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준이 걸어온 길, 조선인민공화국의 건설과 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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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이 걸어온 길, 조선인민공화국의 건설과 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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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나요?'

한 중학생이 내게 쪽지를 보내왔고, 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해서 기록한다.

1. 건준의 성립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혹은 건준. '조선'을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는 위원들의 모임이라는 뜻처럼 1945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를 말한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틀 뒤인 7월 28일 직접적으로 '묵살한다'고 표현하며 그 선언을 무시했다. 

히로시마 상공에서 터진 리틀보이(좌)와 나가사키 상공에서 터진 팻맨(우)

일본이 무시한 것이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미국 공군이 8월 6일에는 미군의 B-29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8월 9일에는 B-29 복스카가 나가사키 상공에서 원자폭탄 팻 맨을 투하하며,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원자폭탄을 맞게 된다.

 

미국이 원자폭탄으로 일본 본토를 가격하던 8월 8일, 소련은 일본과 맺은 <소련-일본간 중립 조약(일소 중립 조약, Пакт о нейтралитете между СССР и Японией)>을 깨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같은 해 2월 맺어진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에서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 제국 당시 가졌던 사할린 반환, 뤼순항 조차권 등의 이권을 재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0일, 미국 정부는 소련에게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한반도를 소련과 미국이 양분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물론 이 사실은 당시 일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8월 11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에 대해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1886~1963)를 통해 민족주의 계열인 송진우(宋鎭禹, 1890~1945)에게 치안권과 행정권 인수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웅기군, 나진시, 청진시의 위치

이에 소련은 8월 12일, 함경북도 웅기군과 나진시를 점령했고, 다음 날 13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진입했다.

미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8월 13일, 소련이 한반도 동북부를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에드윈 W. 폴리(Edwin W. Pauley, 1903~1981)와 소비에트연방 대사 W. 애버렐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이 한반도를 먹을 야심을 갖고 있으니 당장 한반도 전역과 만주를 점령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 8월 15일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를 공격하고 있었고, 미군은 필리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묵살되었다.

 

미국이 원폭을 2대나 때렸지, 소련군은 벌써 한반도 북부를 차례차례 점령해오고 있지... 이렇게 궁지에 몰렸던 천왕가와 일본제국 정부는 할 수 없이 포츠담 선언을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8월 14일의 회의 결과에 따라 옥음방송(玉音放送)의 초안을 완성했다.

 

8월 15일 오전 8시, 엔도 류사쿠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과 만나 일본측이 요구한 자주적 국내치안유지와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고, 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3개월간의 식량 보급,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8월 15일 오전 9시, 조선총독부는 당시 밀고 내려오던 소련군이 일본인을 학살할 것을 막고자 여운형을 총독부로 임명했다.

 

8월 15일 정오, 쇼와 덴노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항복 방송을 하게 되며, 대일본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 옥음방송

덴노가 옥음방송을 마치자마자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에서 즉시 일본과 단교하고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옛 조선총독부와 휘문중학교 위치

8월 16일 오후 1시, 여운형은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 류사쿠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한일 두 민족의 자주적 보호를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경위대 편성을 넘어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정책을 넘어 경제상 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일본이 항복하고 여운형을 필두로 한반도에는 건준이 세워졌다'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내용의 실상이었다. 

2. 건준,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다.

8월 17일 오전 11시 30분, 소련은 청진시를 점령하며 함경북도 북쪽까지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소련이 청진시를 점령했을 즈음, 건준의 중앙조직이 발표되었는데,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 그 외 5개부서로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 1897~1961), 재무부장 이규갑(李奎甲, 1888~1970), 조직부장 정백(鄭栢, 1899~1950),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 1892~1954), 무경부장 권태석(權泰錫, 1894~1948)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8월 10일, 여운형은 건준 제1차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이라는 당장 대한민국이 해야할 것들에 대해 정리한 글을 발표했다.

1. 어느 기간까지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2.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된다.
3.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4. 모든 공사기관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 직장을 엄수하여야 한다.
5. 각 원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공작에 협력하여야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8월 18일, 김병로(金炳魯, 1887~1964), 백관수(白寬洙, 1889~1951), 이인(李仁, 1896~1979) 등은 민족주의 계열과의 합작을 위해 여운형과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상호 간에 다음날 19일에 전국유지자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날 밤 여운형이 테러를 당하면서 대회는 소집되지 않게 되었으며,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21일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의 고경흠(高景欽, 1909~1963), 윤형식(尹亨植, ?~?), 정백(鄭栢, 1899~1950) 등이 상의 없이 건준 경성지회를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결국 이 무단 위원회 조직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2일에 다시 돌아온 여운형을 포함한 33명으로 확대된 건준 2차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다.
한편, 소련은 계속 남하하며 같은 날(8월 22일)에는 원산에까지 발을 들이게 된다.


건준 2차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인 8월 23일부터 좌우협상과 건준 확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좌익인가와 우익인사가 서로 자신들 진영의 사람들을 끌어드리려는 사건들이 일어나며 좌우 협상은 결렬되었다.

소련군 북한 진격도

국내에서 건준이 협상을 시도하고 결렬되고를 반복하던 한편, 소련은 8월 23일경에는 개성에, 24일부터 26일까지는 평양에 입성해 북부의 중심을 장악했으며, 29일에는 신의주까지 점령하며, 그렇게 한반도 북부는 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다.

 

건준 중앙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건준은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고 평가받게 된다.

같은 날(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을 만나 민족계열 위주의 건준에 공산주의자도 넣어 새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평남 건준은 8월 27일에 민족계열과 공산당측 각 16인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된다. 그럼에도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직 직위를 유임하였다.

 

건준과 민족주의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8월 31일 위원장 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 부위원장 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사라진 건준에서는 9월 1일, 사회주의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이 건준의 중심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편, 같은 날, 송진우(宋鎭禹, 1890~1945) 등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그들의 귀국을 촉구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고 있는 건준은 9월 2일 서기국을 통해 3개항을 내세운 강령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9월 4일, 김포비행장에 최초로 미군의 소규모 부대가 도착했다.
같은 날, 건준 확대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수리건을 18대 17로 부결시키고, 공산주의계열 허헌(許憲, 1885~1951)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했다.

이틀 후인 9월 6일, 확대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서울 경기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했다.
이 회의는 헌법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李承晩), 여운영, 허헌, 김규식(金奎植), 김구(金九), 조만식(曺晩植)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이시영(李始榮)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했다. 그렇다. 그들은 한민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국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 공화국은 현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국가임을 미리 밝힌다!

Q..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나요?

A. 아니요. 그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한민족이 독자적으로 수립한 주석제 미승인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이 공화국은 현 북한이라고도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국가입니다.

공화국이 발표되자 자연스럽게 건국 준비위원회는 9월 7일 사라지게 되었다.

3. 조선인민공화국(PRK)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통과된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해 그 날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9월 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지를 천명하기 위해 국민대회준비회를 민족주의자 중심의 330명의 발기인 이름으로 발족했다.

 

9월 8일, 국민대회준비회와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명의 이름으로 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날, 소련 군정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이 인민위원회가 향후 현 북한 정권의 모체가 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되어간다는 말이었다. 또, 미국 제7보병사단 소속 병사 14명이 인천을 통해 상륙했고, 다음날 9일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다.

 

1945년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러면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 시정 방침 등을 발표했다. 우선 정강의 내용을 살펴보자.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충실을 기하며,
노동자·농민과 기타 일체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하고,
세계 민주주의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꾀한다.

 지금 봐도 시대적으로 꽤 앞선 내용들을 적고 있다. 그럼 각료 명단은 어떨까?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경제부장 하필원
농림부장 강기덕
보건부장 이만규
교통부장 홍남표
보안부장 최용달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선전부장 이관술
체신부장 신익희
노동부장 이주상
서기장 이강국
법제국장 최익한
기획부장 정백

이 20명의 각료 중 11명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분명 임시정부 출신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명목상의 지위만 얻었던 것이다. 이러니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계열 요인들은 이 조선인민공화국 자체를 부정했다.

1945.08.15~1945.09.07 건국준비위원회
1945.08.17~1945.08.27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1945.08.27~1945.09.08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1945.09.08~1945.11.19 5도인민위원회
1945.11.19~1946.02.08  북조선 5도행정국
1946.02.08~1947.02.22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1947.02.22~1948.09.09 북조선인민위원회
1948.09.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러한 상황에서 9월 16일,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를 내세운 한국민주당(KDP, 1945~1949)이 창당되었다. 이 정당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으로, 2022년 5월 19일 현재 더불어민주당(2015~), 민생당(2020~)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로써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계열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팽팽한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남한에는 미군정만 있을 뿐,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은) 정부를 함부로 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미군정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22일,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모르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 11월 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거절했다.

 

11월 28일, 김구와 김규식 또한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과 이야기가 오고간 것이 없었다며 자신들이 각각 조선인민공화국 내무부장과 외무부장직에 추대된 것을 부인했다. 

 

이렇게 민족주의 계열 인사의 조선인민공화국 각료 직위 거부와 미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존재 부인 등을 계기로 조선인민공화국 세력은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라고 알려진 사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장관이 소련의 모스크바에 모여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관리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3) 한국(KOREA)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trusteeship, опёка)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중축이 되어 한반도의 신탁통치 실시방안에 대한 결정 순서를 정하게 되었다. 이 말은 곧 '한반도를 ''당장'' 신탁통치하자'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회의에서 있었던 중요한 일 하나를 알고 넘어가야 한다. 위에 기재된 '선 임시정부 건설, 후 신탁통치' 안은 소련이 먼저 제시했고, 미국측은 '선 신탁통치, 후 임시정부 건설' 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왜곡되어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12월 27일, <동아일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문에서 이 소식을 왜곡된 채로 실었는데, 이 내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신탁통치 오보사건이라고 한다.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외상회의에서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동아일보>(1면) 1945년 12월 27일자 

 

이 보도가 발표되자 우파는 '즉시 독립'을 주창하며 대중의 정서를 자극했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식민통치의 연장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이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를 반탁운동 혹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새로운 식민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일부 공산주의계열 세력도 동참했다.

 

그러다 1946년 1월 1일 오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소련이 주장했다는 신탁통치는 일본제국이 행했던 식민통치가 아니며, 조선만의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신탁통치 찬성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민족주의계열은 반탁운동을, 공산주의계열은 찬탁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민족주의계열 중심의 반탁운동과 공산주의계열 중심의 찬탁운동으로 정국이 시끄러워진 상황 속에서 1월 16일,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동회담(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1946.01.16~1946.02.05)을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었다.

이 회담은 분단으로 인한 경제, 행정상의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난항을 겪다가 약 한 달 뒤인 2월 5일이 되어서야, 1개월 내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회했다. 

 

1월 24일, 소련이 타스통신(ТАСС)을 통해 모스크바 3상 회담의 경과와 신탁통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오보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2월 8일,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모태로 한 북조선 5도행정국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로 개편했다. 이 조직은 훗날 1948년 9월 9일에 북한 정권이 들어서는 행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해 반탁운동의 핵심 선두 당파로서 상황을 전두지휘 하기 시작했다.

 

2월 14일,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발족되었다. 애초 목적은 과도정부수립이었지만, 미군정 산하의 자문기관으로 전락하면서 그들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의 압박, 반탁운동으로 인한 사회 혼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발족 등으로 남측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진 공산주의계열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은 사라지고, 그 구성원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4.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정리와 의의

북측은 소련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북조선 5도행정국->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순으로 자연스럽게 공산권 국가가 되어갔으며, 그렇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는 틀을 완성해갔다.

한편, 남측에서는 처음에는 민족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세워졌던 조선인민공화국이 점차 사회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의 작품으로 되어가며, 민족주의계열과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조선인민 공화국은 한국현대사 최초로 지방 자치를 시행했으며, 많은 지역에서 지역 인민위원회는 그 지역의 치안, 경제, 경영을 담당해 지역 안정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에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집행부에서의 사상 다툼으로 인해 지도부는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나 남측에서는 반공주의가 크게 일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계열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갈아타게 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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