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봉창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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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봉창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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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를 일본에서 뭐라고 부를까라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고 정리해봤다.

1. 사쿠라다몬이란?

사쿠라다몬과 그 주변 풍경 (출처 : 구글어스)

사쿠라다몬(桜田門)은 '벚꽃논문' 혹은 '벚꽃밭문'이라는 뜻으로, 현재 황거(皇居)로 쓰이는 에도성(江戸城)의 우치보리(内堀, 안쪽 해자)에 만들어진 문의 하나다. 이곳에는 안쪽에 설치된 우치사쿠라다몬(内桜田門)과 바깥쪽에 설치된 소토사쿠라다몬(外桜田門)이 있는데, 보통 안쪽의 우치사쿠라다몬(内桜田門)을 키쿄우몬(桔梗門)이라고 부르며, 안과 밖 구분 없이 단순히 사쿠라다몬(桜田門)이라고 부르면 바깥쪽에 설치된 소토사쿠라다몬(外桜田門)을 뜻한다.

사쿠라다몬(桜田門)
소토사쿠라다몬(外桜田門)
=사쿠라다몬(桜田門)
우치사쿠라다몬(内桜田門)
= 키쿄우몬(桔梗門)

처음에는 오다와라 가도(小田原街道)의 시작점이였기 때문에 오다와라구치(小田原口)라고 불렸는데, 1636년에 나무로 되어 있던 곳을 돌을 쌓아 재건축해 지금의 사쿠라다몬(桜田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세이5무오년 3월 3일에 사쿠라다몬밖에서 수부(水府) 탈사배(脱士輩) 회맹하고 눈 속에서 대로 히코네후(彦根侯)를 습격한 그림(安政五戊午年三月三日於テ桜田御門外ニ水府脱士之輩会盟シテ雪中ニ大老彦根侯ヲ襲撃之図) (1860)

1860년 3월 24일, 이 문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히토츠바시파(一橋派)였던 미토번 낭인(낭사, 浪士)들이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1860)를 암살한 사쿠라다몬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며, 존왕양이 운동도 격화되게 되었다. 사실상 이 사건으로 에도 막부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막부 시대가 끝나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23년 9월에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일부가 파손되었고, 부서진 부분은 강철과 흙, 돌을 쌓아 고쳤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1900~1932)이 쇼와 덴노(昭和天皇, 1901~1989)를 암살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쿠라다몬 사건이 일어났다.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일본 덴노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말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봉창 의거 혹은 사쿠라다몬 의거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제1차 상하이 사변(1932.01~1932.05)의 계기가 된다.

2.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 이봉창 의거부터 윤봉길 의거까지

한국인이라면 어떤 사건인지 대략 알지만 이 사건을 다시 다뤄보자. 사실 이 글의 목적은 다 이루었다. ''이봉창 의거'를 일본에서 뭐라고 할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 12월 13일, 제 29대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가 당선되며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를 중심으로 한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 1931.12~1932.05)가 들어섰다. 당시 일본의 지도층은 덴노로는 쇼와 덴노가, 내각총리대신으로는 이누카이 쓰요시가 있었던 것이다.

1931년 12월 28일, 이봉창은 <도쿄 아사히신문>에서 쇼와 덴노가 다음달에 있을 대일본제국 육군하지메에 참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32년 1월 6일, 이봉창은 버스기사 스가와라 쿠고로(菅原久五郎)로부터 우연히 입수한 헌병조장(憲兵曹長, 헌병 상사급) 오오바 젠케이(大場全奎)의 명함을 얻었다. 그는 이때 얻은 명함을 사용해 관병식(열병식) 경계망을 2번이나 돌파했다.

1932년 1월 8일, 대일본제국 육군은 매년 거행했던 연초 행사인 육군하지메(陸軍始) 열병식을 관람하기 위해 쇼와 덴노는 행행(行幸, 덴노가 외출하는 것)했다. 열병식이 끝나고, 황거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쿠라다몬 바로 앞에 경시청 본부가 있다. 그러니까 집 앞에 다왔는데 누가 뒷통수를 친 격이다.

고지마치구(麹町区) 사쿠라다정(桜田町)의 경시청(警視庁) 청사 앞 거리에 들어선 덴노를 환영하는 행열 속으로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때, 길가로 뛰어나간 한 남자(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졌다.

그 남자는 1번째 마차가 지나가게 하고, 2번째로 지나가던 마차를 노렸는데, 사실 그 마차에는 쇼와 덴노가 아닌 궁내대신 이치키 키토쿠로우(一木喜徳郎, 1867~1944)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쇼와 덴노는 3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사건 현장 사진. 좌측 밑에 검은색으로 X표시된 곳에 폭탄이 투척되었다.

노가 어디에 타고 있었던, 그가 던진 수류탄은 2번째 마차의 왼쪽 뒷바퀴에 떨어져 작렬했으며, 마차 밑부분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2~3개의 구멍을 뚫을 정도로 효과는 미미했다. 수류탄 투척 사고가 있었음에도 바로 앞의 사쿠라다몬을 통해 황거로 들어간 행렬은 그제서야 마차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마차 뒷바퀴 부분과 바닥면 일부가 파괴되긴 했으나, 운행은 계속될 정도로 심하게 파손된 건 아니었고, 마차를 끌던 말 2마리와 그 말을 이끌던 근위기병 1명이 다치는 정도에 그쳤다.

쇼와 덴노를 모시기 위해 같이 타고 있던 나라 타케지(奈良武次, 1868~1962) 무관장에 따르면, 그는 폭발 소리가 들렸을 때, 지극히 냉정했으며, 귀환 후에도 사건에 대해 어떤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 사건을 보고 있던 경찰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폭탄이 날아왔을 거라고 추측된 방향에 있던 한 일본인을 범인으로 속단해 마구 구타했다. 그러자 뒤에서 한 남자가 안타까움을 느끼고 뛰어난 일본어 발음으로 '숨지 않을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하며,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했다.

사건 직후 바로 붙잡힌 이봉창. 우리에게는 이 사진이 더 익숙할 것이다.

[쇼와 7년 1월 8일 내무성 발표]
덴노 폐하 육군하지메(陸軍始) 관병식 행행(行幸)에서 환어(還御, 어소로 돌아옴) 도중 로보사쿠라다몬밖(歯簿桜田門外)에 다다랐을 때 경호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개요는 왼쪽과 같다. (일부 호외 다시 실음)


본일(8일) 오전 11시 44분경 치박 로보고지마치구(歯簿麹町区) 사쿠라다정(桜田町)의 경시청(警視庁) 앞 길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봉배자선(奉拝者線, 삼가 배례하는 사람들의 길) 안에서 돌연 로보(歯簿)의 두번째 마차의 궁내대신(宮内大臣)이 승차한 마차(어료차(御料車, 덴노와 황족이 타는 차) 전방 18간(間))에 수류탄 같은 것이 던져졌는데, 같은 대신이 탄 마차의 왼쪽 뒷바퀴 부근에 떨어져, 그 차체의 바닥 뒷부분에 엄지 크기의 큰 손상을 2~3정도 주었는데, 어료차와 (그 외의) 다른 이상 없이 11시 50분 무사히 궁성(宮城)에 환행하게 되었고, 범인은 경시청 경시 이시모리 이사오(石森勲夫), 순경 혼다 쓰네요시(本田恒義), 야마시타 소우헤이(山下宗平) 및 카와이(河合) 헌병 상등병, 우치다 군소우(内田軍曹) 등에서 이를 체포하여 경시청에 인치하고 목하취조 중이나 그 씨명(氏名), 연령은 왼쪽과 같다.

조선(朝鮮) 경성(京城) 출생, 천산창일사(浅山昌一事) 토공(土工, 토목 노동자) 이봉창(李奉昌) (32세)

- <오사카 아사히신문>(1932년 1월 9일자)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쇼와 덴노는 시국이 중대하다며 스즈키 칸타로우(鈴木貫太郎, 1868~1948) 시종장(侍従長)을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에게 보내어 하문시키고 사태 수습을 명령했다. 사이온지 킨모치는 이누카이 쓰요시에게 덴노의 간곡한 말씀을 빨리 이행해 내각을 속히 이행하라고 설득했다. 야마토모 곤노효우에(山本権兵衛, 1852~1933) 또한 히로히토 친왕이 피격당할 뻔했던 도라노몬 사건(虎ノ門事件, 1923) 때와는 다르니 책임을 묻고 자리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1932년 1월 9일 오전 8시, 이누카이 내각의 구성원들은 덴노를 뵈러 왔고, 오전 10시에 덴노는 친히 '중대한 시국이니 고로 유임하라(일단 직임을 맡고 있으라)'고 해 내각 전원은 파면과 문책을 받지 않게 되었다.

한편, 같은 날, 사건을 접한 중국 공산당 기관지 중 하나였던 <칭다오 국민일보(青島民國日報)>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韓國不亡,義士李奉昌刺日皇未遂]
[한국 불망, 의사 이봉창 일황(日皇) 살인 미수]

韓人李奉昌阻擊日皇不幸不中
한인 이봉창 일황 저격 불행히도 되지 않음

-<칭다오 국민일보(青島民國日報)>(1932년 1월 9일자)


1932년 1월 11일 밤, 재 칭다오 일본 총영사 카와고에 시게루(川越茂登, 1881~1969)가 칭다오 시장 침홍렬(沈鴻烈)을 찾아와 시장의 직접 사과와 <칭다오 국민일보>를 폐간할 것을 요청했으나 해당 신문은 당의 기관지라며 함부로 폐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를 내보냈다. 이후 그는 간부들을 불러모아 해병대와 경찰에 있을지 모를 일본군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게 했고, 일본영사관과 신속히 협의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며, 만일의 경우, 영국, 미국, 프랑스 영사 등이 나서 중재해달라고 요청했고, 낭인들의 도발에 대비해 시민들에게 외출을 자제할 것을 권했다.

1932년 1월 12일 오전 8시(혹은 9시 10분)쯤 일본인 2명이 국민일보사에 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지며 불을 질렀고, 경찰이 출동했으나 두 일본인은 체포당하는 걸 거부했다. 일본인들과 중국 경찰이 대치하다가 두 일본인이 일본인 거류지로 철수하며 상황은 잠잠해 지는 듯 했다. 불은 다행히 급하게 진압되었다.
이날 오후 2시, 시장 심홍렬은 총영사 카와고에 시게루를 시청으로 초청해 협상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10일간 국민일보 폐간, 국민일보 복간시 사과문 게재, 향후 재발 방지 등 4개 항에 대해 합의하게 된다. 협상은 잘 되었지만, 이 사실이 당장 일본인들의 귀에 들어가진 않은 듯하다.

일본인에 의해 파괴된 칭다오 시당 청사

오후 3시, 일본인 거류지에서 1천 여명이 집결해 항의 시위를 했고, 또, 10여명은 시당 청사로 난입해 창문과 문 등을 부쉈다. 다행히 이 첩보를 미리 받은 중국 시당원들은 모두 철수해 다친 사람은 없었다. 차를 탄 일본인들은 신문사로 향해 수류탄 한 발을 던지고 돌아갔다.
오후 6시쯤,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위를 하던 1천 여명의 일본인은 시위 행진을 이어나가 오후 8시 40분에 국민일보사에 들어가 문, 창문, 사무기기 등을 모두 부수고, 2층에 불까지 질러버렀다. 당연히 소방차가 왔지만, 일본인들이 그 차량들을 막는 바람에 불은 13일 오전 5시에 꺼지면서 건물은 거의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한편, 시위대가 시위 행진을 벌일 무렵, 일본제국 해군은 장갑순양함 이즈모(出雲)와 야쿠모(八雲)에 일본 해군 육전대 수백명(300~800명 예상)을 태우고, 중국 칭다오 시에 상륙해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인 거류지 주변의 경계를 펼쳤다.

1월 13일 오전, 심홍렬은 일본 총영사관에 강력히 항의했고, 이날 오후 9시(혹은 오후 4시) 일본제국 해군 육전대는 군함을 철수 시켰다. 나중에 이 사건의 피해액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칭다오 시는 595600위안에 달하는 손실을 얻었다고 한다... 보도 하나 일본의 입맛과 다르게 했다고 일어난 이 사건을 칭다오 국민일보 사건(青島民國日報事件, 1932.01.09~1932.01.13)이라고 한다.

칭다오 국민일보 사건으로 중일 관계는 심하게 냉랭해졌다. 그 사건으로 일본 내 중국을 향한 여론이 악화되고, 양국은 큰 긴장 상태가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1월 18일,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인에 의해 니치렌종(日蓮宗, 일련종) 승려 2명과 신도 3명을 습격해 승려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입은 상하이 일본인 승려 습격 사건(上海日本人僧侶襲撃事件)이 일어나며, 일본인들의 분노는 거세어졌고,

1932년 1월 20일에 찍은 일본청년동지회에 의해 파괴된 삼우실업사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 날 1월 19일, 전일 사건의 범인들이 일했다고 여겨진 삼우실업사(三友实业社)를 방화 습격한 사건(삼우실업사 습격 사건)을 펼쳤다. 그럼에도 일본 여론은 중화민국이 벌이던 항일 운동을 섬멸해야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협상 내용에 만족하지 못한 중국 인민들과 중국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은 크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일본군과 중화민국군은 각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대치까지 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치하던 중 1월 28일 오후가 되었을 때 처음 충돌이 일어났고, 이 충돌의 총소리는 1.28사변(一·二八事變) 혹은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사변은 3월 3일, 일본군의 전투 중지 선언을 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게 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과 미국과 정전 교섭을 하던 중, 덴노의 생신인 천장절(天長節)이 다가왔다.

식전 인사를 하고 있는 시라카와 요시노리. 뒤에 고위 관료와 간부가 서있다.

그리고 드디어 4월 29일이 되자, 상하이 파견군(上海派遣軍) 상하이에 살던 일본인 거류민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虹口公园)에서 대관병식과 천장철 축하 모임을 거행했다. 솔직히 이 행사는 위험했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 정전 교섭 중이었고, 이를 받아들일 리 없는 중국인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험은 현실이 되었다.

4월 29일 11시경, 대일본제국 육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써 상하이 사변을 이끈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1869~1932) 대장, 대일본제국 육군 제9사단장으로써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같이 상하이 사변을 이끌었던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 1875~1962) 중장 사살을 목표로 한 한인애국단의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물통 폭탄을 던진 것이다.
던져진 폭탄으로 상하이 거류민단(上海居留民団) 행정위원회 회장이었던 의사 카와바타 데이지(河端貞次, 1874~1932)가 즉사했고, 원래 목표였던 일본제국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 중장, 일본제국 해군 제3함대 사령관장 노무라 키치사부로우(野村吉三郎, 1877~1964) 중장, 재상하이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 재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 1888~1953),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 서기장 토모노 모리(友野盛)가 중상을 입었다. 또, 사건의 후유증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또한 다음 달에 사망했다. 결국 윤봉길은 모든 목표물 제거를 완수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훙커우 공원 의거 혹은 훙커우 공원 사건 부르며, 일본은 이 사건을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上海天長節爆弾事件), 중국은 이를 훙커우 공원 폭작 사건(虹口公园爆炸事件)이라고 부른다.

사쿠라다몬 사건과 훙커우 공원 사건을 계기로 1932년 5월 26일, 당시 일본을 이끌던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 1931.12~1932.05)는 모두 사직하게 되었다. 사실 이 내각은 태평양 전쟁 전 일본의 마지막 정당내각이었으며, 이 이후로 일본은 단숨에 군국주의로 경도되어 갔다. 그리고 제3대, 제5대 조선 총독을 지냈고 퇴역한 해군 대장이었던 사이토우 마코토(斎藤実, 1858~1936)를 중심으로 한 사이토우 내각(齋藤内閣, 1932.05~1934.07)이 성립하게 된다.

원초 1932년 7월 19일에 일본제국 대심원은 공판 개정일로 결정했으나, 사정이 생겨 9월 16일에 제1차 공판을 열고 예심조서(予審調書, 예비조사에 관한 조서)를 채용해 그날 결심(審, 변론을 끝내는 일)했다.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15분쯤, 일본제국 대심원 대법정에서 와니 테이키치(和仁貞吉, 1870~1937) 재판장은 특별재판 피고 이봉창에게 형법 제73조에 따른 대역죄로 인한 극형을 선고했고, 그 해 10월 10일,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市ヶ谷刑務所)에서 교수형이 집행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길고도 긴 이봉창 의거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봤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일본제국주의의 최고봉에 서있는 덴노에 대한 피지배 조선인의 암살 미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일본제국주의를 확장하려는 일본과 그를 막고자 나선 조선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일어난 동북아시아 대투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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