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웠던 노포동 고분군 방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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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노포동 고분군 방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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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자전거를 타고 이쪽 부근을 지나면서 이 고분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때는 입구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간 꼭 가보겠다고 결심하고 몇년이 지난 후, 스포원으로 산책을 가던 중 이 고분군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 다시 그곳을 찾아봤다.

스포원 밑에 위치한 노포동고분군 (출처 : 네이버

이곳은 스포원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분군 주변에 직장고분군도 있었다는 걸 오늘 글을 정리하면서 처음 알게되었다 ㅠ 알았으면 저기도 가보는 건데..

여튼, 노포동 고분군은 범어사역에서 쭉 올라가다가 차도 기준 큰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노포차량기지 방향인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면 나온다. 위 사진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지역으로 가면 고분로로 이어지게 된다.

고분로 (출처 : 네이버지도)

중앙대로에서 우측으로 가면 나오는 고분로. 이 길의 이름은 이 길 가운데 위치한 노포동 고분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노포동 고분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

고분로에 진입하고 약 10~15분을 걸으면 위의 사진처럼 안내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노포동 고분군 안내판

노포동 고분군(老圃洞 古墳群)

 이 고분군은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 초기 유적이다.

 1983년에 발견된 토기 3점이 부산시에 신고되어 처음으로 알려졌다. 고분은 해발 60~80m 구릉 경사면 기슭에 모여 있다. 이곳은 과수원으로 장기간에 걸쳐 경작되어 파괴가 심하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부산시립박물관과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다.
 조사된 유구는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2동, 삼한시대 토광묘 45기, 옹관묘 6기이고,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석기, 구슬 등 총 834점이었다. 확인된 묘제 가운데 웅관묘는 목곽묘의 배묘적(賠墓的)인 성격을 띤다. 출토유물 가운데 토기류는 회색의 와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 지방 도질토기의 발생시기를 알려주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은 3세기 중엽에서 4세기 초에 걸친 분묘 유적으로 무문토기시대의 주거유적을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목곽묘를 주축으로 하는 묘제와 다량의 와질토기, 철제무기류, 농공구류는 당시 부산지방의 상황과 외래문화의 수용과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고분군은 묘제와 출토유물에 의해 크게 3세기 중엽의 전기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초의 후기로 나누어진다. 후기에 보이는 변화는 환두대도(環頭大刀)의 출현, 철모의 의기화(儀器化)와 다양화, 부곽이 딸린 대형 목곽묘의 등장, 토기 기종의 다양화, 도질토기의 출현 등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지배층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유적은 부산지방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고대국가의 발생과 성격 및 전개과정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3세기면 거진 삼국시대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 삼한 세력들이 완전히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병합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신라 제11대 국왕 조분 이사금(~247) 때, 진한의 골벌국(骨伐國)의 아음부(阿音夫)왕이 신라에 항복하러 왔다는 기사나 신라 제14대 국왕 유례 이사금(~298) 때, 신라에 변한계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침공했다는 기사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시기에 이 지역에서 무덤군이 만들어졌고, 약 한 세기가 지난 무렵, 이 무덤군을 뒤덮고 새로운 무덤군이 만들어졌다. 기존의 무덤군이 덮혔다는 말은 새로운 지배층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한 시대 후기~삼국 시대 초기에 이곳 인근에서 어떤 격전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상상해봤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 고분군의 현재모습을 살펴보자.

노포동 고분군 가는길
노포동 고분군 아래쪽에서 본 풍경

노포동 고분군으로 가는 길에서 우측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 보면 갈색 잡초가 펼쳐진 구릉이 나타난다. '에이 설마 이게 고분군이라고? 조금만 더 올라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좀 더 올라가봤다.

노포동 고분군 위쪽에서 본 풍경

설마하는 마음에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선배님에게 무덤이 하나도 안보이는데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봤다.

발굴 다 하고 덮어놔서 그래요ㅋㅋㅋㅋㅋ

 

ㅠㅠ 그 때 이 고분군의 조사가 1986년에 끝났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고고학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나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이었다. 당연히 발굴을 한 곳은 그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다던가, 유적터로 펼쳐놓고 관리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건 아닌가보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겨두고, 다시 나는 스포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잠깐? 노포동 고분군으로 올라오는 길 말고 다른 풀숲길이 있었다!

노포동 고분군 안내판을 조금 올라오면 나오는 왼쪽의 풀숲길

가다보니 조금 풀이 없는 곳이 나오다가 급격한 내리막길이 보였다.

노포동 고분군으로 연결되는 또다른 길(?)

오! 여기도 고분군으로 향하는 길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내려가봤다.

?????

막혀있다?!?!?!?! 분명 저 앞에 안내판이 뻔히 있는데도 이 길은 막혀있다!!! 하는 수 없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ㅜㅠㅜㅜ

돌아가서 스포원으로 가는 길. 이곳에 분명 노포동 고분군의 안내판과 무단 투기 금지 경고판이 있었다. 저번에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해서 올라가려다가 길이 막혀 못올라갔던 기억이 났다. 내 생각에 길은 맞는데 이 고분군 왼편에 위치한 중장비 공사 회사가 있었는데, 그쪽에서 사유지라고 막아뒀거나, 아님 다른 농사하시는 분이 막아뒀거나,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금정구 문화관광과에서 막아둔 듯하다. 정확한 사유는 모르지만 이렇게 해두면 처음 온 사람들은 길을 못찾을게 뻔하지 않는가ㅠㅜ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유적이었다.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트럭이 서있는 쪽으로 쭉 가면 스포원 입구가 나온다.

스포원 산책갔다가 생각나서 들러본 노포동 고분군의 파여진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내판을 읽으면서 치고박고 싸우며 영토를 넓혀갔던 초기 국가들의 땀과 노력이 느껴졌다. 지나가게 된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고분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나름 이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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