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일본의 선사~고대 시대 요약 정리
일본 열도의 형성 | 일본 열도의 구성 :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쿠 등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 -> 빙하기로 인해 약 2000만 년 전부터 갈라지기 시작 -> 약 1만 년 전에 오늘날의 해안 지형을 갖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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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조몬 시대 (-15세기~ -3세기) |
수렵, 채집, 어로 수혈주거 동일본 이북 지역 중심 농경이 수반되지 않은 줄무늬(縄文)토기 대거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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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 (-3세기 ~ 3세기) |
서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시작 -> 농경을 핵심으로 한 생산 경제 체제로 진입 한반도 남부 지역 등에서 이식된 문화 쿠니(國, 정치적 공동체)와 수장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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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 (-3세기 ~ 3세기) |
왜(倭) |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 일본 열도와 그 정치 체제를 부르던 명칭 | |
한위노국왕인 (57년) |
한이 위노국(혹은 노국)의 조공에 대한 답례로 하사한 금인 | ||
야마타이국 (2~3세기) |
3세기경 여왕 히미코가 다스림 친위왜왕 칭호/금인 (239) 철을 얻기 위해 한반도와 교류 위치에 대해선 규슈설과 키나이설이 대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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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 (4세기 ~ 6세기 말) |
거대 무덤의 출현(토우, 해자 등 존재) 전방후원분(다이센 고분 등) 후기로 갈수록 작고 평범한 돌방무덤으로 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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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 (4세기 ~ 6세기 말) |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교류 | 칠지도(4세기) : 백제 증여설 광개토대왕릉비(5세기) : 고구려와의 갈등 왜 5왕 중 무의 <상표문> : 고구려와의 갈등 왜의 수장이 백제, 가야 등과 손잡고 한반도에 관여 |
1. 아스카 시대(592~710)
아스카시대(飛鳥時代)는 6세기~7세기 말에 현재의 나라현 타가이치군(다카히치군)의 아스카(飛鳥) 지역을 중심으로 한 왕조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지에 대해 크게 3가지 이견이 있어 그 3개의 시간대 구분을 정리해봤다.
아스카 시대 | |
시작 | 종료 |
나니와 궁(難波宮)이나 아스카(飛鳥)에 궁도(宮都)가 설치됨 (음력 592년 12월(양력 593년 1월)) |
헤이죠쿄(平城京) 천도 (710) |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의 섭정 시작 (593년) |
후지와라쿄(藤原京) 천도 (694) |
헤이죠쿄(平城京) 천도 (710) |
아스카(飛鳥)라는 명칭은 현재의 나라현 타가이치군(高市郡) 아스카촌(明日香村) 부근에 해당하는 아스카(飛鳥) 지역에 궁궐(宮)과 도읍(都)이 놓여 있었다고 여겨지는데서 유래했다.
아스카 시대의 역대 덴노와 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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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재위시기, 칭제 시기 | 덴노 혹은 칭제 호칭 |
642~645 | 고교쿠 덴노(皇極天皇) | |
다이카(大化, 645~650) | 645~654 |
고토쿠 덴노(孝徳天皇) |
하쿠치(白雉, 650~654) | ||
- | 655~661 | 사이메이 덴노(斉明天皇) |
- | 661~668 | 나카노에노 황자(中大兄皇子) (=텐지 덴노) |
- | 668~672 | 텐지 덴노(天智 天皇) |
- | 672 | 고분 덴노(弘文天皇) |
슈쵸(朱鳥, 686) | 673~686 | 텐무 덴노(天武天皇) |
- | 686~690 | 우노노사라라/우노노사사라(鸕野讚良) (=지토 덴노) |
- | 690~697 | 지토 덴노(持統天皇) |
다이호(大宝, 701~704) | 697~707 |
몬무 덴노(文武天皇) |
케이운(慶雲, 704~708) | ||
707~715 |
겐메이 덴노(元明天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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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도(和銅, 708~715) |
고훈 시대 말기의 5세기에 씨성제도에 기초한 부민제(部民制, 왕권에의 종속, 봉사, 업무의 분담을 규정한 야마토 왕권의 제도)가 보급되던 중 6세기 초중반경 백제 성왕이 당시 왜에 백제를 전파했다.
킨메이 덴노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百濟) 성명왕(聖明王) [고쳐서 성왕(聖王)이라고도 부른다.]이 서부(西部) 희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누리시치케이)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釋迦佛金銅像) 1구(軀), 번개(幡蓋) 약간(몇 기), 경론(經論) 약간 권(몇 권)을 드렸다.
- <일본서기 킨메이 덴노조>
당시 오오키미(大王)의 불교 귀의에 대해 찬성하는 숭불파 소가씨(蘇我氏)와 오오키미의 불교 귀의에 반대하는 배불파 모노노베씨(物部氏)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소가씨의 편을 들며 무력 항쟁을 벌인 끝에 모노노베씨를 멸망시켰다.(정미의 난(丁未の乱)). 이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아래 부분에 다시 자세히 다루겠다. 모노노베씨를 멸망시킨 소가씨는 약 반세기 동안 오오오미(大臣)로써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소가씨는 스슌 덴노(崇峻天皇, ? ~ ?)가 즉위시켰고, 그가 즉위한 588년에 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 ? ~ 626)가 아스카 지역에 일본 최초의 절인 호우코우지(法興寺, 현재의 아스카데라(飛鳥寺))를 건립을 시작했다.
그런데 즉위한 스슌 덴노와 소가노 우마코 사이에 점점 불화가 생겼고, 결국 야마토노아야노 코마(東漢 駒, ~592)를 시켜 스슌 덴노를 암살시켜버렸다... 덴노가 암살당한 뒤 일본 최초의 여제라고도 여겨지는 스이코 덴노(推古天皇, 554~628)을 덴노로 즉위시키고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 쇼토쿠 태자)를 황태자로 세워 섭정으로 즉위시켰다. (소가씨가 당시 덴노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힘이 막강했으며 7세기 중반까지도 조정의 실질적 지배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게 아스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당시에 아스카 지역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며 지역 개발을 주도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그렇게 발전한 불교적 색채가 강한 귀족 중심의 문화를 아스카 문화(飛鳥文化)라고 한다.
중국 대륙이나 인도에서 유입된 선진 문화 등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파된 국제성이 풍부한 이 문화로 대형 사원이 건립되고 한문이 널리 쓰이게 되며 왜(일본) 또한 한자문화권으로 자리잡게 된다.
1-1.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 大和王権)
[야마토 왕권의 특징] 1. 오오카미(大王)와 호족(豪族)의 연합 정권 2. 씨성제도(氏姓制度) |
시기 | 시대 명칭 | 정권 명칭 |
~ 1970년대 | 야마토 시대(大和時代) |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
1970년대 ~ 1980년대 | 고훈 시대(古墳時代) (+ 야마토 시대(大和時代)) |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 야마토 정권(大和政権) |
1980년대 ~ |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 大和王権) (+ 야마토 정권(大和政権),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
1-1-1. 야마토 왕권의 특징 - 오오카미(大王)와 호족(豪族)의 연합 정권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 大和王権)은 고훈 시대(3세기 중반(혹은 4세기) ~ 6세기말(혹은 7세기)에 키미(王) 혹은 오오키미(大王) 등으로 불리던 왜국(倭国)의 수장(首長)을 중심으로 여러 유력 호족이 연합해 성립한 정치권력이자 정치조직을 말한다.
[야마토 왕권의 흐름] | ||
4세기 초 | 긴키 지방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호족+오오키미 형태로 수장 세력 형성 | |
6세기 초 | 게이타이 덴노(継体天皇) 때부터 본격적인 전제 오오키미(大王) 왕권 수립 게이타이 덴노 사후 분열 발생 긴메이 덴노(欽明天皇)가 분열을 잠재우고 호족 세력을 이용하기 시작(야마토 왕권의 안정화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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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왕권의 특징] | ||
1. 오미(臣)였던 소가씨(蘇我氏)와 무라지(連)였던 모노노베씨(物部氏)가 축이 된 연합 체제 2. 불교 수용 문제로 소가씨(蘇我氏) vs 모노노베씨(物部氏)의 대립 구도 형성 |
앞서 야마타이국은 히미코라는 여왕 한 명이 30여 개의 소국을 거느리는 체계였다.
그에 반해 야마토 왕권은 긴키 지방의 야마토(현재의 나라현 북부)의 호족들이 연합 정권을 성립시킨 것인데, 그 연합 정권의 수장으로 있던(정점에 있던) 자가 오오키미(大王)였다. 이 오오키미는 유력 호족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권력의 집중이 발생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4세기부터 7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그에 따라 오오키미(大王)는 세대를 거쳐 교체되었다. (나중에 이 오오키미(大王)들을 덴노(天皇)라고 부르게 된다.) 이 체계는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으로 덴노 중심의 정치가 성립될 때까지 이어졌다.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성립되고 덴노(天皇)라는 명칭이 법제화되었으며, 이 때부터 덴노가 정치를 하는 조정(朝廷)에 2관 8성을 두었고, 나아가 지방도 조정이 다스리게 된다.
이 야마토 왕권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2세기 말에서 3세기에 걸쳐 오사카 평야부터 야마토 분지에 있었던 세력, 키비노쿠니(吉備国)를 비롯한 세토우치 지방(瀬戸内地方)나 시코쿠(四国), 산인 지방(山陰地方), 키타큐슈(北九州)를 포함한 서일본(西日本), 도카이 지방(東海地方) 등 지역을 초월한 세력이 연합해 야마토 분지 동남부의 현재의 마키무쿠 유적(纒向遺跡)이 있던 땅에 성립해 3세기 후반~5세기까지는 토우호쿠 지방(東北地方)의 남쪽에서 미나미큐슈(南九州)까지 일본 열도에서의 넓은 범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보는데 이 범위가 전방후원분이 분포한 지역과 비슷해 전방후원분 체제(前方後円墳体制)라고도 불린다. 특히 규슈의 에다후나야마 고분과 간토 지방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고 적힌 철검이 발견되어 대략적인 야마토 왕권의 세력 범위를 위 그림처럼 추정해 볼 순 있다. 어찌되었든 이 시점에서는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완만한 정치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1-1-2. 씨성제도(氏姓制度)
씨성제도(氏姓制度)란 고대 일본에서 중앙 귀족과 지방 호족의 국가에 대한 공헌도, 조정 정치 상에서의 점하는 지위에 대해 조정으로부터 우지(氏)와 카바네(姓)라는 이름(名)을 수여받아 그 특권적 지위를 세습한 제도를 말한다. 여기서 우지(氏)는 동족 중심의 집단에 이름을 붙인 것을 말한다. 현재 한국의 성(姓)과 같은 개념이다. 또, 카바네(姓)는 그 가족에게 주어지는 등급을 말한다. 오미(臣)가 가장 높고, 그 다음 무라지(連) 순으로 내려간다. 이러한 제도는 오오키미(大王) 중심의 지배 체제 구축 과정에서 성립하게 되었다.
또한, 위 사진은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임나(가야) 출신의 성씨를 정리한 그림인데, 오른쪽에 보면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오치노오비토(大市首), 시미즈노오비토(清水首), 다타라노키미(多多良公)와 같이 우지(氏) + の + 카바네(姓)의 형태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지배층은 우지+카바네(우지+の+카바네)로 자신의 성을 표현했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혈연관계 집단에 신분(rank)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제도에 따르면 '가계=신분'이었던 셈이다. 이후 쇼토쿠 태자가 603년에 발표한 관위 12계(冠位十二階)를 제정할 때까지 이 씨성제도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카바네(姓) | 우지(氏) | 직위나 위치 |
오미(臣) | 소가씨(蘇我氏), 코세씨(巨勢氏), 키씨(紀氏), 헤구리씨(平群氏), 카츠라기씨(葛城氏), 하타씨(波多氏), 아베씨(阿倍氏), 기비씨(吉備氏), 이즈모씨(出雲氏), 호즈미씨(穂積氏) 등 | 야마토 왕권을 구성하는 유력 호족이나 지방의 유력 호족 |
무라지(連) |
오오토모씨(大伴氏), 모노노베씨(物部氏), 나카토미씨(中臣氏), 하지씨(土師氏), 유게씨(弓削氏), 오와리씨(尾張氏) 등 | 특정한 직무나 지위로 야마토 왕권을 지탱하는 호족 |
키미(君/公) | 오키나가씨(息長氏), 케노씨(毛野氏), 타지히씨(多治比氏), 츠쿠씨(筑紫氏), 미와씨(三輪氏) 등 | 지방의 유력 호족, 일부 황족 |
아타이/아타에(直, 費, 費直) | 오오시코우치씨(凡河内氏),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 등 | 쿠니노미야츠코(国造) 등을 맡은 지방 호족 |
미야츠코(造) | 아나호베씨(穴穂部氏), 우마카이베씨(馬飼部氏), 키누누이베씨(衣縫部氏), 야하키베씨(矢作部氏) 등 | 덴노나 조정(왕정)에 속한 업무 부서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토모노미야츠코(伴造) |
오비토(首) | 아코베씨(赤染部氏), 아마베씨(海部氏), 임베씨(忌部氏), 카와치노후미씨(西文氏), 시키(志紀氏), 야마베씨(山部氏) 등 | 일부 토모노미야츠코(伴造) 호족, 도래인계 호족, 아가타메시(県主)를 맡고 있는 지방 호족 |
1-2. 소가씨(蘇我氏)와 불교 수용
아스카 시대의 창립과 야마토 왕권의 뒷배경에는 소가씨(蘇我氏)가 있었다. 우지(氏)는 소가(蘇我/宗賀/宗我/巷奇)이며, 카바네(姓)는 오미(臣)였다.
전설에 따르면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三韓征伐) 등에서 활약했다는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 宿禰)가 그 조상이라고 한다. 사실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 宿禰)는 소가씨(蘇我氏) 말고도 고대 일본의 중앙 유력 호족이었던 키씨(紀氏), 코세씨(巨勢氏), 헤구리씨(平群氏), 카츠라기씨(葛城氏) 등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사람 자체가 유력 호족의 대표격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미 고훈 시대 때부터 유력한 호족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훈 시대 말기의 호족이었던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 570)는 536년에 오미(臣)에서 오오오미(大臣)로 등극하게 되어 큰 권세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녀의 딸들을 즉위한 덴노의 황비로 맞이하게 하면서 소가씨의 피가 덴노가에 스며들게 했다. 실제로 스슌 덴노(崇峻天皇)는 소가노 이나메의 외손자였고, 그를 덴노로 즉위시킨 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 또한 그의 외삼촌이었다...
그러던 중 552년에 백제 성왕(성명왕)이 불교를 전파했고, 이를 두고 킨메이 덴노는 불상에 예배를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군신들에게 묻게 된다. 이 때 소가노 이나메는 "서쪽의 여러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西蕃諸国国)이 이를 예배 드리는데 왜가 이를 어기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말하며, 덴노가 불교를 받아들이길 강권했다. 소가씨가 외국과의 교역에 힘을 쓰고 있고, 외래 문물 수용에 긍정적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덴노는 오하리다 궁(小墾田宮)에 불상을 모셔서 불상에 예배를 드리라고 명하게 된다. 그러나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 등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해 역병이 일어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자 당시 무라지를 카바네로 가지고 있던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 ~ ?)와 나카토미노 카마코(中臣鎌子, ? ~ ?)는 이미 180명의 신을 모시는데 외국신(蕃神)을 모시면 우리나라의 신(国神)이 노여워해 백성들이 사망한 것이라며 불상을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덴노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고 모노노베씨를 중심으로 한 배불파는 법당과 불상을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 그리고 도래인과 긴밀한 관게를 맺고 있던 소가씨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착귀족들을 억압하고 왕권의 우월성을 확립하려 했던 일본 왕실 역시 불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587년 병석에 있던 요메이 덴노의 불교 귀의를 계기로 발생한 숭불파와 배불파의 대립은 무력대결로 확대되었는데, 왕실과 결합한 소가씨가 배불파의 모노노베씨 등을 토벌함으로써 불교를 반대하는 세력은 사라지고 같은 해(587년) 불교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용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미의 난(丁未の乱)이라고 한다. 이렇게 불교 수용 항쟁에서 승리한 소가씨는 이후 조정의 대표적인 위치에 서게 되어 왕위 계승 문제에 까지 관여하게 될 정도로 큰 위력을 얻게 된다.
1-3.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 645~650/701)
1-3-1. 을사의 변으로 시작된 다이카 개신
645년 6월 12일에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 626~672),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 614~669) 등이 당시 외척으로 국정을 농단하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 ~ 645)를 암살해 소가씨를 몰락시킨 을사의 변(乙巳の変)이 일어난다. 이를 시작으로 일련의 국정 개혁이 시작되는데, 이를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이라고 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다이카 개신은 다이카 연간(645~650)에 일어난 개혁을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의 다이카 개신은 645년부터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완성될 때까지를 포함한다. 개혁 자체는 이후 덴노가 된 젊었던 두 황자였던 나카노오오에 황자(텐지 덴노)와 오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 ~ 686, 덴무 덴노)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오오카미(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성립되게 된다.
1-3-2. 다이카 개신의 진행(고토쿠 덴노와 나카노에노 황자의 국정 쇄신)
다이카 개신의 진행 | ||
645년 | 을사의 변 | 국정을 농단하던 소가노 아루카 암살 |
원호(元号, 연호) 사용 | ||
남녀의 법(男女の法) 제정 | 1. 양민 부모의 자식은 아버지에게 귀속 2.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그 자녀도 노비 3. 주인 다른 노비의 자식은 어머니에게 귀속 4. 사원의 잡역부는 원칙적으로 양민. 다만 노비인 경우 노비의 법으로 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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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궤의 제(鍾匱の制) 개시 | 조정이 투서(投書)를 통해 백성들의 호소를 들으려고 했던 제도 (신문고와 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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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흥륭의 조(仏法興隆の詔) 발표 | 우지데라(氏寺, 씨족을 모시는 절) 건립 시작 | |
각종 직책 임명 및 신설 | ||
사유지 및 사유지 판매 금지 | ||
나니와노나가라노토요사키궁 천도 결정 (難波長柄豊碕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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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년 | 개신의 조(改新の詔) 발표 | 1. 토지의 국유화, 대부 이상에게 식봉 차등 지급, 그 이하의 관인, 백성에게 비단, 삼베 지급(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 토지 국유화, 백성 국유화)) 2. 수도, 군사, 교통 제도 정비, 키나이(畿内)와 쿠니(国)의 범위 규정 3. 호적, 기록대장 도입 및 반전수수법 책정 4. 새로운 조세제도 실시(조용조 등) |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일부 세력들은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이카 개신이 진행될 때 즉위하고 있으면서 나니와 궁으로 천도했던 고토쿠 덴노(孝徳天皇)와 개혁의 핵심축이면서 환궁을 요청했던 나카노에노 황자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결국 653년에 실권을 가진 나카노에노 황자 일행이 나니와 궁을 떠나며 고토쿠 덴노는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1-3-3. 고토쿠 덴노의 사망과 사이메이 덴노의 즉위
이듬해 고토쿠 덴노가 사망하자 655년에 나카노에노 황자는 어머니이자 전직 덴노였던 고교쿠 상황을 사이메이 덴노로 즉위시킨다.
사이메이 덴노는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를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해 에미시(蝦夷)를 물리치고 조정의 지배권을 동쪽으로 조금씩 넓혀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다이카 개신이 진행되던 터라 아직도 정치적인 정세가 불안했는데, 실제로 한 황자가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유로 그 무리를 처형한 일도 있었다.
1-3-4. 백제의 멸망과 구원군
한편, 650년대부터 한반도에서 피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나당연합군(648~670)의 공격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만다.
661년 망한 백제의 신하들이 왜로 건너가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이에 나카노에노 황자는 이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사이메이 덴노와 함께 백제와 가까운 규슈 지역으로 향했지만 사이메이 덴노는 결국 규슈에서 사망하고 만다. 한반도의 백제 부흥 운동을 돕던 사이메이 덴노가 사망하자, 나카노에노 황자가 칭제해서 왜를 다스리게 됨가 동시에 추가 병력을 한반도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 663년 10월, 한국어로는 백강 전투(白江戰鬪), 중국어로는 백강구 싸움(白江口之戰), 일본어 한자로는 백촌강 싸움(白村江の戦い, 하쿠스키노에 싸움)이라고 불리는 전투가 일어났다. 현재의 금강 하구 지역에서 백제 부흥군+왜군과 나당연합군이 맞닥뜨리게 된다. 결과는? 나당연합군의 승리. 그러니까 백제 부흥군과 왜의 패배였다... 그렇게 왜는 한반도에서 손을 서서히 떼어나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많은 백제 유민들이 왜로 몰려오자 살 곳을 내어주기도 했다. 민간 지원 차원에선 그랬지만 이제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백제도 망했고, 소가씨의 힘도 약해진 데다가 신라가 당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보고 대세를 따르기 위해 이제 왜는 친백제 노선에서 친당, 친신라 노선으로 갈아타게 된다. 이 백강 전투를 통해 당시 왜는 한반도나 주변 국가의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적 후진국의 위치에 있었지만 큰 독자적 성장을 거쳐 군사적 측면에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절대군주로서의 덴노
1-4-1. 텐지 덴노가 후계자를 결정하다.
660년대 후반 텐지 덴노가 수도를 오우미 궁(近江宮)으로 옮기면서 처음엔 동생 오오아마 황자를 황태자로 내세우려고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 671년 11월, 텐지 덴노는 그의 아들을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삼아 후계자로 삼을 의사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텐지 덴노가 병에 몸져 눕게 되고 그렇게 오오토모 황자가 차기 덴노가 될 것으로 보였다.
1-4-2. 고분 덴노의 즉위와 임신의 난
672년 1월 7일, 텐지 덴노가 돌아가시고, 결국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가 24살의 나이로 고분 덴노(弘文天皇)로 즉위하게 된다. 672년 7월 중반, 오오아마 황자는 출가한 곳을 떠나 병사를 모으며 조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 싸움은 8월 20일에 일어난 세타바시 싸움(瀬田橋の戦い)에서 고분 덴노군이 대패하고 그 다음날 21일에 목을 매어 자결하며 끝나게 된다. 이 사건을 임신의 난(壬申の乱)이라고 부른다. 임신의 난을 진압한 오오아마 황자는 조정을 아스카로 옮겼고, 이듬해 673년 2월 오오아마 황자는 텐무 덴노로 즉위하게 된다.
1-4-3. 텐무 덴노의 즉위
임신의 난이 막 정리되기 시작할 무렵, 텐무 덴노는 공에 따라 상을 차등 지급하고(논공행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구축했는데, 이 과정에서 복제(服制)가 개정되었고, 팔색의 성(八色の姓, 야쿠사노카바네)가 제정되었으며, 관위(冠位) 제도도 개정 등이 이루어졌다.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더욱 강력학 중앙집권제를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덴노'라는 호칭을 사용하거나(다른 이견도 있긴 함), <일본서기>, <고사기>의 원형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자신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천왕전제정을 확립하고 황친정치를 추구했으며, 관제 개혁을 주도했다.
새롭게 천하를 평정하고 처음 즉위했다!
텐무 덴노는 위의 말처럼 그 자신이 텐지 덴노의 후계자라기 보다는 새로운 왕통의 창시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는 단 1명의 대신(大臣)도 두지 않고 법관(法官), 병정관(兵政官)을 직속시켜 직접 정무를 보았다. 요직에 황족을 붙인 황친정치(皇親政治)를 추구했으며, 왕족은 관위 12계(冠位二十六階)와 별도로 5위(五位)까지의 황족 전용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황족이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고 권력은 어디까지나 덴노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덴노 스스로 군림하고 통치했다는 점에서 텐무 덴노는 일본 역사상 드물게 권력의 집중을 이뤄냈고 그렇게 중앙집권적 군주게 국가가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텐무 덴노가 처음으로 덴노(天皇) 작위를 칭하고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칭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어찌되었든 율령을 제정하라는 명령도 내렸고, 복제와 관위 제도를 개편시키기도 했다.
외교적으로 친백제 정책이었던 텐지 덴노와 다르게 그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당시 당과 신라는 서로 한반도 지배를 다투고 있었던 한편(나당전투), 각각 왜와의 통교를 요구하고 있어 외교적으로 텐무 덴노에게는 최적의 기회가 찾아왔다. 덴노는 외국에 대한 정복과 간섭을 위한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고, 즉위 후에도 국내외의 전쟁이 없었다. 덴무 덴노는 저자세를 취했던 당시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체제 정비에 필요한 율령 지식 등을 전수받았다. 또한 한반도에서 귀화한 사람들에게는 681년까지 과세를 면제하기도 하며 한민족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텐무 덴노는 전통적인 문예와 전승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래 문물을 배척한 것은 아니고 단순히 이전보다 토착 문화의 발굴과 정리를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군주의 칭호를 덴노(天皇)라고 처음 정해진 것도 이 시기라고 많은 학자들이 여기고 있으며, 민속 문화를 받아들여 국가적 제사로까지 확대시켰는데, 이에 대한 대표적으로 고세치노마이(五節舞), 이 시기에 국가적 제사가 된 니이나메사이(新嘗祭, 신상제), 이 시기에 마련된 대상제(大嘗祭) 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제기(帝紀)>(혹은 <제황일계(帝皇日継)>)와 <상고제사(上古諸事)>, <구기(旧辞)>, <일본세기(日本世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을 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이후 완성될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외 일본 최초츼 첨성대를 짓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왜국 자체의 민족 의식을 끌어 올려 신도(神道)가 진흥케 했는데, 이는 전통을 중요시 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덴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천조대어신) 혹은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 천조대신)를 시조로 하는 덴노가(天皇家, 천황가)와 각지의 신을 지위에 맞게 위치시켜 덴노가의 정통성과 각 지역의 덴노에 대한 복속의 의무성을 강화하는데 쓰였다.
1-5. 다이호 율령(701)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은 701년(다이호 원년)에 제정된 일본의 율령으로, 6권의 율(律)과 11권의 령(令)으로 구성된다.
이 다이호 율령의 의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중국의 방식이 기준 제도로 전환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기존 관위12계에서는 덕목(virtue)을 드러내는 한자로 개개인의 벼슬을 나타내어 원칙상 상하관계를 알 순 없었지만, 이 율령에선 중국식으로 수치를 통해 상하관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다이호 율령은 일본의 국정에 부합하는 율령 정치 실현을 목표로 편찬되었다. 현대의 형법에 해당하는 6권의 율(律)은 거의 당율(唐律)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지만, 현대의 행정법+민법에 해당하는 11권의 령(令)은 당령(唐令)을 따르면서도 당시 일본 사회의 실정에 맞게 개편되었다.
이 율령의 제정으로 국호를 공식적으로 일본(日本)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일본의 유래에 관한 중국 측 기록 중 재밌는 내용이 있다. 수나라가 중국을 다스리던 607년이었다.
(607년에 있었던 일이다.)
해가 뜨는 곳(日出處)의 천자(天子)가 해가 지는 곳(日沒處)의 천자(天子)에게 글을 보낸다. 무탈한가?
- <수서 열전 동이 왜국조>
국제적 인식이 없었던 건지, 단순히 천자로서의 자존감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이 때도 이미 일본 열도가 가장 동쪽에 있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러한 인식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의 유래가 되는 여러 계기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본다.
중앙관제는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2관(신기관, 태정관) 8성(중무성, 식부성, 치부성, 민부성, 대장성, 형부성, 궁내성, 병부성)의 관료기구를 골격으로 한 본격적인 중앙집권 통치체제가 성립되었다.
그 외 관공서에서 취급하는 문서에는 원호(연호)를 사용할 것, 도장을 찍을 것, 정해진 형식에 따라 작성된 문서 이외는 받아들이지(수리하지) 않을 것과 같이 문서와 절차의 형식을 중시한 문서주의가 도입되었다.
또한 지방 관제에 대해서는 국군리제(国郡里制)가 수행되어 국(国), 군(郡), 리(里)와 같은 단위가 정해졌으며, 중앙 정부에서 파견되는 국사(国司)에게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지방 호족이 그 직을 차지하고 있던 군사(郡司)에게도 일정한 권한이 인정되고 있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
이렇게 일본사에서 중요한 다이호 율령의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그 내용의 일부가 <속일본기(続日本紀)>, <영집해(令集解)> 등의 오래된 기록에 남아 있어 연구가들에게는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757년에 발표된 <요로 율령(養老律令)>이 이 다이호 율령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실질적으로 요로 율령을 통해 다이호 율령의 복원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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