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광역 행정구역 도도부현(都道府県) - 현(県)에 대해 알아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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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세계사, 세계문화

일본의 광역 행정구역 도도부현(都道府県) - 현(県)에 대해 알아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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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광역 행정구역 도도부현 시리즈
1편(https://mspproject2023.tistory.com/553
)
2편(https://mspproject2023.tistory.com/559)

1. 켄(県)

1871년 8월, 일본에서는 중국의 제도와 미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 영향을 받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에도 시대까지 사용하던 번(藩)을 폐지하고 현(県)을 두는 하이한치켄(廃藩置県, 폐번치헌)이라는 행정 개혁을 하면서 현대에 이르는 지방자치단체와 지방공공단체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1947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켄(県)이 보통지방공공단체로서 새롭게 정의되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현재 일본의 県[켄]을 영어로 prefecture라고 번역한다.

1. 보통지방공공단체는 토도후켄(都道府県) 및 시쵸손(市町村)으로 한다.

- <지방자치법 제1편 총칙 제1조의3>

이제 각 현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1-23. 치바현(지바현, 千葉県)

치바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千葉[치바]는 '즈믄개의 잎'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잎이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9~10세기 사이에 완성된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와 <일본후기(日本後紀)>, 메이지 시대에 완성된 <제계보(諸系譜)>에는 '치하노쿠니미야츠코(千葉国造)'라는 관직명이 이미 등장한 것으로 보여 최소한 9~10세기경에는 [치하] 혹은 [치바]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더 오래전에 쓰인 [치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7~8세기에 쓰인 <만엽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 이곳을 知波[치바]라고 썼다.

치바(知波)들(野)의 코노테카시하(古乃弖加之波, 측백나무) 잎은 풋풋하고 사랑스럽지만, (너무 아름다워) 멀리 (여기까지) 왔습니다.

- <만엽집><제20권 4387번>

<일본서기>에서는 이 지역을 知麼[치바]라고 적었다. 그럼 이 [치바]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새(茅)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는 뜻의 치부[茅生]에서 왔다고도 하고, 단어 자체를 보고 '잎(=식물)이 많이 있는 곳'

키사라즈현
(木更津県, 
1871~1873)
치바현
(千葉県,
1873~)
 
시모우사노 진무부
(下総野鎮撫府,
1867)
시모우사 지현사
(下総知県事,
1867~1868)
카츠시카현
(葛飾県,
1868~1871)
인바현
(印旛県,
1871~1873)
사이타마현
(埼玉県, 
1871~)
니이하리현
(新治県,
1871~1875)
이바라키현
(茨城県, 
1871~)
이바라키현
(茨城県, 
1871~)

 

1-24. 토쿠시마현(도쿠시마현, 徳島県)

토쿠시마 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徳島[토쿠시마]는 '덕섬'이라는 뜻이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시코쿠 정벌에 훈공이 있었던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1558~1639)가 아와(阿波) 1국 18만 6000석을 하사받았다.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공에 대한 보답을 받고 하치스카 이치노미야성(一宮城)으로 들어왔지만, 곧 마음을 바꿔 구릉에 성을 쌓는 평산성(平山城) 방식으로 새로운 성을 지을 것을 명했다. 이후 1586년, 토쿠시마성(徳島城)이 완성된다.

1974년의 토쿠시마성 위성도 (출처 : 일본국토교통성)

이 성은 요시노가와(吉野川)라는 강의 하구 삼각주에 지어졌는데, 이를 보고 '재수를 가져다 줄 섬'이라는 뜻의 徳島[토쿠시마]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토쿠시마번
(徳島藩, 1601~1871)
토쿠시마현
(徳島県, 1871)
묘우도우현
(名東県, 1871~1876)
코우치현
(高知県, 1871~)
토쿠시마현
(徳島県, 1880~)​

 

1-25. 토치기현(도치기현, 栃木県)

토치키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栃木[토치기]는 칠엽수(Aesculus turbinata)를 말한다.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당시, 칠엽수(栃木)가 많았다고 해서 '토치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주신으로 모시는 신메이구우(神明宮)의 신전에 있는 10그루의 치기(千木, 신전 지붕 장식 중 하나)를 보고 토치기(十千木)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현명은 나무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1871년 폐번치현 직후 橡木[토치기]이라고 적었으나, 곧 杤木[토치기], 枥木県[토치기]라고 적기 시작했다. 1881년 무렵부터는 지금의 栃木[토치기]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게 되었다.

미부번
(壬生藩, 1602~1871)
미부현
(壬生県, 1871)
토치기현
(栃木県, 1871~)
후키아게번
(吹上藩,1842~1871)
후키아게현
(吹上県, 1871)
사노번
(佐野藩, 1600~1613, 1613~1684, 1698~1826) 
사노현(佐野県, 1871)
아시카가번
(足利藩, 1644~1663, 1688~1692, 1705~1871)
아시카가현
(足利県, 1871)
모오카지현사
(真岡知県事, 1868~1869)
닛코우현
(日光県, 1869~1871)
타테바야시번
(館林藩, 1590~1683, 1707~1734, 1740~1871)

타테바야시현
(館林県, 1871)
우츠노미야번
(宇都宮藩, 1598~1871) 
우츠노미야현
(宇都宮県, 1871~1873)

 

1-26. 톳토리현(돗토리현, 鳥取県)

톳토리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鳥取[톳토리]는 '새잡이'라는 뜻이다.

 

8세기에 완성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의 제11대 덴노 스이닌 덴노(垂仁天皇)와 관련된 기록에서 토토리노미야츠코(鳥取造)와 토토리베(鳥取部)라는 관직명이 등장한다.

스이닌 덴노(垂仁天皇)는 호무츠와케노미코(誉津別王子, 스이닌 덴노의 첫째 황자이자 게이코 덴노의 형)가 30살 성인이 되어도 말을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호무츠와케노미코가) 하늘을 나는 흰새(白鳥)를 보고 '저것이 무어냐?'라고 말을 했다. 덴노는 기뻐하며 그 새를 포획하라고 명했다.
아마노유카와타나(天湯河板挙)가 새를 쫓아 각지를 돌았는데, 마침내 이즈모(出雲)의 땅에서 (그 새를) 포획했다. 이 공적으로 (덴노는 그에게) 토토리노미야츠코(鳥取造)라는 성(姓, 카바네)을 하사했다.

- <일본서기>

말 못하는 황자를 안타깝게 여기던 덴노가 어느날 그 아들이 흰 새를 보고 '저것이 무엇인고'라고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새를 잡아오라 했다. 이 명에 따라 '새잡이부'라는 뜻의 토토리베(鳥取部) 관직이 생겼고, 새를 잡아온 아마노유카와타나(天湯河板挙)에게 하사한 성(카바네)인 토토리노미야츠코(鳥取造)에서 현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톳토리번
(鳥取藩, 1600~1871)
톳토리현
(鳥取県, 1871)

 

1-27. 토야마현(도야마현, 富山県)

토야마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富山[토야마]에 대한 직역은 없다. 富[부]라는 한자를 어떻게 읽어도 [토]라고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자 뜻만 맞춰본다면 '부유한 산'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쿠레하 구릉 (출처 : 구글어스)

이 지역의 토야마 평야(富山平野)에 있는 거대한 언덕인 쿠레하 구릉(呉羽丘陵)이현의 서쪽에서 봤을 때 바깥쪽에 있었기 때문에 '바깥쪽의 산'이라는 뜻의 外山[토야마]라고 불리다가, 발음이 비슷하고 '재산이 많다, 부유하다, 재수가 좋다'라는 뜻을 가진 富む[토무]로 바뀌어 山[토야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설 중 '산이 많이 있는 나라'라는 뜻에서 富山[토야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토야마번
(富山藩, 1639~1871)
토야마현
(富山県, 1871)
니이카와현
(新川県, 1871~1876)
카나자와현
(金沢県, 1871~1872)
이시카와현
(石川県, 1872~)
토야마현
(富山県, 1883~)

 

1-28. 나가사키현(長崎県)

나가사키 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長崎[나가사키]는 '긴 곶'이라는 뜻이다. 이름대로 나가사키의 바닷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들쑥날쑥한 곶이 많이 분포해있다.

밑으로 뻗은 지역이 나가사키 반도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나가사키 반도의 끝부분에 위치한 노모자키 반도(野母崎半島)를 나가사키벤(長崎弁, 나가사키 사투리)을 쓰는 현지에서는 '긴 곶'이라는 뜻의 나가카미사키(長か岬)라고 부른다. 이 발음이 [난카미사키]로 바뀌고, 또 줄어들어 지금의 長崎[나가사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이미 이 지역을 나가사키우라(永崎浦, 長崎浦) 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나가사키] 혹은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나가사키봉행소
(長崎奉行所, 1592~1600, 1603~1868)
나가사키재판소
(長崎裁判所, 1868)
나가사키부
(長崎府, 1868~1869)
나가사키현
(長崎県, 1869~)
히라도번
(平戸藩, 1587~1871)
히라도현
(平戸県, 1871) 
후쿠에번
(福江藩, 1603~1871)
후쿠에현
(福江県, 1871)
오오무라번
(大村藩, 1587~1871)
오오무라현
(大村県, 1871)
시마바라번
(島原藩, 1616~1871)
시마바라현
(島原県, 1871)
사가현
(佐賀県, 1871~1876)

 

1-29. 나가노현(長野県)

나가노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長野[나가노]는 '긴 들'이라는 뜻이다.

나가노분지 전경 (출처 : 위키피디아)

이름 그대로 젠코우지하이라(善光寺平)라고도 불렀던 나가노 분지(長野盆地)가 길게 경사져있어서 이 지역을 長野[나가노]라고 불렀고 그 이름이 현명이 되었다.

 

이나현
(伊那県, 1868~1870)
나가노현
(中野県, 1870~1871)
나가노현
(長野県, 1871~)
오규우번
(大給藩, 1684~1703)
오쿠토노번
(奥殿藩, 1711~1863)
타노구치번
(田野口藩, 1863~1871)
사쿠마현
(筑摩県, 1871~1876)
이와무라다번
(岩村田藩, 1703~1871)
이와무라다현
(岩村田県, 1871)
코모로번
(小諸藩, 1648~1871)
코모로현
(小諸県, 1871)
마츠시로번
(松代藩, 1616~1871)
마츠시로현
(松代県,1871)
스자카번
(須坂藩, 1615~1871)
스자카현
(須坂県, 1871)
이이야마번
(飯山藩, 1603~1871)
이이야마현
(飯山県, 1871)

 

1-30. 나라현(奈良県)

나라 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奈良[나라]에 대한 직역을 할 수 없다. 良[라]는 음훈독으로 읽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님(大君, 덴노)의 명을 황공해하며 정든 집을 떠나 하츠세노카와(泊瀬乃川)에 ㅇㅇ떠있고, 나는 강을 건넌다.
강모퉁이는 80번 굽이지고 (나는) 만번 굽어보네.
옥사발(玉桙)과 함께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푸르고 좋은 나라(楢)의 수도(京師)에 있는 사호가와(佐保川)에 도착한다.
내 잠옷 위 아침달에 푸르게 보면, 베(栲)이삭에 밤서리 내렸고, 바윗침대(磐床)같이 강물이 두텁게 어는 추운 밤에도, 쉬지 않고 계속 다니며 만든 집에 천대(千代)까지 오시오. 대공(多公)이여. 저 또한 통할지니.

- <만엽집><권1 79번>

 

그 때 이와이베(忌瓮)를 와니노타케스키노사카(和珥武鐰坂) 위에 두었다.
곧, 정예병을 거느리고, 나라산(那羅山)에 군과 함께 올랐다. 관군(官軍)이 모여 있을 때, 풀과 나무를 밟아 골랐다(蹢跙). 이에 그 산을 나라산(那羅山)이라고 한다.
[蹢跙[나라]는 '밟아 고르다'라는 뜻의 布瀰那羅須[후미나라스]를 말한다.]


- <일본서기><숭신기(崇神紀)>

<만엽집>의 여러 시가나 <일본서기> 등의 고서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나라(楢, 那羅, 名良, 奈良, 奈羅, 乃楽, 寧樂, 乃羅, 平, 平城)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땅을 밟아 고르다'라는 뜻의 踏み均す[후미나라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795년 편찬된 <이나바지(因幡志)>에 따르면, '평지(平地)'를 ナルヂ[나루지]라고 읽는다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平라는 한자를 [나루]라고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나라]라는 지명은 '평평하다'라는 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 한국어로 '국가'를 뜻하는 '나라'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나 퉁구스계 언어에서 '땅'을 뜻하는 [나]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야규우번
(柳生藩, 1636~1871)
야규우현
(柳生県, 1871)
나라부
(奈良府,
1868~1869)

나라현
(奈良県,
1869~1876)

사카이현
(堺県,
1868~1886)

나라현
(奈良県,
1886~)

코오리야마번
(郡山藩, 1615~1871)
코오리야마현
(郡山県, 1871)
이즈미번
(小泉藩, 1600~1871)
코이즈미현
(郡山県, 1871)
야나기모토번
(柳本藩, 1615~1871)
야나기모토현
(柳本県, 1871)
시바무라번
(芝村藩, 1615~1871)
시바무라현
(芝村県, 1871)
타와라모토번
(田原本藩, 1868~1871)
타와라모토현
(田原本県, 1871)
타카토리번
(高取藩, 1640~1871)
타카토리현
(高取県, 1871)
쿠지라번
(櫛羅藩, 1863~1871)
쿠지라현
(櫛羅県,1871)
오사카정봉행소
(大坂町奉行所, 1619~1868)
오사카부
(大阪府, 1868~)

 

1-31. 니이가타현(니가타현, 新潟県)

나이가타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新潟[니이가타]는 '새로운 석호'라는 뜻이다.

시나노가와와 아가노가와 사이에 위치한 석호, 토야노가타 (출처 : 구글어스)

시나노가와(信濃川)와 아가노가와(亜賀野川)의 하구의 가운데에 형성된 석호가 있는데, 그 석호를 '새로운 석호'라는 뜻에서 新潟[니이가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름이 현명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카시와자키현
(柏崎県, 1868)
니이가타부
(新潟府, 1868~1869)
카시와자키현
(柏崎県, 1869~1873)
니이가타현
(新潟県, 1871~)
에치고부
(越後府, 1868)
에치고부
(越後府, 1869)
스이바라현
(水原県, 1869~1870)
니이가타현
(新潟県, 1868~1869)
사도재판소
(佐渡裁判所,1868)
사도현
(佐渡県, 1868~1871)
아이가와현
(相川県, 1871~1876)
무라카미번
(村上藩, 1598~1871)
무라카미현
(村上県, 1871)
미츠카이치번
(三日市藩, 1724~1871)
미츠카이치현
(三日市県, 1871)
쿠로카와번
(黒川藩, 1724~1871)
쿠로카와현
(黒川県, 1871)
시바타번
(新発田藩, 1598~1871)
시바타현
(新発田県, 1871)
무라마츠번
(村松藩, 1639~1871)
무라마츠현
(村松県, 1871)

 

1-32. 효우고현(효고현, 兵庫県)

효우고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兵庫[효우고]는 兵庫[병고]라는 한자의 음독으로 원칙상 한국어 음독 발음인 [병고]라고 읽을 수 있겠지만, 고유 지명으로 간주해 [효우고]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병기를 넣어두는 창고'라는 뜻이다.

 

1180년말,  승려 츄우겐(重源)은 겐페이 합전(源平合戦, 1180~1185)으로 불탄 토우다이사(東大寺)를 복원하기 위한 물자 창고 항구인 효우고노츠(兵庫津)를 지었다. 이 지역은 송일무역(宋日貿易)의 거점으로서 가마쿠라 시대의 제1항구가 되었고,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서도 명일무역(明日貿易)을 주도하며 명실상부 최고급의 항구로서 입지를 유지해 나갔다. 이 시기에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류큐에서도 배가 드나들었을 정도로 동아시아 국제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독일 북부 지역의 무역 동맹으로 자리 잡았던 한자 동맹(Hanse, 13~17세기)의 전성기 때의 뤼베크 수출입 관세 기록부를 확인해보면 뤼베크(Lübeck) 지역의 항구에 한해 약 680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1444년 한 해간 효우고 항에 입출항했던 배는 약 2,500척에 다다를 정도로, 당시 이미 세토 내해 연안의 물자 유통규모가 거대했고 그 물자는 효우고의 항구를 거쳐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도 시대에도 물자 유통항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1858년에 맺어진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에서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이가타(니가타), 에도, 오사카와 함께 개항하게 된다. 서양인으로써 처음 공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일본의 6개의 항구 중 하나가 바로 효우고였다는 뜻이다.

 

그럼 이 [효우고]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제35대 덴노 고교쿠 덴노(皇極天皇, 594~661)) 3년(644년) 겨울 11월, 소가노오오오미노에미시(蘇我大臣蝦夷, 586'~645)와 (그의) 아들 이루카노오미(入鹿臣, 611'~645)가 오마카시노오카(甘檮岡)에 함께 집을 세웠다. 오오오미의 집(大臣家)은 상궁문(上宮門)이라고 불렀고,  이루카의 집(入鹿家)은 곡궁문(谷宮門)이라고 불렀다. [곡(谷)은 '하사마(波佐麻)'라고 한다.]
집 밖에 성책을 짓고, 문곁에 병고(兵庫)를 지었다.

- <일본서기><고교쿠덴노기>

이렇게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효우고(兵庫)를 병고(병기를 두는 창고)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한 일화에 따르면 38대 덴노 덴지 덴노(天智天皇, 626~672)가 츠와모노구라(兵庫)를 설치했는데, 이 말을 음역한 [효우고]가 현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효고진대
(兵庫鎮台, 1868)
효고재판소
(兵庫裁判所, 1868)
효고현
(兵庫県, 1868~)
히메지현
(姫路県, 1871)
시카마현
(飾磨県, 1871~1876)
묘우도우현
(名東県., 1871~1876)
오마가사번
(尼崎藩, 1615~1871)
오마가사현
(尼崎県, 1871)
산다번
(三田藩, 1626~1871)
산다현
(三田県, 1871)
셋츠현
(摂津県, 1869)
토요사키번
(豊崎県, 1869)
토요오카현
(豊岡県, 1871~1876)
교토부
(京都府, 1868~)

 

1-33. 히로시마현(広島県)

히로시마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広島[히로시마]는 '넓은 섬'이라는 뜻이다.

오오타가와 삼각주 (출처 : 구글어스)

이 이름에 걸맞게 이 지역을 흐르는 오오타가와(太田川)의 하구에 큰 삼각주가 있는데, 이를 오래전부터 넓은 섬이라는 뜻의 [히로시마]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서 현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589년, 모리씨(毛利氏)의 14대 당주이자 무사였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가 이 강 하구에 성을 건설했는데, '넓은 섬'안에 지어졌다고 해서 히로시마성(広島城)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성의 유래에 대해서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모리 테루모토가 이 성을 지을 때, 그의 조상 중 한명인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1148~1225)의 히로(広)와 당시 지역 호족이자 무사였던 후쿠시마 마사나가(福島元長, 1615~1702)의 이름의 시마(島)를 합쳐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해석이다.

히로시마번(広島藩, 1600~1871) 히로시마현(広島県, 1871~)
오카야마현(岡山県 1871~)

 

1-34. 후쿠이현(福井県)

후쿠이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福井[후쿠이]는 '복우물'이라는 뜻이다.

 

1575년 8월,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노쿠니(越前国)를 재침공해서 혼간지(本願寺)의 문도와 승려를 탄압하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1583)에게 에치젠의 키타노쇼우(北之庄)를 비롯한 8개 군(郡)을 주었다. 그 해, 시바타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성(北之庄城, 北ノ庄城)을 축성한다. 그러나 키타노쇼우성 싸움(北ノ庄城の戦い)을 계획한 하지바씨(羽柴氏)가 싸움에서 이기면서 당시 시바타 카츠이에는 성내 도시에 불을 지르고는 자결했다.

 

이후, 1585년까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1535~1585)가 성주로 있었고, 그 다음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1553~1590)가 성주가 되었지만, 1598년, 에치고노쿠니의 카스카야마성(春日山城)으로 봉해져 성주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 유우키 히데야스(結城秀康, , 1574~1607)가 키타노쇼우 지역을 받게 되었고, 타버렸던 키타노쇼우성을 다시 지었다.

 

1623년, 유우키 히데야스의 아들이자 3대 키타노쇼우번주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忠昌, 1598~1645)는 北[호쿠]라는 글자가 '패배'를 뜻하는 敗北[하이보쿠]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해 성 이름을 '복있는 거주지'라는 뜻의 후쿠이[福居]로 바꾸었고, 나중에 이 이름은 이 성 부근에 있던​ 우물 福井​[후쿠이]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지역에 있던 한 우물에서는 물이 부풀며 뿜어져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착안해 '부풀어 오르는 우물'이라는 뜻의 脹井[후쿠이]라고 불렀던 것이 지명으로 확대되었다고도 하며, 후쿠이성 아래에 흐르던 아스와가와(足羽川)를 '복이 많은 강'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福井​[후쿠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후쿠이현
(福井県, 1871~1872)
아스와현
(足羽県, 1872~1873)
츠루가현
(敦賀県, 1871~1876)
시가현
(滋賀県, 1872~)
후쿠이현
(福井県, 1881~)
이시가와현
(石川県, 1872~)

 

1-35. 후쿠오카현(福岡県)

후쿠오카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福井[후쿠오카]는 '복(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 큰 공을 세워 치쿠젠노쿠니(筑前国) 지역 일부를 가지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1602)가 비젠노쿠니(備前国)의 오카야마번(岡山藩)으로 봉해졌다. 이에 당시 부젠노쿠니(豊前国)의 나카츠번(中津藩)의 2대 번주였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1568~1623)가 나지마성(名島城)으로 봉해지며 후쿠오카번(福岡藩)이 성립한다.

1601년, 쿠로다 나가마사는 나지마성을 폐지하고, 나카군(那珂郡) 케고촌(警固村) 후쿠자키(福崎)에 새로운 성을 지어 1607년에 후쿠오카성(福岡城)을 완성시켰다. 이 번명과 성 이름이 지금 현명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럼 이 [후쿠오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일설에 따르면, 쿠로다 나가마사의 출신지라고 여겨지는 비젠노쿠니의 후쿠오카쇼우(福岡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지역은 '언덕이 있는 땅'이 있어서 그 뜻의 한잣말인 福岡[후쿠오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그가 성을 지은 후쿠자키(福崎)라는 이름을 후쿠오카(福岡)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코쿠라번(小倉県, 1871~) 후쿠오카현
(福岡藩, 1871~)
오오이타현
(大分県, 1871~)
후쿠오카번
(福岡藩, 1600~1871)
후쿠오카현
(福岡県, 1871~)
아키즈키번
(秋月藩, 1623~1871)
아키즈키현
(秋月県, 1871)
미즈마현(三潴県, 1871~1876)
나가사키현
(長崎県, 1869~)

 

1-36. 후쿠시마현(福島県)

후쿠시마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福島[후쿠시마]는 '복섬'이라는 뜻이다.

 

1413년 4월, 다테 마츠이누마루(伊達松犬丸)라고도 불렸던 다테모치무네(伊達持宗, 1393~1469)가 카케타 사다카츠(懸田定勝)와 함께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 1398~1439)에 반대해 다이부츠성(大仏城)라는 성에서 농성을 벌였던 일이 있었다. 이 다이부츠성은 후에 스기노메성(杉妻城, 杉目城)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1592년경,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 ?~1598)는 스기노메성(杉妻城, 杉目城)후쿠시마성(福島城)으로 고치고 그 성에 살게 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이 후쿠시마(福島)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후쿠시마현청이 세워진 곳에 후쿠시마성이 있었다. 후쿠시마현청의 위에 있는 도시로 둘러 쌓인 산이 시노부야마(信夫山)다.

후쿠시마성이 있던 지역은 오래전 호수늪이였다.  그 가운데 위치한 시노부야마에서 강한 재넘이(밤에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부는 바람)가 불고 있었기 때문에 '재넘이가 부는 섬'이라는 뜻의 후키시마(吹島)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름에서 발음이 비슷하면서 뜻이 좋은 후쿠시마(福島)라고 바꿔 불렀다고 한다.

타이라현
(平県, 1871~1872)
이와사키현
(磐前県, 1872~1876)
미야기현
(宮城県, 1872~)
후쿠시마현
(福島県, 1871~)

시라카와번
(白河藩, 1627~1869)
시라카와현
(白河県, 1869~1871)
니혼마츠현
(二本松県, 1871)
니혼마츠번
(二本松県, 1627~1871)
후쿠시마번
(福島藩, 1679~1868)
후쿠시마현
(福島県, 1869~1871)
와카마츠민정국
(若松民政局, 1868~1869)
와카마츠현
(若松県, 1869~1876)

 

1-37. 미에현(三重県)

미에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三重[미에]는 '세 겹'이라는 뜻이다.

到三重村之時、亦詔之 「吾足、如三重勾而甚疲。」 號其地謂三重。
미에무라(三重村)에 다다랐을 때, 말씀하시길 '나의 다리는, 세겹 굽은 듯하여 심히 피로하다' 하였다. (따라서) 이 땅을 미에(三重)라고 부른다.

- <고사기>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가 미에촌(三重村)에 다다랐을 때, 다리가 세겹으로 굽어질 정도로 피곤하고 지쳤다는 설화가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저 시기부터 미에(三重)라는 발음과 한자표기로 해당 지역을 불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이 물가 부근에 있기 때문에 '물가'라는 뜻의 水辺[미헤]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카와라이부
(度会府, 1868~1869)
카와라이현
(度会県, 1869~1876)
미에현
(三重県, 1876~)
토바번
(鳥羽藩, 1681~1871)
토바현
(鳥羽県, 1871)
히사이번
(久居藩, 1669~1871)
히사이현
(久居県, 1871)
아노우츠현
(安濃津県, 1872~1876)
츠번
(津藩, 1595~1871)
쿠와나번
(桑名藩, 1601~1871)
쿠와나현
(桑名県, 1871)
이세카노번
(伊勢亀山藩, 1601~1871)
이세카노현
(伊勢亀山県, 1871)
나가시마번
(長島藩, 1649~1871)
나가시마현
(長島県, 1871)
칸베번
(神戸藩, 1651~1871)
칸베현
(神戸県, 1871~1872)
코모노번
(菰野藩, 1600~1871)
코모노현
(菰野県, 1871)

 

1-38. 미야기현(宮城県)

미야기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宮城[미야기]는 '신을 모시는 성' 혹은 '황제가 사는 성'이라는 뜻이다.

宮城[궁성]이라는 글자를 [큐우쥬우]라고 음독한다면, '황제, 왕, 덴노가 머무는 곳'을 말하지만, 실제로 해당 지역을 발음할 때는 훈독하기 때문에 [미야기]라고 읽는 것이 맞다.

 

이 지역에는 무츠노쿠니(陸奥国)의 국부(国府, 일본 율령국의 국사가 정무를 보는 곳에 설치한 도시) 중 하나인 타가성(多賀城)이 설치되었는데, 이 타가성이 조정의 직할지로 여겨져 미야케(宮宅, 屯宅)라고 부르던 것이 [미야기]로 바뀌어 그에 맞는 한자 宮城[궁성]을 끼워 맞췄다고 한다. 혹은 처음부터 '조정의 성'이라는 뜻에서 宮城[미야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한편, 이 지역에 있는 시와히코오오미카미(志波彦大神)를 주신으로 모시는 시오가마 신사(鹽竈神社)를 宮[미야]라고 불렀는데, 이에 '큰 집(성 등)'을 뜻하는 접미사 城[키]가 붙어 宮城[미야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센다이번
(仙台藩, 1601~1871)
센다이현
(仙台県, 1871)
미야기현
(宮城県, 1871~)
시로이시현
(白石県, 1869)
카쿠다현
(角田県, 1869~1871)
와쿠야현
(涌谷県, 1869)
토메현
(登米県, 1869~1871)

 

1-39. 미야자키현(宮崎県)

미야자키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宮崎[미야자키]는 '신을 모시는 곶' 혹은 '황제가 사는 곶'이라는 뜻이다.

 

宮[미야]는 '신궁(신을 모시는 곳)' 혹은 '황거(황제가 사는 곳)'라는 뜻이며, 崎[사키]는 '곶'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키]는 '앞(先, 前)'이라는 뜻으로 보이기에, '신궁 앞'이라는 뜻의 미야자키[宮前]의 글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어원 속에서 말하는 '신궁'의 후보로는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 나고 신사(奈古神社), 에다 신사(江田神社)' 등이 있다. 이 중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는 그 유명한 진무 덴노가 동방 원정을 준비하던 궁궐이라는 설이 있으며, 지금도 이 신사에서는 제1대 덴노인 진무 덴노를 기리는 제를 지내고 있어 이 해석에 더 신빙성을 준다.

노베오카번
(延岡藩, 
1587~1871)
노베오카현
(延岡県, 1871)
미미츠현
(美々津県,
1871~1873)
미야자키현
(宮崎県, 
1873~1876)
가고시마현
(鹿児島県, 1871~)
미야자키현
(宮崎県, 1883)
타카나베번
(高鍋藩, 
1604~1871)
타카나베현
(高鍋県, 1871)
사토와라번
(佐土原藩,
1603~1871)
사토와라현
(佐土原県, 1871)
가고시마현
(鹿児島県, 1871~)
토미다카현
(富高県, 1868)
히타현
(日田県,
1868~1871)
류큐번
(琉球藩,
1872~1879)
코쿠라현
(小倉県, 1871~1876)
후쿠오카현
(福岡県, 1871~)
오오이타현
(大分県, 1871~)

 

1-40.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가타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山形[야마가타]는 '산모양'이라는 뜻이다.

 

사실 오래전에는 이 지역을 山方[산방/야마가타]라고 썼다.

모가미군(最上郡) 야마가타향(山方郷)

- <화명류취초>

山方[야마가타]는 직역하면 '산쪽'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 지역에는 높은 산들이 많다. 의문점은 많지만 이러한 자연 경관에서 따왔다는 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텐도우번
(天童藩, 1830~1871)
텐도우현
(天童県, 1871)
야마가타현(山形県, 1870~)
스카타현
(酒田県, 1869~1870)
카미노야마번
(上山藩,1622~1871)
카미노야마현
(上山県, 1871)
신죠우번
(新庄藩, 1622~1871)
신죠우현
(新庄県, 1871)
츠루오카현
(鶴岡県, 1875~1876)
오키타마현
(置賜県, 1871~1876)

 

1-41. 야마구치현(山口県)

야마구치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山口[야마구치]는 '산(의) 입'이라는 뜻이다.

히가시호우벤산 풍경 (출처 : https://www.jldb.bunka.go.jp/)

야마구치현의 가운데에 거대한 히가시호우벤산(東鳳翩山)이 있다. 이 산에 들어가기 위한 주변 지역을 야마구치(山口)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이 현명이 된 것이다. 거기다 산의 입구라는 것은 '산의 가장자리'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야마후치(山縁)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었다고도 한다.

하기번
(萩藩,1600~1863)
야마구치번
(山口藩,1863~1871)
야마구치현
(山口県,1871)
이와쿠니번
(岩国藩, 1868~1871)
쿄스에번
(清末藩, 1653~1871)
쿄스에현
(清末県, 1871)
쵸우후번
(長府藩, 1600~1869)
토요우라번
(豊浦藩, 1869~1871)
토요우라현
(豊浦県, 1869~1871)

 

1-42. 야마나시현(山梨県)

야마나시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山梨[야마나시]는 '배나무(Pyrus pyrifolia)'라는 뜻이다.

 

단어 그대로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한편, '이루다'라는 뜻을 가진 成す[나스]에서 따와 '산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뜻의 山成[야마나시]에서 왔다고도 한다. 그와 반대로 이곳의 평야를 보고 '산이 없는 곳'이라는 뜻에서 山無し[야마나시] 혹은 '산없이 평평한 곳'이라는 뜻의 山平らし[야마나라시]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후츄우현
(府中県, 1868)
카이부
(甲斐府, 1868)
카이현
(甲府県, 1868~1870)
야마나현
(山梨県, 1870~)
이치카와현
(市川県, 1868)
이사와현
(石和県, 1868)

 

1-43.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와카야마현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和歌山[와카야마]는 '와카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和歌[와카]는 일본 고유의 시가를 말한다.

 

센고쿠 시대가 한창이던 15세기 중반, 키이노쿠니(紀伊国)와 카와치노쿠니(河内国)의 슈고다이묘였던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高政, 1527/1531~1576)는 오카야마성(岡山城)을 세웠다.

이후 1585년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슈 정벌을 하고 오카야마성 부근에 와카야마성(和歌山城)을 세우며 오카야마성의 역할을 폐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카야마성을 세우던 지역을 오래전부터 '어린산'이라는 뜻의 와카야마(若山)라고 불렀는데, 천하를 지배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어리다, 미숙하다'라는 뜻을 가진 若[와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큰 고심끝에, 그 성의 남쪽에 있던 전통적인 명승지였던 와카노우라(和歌浦)의 이름을 따서 와카야마(和歌山)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이 지금까지 현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와카노우라(和歌浦)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와카노우라가 있던 해변을 '젊은 해변'이라는 뜻의 와카노하마(弱浜)라고 불렀던 것이 그 유래라고 본다.

그러다 724년, 제45대 덴노 쇼무 덴노(聖武天皇, 701~756)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밝은 빛의 포구'라는 뜻의 아카노우라(明光浦)라고 부르라는 칙령을 내렸고, [아카노우라], [와카노우라]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를 자주 부른 포구라는 뜻에서 와카노우라(和歌浦)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19세기에 완성된 <키이속풍토기(紀伊続風土記)>에서는 타마츠시마신사(玉津島神社)에서 주신으로 모시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의 누이동생 와카히루메노미코토(稚日女尊)의 이름에서 와카(和歌)가 유래했다고 한다.

키슈우번
(紀州藩, 1586~1871) 
와카야마번
(和歌山藩, 1869~1871)
와카야마현
(和歌山県, 1871~)
키이타나베번
(紀伊田辺藩, 1619~1871)
타나베현
(田辺県, 1871)
키이신구우번
(紀伊新宮藩, 1600~1871) 
신구우현
(新宮県, 1871)

 

 

일본의 대표적인 광역행정구역인 도도부현의 지명을 공부하면서 일본어 한자를 읽는 실력을 다지려고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근 일본 날씨 뉴스를 보던 중, 나오는 지명을 통해 대략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 어느 곳이다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이 지명들을 정리하면서 각 지역들의 특색과 간략한 역사 또한 알게 되어 일본의 지형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올라갔음을 몸소 느꼈다. 짧지만 긴 시리즈를 빠른 기간 안에 정리하고 재점검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 이 글을 쓰고 개인 시간을 좀 가지려 한다. 그래봤자 2~3일 이겠짘ㅋㅋㅋㅋ

최근 블로그에 글이 뛰엄뛰엄 올라온 것도 이 시리즈를 준비한다고 그런 거였으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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