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진리교와 일본적군, 미국이 지정한 일본 내 외국테러단체(F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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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진리교와 일본적군, 미국이 지정한 일본 내 외국테러단체(F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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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5년 이민 국적법 219조와 그에 따른 FTO 지정

FTO외국 테러 조직(Foreign Terrorist Organization)의 약칭으로, 1965년 제정된 1965년 이민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에 따라 미국 정부가 테러 활동에 관여하는 것으로 간주해 미국 국무장관이 지정한 미국에 근거지를 두지 않은 테러 단체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SEC. 219 - DESIGNATION OF FOREIGN TERRORIST ORGANIZATION

(a) Designation.-
     (1) IN GENERAL.-The Secretary is authorized to designate an organization as a terrorist organization in accordance with this subsection if the Secretary finds that-
          (A) the organization is a foreign organization;
          (B) the organization engages in terrorist activity (as defined in section 212(a)(3)(B) 1a/ or terrorism (as defined in section 140(d)(2) of the Foreign Relations Authorization Act, Fiscal Years 1988 and 1989 (22 U.S.C. 2656f(d)(2)), or retains the capability and intent to engage in terrorist activity or terrorism); and
         (C) the terrorist activity 1a/ or terrorism of the organization threatens the security of United States nationals or the national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219조 - 외국테러조직(FTO) 지정

(a) 지정.-
     (1) 일반.-국무장관은 본 항에 따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할 권한이 있다.
           (A) 그 조직이 외국 조직인 경우
           (B) 그 조직이 테러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 (212(a)(3)(B) 1a/조에 정의된 테러 활동 혹은 <회계년도 1988년 및 1989년 외교활동허가법>(22 U.S.C. 2656f(d)(2)의 140(d)(2)항에 정의된 테러리즘, 테러 활동 및 테러리즘에 참여할 수 있는 의도 및 능력 유지)
           (C) 그 조직의 테러 활동(1a/에 의해 정의) 및 테러리즘이 미합중국 국민 및 미합중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경우

- 1965년 이민 국적법 219조 中

1965년 12월 1일 제정되고, 1968년 7월 1일 발효된 미국의 <1965년 이민 국적법(1965 INA)>의 219조에는 테러 활동에 참가하거나 직접 수행 중이면서 그 테러 활동이 미국 및 미국 국민의 안보를 위협하는 외국 조직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이 그 조직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가함을 명시했다.

 

그 외, 1996년에 제정된 <1996년 반테러리즘 및 유효사형법> 및 <1996년 불법 이민 개혁 및 이민자 책임법(1996 IIRIRA)>에 따라 1997년 10월 8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K.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1937~)은 총 30개의 외국 테러 조직(FTO)를 지정했다.

INA의 219(a)(2)(A)(ii)조에서 요구됨에 따라, 1997년 10월 8일 나는 연방 관보(Federal Register)에 발표할 것을 지시한다.

- 제64대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K.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1937~)

 

2001년 9월 23일, 제43대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1946~)가 발표한 행정명령 13224호(Executive Order 13224)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미국 재무부와 함께 개인과 독립적 단체(법인 등)를 대테러 제재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 대한 테러를 일으키는 단체 및 개인에 대한 경제적 불이익을 미국 정부 자체의 제재가 가능해졌다.

테러 수행 및 태러 위협 및 테러 지원을 하는 개인과의 재산 저지(블로킹) 및 거래 금지

- 행정명령 13224호(Executive Order 13224)

이에 따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그러한 개인과 기업의 별도 목록을 작성하여 보유하고 있다. 혹시 이와 관련된 정보를 찾고 싶다면 미국 재무부 사이트(https://home.treasury.gov/)를 참고하길 바란다.

 

2. 뚜둔! 일본도 FTO로 당첨되셨습니다!

Aum Shinrikyo
also known as Aum Supreme Truth,
also known as A.I.C. Sogo Kenkyusho,
also known as A.I.C. Comprehensive Research Institute

Japanese Red Army
also known as Nippon Sekigun,
also known as Nihon Sekigun,
also known as the Anti-Imperialist International Brigade,
also known as the Holy War Brigade,
also known as the Anti-War Democratic Front,
also known as the JRA,
also known as the AIIB

- 연방관보 Vol.62, No. 195(1997년 10월 8일 발표)

1997년 10월 8일에 발표된 연방관보에 발표된 30개의 FTO 중 독특해 보이는 이름이 몇가지 있다.

그 하나는 Aum Shinrikyo[오움 신리쿄], 또 다른 하나는 Japanese Red Army[재패니즈 레드 아미]다...

그렇다. 1997년 당시 일본에도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된 단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2-1.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와 그들이 일으킨 사건들

1987년 6월, 아사하라 쇼코가 이끌던 여성 전용 요가 단체 옴신선회(オウム神仙の会)의 이름을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로 고치며 신흥 종교 단체로 세간에 등장하게 된다. 종교로 우뚝 서면서 아사하라 쇼코는 거액의 헌금을 강요했고, 이 때 쯤, 당시 그를 따르던 제자의 3분의 1이 그곳을 나갔다.

 

1988년 9월 2일, 신자가 100일 수행을 하던 중 발작을 일으켰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신도들에게 그를 찬물에 담그라고 지시한다. 이러던 중 그 제자는 사망하게 되었고, 당시 교단은 도쿄에 종교법인을 신청중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시신을 태운 뒤 호수에 유기했다. 이 사건을 옴진리교 재가신자 사망 사건(オウム真理教在家信者死亡事件)이라고 부른다.

 

1989년 2월 10일, 옴진리교 서적 판매를 하고 있던 한 남성 신자가 회의감을 갖고 종교를 떠나려 했다. 또, 직전 옴진리교 재가신자 사망 사건의 뒷처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상사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 그 사실은 즉시 교주에게 보고가 들어갔고 교주는 그를 후지산의 한 독방에 감금하게 된다. 계속된 설득에도 그를 되돌릴 수 없었던 교단은 결국 그를 포아(phowa, 사후의 의식 전이를 뜻하는 티베트 불교 용어)했다. 옴진리교에서의 포아는 옴진리교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신자를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을 옴진리교 남성신자 살해 사건(オウム真理教男性信者殺害事件)이라고 부른다.

같은 해 11월 4일, 교단에 적대적이라고 여겨졌던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와 그 일가족을 교단측이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이 일어났다. 교살당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단에 빠진 아들을 구해달라는 한 어머니의 요청으로 옴진리교를 조사하고 있었다.

 

1990년 혹은 1991년경, 옴진리교의 금품을 횡령했다고 여겨진 한 27세 여성 신자가 그에게 붙잡혀 교살 혹은 약물 투여로 인해 사망한 옴진리교 여성신자 살해사건(オウム真理教女性信者殺害事件)이 일어났다.

 

1990년 4월, 흔히 보톡스라고도 불리는 보툴리눔 독소(BTX)를 도쿄에 살포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효과도 영향도 없었다.

 

1993년 6월 6일, 탈회를 희망하던 25세 남성 신도에게 거꾸로 매다는 수행을 시켰다. 이 수행은 다리에 밧줄을 감고 견인기로 올려 사람을 거꾸로 매단 뒤 1시간반 정도 매달아 두는 수행이지만 당시 감독관이 축제 준비로 자리를 비웠고, 남성 신도는 너무 오래 매달려 있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후 시체를 가열장치로 소각하고 유골을 갈아 목욕탕 배수구에 유기했다. 이 사건을 옴진리교 남성신자 거꾸로 매달기형 사망 사건(オウム真理教男性信者逆さ吊り死亡事件)이라고 한다. 사망까지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1993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2차례에 걸쳐 가메이도 악취 사건(亀戸異臭事件)이 일어났다. 옴진리교 가메이도 교단 신도쿄 총본부 부근에서 썪은 된장과 같은 강렬한 악취가 풍겼다고 한다. 후에 밝혀지길 이 냄새의 원인은 탄저균이었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탄저균을 배양할 때 썼던 약품이 너무 강해 대부분의 세균이 죽거나 유독균으로 발달하지 못해 탄저균 살포 미수 사건으로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이 탄저균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본 국회의사당, 황거(천황의 거주지), 옴진리교가 프리메이슨 건물이라고 여긴 곳, 창가학회, 도쿄타워에도 이 탄저균을 살포했지만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4년 1월 30일, 교단에서 탈출하려던 약제사는 여성 B와 모의해 그가 치료하던 여성 A와 같이 탈퇴하려고 하다가 잡혔다. 교주는 약제사를 도와준 여성 B에게 약제사를 살해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살인을 강요했고, 결국 그 여성 B가 약제사를 목졸라 죽인 약제사 린치 살인 사건(薬剤師リンチ殺人事件)이 일어났다.

 

1994년 6월 27일, 마츠모토 사린사건(松本サリン事件)이라고도 알려진 마츠모토 시내에서의 독물사용 다수살인사건(松本市内における毒物使用多数殺人事件)이 일어났다. 사건의 동기는 마츠모토 시에 건물을 사려다 민사소송을 당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 재판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교주는 그 재판을 판결할 판사를 살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알루미늄 2톤 트럭을 개조한 사린 분무차를 만들고 1994년 6월 27일 22시 경 나가노 지방법원 마츠모토지부 관사에 도착해 관사를 향해 준비한 사린가스를 발포했다. 약 50분이 지나고 모든 사린가스를 발포하자 차는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판사들을 포함한 7명이 사망, 600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이후 다시 한번 전일본이 옴진리교에 반감을 더 깊게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는 옴진리교를 몰아내기 위한 여러 활동이 펼쳐졌다.

 

이후에도 탈퇴를 결심한 신도나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감금하거나, 고문시켜(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수행을 하던 중에') 사망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옴진리교를 추적하던 일본 경찰의 수사망을 교란시키면서 수도권에 큰 혼란을 주기 위해 옴진리교의 악명을 세상에 또다시 널리 알린 사건이 일어났다.

 

1995년 3월 20일, 도쿄도 지하철 사린사건(地下鉄サリン事件) 혹은 지하철내 독물사용 다수살인사건(地下鉄駅構内毒物使用多数殺人事件)이라고 불리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했다.

작은 노란색 동그라미는 '살포범이 승차한 역'을 말하며, 화살표는 '살포범이 사린을 살포한 시점이자 열차의 진행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역명의 뒤에 흰색으로 숫자가 기입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그 역에서의 사망자 수다.

오전 7시 48분경, 옴진리교 신도 5명은 제도고속도교통영단(帝都高速度交通営団, 1941~2004, 현 (주)도쿄지하철)에서 운영하며 주요 관공서를 지나가는 마루노우치선(丸ノ内線)과 히비야세키선(ロ日比谷線)에 각각 2편성, 치요다선(千代田線)에 1편성에 사린을 담은 종이봉투를 들고 탔다. 이들은 종이봉투에 구멍을 내곤 다음 열차에서 내리고 대기하던 차를 타고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약 6300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14명이 사망했으며, 경찰은 즉시 옴진리교 본부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조사했으며, 관련자를 처벌했고, 1995년 5월 16일, 현금 960만엔을 들고 숨어있던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체포하며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교주가 잡히고 약 5개월 뒤인
10월 30일, 도쿄 지방법원으로부터 옴진리교에 대한 종교 법인법상의 해산 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옴진리교는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외치며 활동을 계속했다. PC통신, 미디어, 게임 등의 2차 창작까지 만들며 교주를 기다림과 동시에 (그들 입장에서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997년 10월 8일, 미국 <이민국적법>에 따라 FTO로 선정되었다.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 Aum Shinrikyo)
옴진리(オウム真理, Aum Supreme Truth)
A.I.C. 종합연구소(A.I.C. 総合研究所, A.I.C. Sogo Kenkyusho, A.I.C. Comprehensive Research Institute)

1999년 9월, 옴진리교 교단은 옴진리교에 대한 휴면선언(休眠宣言)을 했다.

 

한편 일본 국회는 앞으로 이런 집단 테러를 막고자 오무신법(オウム新法)이라고도 불리는 무차별대량살인행위를행한단체의규제에관한법률(無差別大量殺人行為を行った団体の規制に関する法律) 1999년 12월 7일에 공시하고 같은 달 27일에 시행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일이 끝날 줄 알았건만, 각지에서는 옴진리교의 후계 종단이 속속 생겨났다.

2000년 2월 4일 아레후(Aleph, 알레프) 설립
2007년 5월 7일 히카리노와(ひかりの輪, 빛의 고리) 설립
2014~2015년경 야마다라노슈우단(山田らの集団, 야마다계의 집단) 설립

 

1995년경(추정) 케로욘 쿠라프(ケロヨンクラブ, 케로욘 클럽) 설립
(불명) 기소오닷카이샤(偽装脱会者, 위장탈회자) 설립

 

이 사건으로 우선 일본 요가 업계는 큰 파국에 치달았다. 당시 문을 닫던 요가 업계가 많았지만, 2000년대 건강과 같은 새로운 토픽이 떠오르며 종교적 색채를 없앤 새로운 현대식 요가가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 등에서는 종교법 개정을 해 종교 단체에 대한 의무를 무겁게 지게 했으며, 각국에서는 테러방지를 위한 법도 개정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에 맞춰서 미국 국무장관은 이 옴진리교를 외국테러단체(FTO)로 지정했다.

 

2-2. 일본적군(日本赤軍)

일본적군(日本赤軍)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적군파(赤軍派)에서 갈라져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신좌익계 조직. 해외에 근거지를 찾아 레바논에 출국한 인원들이 1972년 결성. 같은 해 텔 아비브 국제공항 난사 사건을 비롯해, 1980년대 중동, 유럽, 동남아시아에서 각국 대사관을 습격하거나 항공기 하이재킹 등을 반복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조직원들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2001년에는 해산을 선언했다.

- goo.dic

 

일본공산당준비회(日本共産党準備会, 1921~1922) -
일본공산당(日本共産党, 1922~) -
전일학생자치회총연합(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 1948~)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1958~)
공산주의자동맹적군파(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 1969~)
일본적군(日本赤軍, 1971~2001)

 

1969년에 결성된 공산주의자동맹적군파(약칭 적군파)는 '전(前)단계 무장봉기론'을 주장하며 무기를 모으다가 다이보사츠 고개 사건(大菩薩峠事件, 적군파의 53명이 무기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조직의 힘을 약화시킨 사건) 등으로 조직원이 대거 체포되자 해외에도 운동거점과 동맹군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국제근거지론'을 주창했고, 잡히지 않은 조직원 중 일부는 항공기 요도 호를 하이재킹해 북한으로 도망간 요도 호 사건(よど号事件)을 일으켰다.

 

한편, 중동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منظمة التحرير الفلسطينية) 등의 무장 투쟁이 계속됐고, 그 중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الجبهة الشعبية لتحرير فلسطين, PFLP)은 엘알 이스라엘 항공 426편 납치 사건(1968년), 도슨필드 지역 항공기 동시 납치 사건(Dawson's Field hijackings, 1970년) 등을 일으키며 항공기 이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70년대부터 일본적군을 이끌었던 '장발 미인' 시게노부 후사코. 이 '장발 미인'이라는 호칭은 당대 신문에서 그를 부르던 별칭이었다.&amp;nbsp; (출처 : 산케이뉴스)

1971년 2월,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1945~)는 오쿠다이라 츠요시(奥平剛士, 1945~1972)와 위장 결혼을 하고 오쿠다이라 후사코(奥平房子)라는 이름을 얻고 2월 28일에 중동으로 떠났다. 이 때 그들은 스스로를 '아랍적군(アラブ赤軍), 적군파 아랍위원회(赤軍派アラブ委員会), 혁명적군(革命赤軍)' 등으로 칭했는데, 당시 이름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일본적군이 탄생했다. 이 때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외부 작전(PELP-EO)에게 지도되는 형태로 조직이 운영되었다.

 

1972년 2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와 일본공산당 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약칭 : 혁명좌파)가 모여 결성한 연합적군(1971~1972) 일으킨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끝나고 1972년 3월 4일, 적군파 아랍위원회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의 독립 및 독자 노선의 진행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적군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꿈과 용기를 담아 결별을 선언한다.
(...)
동료를 죽인 연합적군 동지들이여, 이제, 동지라고 부르려는 내 마음을 알겠는가?
동료를 죽일 권리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비록 당신들이 몇 명, 수십 명의 적을 죽였다고 해도 동료를 죽인 죄는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
모든 당파, 모든 투쟁의 담당자가, 스스로의 것을 재점검하지 않는 한, 크든, 작든, 이와 같은 종말로 향할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
죽음을 결의한 투쟁은 동지들의 목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현실적으로 총격전을 수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동지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적군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의 질을 실질적으로 역류시키는 일을 단호히 지속할 것입니다.


- 적군파 동지제군 및 연합적군 동지제군 그리고 친구들에게
(赤軍派の同志諸君ならびに連合赤軍の同志諸君そして友人たちへ)

 

사건 직후 현장 사진 (출처 : BBC)

1972년 5월 20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지원을 받은 적군파 아랍위원회는 이스라엘의 법적 수도인 텔 아비브 인근에 있던 로드 공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켰다.이 사건을 로드 공항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기 2시간 전인 1972년 5월 20일 오전 10시경, 로마에서 출발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로드 공항에 도착했고, 그 비행기에서 적군파 아랍위원회 위원 3명이 내렸다. 수수한 옷차림에 슬림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니던 조직원들의 모습은 공항 경비원이나 행인의 눈길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12시 4분경, 그들은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체코 vz. 58 자동소총을 꺼내들었다. 그들은 주기장으로 뛰어나가 지나가는 행인들과 이스라엘 항공기를 향해 사격했고, 수류탄을 던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테러범 1명을 포함한 79명이 부상을 입었고, 테러범 2명을 포함한 26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자 중에서는 당시 이스라엘 생체고분자 전기화학의 선구자였던 아하론 카치르(Aharon Katzir, 1914~1972)도 포함되었다.

납치된 일본항공 404편 (출처 : 일본항공)

1973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발, 파리 및 앵커리지 경유, 하네다행 일본항공 404편(JA8109)에 적군파 아랍위원회의 마루오카 오사무 등 5명과 PFLP 요원 4명의 혼성부대가 폭탕 등의 무기를 들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기체에 탑승했다.

비행 도중 한 여성 조직원이 수류탄을 잘못 터트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우연히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조직원들은 하이재킹을 일으켰다. 항공기 납치범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로드 공항 난사 사건 때 잡혔던 조직원이자 해당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테러범 오카모토 코우조우(岡本公三, 1947~)의 석방과 5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레바논과 시리아는 승인하지 않았고, 부득이 항공기는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항공기는 두바이에서 3일간 대기했고 그동안 정부는 그들과의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비행기는 떠났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국제공항에서 연료 보급을 받은 뒤 리비아 벵가지에 위치한 베니나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후 납치범들은 인질로 잡아둔 승무원과 승객 150명을 풀어준 뒤 비행기를 폭파하고 리비아 당국에 투항했다. 그들이 투항했던 날짜는 7월 23일이었다. 당시 리비아의 최고지도자였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묵인아래 테러범은 무사히 국외로 빠져나갔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처음에 수류탄을 실수로 터뜨린 여자 조직원뿐이었으며 1~2명이 경미한 수준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1974년, PELP-EO의 지도하를 떠나 최고간부 시게노부 후사코와 군사전문가 마루오카 오사무(丸岡修, 1950~2011)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투쟁을 모색했고 그 결과 아랍 적군 등의 통칭으로 알려진 이 조직이 정식으로 일본적군(日本赤軍)이라고 자칭했다.

1974년 1월 31일, 와코우 하루오(和光晴生, 1948~)와 야마다 요시아키(山田義昭, 1949~), 그리고 PFLP 요원 2명이 싱가포르 공화국의 팔라우 부콤(Pulau Bukom) 섬에 위치한 석유회사 로열 더치 쉘의 석유 정제 시설을 습격해 이동용 보트를 뺏고 선원 5명을 인질로 잡은 뒤 납치범(일본적군 및 PELP)의 국외 이송을 요구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이 요구를 거부해 교착상태에 빠졌다2월 6일 쿠웨이트 주재 일본대사관 점거사건이 터지자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급히 싱가포르에 파견된 일본항공 특별기편으로 2월 8일, 납치범 4명은 무장을 한 채 쿠웨이트로 향할 수 있었다... 참고로 쿠웨이트 주재 일본대사관 점거사건을 일으킨 일본적군 인원은 남예멘 정부의 묵인 아래 도망칠 수 있었다...

1974년 9월 14일, 헤이그(Hague)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의 덴하흐(Den Haag)의 프랑스 대사관이 습격당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원흉은 또 일본적군이었다. 일본적군 인원 3명이 구속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했고, 프랑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체포한 인원을 석방했다. 이 사건으로 네덜란드 주재 경찰관 2명과 일본적군 인원 1명이 다쳤고, 사망자는 없었다.

 

1975년 8월 4일, 구속된 일본적군 및 연합적군, 적군파의 조직원 및 동조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미국 대사관과 스웨덴 대사관을 점거하고 당시 말레이시아 주재 미국 총영사 프랜시스 T. 언더힐(Francis T. Underhill, Jr.)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그 요구에 응해 초법적 조치로 일본 적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한 2명을 제외한 총 5명을 석방했고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 사건을 쿠알라룸푸르 사건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구속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납치나 습격, 항공기 납치(하이재킹) 등이 지속적으로 계속 행해지고 있었다.

 

1981년, 제3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يَاسِرْ عَرَفَاتْ), 2004~ 1929)가 방일했을 때, 한 때 경찰청장관을 지냈던 고토우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가 일본에 대한 일본적군이 벌이는 납치를 그만두게 하도록 제의했고, 당시 PLO 도쿄사무소(현 주일 팔레스타인 상주총대표부) 소장 파트히 압둘 하미드(Fathy Abdul Hamid)로부터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는 회답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PLO의 협력도 줄고, 조직원들과 중심 멤버들도 체포되기 시작하며 조직은 점점 괴멸하게 된다. 1987년 11월, 일본 도쿄도 내에 조직의 핵심 인물이던 마루오카 오사무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루마니아와 페루, 네팔, 레바논, 볼리비아 등에 잠복해있던 핵심 조직원들이 국외 퇴거 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강제 귀국해 체포되었다.

 

1991년경부터,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일본 내에서 무력 혁명을 이루려는 인민혁명당(人民革命党)과 그 활동을 일으키려는 위장 단체 희망의 21세기(希望の21世紀)의 조직을 준비했으며, 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 1945~1996)과의 제휴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직원이 하나하나 잡혀가고 있던 1997년 10월 8일, 미국 <이민국적법>에 따라 일본적군은 FTO로 선정되었다.

일본적군(日本赤軍, Japanese Red Army, JRA, Nippon Sekigun, Nihon Sekigun)
반제국주의국제여단(反帝国主義国際旅団, Anti-Imperialist International Brigade, AIIB)
성전여단기구(聖戦旅団機構, the Holy War Brigade,
반전민주전선(反戦民主戦線, Anti-War Democratic Front)

2000년 11월, 일본적군의 최고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도 잠복해 있던 일본 오사카 부 다카쓰키 시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때, 일본적군은 희망의 21세기라는 단체를 설립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일본사회당과 협력하려 했다는 정보를 얻고, 곧 그 2곳을 조사했지만, 희망의 21세기와 일본사회당은 자신들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2001년 4월,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적군으로서의 해산 선언을 하여 조직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후에 이렇게 반성했다. 다만 로드 공항 사건에 대한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를 바꾸겠다고 우쭐해했고,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해도 좋다고 하는 감각에 빠져 있었다.

- 시게노부 후사코와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 中

그는 같은 달, 스스로에 대한 자서전, 정확히는 옥중수기를 발표했는데 그 책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너를 낳으려 했다(りんごの木の下であなたを産もうと決めた)'이다.

 

2001년 5월, 조직은 시게노부 후사코의 조직 해체 선언 사실을 받들어 해산을 공인했다.

2001년 10월 8일, 조직이 해체되었다고 판단한 제65대 미국 국무장관 콜린 루서 파월(Colin Luther Powell, 1937~2021)은 미국 <이민국적법>에 따라 지정된 FTO에서 일본적군을 해제했다.

'일본적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었지만, 그 구성원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있었다. 그들은 2001년 12월 연대(連帯)라는 일본적군의 후속 단체를 설립해 활동을 재개했다.

 

2003년 1월, 일본적군의 명을 잇는 '연대'는 '무브먼트 연대(ムーブメント連帯)'로 조직명을 변경했다.

2003년 5월, 팔레스타인에 헌화를(パレスチナに献花を!, Flowers for Palestine)이라는  5·30집회에서 무브먼트 연대는 '리다 투쟁의 의의를 지켜내고 그 희생적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밝혔고, 이 일을 계기로 일본 공안경찰은 그 단체를 '극좌폭력집단'으로 규정하며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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