 조직해 755년, 타치바나노 모로에로부터 실권을 빼앗았고, 757년에는 타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 奈良麻呂)가 이에 분개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를 멸하고 덴노의 폐위를 기도하려고 하다가 밀고로 인해 잡혀 내쫓겨진다(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이로 인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독재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준닌 덴노를 꼭두각시 덴노로 옹립했다. 그러나 760년 후지와라 남가를 후원하던 코묘 황후가 사망하면서 일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코묘 황후의 병간호를 위해 덴노 자리를 양위했던 코켄 상황(孝謙上皇)은 자신이 아플 때 돌봐줬던 승려 도경(道鏡)이 얻게 되면서 코겐 상황 + 도경 vs 준닌 덴노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대결 구도가 형성된다. 결국 승려 도경의 힘을 조정에서 제외시키려고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사망하고 그가 세웠던 준닌 덴노도 유배된다(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그렇게 코겐 상황은 다시 쇼토쿠 덴노로 복위한다.

 

2-5. 우사하치만궁 신탁 사건과 코닌 덴노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승려 도경(道鏡)은 이윽고 765년에는 태정대신선사(太政大臣禅師)라는 직책을, 766년에는 법왕(法王)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자신의 일족과 자신을 따르던 승려들을 고위 관리로 등용하며 권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사이다이지(西大寺, 서대사)와 백만탑(百万塔)을 조성하며 불교에 의한 정권 안정화를 꾀했다.

 

769년에 쇼토쿠 덴노와 도경은 우사하치만궁(宇佐八幡宮)에 신탁을 받았다며 도경을 왕위계승자로 옹립하려 했지만,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와 와케노 키요마로(和気清麻呂) 등의 저지로 쇼토쿠 덴노가 사망한 770년에 도경이 실각된다(우사하치만궁 신탁 사건). 그렇게 8세기 후반 승려 도경의 집권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런 정국 속에서 770년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의 후지와라노 나가테(藤原永手), 후지와라 식가(藤原式家)의 후지와라노 요시츠구(藤原良継)와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이 텐지 덴노의 후손이었던 코닌 덴노(光仁天皇)를 옹립하면서 정계에 눈부시게 진출하게 된다. 즉위한 코닌 텐노는 관인(官人)의 수를 줄이며 재정 긴축에 힘썼고, 국사(国司)와 군사(郡司)에 대한 감독을 엄격히 해 지방 정치를 엄격히 바로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780년에는 도호쿠 지방의 무쓰노쿠니(陸奥国)에서 코레하리노 오자마로(伊治呰麻呂)가 반란을 일으키는(호우키의 난(宝亀の乱)) 등 에조의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2-6. 나가오카쿄에서 헤이안쿄로(헤이안쿄로의 천도)

784년, 불교 중심의 정책으로 점차 강해져 온 사찰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코닌 텐노 사후 즉위한 칸무 덴노가 처음엔 나가오카쿄(長岡京)를 조성하고 천도했으나, 이듬 해 공사 담당자였던 후지와라노 타네츠구(藤原種継)가 화살에 맞아 암살되고(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 이에 연루되었다고 여겨진 덴노의 동생 사와라 친왕(早良親王)가 유배당하게 된다. 이러한 일로 인해 794년, 칸무 텐노는 새로운 도성을 지방 호족들의 자원과 노동력을 투입해 조성하고 헤이안쿄(平安京)라고 이름 붙여 천도하게 된다. 이렇게 나라 시대는 완전히 끝나고 새롭게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다. 이 헤이안쿄는 조방제에 따라 만들어진 일본의 마지막 수도였으며, 이곳에서부터 도호쿠 지방의 에미시 정벌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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