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사 연표(6분법에 따른 시대 구분)
일본사를 '원시시대'를 제외한 서양식 5분법에 맞춰 시대를 분류하면 고대(300~1185), 중세(1185~1600), 근세(1600~1868), 근대(1868~1945), 현대(1945~)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근대와 현대의 시기 구분은 큰 논란은 없지만, 고대, 중세, 근세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시대 구분 | 시작 | 종료 |
고대 | 고훈 시대 (3세기~7세기) |
헤이안 시대 (794~1185) |
중세 | 가마쿠라 막부 (1185/1192~1333) |
센고쿠 시대 (1467/1493~1587/1590/1591/1600) |
근세 | 세키가하라 전투 (1600) |
에도시대 (1603~1868) |
근대 | 메이지 시대 (1868~1912) |
대일본제국 (1889~1945/1947) |
현대 | 연합군 점령하 일본 (1945~1952) |
일본국 (1947~) |
2. 일본 열도의 탄생
일본 열도(日本列島)는 유라시아 대륙 동아시아의 동단의 연안 앞바다(태평양 북서쪽 연해부)에 위치한 호상열도(弧狀列島, 활모양의 열도) 중 한 열도를 말한다. 그 범위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 일본 열도의 거의 대부분은 현재 일본국의 영토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런가 일본에서는 종종 일본의 영토는 일본 열도(日本列島)라고 혼동되게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일본 열도는 길이 약 3500km, 가장 넓은 곳의 너비는 약 300km로 총면적은 약 377,975km2에 달한다. 육지 면적의 75%가 산지 혹은 산기슭으로 평지 비율이 2018년 대한민국의 실질 지배 지역의 산지가 72.1%를 차지한 것보다 더 높아 생각보다 일본 열도도 산과 숲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은 온난습윤(따뜻한 날씨 + 높은 습도) 기후에 속하며, 계절풍의 영향으로 발생한 폭설이나, 장마, 태풍 등에 의해 지금도 침식의 정도가 심하다.
일본 열도의 주위로 동해, 오호츠크 해, 태평양, 동중국해로 둘러싸여 있으며, 열도의 동쪽(태평양 쪽)에는 쿠릴-캄차카 해구, 일본해구, 이즈-오가사와라 해구, 난카이 해곡 등의 깊은 해구가 있어 열도 전체가 지각 변동과 조산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내각부 방재정보>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확인된 화산의 약 10%가 일본 열도 안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도 한다. 이러니 지진이니 쓰나미니 화산 폭발이니 하는 무서운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좁은 의미에서 일본 열도는 홋카이도(北海道, 북해도), 혼슈(本州, 본주), 시고쿠(四国, 사국), 규슈(九州, 구주) 4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일본 열도는 위의 4개의 큰 섬에 더해 그에 부속된 아주 작은 섬들, 그리고 러시아와 분쟁 중인 쿠릴 열도, 오키나와가 있는 난세이 제도 등으로 구성된다. 그럼 이제 이 거대한 섬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보자.
먼 옛날 일본 열도는 한반도가 있던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였다. 그런데 몇 번의 빙하기가 지나고 약 2000만 년 전부터 대륙의 가장자리가 동서로 갈라지며 일본 열도의 지각이 대륙과 멀어지게 된다. 이윽고 그 균열은 바다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는 해수면이 상승하며 바닷물이 들어갔는데 이것이 동해의 근원이 된다.
해저 지역은 천천히 확대되고 그에 따라 생긴 균열의 아래에서 마그마가 뿜어져 나와 화산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올라온 마그마가 식으며 암석이 되어 한층 한층 퇴적되어 갔고, 이윽고 일본 열도의 서남쪽은 시계방향으로, 동북 방향은 시계반대방향으로 달아 지금 일본 열도의 모습인 활모양(弧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르고 많은 지각 변동이 일어나며 약 1만 년 전에 오늘날의 해안 지형을 갖춘 일본 열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3. 조몬 시대(기원전 15세기 ~ 기원전 10세기(or 기원전 3세기))
일본이 대륙으로 완전히 분리가 되며 일본에 정착했던 당시 사람들은 고유한 문화를 만들게 된다. 대략 1만 6850년 전에서 1만 5150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중석기~신석기시대로 보는 죠몬 시대(縄文時代)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직역하면 '줄무늬'라는 뜻의 조몬(縄文, 승문)이란 꼬인 끈은 꽉 눌렀다가 굴려 붙인 토기의 문양(文様, 무늬)을 말한다.
대략적으로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조몬 시대는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에 이은 기반으로 수렵, 채집, 어로 등의 식량 채집과 땅을 파서 만든 주거 형태인 수혈주거(竪穴住居)를 기반으로 주로 동일본 이북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중~신석기 문화인 조몬 문화(縄文文化)가 번성했다. 이땐 아직 농경이 수반되지 않은 줄무늬 토기들이 대거 출현했다.
4. 야요이 시대(기원전 10세기(or 기원전 3세기) ~ 3세기)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는 야요이 문화(弥生文化)가 있었던 대략 기원전 10세기(혹은 기원전 3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조몬 시대(縄文時代) 이후, 고훈 시대(古墳時代) 이전에 존재했다. 채집 경제로 굴러갔던 조몬 시대와 달리 서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일본사 최초로 농경을 핵심으로 한 생산 경제 체제로 들어선 시기라는 의의를 가진다. 그 외 조몬 문화의 전통 위에 한반도 남부 지역 등으로부터 이식된 대륙 문화가 도래해 성립했다. 앞서 말한 벼농사, 쌀의 주식화, 유입된 청동기 및 철제의 제작과 사용, 방직 등이 시작되며 전문 기술자들이 생겨나고, 정치적 공동체인 쿠니(國)와 수장 출현하며 지배-피지배 관계가 생겼고 그 결과 지역 사회가 정치적으로 정리되어 가기 시작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일단 편의상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를 구분하긴 했지만,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 두 시기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3세기까지도 혼재했다고 본다. 두 문화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야요이(弥生)라는 이름은 1884년 일본의 도쿄부 혼고구(本郷区) 무코가오카-야요이정(向ヶ岡弥生町)[현재 도쿄도 분쿄구(文京区) 야요이(弥生)]의 야요이 쵸 유적(弥生町遺跡)에서 야요이식 토기(弥生式土器)가 발견된 데에서 유래했다.
처음엔 이 야요이식 토기(弥生式土器)가 사용된 시대라고 해서 야요이식 시대(弥生式時代)라고 불렀으나 이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야요이 토기(弥生土器),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라고 부르게 되었다.
4-1. 쿠니(国)와 왜(倭)
4-1-1. 쿠니(国)
야요이 시대에 들어서며 정치적 공동체인 '나라'라는 뜻의 쿠니(国)와 수장 출현하며 그 지방정권이 지배하는 영역을 쿠니(くに)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야요이 시대의 쿠니(くに)란 단순히 '나라'라는 개념으로 한정되기보단 정치체제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한 원초적 정권이라는 의미로까지 쓰이게 된다.
이후 고훈 시대에 가서는 실제로 지방 호족이 다스리던 지역을 쿠니(国)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가, 율령제가 확대되며 쿠니노츠카사(国司, 국사)가 다스리는 영제국(令制国)이 들어서면서 쿠니(国)라는 말이 지방 정권을 부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메이지 시대 때부터는 쿠니(国)라는 말이 국가(国家) 혹은 그 국가에서의 정당한 정부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쿠니(国)는 '나라'라는 기본뜻 외에도 문맥에 따라 '출신지, 고향, 정부'같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4-1-2. 왜(倭)
한국어로 '왜나라 왜'라고 부르는 이 글자를 일본에서는 아래와 같이 읽는다.
음읽기(음독) | 훈읽기(훈독) |
ワ[와], イ[이] | やまと[야마토] |
사실 이 倭 [왜]라는 글자는 중국과 한국 측에서 일본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실제로 중국 정사(<후한서 왜전>, <위지 왜인전>, <진서 왜인전>, <송서 왜국전>, <남제서 왜국전>, <양서 왜국전>, <수서 왜국전>, <북사 왜국전>, <남사 왜국전> 등)에도 버젓이 왜(倭)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 해내북경> | 해내(海內)의 동북 모퉁이(東北陬)에선 남쪽까지다. 거연(鉅燕)은 동북 모퉁이에 있다.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燕)에 속한다.] |
<논어> | |
<논형> | 주(周)의 때, 천하태평하고, 왜인(倭人)이 와서 창초(鬯草)를 바쳤다. 성왕(成王) 때, 월상(越常)은 꿩을 바치고, 왜인은 창(鬯)을 바쳤다. 주의 때, 천하태평하고, 월상(越裳)은 흰꿩(白雉)을 바치고, 왜인은 창초(鬯草)를 바쳤다. 흰꿩을 먹고 창초를 마셔도 흉(凶)을 없앨 수 없었다. |
<한서> | 그리고 동이(東夷)의 천성은 유순한데 삼방(三方)의 바깥쪽과는 다르며, 고로 공자(孔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은 것을 슬퍼했고,바다에 뜨면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했다. 낙랑해(樂浪海) 가운데, 왜인(倭人)이 있는데, 100여국으로 나누어 있으며 해마다 바치고 뵈러 온다. |
<삼국지 위지 왜인전> (히미코의 왜국왕 추대되며 전쟁이 수습된 것에 대한 내용 기술) |
또 나국(裸國)과 흑치국(黒齒國)이 거듭 있는데, 그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삼문(參問)에 이른다. 왜의 땅(倭地)은 끊어진 바다 가운데의 물가섬(洲嶋) 위 혹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져 둘레가 5천여리쯤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원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倭國)에 난이 있어, 오랜 시간동안 서로 공격하고 정벌해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이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라 하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경초 2년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군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할 것을 청했다. 그 해 12월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 히미코(卑彌呼)에게 천자는 명한다. (...)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金印) 등을 내리고 하사토록 한다. |
<후한서 동이전> (왜노국에 인을 하사한 사실 기록) |
건무(建武) 중원(中元) 2년, 왜노국(倭奴國)이 공물을 받들고 조하(朝賀)했다. 사신은 스스로를 대부(大夫)로 칭했다. 왜국(倭國)은 지극히 남쪽 경계(南界)에 있다. 광무(光武)는 인수(印綬)를 하사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 왜국왕(倭國王) 수승(帥升) 등이 세이코(生口, 노예) 160명을 바치고 뵙길 청하였다.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무리를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
<송서 왜국전> (왜 5왕이 송에 조공해 책봉받은 사실 기록) |
영초 2년, 왜(倭)의 찬(讃)이 만리를 건너 공물을 바쳤다. 원가 2년, 찬(讃)은 또 사마조달(司馬曹達)을 보내 상표문을 받고 만물(方物)을 바쳤다. 찬(讃)이 죽자 그의 아우 진(珍)이 즉위했는데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스스로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国王)이라 칭했다. 표를 올려 안동장군(安東將軍) 왜국왕(倭国王)이라 했다. 원가 20년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파견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安東將軍) 왜국왕(倭國王)으로 삼았다. 제(濟)가 죽자 세자 흥(興)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흥(興)이 죽자 아우인 무(武)가 즉위하였는데, 스스로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国王)이라 칭했다. |
4-1-3. 한위노국왕인(漢委奴国王印)
건무(建武) 중원(中元) 2년, 왜노국(倭奴國)이 공물을 받들고 조하(朝賀)했다. 사신은 스스로를 대부(大夫)로 칭했다. 왜국(倭國)은 지극히 남쪽 경계(南界)에 있다. 광무(光武)는 인수(印綬)를 하사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 왜국왕(倭國王) 수승(帥升) 등이 세이코(生口, 노예) 160명을 바치고 뵙길 청하였다.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무리를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
이렇게 기록으로만 알려진 인장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발견 경위와 장소, 발견자에 대해서 조차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어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한위노국왕인(漢委奴国王印)은 한나라에서 노국(奴国) 혹은 위노국(委奴国)에 하사한 일본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뱀의 모양을 띈 순금 왕의 도장(王印)이다. 1966년 측정 결과 한 면의 평균은 2.347cm, 손잡이를 제외한 인대(印台)의 높이는 평균 0.887cm, 손잡이를 포함한 총높이는 2.236cm, 무게는 108.729g, 부피는 6.0625cm3이었으며, 그 재질은 금 95.1%, 은 4.5%, 동 0.5%로 이루어져 있어 조사팀은 이 인장이 순금제라고 볼 수 있다고 발표했다.
한위노국왕(漢委奴国王)이 어구에서 '委奴国' 혹은 '奴国'은 어떻게 해석되고 어느 지역에 있었을까? 현재 이 어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정설은 없다는 것이 일본 문화청의 입장이다. 그럼 이 어구를 실은 유명한 사전 2개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일본대백과전서> | 漢の委の奴の国王 [칸노와노나노코쿠오] 여기서 奴[노]는 나노아가타(儺県)를 말하며, 현재의 나카군(那珂郡)에 해당한다. |
<신편일본사사전> | 위노국(委奴国)은 이토국(伊都国) 혹은 와노나국(ワのナ国) 등으로 보인다. |
그 외 다양한 의견도 존재한다.
카메이 난메이(亀井南冥) 다케다 사다요시(竹田定良) 등 - 현재는 거의 사장된 가설 |
위노국(委奴国)은 왜국(倭国)와 같으며, 그 발음은 [야마토노쿠니]다. |
오치아이 나오즈미(落合直澄) 미야케 요네키치(三宅米吉) 등 - 교과서 등 일반적인 통설 |
금인에 새겨진 위노(委奴)는 <한서>에 적힌 왜노(倭奴)의 약자로 보며, 漢の倭(委)の奴の国王[칸노와노나노코쿠오]로 읽는다. * 미야케 요네키치 "奴[노]는 나노츠(儺津)나 나카 강(那珂川)의 [나]를 표현한 것으로, 현재의 나카 강을 중심으로 하는 후쿠오카 지방에 그 나라가 있었을 것" |
토우 테이칸(藤貞幹) 우에다 아키나리(上田 秋成) 아오야기 타네노부(青柳種信) 쿠메 마사오(久米雅雄) 야나기다 야스오(柳田康雄) 후쿠오카 번(福岡藩) 등 |
위노국(委奴の国)은 이토국(伊都国)이다. |
한편, 漢委奴国王[한위노국왕]이 한나라(漢)에서 위노국(委奴国)이라는 나라의 국왕(国王)에게 준건지, 한나라(漢)에서 왜(委)민족이 세운 노국(奴国)이라는 나라의 국왕(国王)에게 준건지에 대해서도 줄곧 논의되고 있다. 사실 이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들어온 19세기 일본에서부터 있어왔던 논쟁인데, 이 이데올로기적 논쟁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고대 동양에서 한나라(漢)에서 위노국왕(委奴国王)에게 내려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긴 한다.
4-2. 야마타이국(邪馬台国, 2~3세기)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은 2~3세기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쿠니(国) 중 하나로, 왜(倭) 여왕 히미코(卑弥呼)의 왕실이 있었던 여왕국이며, 야마타이국 연합(邪馬台国連合)의 중심 국가(수많은 쿠니의 맹주 격의 위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국 대륙-한반도-일본 열도를 이었던 철 무역로가 있었는데 이때 철 확보를 위해 한반도와 교류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순히 중국의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조>에 기록된 야마타이국의 기록을 토대로 어떤 나라였는지 살펴보자.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교역을 하는데 대외(大倭)가 이를 감독한다. 여왕국(女王國)의 북쪽은 특별히 일대솔(一大率)을 두어 여러나라를 검사하고 살폈는데, 여러 나라가 이를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도국(伊都國)에서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刺史)와 같은 것을 항상 둔다. 왕이 경도(京都)나 대방군(帶方郡) 여러 한국(韓國)과 왜국(倭國)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모두 보내와 전하는데, 섞임이 없었다. 가난한 백성들(下戶)이 길에서 높은 사람(大人)을 만나면 뒷걸음질쳐 풀속으로 들어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혹은 웅크리고 있거나 엎드려있는데 양손을 땅에 댄어 공경을 나타낸다. 대답할때는 [희(噫)]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하겠다(然諾)는 뜻이다. |
야마타이국의 이칭인 여왕국(女王國)의 북쪽에 일대솔(一大率)을 설치해 이토국을 포함한 북방국가들을 감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나라는 원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倭國)에 난이 있어, 오랜 시간동안 서로 공격하고 정벌해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이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라 하고, 귀도(鬼道)를 업으로 했으며, 능히 (사람)무리를 혹하게 했으며,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왕이 된 이후로 (그녀를) 본 자가 적었다. 여자종 1,000여명으로 하여금 시중 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사람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말씀)을 전하여 드나든다. 사는 곳은 궁실과 누각이고 성책을 삼엄하게 둘렀는데, 항상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조> |
왜국은 원래 성립하면서 7~80년간 남자 왕이 다스렸지만, 이후 왜국이 어지러워져 서로 싸우다가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그녀의 이름이 히미코(卑彌呼)였다. 그렇게 히미코(卑彌呼)는 왜국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녀는 귀도(鬼道)를 신봉해(혹은 무녀로서) 많은 무리를 거느렸으며, 나이는 이미 고령이었지만 남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남동생이 나라를 통치할 때 옆에서 보좌했다.
경초 2년(238년) 6월, 왜 여왕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劉夏)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그 해 12월,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말하길, '친위왜왕(親魏倭王) 히미코(卑彌呼)여,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하가 당신의 대부 난승미와 차신(次使)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보내 남자 노예(男生口) 4명, 여자 노예(女生口)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을 바치니 이에 이르렀다. 그대가 있는 곳이 멀지만 이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당신의 충효가 이와 같아, 난 그대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그대를 '친위왜왕'을 삼는다. 그리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을 봉해서 대방태수에게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백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그대가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으로 삼고, 우리(牛利)를 솔선교위(率善校尉)를 삼아 은인(銀印)과 청수(靑綬)를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이제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 5필, 강지추속계(絳地縐粟罽) 10장(張), 천강(蒨絳) 50필, 감청(紺靑) 50필로써 그대가 바친 것에 답한다. 또 특별히 그대에게 감지구문금(紺地句文錦) 3필, 세반화계(細班華罽) 5장(張), 백견(白絹) 50필, 금 8냥(兩), 오척도(五尺刀) 2구(口), 동경(銅鏡) 100매, 진주(眞珠), 연단(鉛丹) 각 50근을 하사하고, 모두 꾸며 봉해(裝封) 난승미, 우리(牛利)에게 맡기니 (그들이) 도착하면 받도록 하라. 이를 남김없이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대를 갸륵하게 여김을 알게 하라. 정중히 그대에게 좋은 물건들을 주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조> |
이렇게 또 기록을 보면 위나라에서 238년(혹은 239년) 일본의 히미코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라고 적힌 금인(金印)을 내려줬다고 적혀있다. 과연 이 도장은 발견되었을까? 아쉽게도 도장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도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고 적힌 인영(印影, 도장을 찍은 자국)이 발견되었다. 도장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후대의 날조가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인영이 발견되었다는 건 역사 속의 기록이 그 자체로 사실일 가능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왕 히미코는 중국 위나라에 사절을 파견해 위나라(魏)와 친한(親) 왜왕(倭王)이라는 뜻의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봉호를 얻게 된다. 그 외에도 정시 원년(240년), 정시 4년(243년), 정시 6년(245년)에도 사신을 파견해 위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사신을 보낸 2년 뒤에 문제가 터진다. 사실, 문제는 그전에 터졌을 수도 있지만, 중국 위나라에 보고된 연도는 서기로 247년이었다.
정시(正始) 8년(247년) (대방)태수 왕기(王頎)가 관(官)에 도착했다. 왜여왕 히미코와 구노국(狗奴國)의 남왕(男王) 히미코코(卑彌弓呼)가 평소 불화했으니, 왜의 재사(載斯), 오월(烏越)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가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 새조연사(塞曹掾史) 장정(張政) 등을 보내 조서와 누런 깃발(黃幢)을 받들고 가서 난승미에게 배가(拜假)하고 격문을 고하고 깨우치게 했다. 히미코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지름이 100여보였고 노비 100여 명을 순장했다. 남자 왕이 다시 즉위했으나 나라사람들이 불복해서 다시 서로 주살(誅殺, 죄를 뒤집어 씌워 죽임)해, 당시 살해당한 사람이 1천 여 명이었다. 다시 히미코의 종녀(宗女) 토요(壹與)가 즉위해 13살에 왕이 되었는데, 나라 안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정(政, 장정) 등이 격문으로 토요를 깨우치려 했으나, 토요는 왜의 대부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 액아구(掖邪狗) 등 20명을 보내 정(政, 장정) 등을 돌아가게 했고, (액아구 등이 낙양의) 대(臺)에 이르러 남녀 노예(生口) 30명을 바쳤으며, 백주(白珠) 5천, 공청대구주(孔靑大句珠) 2매, 이문잡금(異文雜錦) 12필을 바쳤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조> |
그 문제의 사건은 바로 구노국(狗奴國)을 다스리던 히미코코(卑弥弓呼)와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사이의 분쟁이었다. 어떤 분쟁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싸움이 간접적으로 히미코의 사망을 이끌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할 수 있을 만큼 정말 큰 싸움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히미코의 사망으로 지름이 100 보나 되는 큰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후 남자 왕이 즉위했지만 온 나라가 이에 불복해서 더욱 서로를 죽이며 1,000여 명 가까이 죽었다고 한다. 결국 히미코의 종녀(宗女, 같은 무리(일족, 혈연, 같은 카바네 등)의 여성)인 토요(臺與)가 13세의 나이로 즉위하며 나라가 안정되었다. 어찌 되었든 토요가 사신을 보낸 이후로 중국의 사서에서 야마타이국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후에 여러 쿠데타들이 번번이 일어났던 당시 삼국시대 위나라는 이 나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야마타이국에 대한 기록이 247년을 기점으로 사라지고 약 160여 년이 지나고 중국 대륙이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서 왜에서 5명의 왕이 조공을 하면서 또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4-3. 칠지도(七支刀, 4세기?)
현재 일본의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고이 모셔져 있는 길이 74.8~9cm, 양 옆으로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이 하나가 있다. 가지(支)가 7개(七)인 검(刀)이란 뜻에서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르는 이 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일본서기 진구황후조>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자.
(진구 황후) 52년(기록상 252년, 기년법상 372년) 가을 9월 정묘 초하루 병자 구저(久氐) 등이 치쿠마나가히코(千熊長彦,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註) 1면(面)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온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멀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聖朝)에 길이 바치겠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동해(東海)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그대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土物, 토산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 일러두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했다. |
이주갑인상과 같은 논란이 있지만 <일본서기 진구황후조>에서는 서기 252년 혹은 372년에 구저(久氐) 등이 백제와 왜국의 동맹을 기념해 진구 황후에게 칠자경 1장과 칠지도 1자루를 헌상했다고 기록한다. 서기 252년이라면 백제는 고이왕(古爾王)이 다스리고 있었을 때고, 서기 372년이라면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다스리고 있었을 시기다. 일단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교차검증했을 때, 실제로는 372년에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준 것으로 비정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검에 과연 제작 연도가 없었을까? 당연히 존재한다.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
태■ 4년 ■월 16일 병오 정양(한낮)
- 칠지도 앞면 中
지금도 태■ 4년(泰■四年)이라는 부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전에 <일본서기> 상 진구 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와 교차검증해보면 321년부터 389년까지 섭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염두에 두고 태■ 4년(泰■四年)에 대한 가설들을 살펴보자.
칠지도의 泰■은 중국 서진(西晉)의 태시(泰始)이며, 이에 따라 태시(泰始) 4년은 268년임. |
칠지도의 泰■은 중국 동진(東晋)의 태시(太和)이며, 이에 따라 태화(太和) 4년은 369년임. |
칠지도의 泰■은 중국 전진(前秦)의 태초(太初)이며, 이에 따라 태초(太初) 4년은 389년임. |
칠지도의 泰■은 중국 남연(南燕)의 태상(太上)이며, 이에 따라 태상(太上) 4년은 408년임. |
칠지도의 泰■은 중국 송(宋)의 태시(泰始)이며, 이에 따라 태시(泰始) 4년은 468년임. |
칠지도의 泰■은 중국 복위(北魏)의 태화(太和)이며, 이에 따라 태화(太和) 4년은 480년임. |
이렇게 다양한 학설들이 있는데, 이외에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라는 설 등과 함께 수많은 이견으로 지금도 논쟁 중에 있다. 이제 비문을 살펴보자. 해석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당 부분 동의하는 해석을 정리해 봤다.
[앞면]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태■(泰■) 4년 ■월 16일 병오 한낮에 100번 단련된 ■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마땅히 백가지 병(兵, 싸움)을 피할 수 있으니 받들고 받드는 후왕(侯王)에게 ■■■■이 만들었다. |
[뒷면] 先世来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為倭王旨造傳示後世 선대 이래 아직 이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이(혹은 백제 왕세자가 갑자기 성음(聖音)이 생기니)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보여 전하라. |
이 부분 중 앞면의 후왕(侯王)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단순히 왕(王)이라고 설명하고 칠지도를 헌상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에선 후왕(侯王)이라는 글자를 근거로 당시 왜가 백제의 제후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4세기 중반 백제에서 하사했다고 본다. 어찌 되었든 이 칠지도는 백제와 왜. 그러니까 고대 한반도와 고대 일본이 서로 교류했다는 증거로써 큰 의의를 가진다.
5. 고훈 시대(3세기 중반(혹은 4세기) ~ 6세기말(혹은 7세기)
고훈 시대(古墳時代)는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에 이은 고고학상 시기 구분으로, 앞(前)은 사각형(方) 뒤(後)는 원형(円)의 무덤(墳)이라는 뜻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라는 무덤 양식이 성행했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와 거의 같은 시대를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야마토 시대(大和時代)라고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 이 시대는 고훈 시대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평범한 돌방무덤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으로 불교의 유입으로 화장 문화가 발전한 것과, 야마토계 지배층의 권력이 안정화되어 더 이상 위와 같이 큰 무덤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된 것 등의 이유가 있다.
5-1. 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은 원형(円)의 머릿 부분에 사각형(方形)의 돌출부가 이어진 형식의 전체적으로 열쇠 구멍 모양으로 생긴 고분(古墳)을 말한다. 주로 일본 열도에서 3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 혹은 7세기 초경까지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일본 열도의 대표적인 고분 형식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3세기 중엽 야마토 지방의 마키무쿠(纒向, 현 나라현 사쿠라이시 일대)에 거대 도시가 출현해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여겨지는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을 축조하게 되면서 고훈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다. 그 이후 이러한 형태의 봉분이 일본 각지 그리고 심지어 한반도 남부에서도 지어지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이를 장고형 고분(장고분)이라고 부른다. 물론 내부 구조는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한국측 용어 | 일본측 용어 |
장고형 고분(長鼓形 古墳) 장고분(長鼓墳) |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
이러한 전방후원분은 봉구(墳丘), 이장시설, 외표시설 등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는데, 학설에 따라 다르지만 원형으로 된 부분에 사람을 매장하고, 평평한 부분에서 묻힌 사람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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