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관련 용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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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관련 용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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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860년대(860~869)

862~(~1598), 류리크가(Рю́риковичи)
- 초대 노브고로드 공국 공작 류리크(Рюрик)를 시조로 하는 동유럽의 가문. 이들의 후손들은 노브고르드 루스(862~882), 키예프 루스(882~1240)를 거쳐 모스크바 공국(1283~1359), 모스크바 대공국(1359~1547), 러시아 차르국(1547~1721)의 극초기인 1598년까지 러시아 역사의 다양한 핵심적인 곳에서 오랜 시간 통치차로 군림했다.
 
862~1136, 노브고로드 공국(Княжество Новгородский)
 

870년대(870~879)

 

880년대(880~889)

882, 올렉(Олег), 1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
 
882~1240, 키예프 루스(Киевская Русь)
- 9세기에 류리크 왕조(Рю́риковичи)의 권력 아래  동슬라브족과 핀우그리아족이 연합해 북동유럽 지역에 형성되었다가 12세기 중반에 봉건적 분열 상태에 들어가고, 13세기 초중반에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힘을 잃어 1240년 사라졌던 중세 국가. 부분적으로 농사와 목축을 했으며, 중개무역을 통해 먹고 살았다.

890년대(890~899)

 

10세기

900년대(900~909)

907, 907년 루스-비잔틴 전쟁(Война Киевской Руси и Византии 907 года)

- 키예프 루스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며 시작된 전쟁은 키예프 루스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으로, 러시아 사상 처음으로 외국과의 무역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910년대(910~919)

911.09.02, <911년 루스-비잔틴 조약(Ру́сско-византи́йский договор 911 года)>
-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가 911년 9월 2일에 맺은 조약으로,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 사이의 평화를 확립하고, 죄수와 포로를 몸값을 받고 돌려주며, 동로마 제국의 해안에 다다른 조난된 배와 재산은 포획하지 않고, 구조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루스 상인들은 6개월간 콘스탄티노플에서 살 권리를 얻게 되었고, 자유 무역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추가로, 동로마 제국에서 루스인을 군인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920년대(920~929)

 

930년대(930~939)

 

940년대(940~949)

941.05~944, 941~944년 루스-비잔틴 전쟁(Русско-византийская война 941—944 годов)
- 941년 5월에 키예프 루스의 이고리 1세 류리코비치가 페체네그(Печенег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비티니야(Bithynia) 지역을 침범하며 시작되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으로 본격 전개되었고, 키예프 루스는 민간을 약탈하거나 잔혹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9월에 두 장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올라와 키예프 루스를 해치워 나가기 시작했지만, 944년경 키예프 루스는 한 차례 더 침공해왔고,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와 키예프 루스는 동로마 제국과 조약을 맺으며 전쟁은 막을 내린다.
 
944, <944년 루스-비잔틴 조약(Ру́сско-византи́йский договор 944 года)>
- 941~944년 루스-비잔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가 각각 중세 그리스어와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정리해 맺은 <911년 루스-비잔틴 조약>을 갱신한 조약으로, 키예프 루스 상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고 직물을 수출해야하고, 동로마 제국령 크림 반도와 루스 차르국과의 국경을 키예프 루스가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키예프 루스는 더 이상 크림 반도 지역과 그 이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945, 드레블랴네 반란(Восстание древлян)
- 드레블랴네족(Древляне)은 키예프 루스의 반복적인 공물 요청에 빡쳐서 이고리 대공과 그의 친위대가 사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머니 올가(Ольга)의 섭정을 시작으로 스뱌토슬라프(이고르의 아들)이 키예프 대공 즉위한다.
 

950년대(950~959)

957, 크냐기나 올가의 콘스탄티노플 세례(Крещение княгини Ольги в Константинополе)

957년 가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크냐기나 올가가 세례를 받았다고 전하며, 이렇게 루스 내에서 위로부터의 기독교 도입 움직임이 커지게 된다.

 

960년대(960~969)

965(or 968, 969), 스뱌토슬라프 이고로비치의 하자르 원정(Хазарский поход Святослава Игоревича)
-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브 이고로비치 대공의 하자르 공격은 키예프 루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자리야(Хаза́рия, 하자르국)은 지도 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사르켈(Саркел)과 타만 반도가 키예프 루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투르크 부족의 큰 무리들은 흑해 북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 때 볼가 불가르족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직 이에 대해선 논란중이다.
 
967~971, 스뱌토슬라프 이고로비치의 불가리아 원정(Походы Святослава Игоревича в Болгарию)
-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이고로비치 대공이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진군하고 인근의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하였으나, 동로마 제국의 역공으로 더 이상 발칸반도와 크림반도, 그리고 불가리아 지역을 넘보지 않는다고 퇴각하게 된다. 그렇게 키예프로 돌아가던 도중 동로마 제국의 뇌물을 받은 페체네크 유목민들의 공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970년대(970~979)

 

980년대(980~989)

980, 블라디미르 대공(스뱌토슬라프의 아들) 즉위
- 스뱌토슬라프 사후 혼란기를 평정하고, 형제 야로폴크의 뒤를 이어 키예프 대공에 즉위
 
981~982, 블라디미르의 뱌티치 원정(Поход Владимира на вятичей)
- 블라디미르가 아직도 명줄을 이어가는 뱌티치족(Вятичи)을 다시 진압하고, 조공을 뜯어갔다. 이에 분노한 뱌티치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982년 재정복했다. 그들은 힘을 잃은 채 11세기 말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다가 흡수된다.
 
981~985, 블라디미르의 폴란드 원정(Поход Владимира на Польшу)
-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가 결국 승리했고, 키예프 루스는 서부의 도시 체르벤(Червен)을 편입시켰다.
 
983년 블라디미르의 야트뱌히 원정
-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고 발트-리투아니아계인 야트뱌히(Ятвяги)를 정복하고,수다비야(Судавия, 혹은 야트뱌히야(Ятвя́гия))를 점령해 북쪽의 발트해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988, 블라디미르 대공과 안나 비잔틴스카야의 결혼
블라디미르 대공(956'~1015)는 동로마 제국의 안나 비잔틴스카야(Анна Византийская, 963~1011)와 결혼을하며, 키예프 루스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으며,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도 진행되는 발판을 한 층 더 쌓아나가게 된다.

988(or 998),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루스의 세례, Крещение Руси)
- 블라디미르 대공은 크림 반도의 케르소네소스(Херсоне́с)에서 세례를 받고 '성 대 바실레이오스'의 이름을 딴 바실리(Василий)란 세례명을 받고, 이후 그가 키예프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세례를 해주며, 키예프 루스는 기독교 중 그리스 정교를 국교화한다. 국교화 과정 중 다양한 종교를 마주치게 되는데, 하자르인이 추천한 유대교는 유대인이 국가 없이 떠도는 것을 두고 거부했고, 볼가강 볼가르인이 추천한 이슬람교는 음주와 육류 소비 금지 때문에 거부했으며, 독일의 카톨릭을 방문한 사절단은 무미건조하고 영광이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을 토대로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된 사절단이 그리스 정교가 의식이 장엄하고 교회가 아름답다는 보고를 했는데, 이를 통해 블라디미르 대공은 그리스 정교를 채택하게 된다. 이후 기존 국가종교였던 루스의 민속신앙과 합쳐져 이중종교적 성격을 띈 러시아 정교가 탄생하게 되며, 문화(키릴 문자 도입 등), 정치적으로 큰 위로부터의 발전과 민족적 통합, 개혁이 일어났고, 주변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990년대(990~999)

 

11세기

1000년대(1000~1009)

 

1010년대(1010~1019)

1015.07.15, 블라디미르 대공 사망
 
1016, 야로슬라프 1세 무드리(블라디미르의 아들) 즉위
- 그는 재위 시절 동슬라브족의 관습법과 남쪽에서 유입된 비잔틴적 요소가 혼합된 <루스카야 프라브다>라는 러시아 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들었으며, 자녀들을 서양으로 보내기도 했다.
 

1020년대(1020~1029)

 

1030년대(1030~1039)

1030~1031, 야로슬라프 무드리의 폴란드 원정(Польский поход Ярослава Мудрого)
 
1037, 키예프에 소피아 대성당(Софийский собор) 건설 시작(~1041)
 

1040년대(1040~1049)

 

1050년대(1050~1059)

1054.02.20, 야로슬라프 무드리 서거
 

1060년대(1060~1069)

 

1070년대(1070~1079)

 

1080년대(1080~1089)

 

1090년대(1090~1099)

 

12세기

1100년대(1100~1109)

 

1110년대(1110~1119)

1113,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프세볼로트 1세 야로슬라비치의 아들) 즉위
 
1113', <지난 세월의 이야기(Повесть временных лет, 원초연대기)>
- 수도사 네스토르(Несторъ, 1056'~1114)가 850년경에서 1110년경에 걸친 루스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키예프 루스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이자 연대기. <원초연대기> 혹은 <네스토르 연대기>라고도 불린다.
 

1120년대(1120~1129)

1125.05.19,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서거
 

1130년대(1130~1139)

1130', <블라디미르 성모 이콘(Владимирская икона Божией Матери)> 하사
- 1130년경 동로마 제국의 비잔티움에서 므스티슬라프 1세 블라디미로비치 키예프 대공에게 선물한 <블라디미르 성모 이콘>이 키예프 루스에 도착했다. 이 이콘은 113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키예프에 도착한 그리스의 키예프와 전 루스의 관구장 주교 미하일 2세(Михаил II)에 의해 전달되었다.
 
1136~1478, 노브고로드 공화국(Новгоро́д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1140년대(1140~1149)

1147.04.04, 모스크바(1147~) 설립
- <이파티예프 연대기(Ипатьевская летопись)>에 따르면, 1147년 4월 4일 금요일에 유리 돌고루키 로스토프-수즈달 대공이 모스크바를 설립했다고 전한다.
 

1150년대(1150~1159)

 

1160년대(1160~1169)

 

1170년대(1170~1179)

 

1180년대(1180~1189)

 

1190년대(1190~1199)

1199~1392,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Галицко-Волынское княжество)
- 1199년, 볼히니아 공국(Волынское княжество, 987~1452)와 갈리치하 공국(Галицкое княжество, 1141~1199)가 합쳐지며 건설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이후 잠시 또 분열되었다가 1238년 재결합되었다. 이후 1349년경 갈리치아 지역을 잃게 되며, 1392년엔 갈리시아-볼리니아 상속 전쟁(Война за галицко-волынское наследство)으로 갈리치아 지역은 폴란드 왕국(Королевство Польское 1025~1569)에게, 볼히니아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1795)에게 복속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3세기

1200년대(1200~1209)

 

1210년대(1210~1219)

 

1220년대(1220~1229)

1220~1224, 제베-수부타이 원정(Поход Джэбэ и Субэдэя)
 
1223.5.31, 칼카 강 전투(Битва на реке Калке)
 

1230년대(1230~1239)

1236'~1795, 리투아니아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Литовское)
 
1237~1241, 몽골의 루스 침공(Монгольское нашествие на Русь)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키예프 루스를 침공했는데, 결국 키예프 루스는 패배하고,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봉신이 되었다.
 

1240년대(1240~1249)

1240.07~1242.04, 리보니아의 루스 원정(Ливонские походы на Русь)
- 독일계 기사단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루스의 프스코프(Псковск)를 차지하려고 일으킨 원정은 결국 독일계 기사단의 패배로 끝나며, 알렉산드르 넵스키 노브고로드 대공과 평화를 체결하게 되었고, 리보니아 기사단은 더 이상 북부 영토를 들먹일 수 없게 된다.
 
1240.12.06, 키예프 함락
- 몽골에 의해 키예프가 점령되었고, 그 결과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고, 몽골-타타르의 멍에(1240~1480)의 시대가 등장한다.
 
1240~1480, 몽골-타타르의 멍에(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1241.01, 몽골의 갈리치(할리치, Галич), 블라디미르-볼린스키(Владимир-Волынский) 및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Галицко-Волынское княжество)의 도시들을 점령
 
1242.04.05, 추드 호수 전투(битва на Чудском озере)
-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독일계 기사단이 맞붙은 전투로, 기적적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독일계 기사단들을 궤멸시켜 그들의 영향이 루스로 뻗지 못하도록 차단한 전투
 
1242~1502, 킵차크 칸국(금장 한국, Золотая Орда)
 
1247~1326, 트베리 공국(Тверско́е кня́жество)
 

1250년대(1250~1259)

 

1260년대(1260~1269)

1263~1283, 모스크바 공국(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
 

1270년대(1270~1279)

 

1280년대(1280~1289)

1280, 레오 다닐로비치의 크라쿠프 원정(Краковский поход Льва Даниловича)
 
1283~1547.01.16, 모스크바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
 

1290년대(1290~1299)

 

14세기

1300년대(1300~1309)

 

1310년대(1310~1319)

 

1320년대(1320~1329)

1325.11.29, 유리 3세(유리 다닐로비치) 서거, 이반 1세 즉위
 

1330년대(1330~1339)

 

1340년대(1340~1349)

1340.04.08, 이반 1세 서거, 시메온 이바노비치(이반 1세의 아들) 즉위
 

1350년대(1350~1359)

1359.11, 이반 2세 서거, 드미트리 돈스코이(이반 2세의 아들) 즉위
 

1360년대(1360~1369)

 

1370년대(1370~1379)

1377, <라브렌트 연대기(Лавре́нтьевская ле́топись)>
- 수도사 라브렌트(라브렌티, Лаврентий)가 850년경부터 1305년까지 일어난 루스의 역사를 기록한 연대기로, 이전의 <원초연대기>의 내용에 더해 이후의 동슬라브의 역사를 추가한 형식이었다. 이 연대기는 1240년 키예프 루스가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후, 동슬라브의 정치적 중심을 이뤘던 수즈달 공국의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명령으로 편찬되었다.
 
 

1380년대(1380~1389)

1380.09.08, 쿨리코보 전투(Кулико́вская битва)
- 블라디미르 대공국(1147~1389)의 지원을 받은 모스크바 공국(1263~1478)의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군과 마마이 칸이 벌인 전투로, 킵차크 한국의 대군은 돈강 변으로 진격하여 모스크바의 동맹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처음으로 루스가 몽골을 대규모로 이긴 전투를 계기로 모스크바는 몽골로부터 독립할 뻔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마마이 칸은 암살당한다.
 
1389.05, 드미트리 돈스코이 서거, 바실리 1세(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아들) 즉위
 

1390년대(1390~1399)

 

15세기

1400년대(1400~1409)

 

1410년대(1410~1419)

 

1420년대(1420~1429)

 

1430년대(1430~1439)

 

1440년대(1440~1449)

1441~1783, 크림 칸국(Кры́мское ха́нство)
 

1450년대(1450~1459)

 

1460년대(1460~1469)

1462.04.05, 바실리 2세 사망
 
1462.04.06, 이반 3세(이반 대제, 바실리 2세의 아들) 즉위
 

1470년대(1470~1479)

1471.봄~1471.08.11, 1471년 모스크바-노브고로드 전쟁(Моско́вско-новгоро́дская война (1471))
- 리투아니아와의 동맹을 맺은 노브고로드가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3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스크바 대공국을 치지만,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이 승리했고, 두 국가는 코로스틴(Коростынь)에서 <코로스틴 조약>을 맺게 되고, 그 결과 노브고로드의 모스크바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게 된다.
 
1471.08.11, <코로스틴 조약(Коростынский договор)>
-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와 노브고로드 공화국 정부가 제2차 모스크바-노브고로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작성한 평화조약으로, 1456년 2월 야젤비치(Яжелбицы)에서 맺은 <야젤비치 조약(Яжелбицкий мир)>에 이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베체를 청산하게 된다.
 
1472, 체르딘 원정(Чердынский поход)
- 카잔 칸국과의 전쟁(1467~1469)에서 대페름(Пермь Великая)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돕지 않은 것을 이유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대페름을 침공했고,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이 승리하고, 대페름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굴복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은 해당 지역에 요새 포츠카(Покча)를 건설한다.
 
1472.11.12,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와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의 결혼
- 이 결혼으로 인해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3의 로마'라는 칭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쌍두독수리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후예로 일부 인정받게 된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칭호를 '벨리키 크냐지'에서 '차르'로 변경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주국가의 위치로 나아간다.

1477.10.09~1478.01.15, 1477~1478년 모스크바-노브고로드 전쟁(Моско́вско-новгоро́дская война (1477—1478))
- 1470년대 중반 노브고로드 공화국에서 반모스크바 투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모스크바가 노브고로드를 쳐들어 왔는데, 그 결과 모스크바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를 완전 합병하고, 노브고로드의 민회와 공화국을 해체시킨다.
 

1480년대(1480~1489)

1480.10.08~1480.11.11, 우그라 강 대치(Стоя́ние на реке́ Угре́, Стояние на Угре)
- 이흐 칸국(대칸국, 1433~1502)의 아흐마트 칸(Ахма́т, ~1481)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약 1개월간 우그라 강에서 대치했는데, 결국 러시아의 전략적 승리로 끝나며, 루스는 킵차크 칸국의 지배에 벗어나 완전히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된다.
 

1490년대(1490~1499)

1497, <1497년 법전(Судебник 1497 года)>
- 1497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발간한 지역별로 나누어져 있던 법을 통일한 러시아 국가의 중앙집권화에 큰 역할을 했던 러시아 국가 법전이다.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기반으로 만들었으며, 기본적인 범죄 기준과 수사 방법, 형벌을 통일하고, 봉건제 하에서 지주를 보호하기 위해 농민이 타지역으로 이동하려면 그 영주에게 추징금(пожилое)을 내게 하는 등 농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부분이 강조된다. '<이반 3세 법전(Суде́бник Ивана III)>'이라고도 부른다.
 

16세기

1500년대(1500~1509)

1500~1503, 1500~1503년 러시아-리투아니아 전쟁(Русско-литовская война 1500—1503)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국 분할 문제로, 러시아 정부와 크림 칸국이 합세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싸웠으며, 그 결과 대승한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약 3분의 1을 획득하게 된다.
 
1505.11.06, 이반 3세 서거, 바실리 3세(이반 3세의 아들) 즉위
 

1510년대(1510~1519)

 

1520년대(1520~1529)

 

1530년대(1530~1539)

1533.12.13, 바실리 3세 서거, 이반 4세(바실리 3세의 아들) 즉위
- 이반 4세가 3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즉위 직후부터 1538년까지 어머니 옐레나 바실레브나 그린스카야(Еле́на Васи́льевна Гли́нская)가 섭정했으나 그녀 사망 이후 귀족 가문들이 섭정하게 된다.
 
1535~1552, 1535~1552년 러시아-카잔 전쟁(Русско-казанская война 1535—1552 годах)
- 카잔 칸국의 잔알리(Джан-Ал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며 일어난 전쟁은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결국 카잔 칸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1540년대(1540~1549)

1545~1552.10.02, 카잔 원정(Казанские походы)
- 카잔 칸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선빵을 날렸고, 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확장 의지가 맞물려 모스크바 대공국이 역공해 결국 카잔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카잔 칸국은 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루스 차르국이 해당 지역을 합병한다.
 
1547.01.26, 이반 4세의 대관식
- 이반 4세가 정교회 대주교의 권유로 군주의 칭호를 '차르'로 공식 사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국가 체계는 '대공국'에서 '차르국'으로 바뀌게 된다.
 
1547.01.26~1721.11.02, 루스 차르국(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1550년대(1550~1559)

1554~1556, 아스트라한 원정(Астраханские походы)
- 1550년대 초, 크림 칸국의 동맹국이었던 아스트라한 칸국은 볼가 강 하류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1554년 볼가 강을 차지하려 했던 루스 차르국은 우선 흑해 인근에서 아스트라한 칸국의 2개 부대를 격파했고, 그제서야 아스트라한 칸국은 루스 차르국에 복속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2년뒤 1556년,아스트라한 칸국이 갑자기 오스만 제국에 붙었고, 루스 차르국의 코사크 부대를 통해 아스트라한 칸국을 완전 복속시켜 루스 차르국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1554~1557.03.25,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Русско-шведская война 1554—1557 годов)
-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노브고로드 주지사의 중재 없이 스웨덴과 직접 협상하기를 꺼린 것을 빌미로 스웨덴-핀란드 연합군이 노브고로드를 급습했고, 이렇게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사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마을을 부수어 리보니아(Ливония) 지역을 재탈환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1556년 7월에 끝났지만, 결국 스웨덴 측의 제안으로 러시아와 스웨덴 1557년 3월에 <제2차 노브고로드 휴전>을 맺으며 전쟁을 끝내게 된다.
 
1557.03.25, <제2차 노브고로드 휴전(Второе Новгородское перемирие>
-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554~1557)의 결과로 맺어진 조약으로, <오레호베치 조약(Ореховский мир, 1323)>에서 확립된 국경들이 복원되었으며, 장기 휴전에 돌입하자고 약속하게 된다.
 
1558.01.22~1583.08.10, 리보니아 전쟁(Ливонская война)
-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서유럽과의 교역을 위해 발트 해로 진출하고자 리보니아 기사단을 공격하며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리보니아 기사단은 러시아, 스웨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격으로 쇠퇴하다가 결국 해체된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스웨덴과 덴마크도 발트 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루스 차르국을 공격했고,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와의 휴전 협정도 파기한다.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돌아갔고, <얌-자폴스키 조약(Ям-Запольский мир, 1582.01)>를 통해 루스 차르국은 리보니아, 폴라츠크를 폴란드에 양도했으며, <플루사 휴전(Плюсское перемирие, 1583.08)>에 따라 루스 차르국은 잉그리아 대부분과, 리보니아 북부 지역을 스웨덴에게 양도하게 된다.
 

1560년대(1560~1569)

1560.08.07,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의 사망
- 이반 4세의 부인이자 이반 4세의 분노를 잘 가라앉혔던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가 사망하는데, 이반 4세는 누군가 그녀를 독살했을거라고 생각해 귀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표도르 1세 등을 낳았으며, 이후 그의 존재로 인해 로마노프가가 루스 차르국의 새로운 왕조로 즉위하는 계기를 일부분 제공하기도 했다.
 
1565.01~1572, 오프리치니나(Опри́чнина)
- 러시아 차르국 이반 4세가 창설한 토지 관련 제도면서 그 제도의 핵심이 되는 토지 명칭으로, 1565년 이반 4세는 국토를 차르의 사적 영지인 오프리치니나(Опричнина)와 공적 국토이자 오프리치니나 이외의 귀족령인 젬시나(Земщина)로 분할하고 사적 영지 오플리치니나에서 독재권력을 행사해 기존 유력자인 귀족들을 탄압했다. 이 사적 영토는 이반 4세에게 충실한 엘리트 계급의 친위대인 오프리치니키(Опричник)에 의해 관리되거나 하사된다. 이반 4세가 정한 오프리치니나의 재산이 포함된 지역에 있던 여러 공귀족들은 처형되거나 젬시나로 강제 이주되었다.
 
1565.01~1572, 오프리치니키(Опричник)
이 단어는 '밖에'라는 뜻의 부사 опричь[오플리치]에서 유래해 '밖에 서있는 자'란 뜻으로, 이반 4세가 다시 왕좌로 돌아왔을 때 세운 친위대. 그들은 다양한 전투와 전쟁에 참여했긴 했으나, 주 목적은 이반 4세에게 반항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형시키는 것이었다.
 
1568~1570,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568—1570 годов)
-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의 볼가 유역 지배권을 확립하고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관계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루스 차르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후 루스 차르국은 교역을 위한 볼가 강 통행권을 획득했으며, 이 전쟁을 서막으로 러시아와 오스만은 수많은 전쟁을 겪게 된다. 
 

1570년대(1570~1579)

1570.01.02~1570.02.12, 노브고로드 학살(Новгородский погром)
- 이반 4세와 그의 친위대 오프리치니나가 노브고로드의 제후를 포함한 여러 시민들을 포함해 대략 2천~6만 명을 약 5주간 학살한 사건으로, 오프리치니나에 의한 학살 중 가장 잔혹하고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렇게 뒤엉킨 시체들로 도시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도시의 규모는 이전처럼 큰 규모를 이루진 못했다.
 

1580년대(1580~1589)

1584.03.28, 이반 4세 서거, 표도르 1세(이반 4세의 아들) 즉위
- 이반 4세가 독살로 사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의 아들 표도르 1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만, 실권은 그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표도르 1세와 섭정 형태의 공동 통치를 하며 고두노프가가 루스 차르국을 다스릴 준비를 했다.

1590년대(1590~1599)

1591.05.25, 드미트리 우글리치스키 사망
- 이반 4세의 부인 마리아 나가야가 낳은 아들인 드미트리 우글리치스키는 우글리치 공국의 대공으로 있었으나, 1591년 5월 25일 어떤 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당시 보리스 고두노프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그는 칼을 가지고 놀다가 사망했다고 하나, 당시 귀족들은 보리스 고두노프가 죽였다고 믿었다.
 
1598.01.17, 표도르 1세 서거(류리크 왕조의 단절)
 
1598.02.27, 보리스 고두노프(표도르 1세의 처남) 즉위
 
1598~1613, Сму́тное вре́мя(동란 시대)
- 류리크 왕조에서 로마노프 왕조로 변환되던 혼란기. 자연재해, 외부 개입, 내전, 전쟁 등 다양한 사회 경제적 위기가 겹쳤다.
 

17세기

1600년대(1600~1609)

1605.04.23, 보리스 고두노프 서거, 표도르 2세(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 즉위
 
1605.06.20, 표도르 2세 서거
 
1605.07.11, 가짜 드미트리 1세 즉위
 
1606.05.27, 가짜 드미트리 1세 서거
 
1606.05.29, 바실리 4세 즉위
- 류리크가의 방계인 대귀족 슈이스키 가문의 바실리 슈이스키가 귀족들의 추천에 의해 차르로 즉위한다.
 
1606.10.07~1605.12.02, 모스크바 공방전(Осада Москвы (1606))
 - 바실리 4세가 이끌던 루스 정부군과 농민 반란군 대표 이반 볼로트니코프(Иван Болотников, 1565~1608.10.18)가 맞붙은 전투로, 결국 농민반란군들이 대부분 진압되었으나, 반란 주도자 이반 볼로트니코프는 세르푸코프(Серпухов)로 도망갔다가 곧 칼루가(Калу́га)로 도망간다. 이들의 반란 때문에 새로운 왕조의 건설에 도와준 농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농노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1610년대(1610~1619)

1610.07.19, 바실리 4세 폐위 및 바르샤바 유배

 
1611.03.19~1611.03.20, 모스크바 반란(Московское восстание)
- 1610년 가을부터 폴란드-리투아니가가 점령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주민들이 1611년 3월 19일부터 20일까지 그들에 대한해 무장 시위를 펼쳤다. 3월 19일 농민, 카자흐, 코사크, 귀족, 상인, 교회 등이 중심이 된 제1차 해방군의 최전방 부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불태웠다.
 
1611.03.21, 제1차 해방군의 모스크바 도착
 
1612.09.01~1612.09.03, 1612년 모스크바 전투(Московская битва 1612)
-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중앙정부가 없는 루스 차르국의 모스크바 크렘린 궁을 봉쇄하려고 시도했으나 상인, 농민, 카자흐, 교회 등이 다시 모인 제2차 해방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몰아내게 되며 승리한 전투.
 
1613.03.03, 미하일 1세 즉위(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 1613년 3월 3일(구력 2월 21일)에 열린 젬스키 소보르에서 16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차르로 임명된다. 다만 그 국가 자체는 기존의 모스크바 공국 체제가 이어진 형태였다. 그의 아버지 표도르 로마노프는 필라레트 총대주교로 임명된 인기 있는 보야르이자 모스크바 총대주교였으며, 그의 증조모는 이반 3세의 아내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였다. 물론 모두가 그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 중에선 그를 끌어내리고 싶어한 사람도 있었고, 외국 중에선 스웨덴은 그를 인정하지 않아 무력으로 루스 차르국을 공격해왔다가 철수한 적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즉위했고, 아직 젊었기에 어머니 이노키냐 마르파(Инокиня Марфа)가 1619년까지 섭정했으며, 이후 <데올리노 휴전(1618 or 1619>을 통해 돌아온 아버지 필라레트에 의해 또 1633년까지 섭정이 이뤄진다.
 
1617.02.17, <스톨보보 조약(Столбовский мир)>
제6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610~1617)을 끝내기 위해 러시아의 스톨보보(Столбово)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이 맺은 조약으로, 스웨덴은 점령하고 있던 노브고로드를 러시아에 반환하며, 스웨덴의 차르 승계를 포기하게 된다, 스웨덴은 인게르만란디야(Ингерманла́ндия, 잉그리아)와 서카리알라(Карелия)를 가지고, 루스 차르국은 동카리알라(Восточная Карелия)를 획득하며 카리알라가 분할된다.
 
1617.09~1618.12,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모스크바 원정(Московский поход королевича Владислава Вазы)
- 자포로자 코자크와 힘을 함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 차르국의 모스크바로 쳐들어간다. 폴란드는 모스크바 탈환에는 실패했으나 진격하는 중에 스몰렌스크, 체르니히우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동란기의 혼란이 막을 내렸다고 보기도 한다. 이 원정은 <데울리노 휴전>을 통해 끝난다.
 
1618.12.11(or 1619.01.03), <데울리노 휴전(Деу́линское перемирие)>
-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데울리노(Деулино)에서 맺은 조약으로, 9년간 이어진 제2차 러시아-폴란드 전쟁(1609~1618)을 종식시켰고, 넓은 의미에서 러시아의 동란기의 혼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조약의 핵심은 14년간 휴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외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히우의 폴란드 영유권을 인정하고, 필라레트 등 러시아 포로를 석방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게 미하일 1세의 아버지 필라레트가  석방되었고, 1619년부터 그는 1633년까지 미하일 1세의 섭정을 하게 된다.
 

1620년대(1620~1629)

 

1630년대(1630~1639)

1632.10.20~1634.06.14, 스몰렌스크 전쟁(Смоленская война)
-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모스크바 원정을 포함한 제2차 러시아-폴란드 전쟁(1609~1618)에서 폴란드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폴란드 세력이 약화된 것과 스웨덴과 튀르크가 러시아를 잠시 지지한 것을 틈타, 러시아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고 일으킨 전쟁으로, 러시아가 폴란드에게 20,000루블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폴란드는 세르페스크 등 일부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줌과 동시에 미하일 1세를 루스 차르국의 새로운 군주로 인정하며, 스몰렌스크 지역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는 <폴랴노브카 조약(Поляновский мир)>을 맺으면서 끝나게 된다.
 
1637.02.20, 미하일 1세의 칙령(указ)으로 민간 소유의 농노 수색 기간을 최대 9년까지 연장
 
1637.06.10, 돈 코자크와 자포로자 코자크가 8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튀르크 아조프 해의 튀르크 요새를 습격해 점령. 이로 인해 러시아는 아조프 해의 튀르크 요새를 1642년까지 보유하게 된다.
 

1640년대(1640~1649)

1641.07.04~1641.10.06, 아조프 해 튀르크 요새 점령 사건

러시아가 점령한 아조프 해의 튀르크 요새는 오스만 제국군에 대항하여 코자크인들을 방어했으며, 약 24건의 튀르크의 맹공을 격퇴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으며,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를 풀라고 강요했다.
 
1642.0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고조되어 관련 사안을 논의할 젬스키 소보르가 개최되었는데, 귀족층은 전쟁에 찬성했으나, 상인과 시민 대표는 반대했으며, 여기에 더해 미하일 1세 또한 반대에 코자크가 아조프 해의 튀르크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한다고 결정한다.
 
1645.07.23, 미하일 1세 서거
 
1645.07.24, 알렉세이(미하일 1세의 아들) 즉위
 
1646.02.07, 직접세(прямые налоги)가 소금세(Соляной налог)로 대체
 
1648.06.01, 소금 반란(Соляной бунт)
- 소금 가격과 그에 대한 세금을 인상한 당시 고위층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중간층, 하층민, 도시민, 소총수(стрельцы) 등이 불만을 표출하며 방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소금세를 도입했던 귀족들은 살해당했으며, 이를 승인한 각료 보리스 이바노비치 모로조프(Бори́с Ива́нович Моро́зов)는 수도원으로 추방된다. 그러나 이 반란으로 인해 결국 새로운 벰스키 소보르가 열렸고, 농노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한 <울로제니예(1649)>가 채택된다.
 
1649.01.19, <1649년 대회 법전(소보르 법전, 울로제니에, 농노법, 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 1649 года)>
- 1648년부터 1649년까지 열린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에서 채택된 러시아 제국의 법전으로, 1832년 <러시아 제국 법전(Свод законов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이 채택되기까지 약 200년 동안 유효했으며, 이 법전은 자유농민과 노예를 새로운 노예 계급으로 통합하고, 농노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막았으며, 귀족이라면 농노를 소유할 수 있게 했고, 성직자들의 토지 소유권을 금지하는 등 귀족의 입장에 중점을 둔 법전이었다. 그래서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농민 반란도 발생하게 된다.
 

1650년대(1650~1659)

1652.08.04, 니콘, 모스크바 및 전 루스 대주교로 임명
 
1653.09.22, 루스 차르국, 젬스키 소보르, 보르단 흐멜니츠키의 요청으로 자포로자 코자크를 보내 우크라이나 병합 결정
 
1653~1655, 니콘의 개혁
- 종교 개혁을 통해 서구화 기반을 닦는 것이 목표로 진보적인 성향의 니콘이 러시아 정교의 의례 개혁을 시작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종파 분리로 이어지며, 구교도가 분리되어 나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1654.06~1667.01, 제4차 러시아-폴란드 전쟁(13년 전쟁, Русско-польская война 1654—1667)
-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차지하고 있던 서러시아와 백러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흐멜니츠키 봉기 진압을 루스 차르국이 지원한 것과 보르단 흐멜니츠키의 아들 유리 흐멜니츠키가 친폴란드 정책을 편 것을 계기로 일어난 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 <안두루소보 휴전>을 맺으며 끝나게 된다. 결국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체르니히우, 서부 세베르스카야의 영토를 되찾았으며, 우크라이나, 키예프 좌안 등의 영토를 얻게 되었고, 그렇게 폴란드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1656~1658, 제7차 러시아-스웨덴 전쟁(Русско-шведская война 1656—1658 годов)
- 대홍수(1655~1660)와 케다이냐이 합병(Кейданская уния, 1655) 그리고 발트 해 진출의 의지를 보인 러시아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러시아가 승리해 <발리사르 휴전(Валиесарское перемирие, 1658)>를 맺어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리보니아 동부를 합병하고, <카르디스 평화 조약(Кардис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661)>을 맺어 전쟁 전 국경으로 돌이킨 뒤 전쟁은 끝나게 된다.
 
1658.12.30, <발리사르 휴전(Валиесарское перемирие)>
- 제7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656~1658)을 종결하기 위해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이 발리사르(Валиесар)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쿠코노스(Куконос), 유리예프(Юрьев), 올리스타(Олыста), 시렌스크(Сыренск), 보리소글롭스크(Борисоглебск), 야마(Яма), 레지자(Режица) 등의 발트해 지역 중 정복한 영토를 3년 동안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했다.
 

1660년대(1660~1669)

1661.07.01, <카르디스 평화 조약(Кардис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이 제7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656~1661)의 여파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전쟁과 <발리사르 휴전>으로 획득한  모든 예스틀랸디야(Эстляндия)에스트랜드와 리보니아 도시들을 스웨덴에게 반환해, 1617년에 맺은 <스톨보보 조약(Столбовский мир)> 당시의 국경으로 회귀했다.
 
1662.08.04(구력 07.25), 구리 반란(Медный бунт)
- 1662년 8월 4일, 모스크바에서 세금 인상과 액면가를 유지한 상태로 기존의 금화를 동화로 교체한 것에 의해 화폐의 가치 하락에 불만을 품은 도시 하층민들이 일으킨 반란. 무담보 구리 화폐의 과잉 생산은 은화보다 훨씬 더 큰 가치 하락을 초래했는데, 그래서 폭동이 일어난 지 약 1년 후에 구리 동전 주조 작업이 중단된다.
 
1666.12.22, 니콘, 모스크바 및 전 루스 대주교에서 추방(1667년? 종교회의에서)
 
1667.02.09, <안두루소보 휴전(Андру́совское переми́рие)>
- 제4차 러시아-폴란드 전쟁(13년 전쟁, 1654~1667)을 끝내기 위해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맺은 휴전 조약으로, 이후 13년간의 휴전을 맺으며,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스몰렌스크, 남부 프스코프 일부, 세베르스카야, 우크라이나 좌안 지구를 모두 넘겨주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디나부르크를 회복했으며, 소러시아 지역은 루스 차르국의 간접 지배에 들어갔으며, 양국은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렇게 폴란드의 몰락이 심화된다.
 
1667~1669, 제1차 스테판 라진의 반란(Первое Восстание Степана Ра́зина)
- <1649년 대회 법전>의 '농노'를 억압하는 조항에 분개하여 무장 농민과 카자크들이 아타만(атаман, 카자크의 선출 지도자)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Степа́н Тимофе́евич Ра́зин, 1630'~1671)을 중심으로 모여 당시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 동맥이었던 볼가 강을 차단했으며, 러시아와 페르시아 상선을 강점하는 등 하층민들에게 자유를 달라는 자신의 입장을 강력히 드러냈다. 그 뿐 아니라 카스피 해로 건너가 여러 국가들의 해안을 털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군에 진압으로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며 제1차 반란은 그렇게 막이 내렸으나, 그는 다시 새로운 봉기를 준비한다.
 

1670년대(1670~1679)

1670~1671, 제2차 스테판 라진의 반란(Второ́е Восстание Степана Ра́зина)
- 스테판 라진과 그를 따르는 농민들과 카자크들은 체르카스크(Черка́сск, 현 스타로체르카스스카야)와 차리친(Цари́цын, 현 볼고그라드) 등을 점령하며 그 두 지역 사이의 정부 거점 초르니 야르(Чёрный Яр)까지 점령했다. 이후 카스피해 연안이면서 볼가 강의 어귀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아스트라한(Астрахан)으로 나아가 결국 그 곳의 고위 귀족들을 처단해가며 아스트라한까지 차지다. 이후 승세를 힘에 입은 스테판 라진은 군사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갈 목적으로 볼가 강을 타고 올라가며 약탈을 자행했으나, 중간에 마주친 차르군에 의해 대패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반란의 흐름이 속속히 전해지고 있었고, 결국 모스크바의 하층민들까지도 들고 일어서려는 것을 본 스테판 라진은 고위 귀족과 모든 관리들을 뿌리뽑고, 모든 계급과 존엄성을 평준화하고, 러시아 전역에 절대적인 평등을 이룩할 코사크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 선언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인해 결국 다른 카자크 장로들에게 잡혀 차르에게 넘겨졌고, 그는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반란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지금까지도 그는 자유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다.
 
1672~1681,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672—1681)
- 폴란드-오스만 전쟁(1672~1676)에서 승리한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인근에 살던 코자크가 반격했으며, 이후 러시아도 가세해 결국 1678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대승을 거두어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아버린다. 결국 1681년 1월 양국은 크림 칸국의 수도 바흐치사라이에서 <바흐치사라이 조약(Бахчисарайский мир, 1681)>을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우크라이나 좌안 해안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권을 인정했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우방국들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인정했다. 즉, 이 전투로 오스만 제국은 우크라이나 서안을 차지해 유럽으로 한발짝 더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남부와 흑해 북부까지 영향력이 확대된다.
 
1676.02.08, 알렉세이 서거, 표도르 3세(알렉세이의 아들) 즉위
 

1680년대(1680~1689)

1682.05.07, 표도르 3세 서거, 이반 5세(알렉세이의 아들) 및 표트르 1세(알렉세이의 아들) 공동 즉위
 
1682.06.08, 소피야(알렉세이의 딸) 섭정 시작
 
1682~1695, 놀이 부대(Поте́шные войска́)
- 표트르 1세가 루스 차르국의 군인과 통치자들을 훈련시키고 전쟁 연습을 시키기 위해 만든 특별 편성 부대. 이후 표트르 1세가 수립한 러시아 제국의 정예부대 세묘노프스키 연대(семёновский полк)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Преображенский полк)로 재창설된다.

1686~1700, 제4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686—1700)
-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이 벌이던 대 튀르크 전쟁 중 러시아와 오스만이 벌인 전쟁으로, 결국 오스만 제국은 루스 차르국에 패배했고, 양국은 <콘스탄티노플 조약(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ий мир, 1700)>을 맺게 되며 러시아는 아조프를 획득하고,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막강하던 그 힘이 확 꺾여버린다.

 
1689.06.27, 표트르 1세, 예브도키야 표도로브나(Евдоки́я Фёдоровна)와 결혼
- 표트르 1세와 예브도키야 표도로브나 로푸히나(Евдоки́я Фёдоровна Лопухина́)가 결혼했다. 슬하로는 황태자였다가 아버지 표트르 1세와의 의견 차이로 추방당했던 알렉세이 페트로비치(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1690~1718)와 요절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1691~1692)가 있었다. 특히 알렉세이 페트로비치의 아들은 러시아 제국 3대 차르가 된 표트르 2세였다.
 
1689.03~1689.05, 제2차 크림 원정(Второй Крымский поход)
러시아 군대가 2번째로 오스만 제국의 크림 반도를 총공격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막대한 방어와 역공으로 실패하고 크림 반도 북부의 페레코프(Перекоп)로 후퇴했다.

 
1689.07.~1689.08, 표트르 1세가 제1차 소피 궁정 쿠데타를 진압하며 모친과 함께 루스 차르국을 통치하기 시작
 
1689.09.06(구력 08.27), <네르친스크 조약(Нерчинский договор)>
- 1689년 9월 6일,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와 국경을 처음으로 정의한 조약. 요새 알바진(Албазин)에서 벌어진 러시아-청 국경 분쟁(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1649~1689)의 결과로 맺어진 것으로, 국경은 스타노보이 산맥(Станово́й хребе́т)을 따라 오호츠크 해(Охо́тское море)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정했다.
 
1689.09.17, 소피야(알렉세이의 딸) 섭정 폐위
 

1690년대(1690~1699)

1695, 1695년 제1차 아조프 원정(Первый Азовский поход 1695 года)
- 소피야 섭정기가 끝나며, 루스 차르국의 튀르크와 타타르족에 대한 군사 행동은 중단되었으나, 1694년 겨울쯤부터 이전의 크림 원정(1687, 1689)처럼 아조프 요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돈 강 유역에는 군대와 탄약, 포병, 그리고 아조프로 그들을 수송할 수송선이 준비된다. 만반의 준비는 했지만 결국 아조프 요새로 가는 길의 일부 요새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 지역의 점령을 유지할 수는 없어 결국 <콘스탄티노플 조약(1700)>을 맺으며 철수하고, 드니프로 강 하류는 비무장지대로 선포된다. 그렇게 루스 차르국의 아조프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1696.05.03~1696.07.19, 1696년 제2차 아조프 원정(Второй Азовский поход 1696 года)
-  1695년 말 루스 차르국은 제2차 아조프 원정을 준비했으며, 사령관 알렉세이 세묘노비치 셰인(Алексéй Семёнович Шéин, 1652~1700)이 이끄는 함대를 이끌고, 아조프 요새를 봉쇄했다. 결국 격렬한 전투 끝에 아조프를 지키던 튀르크 세력들은 7월 19일 루스 차르국에 항복하며, 루스 차르국은 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1696.02.08, 이반 5세 사망
 
1697.02.11, 표트르 1세, 루스 차르국 내 담배 판매 허가
 
1697.03.09~1698.08.25, 대사절단(Великое посольство)
-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와 여러 귀족들이 기독교 세력의 유대를 강화하고, 발트 해 진출을 위한 동맹을 만들며, 서구 문물을 배워 러시아를 부흥시키기 위할 목적으로 프로이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영국 등 유럽 여러 선진국을 방문한 사절단. 이 때 표트르 대제는 그가 직접 만든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하급 장교로 위장하며 박물관, 병원, 판화제작소 방문, 조선술, 선박건조, 의술 등 다양한 체험을 했다.
 
1698.07~1699, 1698년 스트렐레츠키 반란(Стрелецкий бунт 1698 года)
- '제2차 소피야 궁정 쿠데타'라고도 불리는 반란은 소총수(стрельцы)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만과 소피야의 왕위 계승을 목적으로 이뤄졌으며, 결국 대사절단에서 돌아온 표트르 1세의 군대에게 진압당했으며, 소피야는 결국 수도원에 유폐된다.
 

18세기

1700년대(1700~1709)

1700.02.22~1721.09.10, 북방전쟁(대북방전쟁, 제8차 러시아-스웨덴 전쟁, Се́верная война́)
- 발트 해를 둘러싼 스웨덴과 북유럽 국가들의 갈등으로 일어난 북방전쟁은 러시아를 포함한 반스웨덴연합의 승리로 이어져 <스톡홀름 조약(Стокгольмские договоры, 1719~1720)>, <프레데릭스보르 조약(Фредериксборгский договор, 1720)>, <니슈타드 조약(Ништад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721)>을 맺으며 끝나게 되었으며, 스웨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열강에 나눠주며 멸망의 길로 걸어갔고, 러시아는 숙원하던 발트 해 진출을 하게 된다.
 
1700.11.30(구력 11.19), 나르바 전투(Битва при Нарве)
- 북방전쟁 초기에 영국,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스웨덴의 카롤 12세가 루스 차르국을 이긴 전투로, 카롤 12세는 러시아군을 얕봤기에 모스크바로 더 진격하는 대신 남쪽의 폴란드로 향했다. 이는 오히려 루스 차르국에게 기회였기에,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는 군을 상비군 체제로 전환하는 등 재수습을 하고 반격의 기회를 기다린다.
 
1701.01.25~1753, 수학 및 항해술 학교(Школа математических и навигацких наук)
- 1701년 표트르 1세에 의해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에 설립된 귀족과 하급관리의 자녀들에게 수학과 항해술을 가르쳐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러시아 최초의 포병, 공학, 해군학교로, 현대 러시아 공학 교육 체계의 기반이 되는 학교. 1753년 폐지되었으나, 지금까지의 수많은 러시아 군사 교육 기관들이 해당 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군사학과 공학 분야에선 높은 대우를 받고 있다.
 
1702.10.07, 1702년 노테부르크 공방전(Осада Нотебурга 1702 года)
- 루스 차르국이 스웨덴 제국에게 대항해 네바강 하구의 노테부르크를 점령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루스 차르국은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시작하며, 나르바 공방전을 통해 나르바 요새를 재탈환하며 승기를 잡게 된다.
 
1703.05.27, 루스 차르국, 네바 강 어귀에서 상트페테르부르그 건설 시작
 
1703.10.21, 크론실로트 요새(Форт «Кроншлот») 건설 시작
-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영토와 해상을 방어하기 위해 현재의 크론시타드(Кронштадт) 지역의 해안에 크론시로트 요새를 건설한다.
 
1704.07.08(구력 06.27)~1704.08.20(구력 08.09), 나르바 공방전(Осада Нарвы)
- 러시아 군대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던 나르바 요새에 포를 쏘면서 공격하다 결국 이겨 나르바를 되찾은 전투.
 
1704.08~1711, 1704~1711년 바슈키르 봉기(Башкирское восстание 1704—1711 годов)
- 1704년 루스 차르국의 추가 과세와 바슈키르인(바시키르인)의 종교적 탄압을 통해 일어난 봉기로, 루스 차르국은 결국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바슈키르인들의 요구를 들어줌과 동시에 그 지역의 지배력이 약화된다.
 
1705.07.30~1706.03.13, 아스트라한 봉기(Астраханское восстание)
- 루스 차르국 정부의 과중한 과세와 개혁 정책으로 1705년부터 1706년까지 아스트라한과 그 일대에서 일어난 소총수(стрельцы), 코자크, 군인, 중산층, 하급 노동자, 농민들이 일으킨 반란. 결국 정부의 진압군이 파병되어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반란이 종료된 뒤, 처음엔 반란군과 그 지도자들은 사면을 받았지만, 곧 다시 체포하기 시작했고, 365명의 아스트라한 봉기 참가자들이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사망한다. 
 
1707.10.20(구력 10.09)~1708, 불라빈 봉기(Булавинское восстание)
- 농민의 자치가 허용되었던 돈 코자크 지역으로 도망친 농노를 찾기 위한 수색, 거기에 돈 코자크 자치 정부를 제한하려는 루스 차르국의 압박과 함대 및 요새 건설에 사람들을 강제 징용한 것에 반감을 가지고 불라빈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봉기로, 결국 정부군은 돈 코자크 지역의 반란을 제압하고 자치를 약화시킨다.
 
1709.07.08(구력 06.27), 폴타바 전투(Полта́вская би́тва)
- 나르바 전투(1700)에서 패배한 루스 차르국의 군대는 소총수(стрельцы)를 포함한 구식군대 해산, 상비군 체제와 징병제 도입, 중경포대 육성, 해군 육성 등 새롭게 개편된 상황을 모르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폴타바로 진격한 스웨덴 제국은 강해진 루스 차르국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결국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쳐버린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북방전쟁이 전환기를 맞게 된다.
 

1710년대(1710~1719)

1710~1713, 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710—1713 годов)
- 북장전쟁 중인 1710년 오스만 제국이 루스 차르국의 크림 반도 북부를 침공하며 일어나 루스 차르국을 패배시킨 전쟁으로, 이 전쟁 이후 양국은 <프루트 조약(Прутский мир, 1711)>을 체결하며, 오스만 제국은 아조프 지역과 자포로자 지역을 획득하고, 루스 차르국의 인근 요새 일부가 해체된다.
 
1711.03.05(구력 02.22)~1917.12.05(구력 11.22), 원로원(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енат)
-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의 입법, 행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최고 정부 기관. 초기 표트르 1세에 의해 설립된 당시에는 표트르 1세가 왕위을 잠시 비우는 동안 국정을 임시로 맡았었다가 점차 그 영향력이 커져간 것이다. 그래서 원로원 구성수도 9명에서 1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1714.08.07, 항코 해전(간구트 해전, Гангутское сражение)
- 루스 차르국의 해군이 항코 지역의 스웨덴 함대를 공격하며 일어난 해전으로, 스웨덴 제국 해군의 갤리선 한 척이 침몰하고 다른 배들이 항복하며 루스 차르국의 대승을 거둔 해전. 이 해전은 폴타바 전투와 함께 북방전쟁의 종결을 일으킨 대전 중 하나였다.
 
1717~1802.09.08, 콜레기야(коллегия, Collegium)
1717년 표트르 1세의 행정 개혁을 통해 프리카즈(Приказ)를 폐하고 설립된 9개의 장관부서로, 이후 1802년에 알렉산드르 1세의 행정 개혁을 통해 미니스트레스트보(министерство, ministerium)로 통합된다.
 
1718.06.07, 표트르 1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중심경찰(Главная Полиция) 설립
 
1718.11.26, 표트르 1세, 남성 인구 조사 및 인두세 도입
표트르 1세는 1718년 지령을 통해 1년간 정규군 소집을 위한 남성 인구 조사를 진행했고, '군참모진과 사병의 평균 세금'을 정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1년간 러시아 제국 내 약 500만 명의 남성 인구를 조사했는데, 1차적으로 연간 1인당 80코페이카로 지정하며 인두세를 본격 도입했다. 그러다 세금은 시간이 흘러 1인당 연간 74코페이카를 지나, 1인당 연간 70코페이카로 감소한다. 처음엔 상인들에게도 과세를 했으나 이후 그들의 세금은 1775년부터 '인두세'에서 '이자수수료(Процентный сбор)'로 대체된다.
 
1718.12~, 아삼블레이(Ассамблеи, assemblée)
 - 루스 차르국 표트르 1세가 러시아 사회의 문학적 삶을 논할 수 있게 만든 귀족 여성 위주로의 사교모임. 전통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은 참가를 꺼리거나 이에 반발했지만, 젊은 세대나 진보주의자들은 2주에 한 번 씩 댄스 파티를 즐기는 등 더 적응하고 사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1720년대(1720~1729)

1721.02.14~1918.02.14, 러시아 정교회 신성 종교회의(Свяще́нный сино́д Ру́с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회의(Архиерейский собор) 기간(총대주교가 없는 기간) 중에 러시아 정교회를 운영해나갔던 교회 조직
 
1721.02.14~1918.02.14, 신성통치종무원(Святейший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
- 러시아 정교회에서 주교회의 기간(1721~1917) 동안 러시아 교회를 통치하던 형식상 정부 직속의 최고 기관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의 최고 행정 기관이자 사법 기관이었다. 러시아 제국 최고 권력자의 승인을 받아 새로운 의장을 열고, 주교들을 선출하거나 임명하고, 교회의 행사와 의식을 제정하고, 성인을 추대하고, 신학적, 역사적, 그리고 성스러운 내용의 작품을 검열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반교회법적(반카논적)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주교들에 대한 1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혼, 성직자 해임 및 평신도 파문 등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영적 교육도 도맡았다.
 
1721.09.10(구력 08.30), <뉘스타드 강화조약(Ништад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대북방전쟁에서 이긴 반스웨덴연합과 스웨덴 제국이 맺은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은 스웨덴 제국으로부터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야의 일부를 획득하고 발트 해로 진출하게 된다. 한편, 더해 루스 차르국이 스웨덴 제국에 200만 은 탈러(Thaler)를 지불하는 대가로 전쟁 기간 동안에 점령했던 핀란드를 스웨덴에 반환했다. 그렇게 발트해의 강자 스웨덴 제국은 붕괴해가게 되었으며, 그에 반해 루스 차르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며 표트르 1세의 러시아 제국 선포에 힘을 더해주었다.
 
1721.11.02, 표트르 1세 러시아 제국 황제로 즉위
 
1721.11.02~1917.09.14,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1722.02.04~1918.1.25, <관등표(Табель о рангах)>
-  1722년 2월 4일 표트르 1세의 법령에 의해 제정된 군, 민간인, 궁정 관리들 사이의 14등급의 상관관계 목록을 포함하는 표로, 이를 통해 표트르 1세는 모든 귀족과 백성에게 각 등급 별로 혜택을 주는 대신 국가에 급에 맞는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이 <관등표>로 인해 귀족 계급으로의 진입 장벽이 강화되고, 러시아 귀족 문화가 펼쳐지는 등 이후 일어날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 공화국이 겪는 여러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722.02.16, <왕위계승에 대한 칙령(Указ 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ии)>
- 1722년 2월 16일, 러시아 제국 표트르 1세가 군주의 직계 후손에게 군주의 왕위를 물려주는 왕위계승 관습을 폐지하고 군주의 의지에 따라 능력있는 후계자를 임명할 수 있게 왕위계승 규칙을 파격적으로 바꾸었다. 이 지령은 1797년 4월 4일, 파벨 1세의 대관식에서 <왕위계승에 대한 법령(Акт 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ии)>을 공포하면서 사라진다.
 
1722.07.29~1723.09.23, 페르시아 원정(제2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Персидский поход 1722—1723 годов)
- 샤마흐에서 러시아 상인들의 물건을 강탈하고 상인들을 살해한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샤에게 반발한 레즈기인을 처벌한 것과 러시아 제국의 남캅카스와 중동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러시아 제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러시아가 승리해 <페테르부르크 조약(Петербу́ргский догово́р, 1723)>를 맺어, 러시아 제국은 도시 데르벤트(Дербе́нт), 바쿠(Баку), 라슈트(Решт)와 마을 시르반(Ширван), 길란(Гилян), 마잔다란(Мазендеран), 고르간(Горган)을 얻게 된다.
 
1725.02.08, 표트르 1세 서거, 예카테리나 1세(표트르 1세의 부인)의 즉위
 
1726.02.19~1730.03.15, 최고추밀원(Верховный тайный совет)
- 1726년 2월 19일, 예카테리나 1세가 기존의 원로원(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енат, 1711~1917)가 중점이 된 행정 체제를 뒤엎고, 독재적 자문기구인 최고추밀원을 세워 약 6명의 구성원의 독재로 진행되었다가 이후 최고추밀원이 섭정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긴 안나 이바노브나가 최고추밀원에 의해 옹위된 직후, 안나 이바노브나가 전제정치를 복원할 목적으로 폐지시킨다. 이 조직은 이후 원로원과 내각(Кабинет министров, 1731.11.06~1741.12.23)으로 대체된다.
 
1727.05.17, 예카테리나 1세 서거, 표트르 2세(표트르 1세의 손자) 즉위
- 표트르 2세가 즉위한 이후, 최고추밀원의 멘시코프(Меншиков)가 1727년까지 섭정을 했으며, 이후 최고추밀원의 돌고루코브가(Долгоруковы)가 1730년까지 섭정했다.

1727.08.31(구력 08.20), <부른스키 조약(Бури́нский догово́р)>
- 러시아 제국과 청 사이에서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정하지 않은 국경의 여러 지역을 통해 러시아인과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건너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맺어진 조약으로, 아르군강(Аргунь) 서쪽에서 서사얀산맥(Западный Саян)의 샤빈-다바트(Шабин-Дабат) 산길까지의 러시아-중국의 국경선이 정의되었다. 이 조약은 후에 <캬흐타 조약(1727)>에 강화된다.
 
1727.11.01(구력 12.21), <캬흐타 조약(Кя́хтинский догово́р)>
- 러시아 제국과 청 사이에서 맺어진 무역과 국경 설정에 관한 조약으로, 외몽골 지역의 국경을 정하고, 러시아 대상(隊商)을 3년에 1번씩 청의 베이징에 200명의 규모로 올 수 있게 했으며, 캬흐타와 아르군 강변에 교역장을 설치하고, 러시아가 베이징에 러시아 정교회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와 연구생을 파견할 수 있게 했다.
 

1730년대(1730~1739)

1730.01.30, 표트르 2세 지병으로 서거
 
1730.02.26, 안나 이바노브나(이반 5세의 딸) 즉위
- 이반 5세의 딸이자, 남편까지 잃고 자녀가 없던 안나 이바노브나는 추밀원이 보기에 섭정하기 좋은 인물이었기에 그를 여제로 즉위시킨다.
 
1733~1735,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Война за польское наследство)


1735.05.31~1739.09.29,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735—1739)
-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연합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그러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물리쳐 <베오그라드 조약>을 통해 유럽으로의 영토 확장을 하게 되며 자존심을 회복함과 동시에 러시아에게 전쟁을 멈출 것을 압박하며 <니시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그 결과 크림 칸국과 몰디비아 종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아조프를 재할양받아 흑해 진출을 할 수 있게 된다.
 
1739.09.29, <1739년 벨그라드 조약(베오그라드 조약, Белград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739 года)>
-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의 벨그라드(현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 사이에서 맺은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 일부 지역을 차지함과 동시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남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제거하여,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1739.10.03, <니시 조약(Нишский договор)>
- 세르비아 동부 니시에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채결한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의 아조프 항구 설치는 허용되었으나, 아조프의 요새화, 흑해 함대 창설은 금지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크림 반도 및 몰디비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해야 다.
 

1740년대(1740~1749)

1740.10.28, 안나 이바노브나 서거, 이반 6세(이반 5세의 증손자이자 안나 이바노브나의 조카) 즉위
 
1740.10.28~1740.11.20, 비론(Biron, Биро́н) 섭정기
- 1740년 10월 28일, 안나 이바노브나의 유언에 따라 미성년자였던 이후 즉위한 이반 6세의 섭정이 되었던 독일인 비론은 자의적인 독재를 하며 경찰을 이용한 탄압과 정치적 테러를 하는 등 각종 문제들이 발생했고, 그렇게 러시아 귀족들의 불만이 들끓게 된다. 결국 1달도 안된 11월 20일 궁정 쿠데타로 체포되며 그의 섭정은 막을 내린다.
 
1741.12.06, 이반 6세 퇴위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즉위
 
1741~1743.08.18, 제9차 러시아-스웨덴 전쟁(Русско-шведская война 1741—1743 гг.)
- 북방전쟁(1700~1721)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스웨덴이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 제국과 그 동맹인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며, <오보 조약>을 맺게 된다.
 
1743.08.18, <오보(Åbo) 강화 조약(Абоский мир)>
- 제9차 러시아-스웨덴 전쟁(Русско-шведская война, 1741~1743)을 종식시키기 위해 러시아 제국(1721~1917)과 스웨덴 왕국이 오보(Åbo, 현 투르쿠(Turku))에서 맺은 조약. 이에 따라 아돌프 프레드리크(Adolf Fredrik, 1710~1771)의 스웨덴 왕국 계승 조기 선언을 했고, 러시아가 퀴멘타르타노 주(Kymmenegårds län, Кюменигордский лен)와 뉘슬로트(Nyslott, 현 사본린나(Savonlinna))를 보유했으며, 핀란드의 대부분의 영토를 스웨덴에 반납하게 되었다.
 
1744.07.10, 표트르 표도로비치(Пётр Фёдорович)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의 결혼
 

1750년대(1750~1759)

1753.12.31, <국내 관세 폐지에 관한 칙령(указ об отмене внутренних таможенных сборов)>
- 국내 관세와 소액 수수료를 없애기 위해 슈발로프(Шувалов) 등이 고안한 결의안으로,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지역 간 무역이 크게 활성화 되었다.
 
1754.06.27, 겨울 궁전(Зи́мний дворе́ц) 건설 시작
 
1754~1786, 귀족대출은행(Дворянский заёмный банк)
- 1754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발표한 칙령(указ)에 의해 설립되어 법령에 의해 귀족들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은행이었다. 이후 이 은행은 1786년에 국립대출은행(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заёмный банк)으로 전환된다.
 
1755.01.23~1917.03.08, 모스크바 제국대학(Императорский Москов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1755년 1월 23일에 공포하고 2월 4일에 발효한 <모스크바 대학교 설립에 관한 안(Проект об учреждении Москов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에 의해 세워진 러시아 제국 최초의 대학으로, 1917년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불리게 된다.
 
1756.05.17~1763.02.26, 7년 전쟁(Семилетняя война)
- 유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 각종 이해관계가 맞물려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vs 프로이센-영국'의 구도로 이어지며 벌어졌다. 프로이센-영국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며 끝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조약(Петербу́ргский мир, 1762)>, <스웨덴-프로이센 조약(함부르크 조약, Шведско-прус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762)>, <파리조약(Пари́ж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763 года, 1763)>이 맺어졌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이 새로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르고, 영국의 캐나다, 루이지애나 동부, 플로리다, 서인도 제도, 세네갈, 인도 지역 식민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제국은 그 책임을 프로이센 빠돌이 표트르 3세에게 묻게 되고 결국 그가 퇴위하고 그의 부인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1760년대(1760~1769)

1762.01.05,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서거,  표트르 3세(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조카, 표트르 1세의 손자) 즉위
 
1762.03.01, <귀족들의 자유선언(Манифест о вольности дворянства)>
- 1762년 2월 말, 표트르 3세가 귀족들이 외국으로 갈 수도 있고, 국가에 대한 봉사도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길 수 있다는 선언문 작성을 명령했고, 이후 3월 1일 표트르 3세가 서명한 선언으로, 귀족들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공무와 군복무를 면제받았으며, 자유롭게 은퇴하거나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생하면 국가가 귀족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족쇄는 남겨두었다. 이 선언은 이후 <1785년 귀족 헌장>에서 재확인된다.
 
1762.05.05, <페테르부르크 조약(Петербург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7년 전쟁 중이던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이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는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년 전쟁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며, 러시아가 점령했던 프로이센 영토를 자발적으로 반환하게 된다.
 
1762.07.09, 표트르 3세 퇴위, 예카테리나 2세(표트르 3세의 부인) 즉위
- 즉위한 표트르 3세가 7년 전쟁 동안 얻은 러시아의 영토를 <페테르부르크 조약(1762)>으로 다시 프로이센에게 무상 반납하고, 프로이센과 연합해 고토 슐레스비히(Шлезвиг)를 되찾기 위한 대 덴마크 전쟁을 준비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과 소유한 땅을 몰수하거나 이콘 사용을 금지하는 등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무례함 등이 원인이 되어 1762년 7월 9일에 일어난 1762년 궁정 쿠데타(Дворцовый переворот 1762 года)로 인해 표트르 3세가 물러나게 되었으며, 즉위 계승자는 그의 부인 예카테리나 2세가 되어 새로운 차르로 등극한다.
 
1764.03.08, <교회 영토 세속화에 관한 칙령(указ о секуляризации церковных земель)>
- 예카테리나 2세가 발표한 교회의 영토를 세속화할 수 있게 만든 법령으로, 약 2백만 명의 수도원 농민(Монастырские крестьяне)들은 경제 콜레기야(Коллегия экономии)로 옮겨졌고, 기존의 수도원 농민들은 경제 농민(Экономические крестьяне)으로 불리게 된다.
 
1766.12.14~1767, 입법위원회(Уложенная комиссия)
- 1766년, 예카테리나 2세가 1649년 제정된 헌법 <울로제니예(1649)> 이후 두 번째로 헌법을 체계화하기 위해 농노를 제외한 여러 선출자와 농민, 카자크를 포함한 소수민족, 신성종무원 인원 등을 모아 법에 의한 지배를 강화하여 당시 군주가 생각하던 계몽주의와 전제주의를 확실시 하고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 또한 더 편하게 하고자 연 입법위원회. 이 위원회 자체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 1764)> 등에 영향을 받았다. 다만 아쉽게도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1768~1774)와 계층 간의 비타협으로 인해 입법위원회는 해산되고 만다.
 
1768.02~1772, 바르 동맹(Барская конфедерация)
-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내정 간섭과 폴란드의 반체제 문제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바르 동맹이 결성되었으나 결국 1772년 러시아 제국은 바르 동맹을 격파시켜버린다. 결국 이 동맹이 와해되며 제1차 폴란드 분할(1772)가 가속화된다.
 
1768.11.29.~1774,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768—1774 годов)
-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칸국의 문제와 폴란드 자유 수호를 목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벌어진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일어난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이긴 러시아 제국에 의해 <퀴췩-카이나르자 조약(Кючук-Кайнарджийский мир, 1774)>가 맺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러시아는 드니프로 강과 부그 강(Буг) 남부 지역(케르치(Керчи), 예니칼레(Еникале), 킨부른(Кинбурн), 예디산(Едисан) 동부)과 베르다 강(Берда)부터 예야 강(Ея)까지의 지역(프리아조프예(Приазовье))를 획득했으며, 아조프 해와 흑해에서 군대와 무역 함대를 보유할 권리를 얻었고, 러시아 상선들은 흑해 해협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다. 또, 크림 칸국이 독립했지만,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된다.
 

1770년대(1770~1779)

1772.08.05, 제1차 폴란드 분할(Первый раздел Речи Посполитой)
- 177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첫번째 분할로, 이미 예카테리나의 입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스타니스와프 2세(포냐톱스키)의 모습처럼 러시아 제국의 속국이 되어 있던 폴란드는 중동유럽의 세력 균형을 꾀한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 의해 그 영토를 잠식당했다. 폴란드군은 이런 이웃나라에 저항할 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고, 또 3국군이 신속하게 폴란드령을 제압했기 때문에 폴란드는 1773년 분할 세임(Partition Sejm)을 열어 어쩔 수 없이 분할을 승인해야했다.
 
1773.09.28~1775, 푸가초프의 난(Восстание Пугачёва)
- 러시아 볼가 강, 우랄 강 유역에서 1773년부터 1775년까지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러시아 사상 가장 큰 농민반란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유일한 권력 기반이었던 귀족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계속해서 농노의 권리를 제한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특히 카자크들에게 큰 원망을 사게 된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사망했다고 여겨지던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농노제 폐지를 선언하며 봉기를 일으켰는데, 농민, 카자크, 러시아 정교회 보수파, 볼가 강 유역의 소수민족들이 대거 합세하며 봉기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푸가초프는 체포되어 1775년 사형당한다. 이 이야기는 후에 푸시킨의 귀에 들어가 <대위의 딸>이라는 작품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1780년대(1780~1789)

1780.07.20~1783.09.03, 제1차 무장중립동맹(제1차 무장중립국, Первый вооружённый нейтралитет)
- 미국 독립 전쟁(1775.04~1783.09)에서 중립을 지키며, 각 중립국들의 항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맹. 미국 독립 전쟁의 계기가 된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해상 봉쇄 정책 등을 근거로 비교전국들의 해상 자유 상업 원칙을 유지한 동맹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나게 된 계기인 <파리조약(1783.09.03)>이 조인됨과 동시에 해체된다.
 
1783.04.19, 러시아의 크림 칸국 합병
- 1783년 4월 19일,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Крым), 타만(Тамань), 쿠반(Кубань)을 러시아 제국 영토로 편입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고, 1784년 2월 13일에는 스스로를 '케르소네소스 타바리체스키(Херсонес Таврический)의 왕(Царица Херсониса Таврического)'라고 선포했다.
 
1785.04.21, <1785년 귀족헌장(Жалованная грамота дворянству 1785 года)>
 - 1785년 4월 21일, 예카테리나 2세가 발표한 귀족의 권리와 자유, 특권을 명시한 헌장으로, 상류층은 귀족회의를 통해 군주에게 청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들의 토지를 완전히 소유하고 민권의 보장을 향유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헌장으로 귀족을 포함한 상류층의 사적 권리가 확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노의 권리는 감소되고 농노제는 더 심화된다.
 
1785.04.21, <1785년 도시헌장(Жалованная грамота городам 1785 г.)>
- 1785년 4월 21일, 예카테리나 2세가 발표한 도시거주자의 권리와 자유, 특권을 명시한 헌장으로, 길드에 소속된 상인, 동업조합에 소속된 장인, 시민을 포함한 외국인들까지도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도시 기관들을 도시민의 선출로 뽑는 등 시민들에게 조금 더 진보된 정책이 적용되었다.
 
1787.08.24~1792.01.09,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787—1791)
- 러시아의 크림 칸국 합병에 반발한 오스만 제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결국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쳐들어간 러시아가 승리하며 <야시조약(Яс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792)>을 맺으며 끝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예디산(Едисан) 서부를 러시아에 양도했으며,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남캅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1790년대(1790~1799)

1793.01.23, 제2차 폴란드 분할(Второй раздел Речи Посполитой)
- 1793년에 일어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 분할.1792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스타니스와프 2세와 개혁파가 폴란드-러시아 전쟁(1792)에서 러시아 제국-타르고비차 연맹 연합군에 패했다.이로써 1793년 그로드노 세임(grodno sejm, 1793)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 의한 국토의 일부 분할을 승인하게 된다. 이 분할에 따라 폴란드인들은 개혁파를 중심으로 코시추슈코 봉기(Восстание Костюшко, 1794.03~1794.11)를 일으켰으나 곧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완전한 국가 멸망을 맞게 된다.
 
1795.10.24, 제3차 폴란드 분할(Третий раздел Речи Посполитой)
- 1795년에 일어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마지막 분할로, 제2차 폴란드 분할에 반대한 폴란드인들의 코시추슈코 봉기(Восстание Костюшко, 1794.03~1794.11)가 진압된 뒤 그 영토가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으로 완전히 분할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양국은 1918년까지 주권국가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 폴란드라는 이름은 역사 뿐 아니라, 사전과 같은 문서에서도 사라졌으며,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역, 쿠를란트 공국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유럽 최강국의 위치로 한층 다가간다.

1796.11.17, 예카테리나 2세 서거, 파벨 1세(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 아들) 즉위
 
1797.04.16, 파벨 1세의 대관식
-  러시아 제국 역사상 황제와 황후의 공동 왕위 계승이었던 파벨 1세와 황후의 대관식에서, 파벨1세는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세운 질서를 나쁘다고 여겼기에 그 질서들을 깨기로 천명했다. 이후 즉위 기간 동안 혁명 사상에 깊은 혐오감을 느낀 파벨 1세는 급진주의자 성향이 강해 예카테리나 2세 때 잡혀들어갔던 인사들을 복직시켰으며, 오히려 반대로 예카테리나 2세를 따르던 귀족의 권리를 확장해가던 인사들을 투옥시키기 시작한다. 또, <귀족헌장>, <도시헌장>과 같이 귀족과 도시민의 권리를 강화하는 헌장들을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 차르 예카테리나 2세가 지속한 농노제는 현행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쉽게 말해, 차르(파벨 1세)의 권위를 귀족과 도시민보다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또한 이 때 그는 <왕위 계승에 관한 법령(Акт 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ии)>을 발표해 장자 계승의 원칙으로 재설정한다.
 
1798.08.12~1800.10.26, 우샤코프의 지중해 원정(Средиземноморский поход Ушакова)
- 러시아 제국 제독 Ф. Ф. 우샤코프(Ф. Ф. Ушаков)이 지휘하던 러시아 함대는 오스만 제국과 힘을 합쳐 지중해를 공격하는데, 이 때 프랑스 제1공화국(1792~1804), 파르테노페 공화국(1799), 로마 공화국(1798~1799)와 전투를 펼쳤고, 결국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승리하게 된다. 이 원정은 공화주의의 발산지 프랑스 제1공화국을 제지하기 위해 영국, 러시아, 포르투갈, 몰타, 나폴리, 오스만, 미국 등이 합세해 일어난 제2 대프랑스 동맹의 한 전쟁이었다.
 
1799.07.19~1881, 러시아-아메리카 회사(Россий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
- 주로 러시아 귀족에게 모피를 공급할 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에 세운 러시아에서 세운 해달 모피 회사. 
 

19세기

1800년대(1800~1809)

1800.12.16~1801, 제2차 무장중립동맹(제2차 무장중립국, Второй вооружённый нейтралитет)
- 1800년부터 1801년에 걸친 영국의 몰타 섬 점령 문제를 계기로 제2차 무장중립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참가국은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으로, 영국의 몰타 섬 철수를 요구했고, 항해의 자유를 발표했다. 영국과 덴마크는 이 동맹 때문에 대립하여 코펜하겐 해전(1801.04)이 일어나게 된다. 이 해전은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일으킨 이집트 원정(1798~1801)에서 비롯된 프랑스의 영국 견제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영국의 덴마크 공격으로 동맹은 파탄났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가 철저히 대립하면서 나폴레옹 전쟁의 본격화로 이어졌고, 이 무장중립동맹도 그 복선이 되었다.
 
1801.01~1801.03.31, 인도 원정(Индийский поход)
- 1801년 1월, 파벨 1세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시작된 인도 원정은 실제로 1801년 2월 28일 돈 카자크 군대를 주축으로 시작되었으나, 제대로된 보급이나 식량도 주어지지 않아 지지부진 했다. 그러다 1801년 3월 23일 파벨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정대는 결국 3월 31일 귀환하며 끝나게 된다.
 
1801.03.24, 파벨 1세의 암살(Убийство Павла I)
- 1801년 3월 24일 늦은 밤, 러시아 제국 파벨 1세가 그의 집무실에서 장교들에게 살해당한다.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측근에 대한 편애, 그리고 파벨의 난폭하고 자기멋대로 행하는 행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으로 귀족들은 억눌린 환호를 표출하게 되었고, 귀족층 대부분은 기뻐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도 혁명을 일으키는 것엔 동의했지만, 암살까지 고려하진 않았다고 한다. 또, 그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뇌졸중'으로 발표된다.

1801.03.24, 파벨 1세 서거, 알렉산드르 1세(파벨 1세의 아들) 즉위
 
1801.09.12, 러시아 제국의 조지아 동부 합병
- 알렉산드르 1세가 파벨 1세가 1801년 1월에 발표했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합병 선언문을 재차 발표하며 조지아 동부를 합병하고 당시 왕을 추방시키고, 왕자는 체포했다. 당시 이슬람이 중심이던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피해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화근이었으며, 결국 조지아 전체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802.09.08~1917, 미니스트레스트보(министерство, ministerium)
- 1802년 9월 8일, 알렉산드르 1세가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표트르 1세가 만든 콜레기야의 행정 업무를 별도의 행정부로 운영하기 위해 신설한 장관직으로, 1917년에 설립된 인민위원회(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가 설립되면서 차츰 한 직책씩 대체된다.
 
1804.06.22~1813.10.24, 제4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Русско-персидская война 1804—1813 годов)
- 러시아의 조지아 합병을 빌미로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며, <굴리스탄 조약(Гюлистан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813)>을 맺으며,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는 아라스 강 이북 지역을 러시아에게 할양했으며, 러시아의 조지아 합병을 인정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카스피 해 항해권을 획득함과 동시에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러시아화가 진행된다. 또 이 전쟁을 복수를 위해 영국의 지원을 받은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가 또 다시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26~1828)을 일으키게 된다.
 
1805.12.02, 아우스터리츠 전투(Аустерлицкое сражение)
- 나폴레옹 전쟁 중 제3차 대프랑스 동맹(1805~1806) 중에 일어난 전투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의 군대가 연합군의 패배로 인해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결국 프랑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나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청산되며 프랑스의 동유럽 진출이 가속화된다.

1806.11.23~1812.05.28,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806—1812 годов)
- 나폴레옹 전쟁 중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12.02)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배한 것을 본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 제국의 조언을 받아 러시아를 침공한다. 그러나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으며, <부쿠레슈티 조약(Бухарес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를 맺어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흑해 동부의 베사라비아 지역을 할양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현대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분단된다.
 
1807.06.02, 프리틀란드 전투(Фридландское сражение)
- 나폴레옹 전쟁 중 제4차 대프랑스 동맹(1806~1807) 중에 프로이센의 프리틀란트에서 일어난 전투로,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둬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틸지트 조약(Тильзитский мир, 1807)>을 맺게 되며, 러시아 주도의 대프랑스 동맹은 종식되고, 러시아는 프랑스의 <대륙봉쇄령(Континентальная блокада, 1806~1814)> 체제에 편입되게 된다.
 
1808.02.21~1809.09.17, 제1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Ру́сско-шве́дская война́ 1808—1809 годов)
- <틸지트 조약>과 건보트 전쟁(Gunboat War, 1807.08~1814.01)으로 스웨덴 왕국이 일으킨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레드릭샴 조약(Фридрихсга́м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를 통해 핀란드와 올란드 제도를 러시아가 가지게 된다. 이에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1809.07.17, <프레드릭샴 조약(Фридрихсга́м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제1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1809)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과 스웨덴 왕국이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 전역과 올란도 제도를 할양받게 되었으며, 그렇게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며, 이 조약으로 지금의 스웨덴과 핀란드의 국경선이 확정되게 된다.
 

1810년대(1810~1819)

1810, 러시아의 <대륙봉쇄령> 파기 및 영국과의 무역 재개
 
1812.06.24~1812.12.26, 조국전쟁(러시아 원정,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
- <틸지트 조약(1807)>을 통해 강제로 프랑스의 동맹이 된 러시아 제국은 1810년 발트 해 쪽으로 영국과 밀무역을 진행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으로, 프랑스는 3달도 안되어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보급, 날씨, 탈영 등의 프랑스군 내부 문제와 러시아의 존버 등으로 러시아가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 연합군은 궤멸했으며,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복수하려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시작된다.
 
1812.09.07, 보로디노 전투(Бородинская битва)
-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보로디노 마을 인근에서 열린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셰프-쿠트조프(Михаил Илларионович Голени́щев-Кутузов, 1745~1813)의 지휘 하의 러시아 군대와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의 지휘 하에 있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서 발생한 러시아 원정(조국 전쟁) 최대의 전투. 결론적으로 프랑스가 전투에서 이겼지만, 큰 사상자를 냈으며, 러시아군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못했다.
 
1812.09.14~1812.10.19, 프랑스의 모스크바 점령(Французская оккупация Москвы)
- 보로디노 전투에서 부분적으로 승리를 한 프랑스는 1812년 9월 14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해 러시아 황제에게 항복 서한을 보냈으나 한 달 간 어떤 답장도 없었으며, 영문 모를 불까지 치솟고 먹을 것도 부족해져 결국 프랑스군은 아무 성과 없이 후퇴한다.
 
1813.10.16~1813.10.19, 라이프치히 전투(Би́тва под Ле́йпцигом)
- 1813년 10월 16일,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당시 작센 왕국령)에서 나폴레옹 1세 휘하의 프랑스군 19만과 프로이센-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스웨덴 연합군 36만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사흘간의 격전 끝에 압도적인 병력차 앞에 프랑스군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프랑스군은 4만 명 이상의 사상자, 연합군 측도 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이 전투의 결과로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가 끝나게 된다.
 
1814.03.30~1814.03.31, 1814년 파리 전투(Штурм Парижа в 1814 году)
-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연합군은 이제 프랑스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1814년 1월에 프랑스 북동부 국경을 넘었으며, 계속 진격해 3월 30일,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였고, 프랑스는 그렇게 항복하며 전투는 끝이 난다. 그러나 제발 좀 항복하라는 장군들을 무시하며 나폴레옹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고, 결국 그는 강제로 퇴위되어 엘바 섬으로 유폐된다.
 
1814.09.01~1815.06.09, 빈 회의(Венский конгресс)
-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모여 한 회의. 이 회의 본질적인 목적은 이전 유럽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폴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핀란드를 계속 보유하는 것을 승인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베사라비아를 얻었다.
 
1815.09.26, 신성 동맹(Священный союз) 창설
- 빈 회의(1814~1815)에서 새롭게 제정된 모든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상호 원조의 선언으로, 교황과 터키 술탄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모든 군주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공식적인 합의는 아니지만, 신성 동맹은 유럽 외교사에서 혁명 정서를 억압하는 데 바탕을 둔 성직자와 군주제 이데올로기를 가진 결속된 조직으로 발전했다.
 
1815.11.20, 4국 동맹(Четверной союз) 창설
- 1815년 11월 20일 <파리 조약(1815)>의 체결을 통해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참가한 동맹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복귀 반대와 같은 주로 프랑스에 대한 빈 의회의 결정을 시행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후 1818년 전쟁배상금을 모두 지불한 프랑스를 포함해 5국 동맹 체재로 개편되었으며 이후 몇달 전에 창설된 신성 동맹으로 옮겨가며 그 명맥을 이었다.
 
1815.11.27, 폴란드 입헌왕국(Ца́рство По́льское) 결성
-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주도로, 빈 회의의 결과에 따라 폴란드 왕국을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는 식으로 결성한다. 그러나 폴란드 입장에선 이를 제4차 폴란드 분할로 여겼다고 한다.

1816.02~1818.01, 구제 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 1816년 2월 21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전 데카브리스트 조직 중 처음 설립된 비밀 정치 결사로, 신성 아르텔(Священная артель)과 시묘놉스키 아르텔(Семёновская артель)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1818.01~1821, 번영 동맹(Союз благоденствия)
- 1818년 1월, 외적으로는 '도덕과 계몽의 진정한 규칙'을 전파하고, 정부의 선행을 도우며, 농노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는 한편, 헌법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고 농노를 없앤다라는 숨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제 동맹의 핵심 멤버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공화정을 지향하 비밀 정치 결사.
 

1820년대(1820~1829)

1821.03.25~1829.02.03, 그리스 독립 혁명(Греческая революция)
-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헬렌인들의 국가를 만드려는 그리스 독립 운동으로, 러시아 제국은 같은 정교도였던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빈 체제로 만들어진 기독교 전제군주 체제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갈등이 생겨 조금의 지원을 해주긴 한다. 이로 인해 결국 그리스는 염원하던 독립을 승인받게 된다.
 
1823,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
- 1823년 장교이자 데카브리스트난을 일으킨 남부 결사의 이사직을 지낸 파벨 이바노비치 페스텔(Па́вел Ива́нович Пе́стель)가 데카브리스트의 난 계획을 쓴 문서로, '조직은 러시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하며, (자코벵처럼) 국민과 독재자의 권한을 가진 임시 통치를 한다'고 적혀 있다.
 

1824.08.17, <1824년 러시아-아메리카 조약(Рус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нвенция 1824)>

- 182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국과 미국이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북위 54도 40분 이북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고, 그 아래의 북미 지역 태평양 북서해안(오리건 주 인근)은 미국령으로 확정했으며, 그 인근의 해역에서 양국과 영국은 어업과 항해를 10년간 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1825.12.01, 알렉산드르 1세 서거, 니콜라이 1세(파벨 1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의 형제) 즉위
 
1825.12.01~1825.12.26, 1825년 공위기(Междуцарствие 1825 года)
- 알렉산드르 1세가 서거한 1825년 12월 1일부터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난 12월 26일까지의 공위기
 
1825.12.26, 데카브리스트의 난(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 1825년 공위기 중인 12월 26일에 독재정권과 농노법을 폐지한다는 목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 계몽주의를 경험한 신흥 젊은 장교 일부가 일으킨 반란으로, 러시아 정부군에 의해 곧 진압됨과 동시에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다.
 
1826.07.31~1828.02.22,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Русско-персидская война 1826—1828)
- 러시아의 조지아 지역 합병과 <굴리스탄 조약, 1813)>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의 러시아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으며, <투르크만차이 조약(Туркманчайский договор, 1828)>을 맺어 러시아는 현재의 아르메니아의 일부인 예리반(Эривань)과 나흐츠반(Нахичевань)을 획득했으며, 카스피 해에 해군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페르시아는 <굴리스탄 조약(1813)>에 따라 획득한 영토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러시아 제국이 카자르 왕조를 완전히 먹을 수 있었으나, 전제정을 끌어내리려는 페르시아 국민들에 대해 반감이 생겨 그만두었다고 한다.
 
1826~1917.04.07, 황제원(Собственная Его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еличества канцелярия)
- 표트르 1세 시절에 세워질 당시에는 러시아 황제의 개인 사무실이었지만, 니콜라이 1세부터 강화되어 182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새로 설립한 황제원은 이미 여러 사무실과 부서로 나뉘어져 있었고, 미니스트레스트보(министерство)의 직과 일치하게 되며 주요 통치기구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업무를 진행했지만, 특히 니콜라이 1세의 강압적인 정치 방식 중 하나였던 정치경찰의 임무도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1827.10.20, 나바리노 해전(Наваринское сражение)
- 그리스를 지원하는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과 그 식민지였던 이집트 속주가 그리스의 나바린 만에서 싸운 해전으로, 연합국은 오스만-이집트 속주 함대를 대파한다.

1828.04.26~1829.09.14,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828—1829 годо́в)
- 그리스 혁명을 빌미로 시작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전쟁으로, 러시아가 이기면서 <아드리아노플 조약(Адрианополь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1829)>를 맺으며 끝나는데, 전쟁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게 다뉴브 삼각주, 아나파(Анапа), 수주크-칼레(Суджук-Кале), 포티(Поти), 아할치헤(Ахалци́хе), 아할칼라키(Ахалкалаки)를 할양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 지역 일부에 대한 자치권도 허락된다.
 

1830년대(1830~1839)

1830.11.29~1831.10.21, 1830~1831년 폴란드 반란(Польское восстание 1830—1831 годов)
- 폴란드 입헌왕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대폭적인 자치권을 갖게 되어 러시아의 지배에 간접적으로 종속하는 형태가 되었다. 러시아와 입헌왕국은 동군연합이 되어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왕을 겸직하고, 폴란드 국가는 독자적인 세임(Sejm)과 정부를 두고 재판소, 군대, 국가재정 면에서도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폴란드 입헌왕국에게 주어진 자유를 서서히 빼앗았고, 조금씩 러시아 당국은 헌법 또한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결국 1830년 11월 29일, 폴란드 입헌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러시아 제국군의 육군 사관학교 소속이지만 아직 임관하지 않은 젊은 부사관들을 표트르 비소츠키(Piotr Wysocki)가 이끌고 봉기했으며, 얼마 안가 폴란드인 대부분이 이 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는 곧 러시아 제국에게 진압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 입헌왕국의 자치권을 빼았고, 헌법을 폐지한 뒤, 폴란드를 유기령(Органический статут)으로 만들어 버리며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1832.02.26, <폴란드 입헌왕국 유기령(Органический статут царства Польского)>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표한 폴란드를 구성하는 세임, 군대 등을 폐지하고, 폴란드 내 가톨릭 교회와 혁명 단체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러시아어 사용을 강화했고, 그 지위는 다수의 러시아의 입김이 들어간 자치 기관에 의해 통치된다는 내용을 담은 규정(статут)


1833.11.19, <관제국민성이론(Теория официальной народности)>
- 러시아 제국의 고전학자이자 보수적인 정치가이자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우바로프(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Уваров)가 발표한 <공교육부 관리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일반 원칙에 대해(О некоторых общих началах, могущих служить руководством при управлении Министерством Народного Просвещения)>에서 발표한 이론으로, '정교회적 믿음(Православная Вера)', '전제정(Самодержавие)', '국민성(Народность)'을 강조하며, 보수적인 정치 체계를 러시아 국민들에게 강조했다. 이를 토대로 10~18세 사이의 학생은 유학을 가거나 해외여행을 가는 것을 금지하는 등 차르 정부 입장에서 '유럽 계몽 사상의 해로운 영향을 받아 반러시아적이고, 진보된 사상에 빠지지 않게 할' 목적으로 톡톡히 쓰였다.
 

1840년대(1840~1849)

1845'~1849, 페트라솁스키 서클(Кружок Петрашевского)

19세기 초중반에 검열의 억압, 농노법의 추악함, 에티엔느 카베(Étienne Cabet, 1788~1856),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등이 주장하던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해 긍정적으로 논의하던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민주주의 문학 서클로,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부타셰비치-페트라솁스키(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Буташевич-Петрашевский, 1821~1866)를 중심으로, Ф. М. 도스토옙스키(Ф. М.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 С. Ф. 두로프(С. Ф. Дуров, 1815~1869), А. Н. 플레셰예프(А. Н. Плещеев, 1825~1893), Н. А. 스페시네프(Н. А. Спешнев, 1820~1882),  등 당대 젊은 작가나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다.

 

1850년대(1850~1859)

1853.02.28, 알렉산드르 세르게이비치 멘시코프의 콘스탄티노플 방문
- 알렉산드르 세르게이비치 멘시코프(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Ме́ншиков) 제독은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지시에 따라 튀르크 내 카톨릭과 정교회의 성지 문제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 방문한다. 러시아는 튀르크 정부에게 해당 영역에 거주하는 전 정교도의 권리를 지켜달라고 요구했으나, 튀르크 정부는 튀르크 정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자국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게 되었고,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이는 러시아의 주권침해로 간주한다고 강하게 나가게 된다. 그렇게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사이는 더 나빠져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853.10.16~1856.03.30, 크림전쟁(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Кры́мская война́ 1853—1856 годо́в)
- 다뉴브 강에서 시작된 크림 전쟁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튀르크에 붙으면서 대러시아전쟁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물량에 딸린 러시아 제국은 패배해, <파리 조약(1856)>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다뉴브 삼각주 합병, 몰도바 왕국의 남베세라비아 합병, 흑해와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화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영국과 약 1세기가량 그레이트게임을 펼치게 된다. 또한 내적으로는 러시아 내 여러 개혁들이 촉진되는 계기도 되었다.
 
1853.11.30, 시노프 전투(Сино́пское сраже́ние)
- 나히모프(Нахимов) 제독이 이끌던 러시아 제국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수송선단을 격파한 해전. 이 전투로 인해 러시아 해군이 승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대러시아 전쟁을 선포하며 튀르크에게 붙어버리는 계기를 제공했다.
 
1854.01.04,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 흑해로 진격
 
1854.02.21, 러시아 제국,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선포
 
1854.03.27,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 러시아 제국에 전쟁 선포
 
1854.08.30~1854.09.05,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방어전(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оборона)
- 러시아 제국 극동 최대 거점이던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가 포격을 퍼부으며 상륙을 감행하려 했다. 그들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 측은 결국 희생자 100명 정도를 내고 요새 방어에 성공한다. 그러나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는 약 210~4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퇴각한다.
 
1854.10.17~1855.09.09, 1854~1855년 세바스토폴 공방전(Оборона Севастополя 1854—1855 годов)
- 러시아 흑해 함대의 근거지로 요새화가 잘 되어 있던 세바스토폴로, 영국-프랑스-튀르크 연합군이 공격한다. 러시아측 보급도 잘 되었고, 러시아군도 요새 방위에 집중했기에 1년여간 지루한 전투만 반복되었다. 그러다 연합군의 강력한 돌격에 요새는 함락되었고,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흑해 함대를 결국 포기했으며, 연합군은 흑해 제해권을 얻게 된다. 이 전투에 '레프 톨스토이'도 참가했는데,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썼다.
 
1855.03.02, 니콜라이 1세 서거, 알렉산드르 2세(니콜라이 2세의 아들) 즉위
 
1856.03.30, <파리조약(Париж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크림 전쟁을 종결시킬 목적으로 1856년 2월 25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되어 러시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프로이센 왕국이 참가해 오스만 제국의 다뉴브 삼각주 합병, 몰도바 왕국의 남베세라비아 합병, 흑해와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화, 러시아의 오스만 제국에 강요하던 영역 내 정교도에 대한 보호 요청 철회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1858.05.28, <아이훈 조약(Айгунский договор)>
- 1858년 5월 28일, 러시아 제국과 청 제국이 청 제국의 헤이룽장성의 북쪽 아무르 강(헤이룽 강) 연안의 아이훈(Айгунь)에서 맺은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무르 강 이북 지역을 획득하게 된다.

1858~1859, 지방위원회(Губернские комитеты)
- 러시아에서 농노법을 폐지하기 위한 조건을 개발하기 위해 농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위원회. 과반수 이상이 농노제 반대자(крепостни́к)였고, 소수의 자유주의자(либералы)가 함께 한 형식이었다. 처음엔 토지 소유권을 지주에게 줬지만, 이후 토지 소유권은 농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바뀌어 어느 정도 농노들의 권리가 향상된다.
 

1860년대(1860~1869)

1860.05.31~1917.12.27,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банк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 1860년 5월 31일, 알렉산드르 2세의 칙령(указ)으로 러시아 제국 국립 상업 은행(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мерческий банк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1818~1860)의 기반 위에 은행법에 근거해 새로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법령에 따르면 이 은행은 무역과 산업의 단기 신용을 목적으로 하는 국영 은행이었다. 시간이 흘러 1917년 12월 27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ВЦИК)의 <은행 국유화에 관한 법령(Декрет о национализации банков)>에 따라 폐쇄되었다.

 

1860.11.14, <베이징 조약(Пеки́нский догово́р 1860 го́да)>

-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과 청 제국 사이에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만주의 우수리 강 동쪽(연해주)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러시아는 1861년 11월부터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민간 정착자를 보내기 시작했고, 1862년에는 토지 매매가 시작되었으며, 1880년에는 공식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름을 받으며 도시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1861.03.03, <농노해방령(러시아의 농노법 폐지, 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 права в Росси́и)>
-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Великие реформы)을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1861년 3월 3일, 말 그대로 농노를 해방한다고 발표하며, 농노법을 폐지함과 동시해 해방된 농노들에게 일부의 토지 배분도 같이 일어난다. 하지만 해방된 농노들이 경제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토지 배분이 부족했으며, 실업 문제가 심각해졌고, 오히려 지주들에게 토지가 증가되는 요상한 결과를 낳는 등 사회, 경제적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러다 도시 노동자와 같은 새로운 계층이 출현하게 되면서 평등 사상이 조금씩 널리 퍼지게 된다.
 
1861~, 제1차 브나로드 운동(Первый хождение в народ)
-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고등교육(특히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1861년 가을, 러시아 제국 정부는 등록금을 인상하고 학생 상호 원조를 금지했다. 이에 대해 대학가에서는 학생 소요사태가 발생해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대부분의 활동적인 젊은이들은 불신 때문에 공직에 입문하거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 때 한 신문에서 '과학을 공부할 수 없는 자들은 인민들로 나아가라'는 기사를 퍼뜨렸고, 그렇게 학문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던 학생들은 인민들을 교육하는데 힘쓰게 된다.
 
1862.05, 1862년 페테르부르크 화재(5월 화재,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жары 1862 года)
- 1862년 5월말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여러 대화재가 쭉 발생한다. 당시엔 원인을 명확히 밝히진 못했지만, 점점 제국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여겨졌으며, 점점 강해지는 몇개의 급진적인 운동 단체는 방화 혐의로 더욱 탄압받게 된다.

 

1863.01.22~1864.06.18, 1863~1864 폴란드 반란(По́льское восста́ние 1863—1864 годов)
- 폴란드와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1863년 1월 22일,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서 폴란드를 부활시키려는 폴란드 국민정부(Rzeczpospolita Trojga Narodów, 1863~1865)까지 선포되며 일어난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이들의 반란을 1년 넘게 겨우겨우 진압한다.
 
1863.02.09, <알벤슬레벤 조약(Конвенция Альвенслебена)>
- 폴란드 반란(1863~1864) 중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의 영토에서, 프로이센군이 러시아 영토에서 반란군을 추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한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이 맺은 조약. 그러나 비준되지는 않았다.

 

1864.01.01, 알렉산드르 2세의 지방자치개혁(Земская реформа) 승인

-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중 지방자치정부(=젬스트보) 체제를 설립하는 지방자치 개혁이 승인된다.


1864.01.01~1919, 젬스트보(Земство)
- 1864년부터 1919년까지 유럽 러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선출 지방 자치 단체로, 총 43개의 젬스트보가 설치되었다. 여기서 전 계층(도시민, 농민, 비귀족 지주 등 포함)의 투표로 지역 의회와 지역 대표를 선출하였다.
 

1864.12.02, 1864년 사법개혁

- 1864년 12월 초에 위원회의 작업이 완료되어 법안이 제출되고, 이 법안이 12월 2일에 알렉산드르 2세가 승인한 사법 개혁 법안으로, 사법기관 설치, 형사소송법, 민ㄴ사소성법, 치안판에에 의한 처벌에 관한 법률 등 4가지 기본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5~1876, 코간트, 부하라, 히바 등 중앙아시아 병합


1866.04.16, 카라코조프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시도
- 드미트리 블라디미로비치 카라코조프(Дми́т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Карако́зов, 1840~1866)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문 앞에서 알렉산드르 2세를 총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 이후 카라코조프는 즉각 체포되었고, 법정 공판을 통해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에 처해지며 사망했다.

 

1867.03.30, 알레스카 판매(Продажа Аляски)

- 러시아 제국 정부가 미국에게 총 1,518,800km2을 720만 달러(1km2당 0.21달러)에 판 사건. 이로 인해 미국은 알레스카 지역을 구매하는데 큰 비용을 치뤘지만, 곧 그곳의 천연 자원을 개발하고, 금을 채굴하는 등 곧 그 비용을 회복했으며, 러시아는 판매 수익금으로 러시아 철도 운송용 부속품을 해외에서 구입하며 철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70년대(1870~1879)

1873.08.24, <겐데미안 조약(Гендемиан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러시아 제국과 히바 칸국이 히바 칸국의 칸의 여름 거주지 겐데미안(Гендемиан)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히바 칸국은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화 된다.

 

1873.09, 러시아 제국의 부하라 토호국 보호국화

-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정벌 과정 중 부하라 토호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874~1877, 제2차 브나로드 운동(Второй хождение в народ)
- 제1차 브나로드 운동의 흐름에 힘입어 더 많은 대학생들이 1874년부터 민중 교육에 열을 올리는 한편 차르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아직도 글을 못 읽고 차르를 신으로 생각하고 있던 대부분의 민중들은 그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군의 탄압과 재판을 통해 제2차 브나로드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인민주의 운동가들은 테러 활동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1875.05.07,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ий договор 1875 года)>
- 1875년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맺은 영토 조약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사할린 섬(카라후토) 점령을 인정하며, 러시아는 우르프 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 북쪽의 18개 섬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
 

1875.07.09~1877.08.04,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봉기(Боснийско-герцеговинское восстание)

-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 지역의 크리스트교도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발해 일으킨 반란으로, 오스만령 세르비아의 반란군, 세르비아 공국(1815~1882), 몬테네그로 공국(1852~1910)과 이에 더해 러시아 제국의 인민주의 의용군까지 참여하는 등 발칸 반도 전체로 퍼져 커져갔으나,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 공국과 몬테네그로 공국 등은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며 세르비아-튀르크 전쟁(1876~1877)이 발발한다.

 

1875~1876, 1875~1876년 코간트 원정(Кокандский поход 1875—1876)

-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정벌 과정 중 코간트 칸국을 무너뜨리고 합병한 원정

 

1876.05.30, <엠스 칙령(Эмский указ)>

- 1876년 5월 30일,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가 바트엠스(Bad Ems)에서 서명한 칙령으로, 러시아 제국의 소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어로 인쇄된 책과 공연의 러시아 국내 배포를 금지한 칙령이었다. 이 칙령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적은 없지만 후의 니콜라이 2세의 <1905년 10월 17일 선언>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무효가 된다.

 

1876.06.30~1877.02.28, 1876~1877년 세르비아-튀르크 전쟁(Серб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876—1877)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봉기를 계기로 세르비아 공국(1815~1882)와 몬테네그로 공국(1852~1910)가 중심이 되고 그 뒤에 러시아 제국과 불가리아 의용군이 합세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일어난 민족적 범슬라브주의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세르비아는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1876.07.08, <라이히슈타드 협정(Рейхштадтское соглашение)>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Франц Иосиф I)와 그의 휘하 외무장관 А. М. 고르차코프(А. М. Горчаков)가 발칸 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맺은 비밀 협정. 이 합의에 따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튀르크 전쟁(1876~1877)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1876.12.23~1877.01.20, 콘스탄티노플 회담(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1877.04.24~1878.3.3,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Русско-турецкая война 1877—1878 годов)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봉기(1875~1877)과 세르비아-튀르크 전쟁(1876~1877) 등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발칸 반도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에게 자치권을 주는 것을 꺼리며 그들의 반란을 진압한 계기로 일어난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으며, <산스테파노 조약(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 1878.03)>, <베를린 조약(Берлинский трактат, 1878.07)>, <콘스탄티노플 조약(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ий мир 1879, 1879.02)>를 맺으며 종료되었고, 이로 인해,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불가리아의 일부는 자치권을 부여하고, 또 다른 부분은 독립할 때까지 잠시 러시아 제국이 행정을 담당했고, 러시아의 영토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하는 등 조금 넓어졌으며, 영국은 키프로스를 점령하게 된다.

 

1878.03.03, <산스테파노 조약(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

 

1878.07.13 <베를린 조약(Берлинский трактат)>

 

1878~1908, 불가리아 공국(Княжество Болгария)
 
1879~1879, 자유 또는 죽음(Свобода или смерть)
- 토지와 자유(Земля и воля)가 2차로 결성된 이후인 1879년에 만들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급진적 테러리스트 비밀 조직으로, 토지와 자유가 해체될 즈음 그들의 정신은 인민의 의지로 이어집니다. 
 
1879.06~1881.03, 인민의 의지(Народная воля)
- 러시아 제국 차르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급진적인 투쟁을 펼치던 인민주의 비밀결사이자 테러조직으로, 토지와 자유,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진 자유 또는 죽음의 뜻을 이어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으며, 이후 조직을 체포해 조사하던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3세 암살도 계획하고 있던 것이 드러났다.
 
1879.08~1881, 흑토분배(Чёрный передел)
- 토지와 자유의 뜻을 이어 러시아 제국 차르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토지를 재분배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평화적인 투쟁을 하던 인민주의 비밀결사로, 1881년에 와해되었으며, 세력이 해체된 이후의 맴버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노동해방단(Освобождение труда, 1883~1903)을 결성했다.
 

1880년대(1880~1889)

1881.03.13,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및 알렉산드르 3세(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 즉위
- 열병식을 마친 알렉산드르 2세는 정오 쯤에 황궁으로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 일정을 알고 있던 인민의 의지 단원 4명이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길로 가지 않고 잠깐 다른 길로 갔다가 사촌을 잠시 만나러 갔고, 이후 오후 2시경 운하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그 때 첫번째 폭탄이 터지고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 신하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마차에서 내려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려 했다. 이를 본 다른 암살자 한 명이 가까이서 폭탄을 던져 그에게 엄청난 치명상을 입혔고, 그렇게 황제는 그날 사망했다. 이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충격을 받아 전 차르이자 아버지인 개혁 의지를 잇지 않고 반동 정치로 되돌아 가버린다.

 

1881.04~1182, 1881~1882년 포그롬(Погромы на юге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в 1881—1882 годах)

-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후, 러시아 신문들은 유대인 1명이 암살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와전되어 유대인들이 차르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를 신문사들은 기사를 실으며 세상에 그 소문을 널리 퍼트리게 되었다. 그렇게 1881년 4월부터 러시아 제국 남부에 주로 살던 유대인들에 대한 폭동과 학살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의 주택이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 가족들이 재산과 가족을 잃게 되었는데, 다행히 정부에서 치안을 강화시키면서 조금 완화되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내 종교 갈등과 민족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1881.05.11, <전제정 불가침에 대한 성명서(Манифест о незыблемости самодержавия)>

- 1881년 3월 13일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후 즉위한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3세가 1881년 5월 11일에 발표하고, 다음 날 5월 12일에 출판반포된 성명서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을 하는 등 선한 정치를 해왔으나 그 뜻을 몰랐던 몇몇 악한 백성들에 의해 사망했으며,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따라 모든 권한을 군주에게 갈 수 있는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전제정을 유지하고 입헌군주제를 배제하겠다는 숨은 의도가 들어 있으며,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사회주의 세력들의 움직임도 무차별적으로 억압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드러낸다.

 

1881.12.09, <1881년 테헤란 조약(Тегеранский договор 1881 года)>

- 1881년 12월, 테헤란에서 러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맺은 국경 조약으로, 양국의 국경을 카스피 해 동쪽을 남북으로 나눠 정했다. 이 조약으로 현재의 카스피 해 동쪽 지역인 자카스피 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가 된다.

 

1882.05.18~1917.12.08, 농민토지은행(Крестьянский поземельный банк)

- 1882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농민의 토지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던 국가 신용기관이자 은행. 이 농민토지은행은 주로 귀족들의 사유지를 매입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장기 대출을 해주었다.

 

1883.09.13~1903.07, 노동해방단(Освобождение труда)

 

1884.08.27, <1884년 대학령(Университетский устав 1884 года)>

- 1884년 8월 27일, 러시아 제국 내 제국 대학의 구조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발표한 헌장으로, 원래는 '대학 교육을 개선하고 진정한 계몽 정신으로 국가와 국민의 요구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것'을 목표로 초안이 작성되었다가 몇차례 수정을 거쳐, 인민교육부 장관(Министерство народного просвещения)으로 선출된 대학총장(ректор университета)의 감독 역할을 크게 증가시켰고, 이사회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학생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와 수업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 외 대학 활동과 같은 수업 이외의 활동은 제한되어 대학의 자율성이 줄어들게 된다.

 

1885~1917.12.08, 국가귀족 토지은행(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дворянский земельный банк)

- 귀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된 국립은행으로, 핀란드, 폴란드, 발트해 연안, 캅카스 등을 제외한 지역의 귀족 지주들에게 토지 가치의 60~75%까지 담보로 최대 48년 4개월(최종저긍로는 66년 6개월) 만기로 대출해주었다. 금리는 처음엔 5~6%였으나, 1897년 이후 3.5%로 떨어져 귀족들은 전보다 대출 갚는 것이 쉬워졌으며, 장기간 미납 시 규정에 따라 부동산 경매에 부쳐질 수 있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귀족지주 입장에선 꽤 좋은 은행이었을 것이다. 이후 1917년 12월 8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СФСР)의 법령(декрет)으로 폐지된다.

 

1887.01.01~1892.08.30, 비수네그랏스키(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Вышнегра́дский), 러시아제국 재무장관

 

1889.07.12~1917, 젬스키 나찰니크(Земский начальник)

-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3세의 지방 정책의 일환으로 생겨난 알렉산드르 2세가 세운 지방자치단체 젬스트보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젬스트보의 최고 기관급 공무원. 대부분 지역 세습 지주들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그래서 지방자치를 제한할 수 있었고, 그렇게 러시아 제국의 지방자치제도는 후퇴하게 된다.

 

1890년대(1890~1899)

1891.03.09,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시작

 

1891.가을~1892.가을, 11891~1892년 기근(Голод в России 1891—1892 годов)

- 1891년 가을부터 1892년 여름까지 러시아 제국에 일어난 기근으로, 각종 경제, 사회적 문제는 물론 전염병까지 발생해 17개 구베르니야(Губерния, 현)에서 약 36~40만 명이 굶어죽게 된다. 이 기근을 러시아 제국 차르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대중주의(포퓰리즘)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2, <1892년 도시 규정(Городовое Положение 1892 г.)>

- 1890년대 반개혁적 반동정치의 일환으로 발표된 모스크바시의 도시 규정으로, 선거인단의 수와 투표권한이 크게 줄고, 두마의 발언권도 줄었으며, 자치권도 제한되는 반면, 정부 관리인 주지사와 그 후견인이 확대되었다.

 

1892.08.30~1903.08.29, 비테(Витте, Сергей Юльевич), 러시아제국 재무장관

- 8월 29일 그는 러시아가 만주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확장하는 것을 지지하는 베조브라조프파(Безобразовская клика)의 압력으로 러시아제국 재무장관직에서 사임한다.

 

1894.11.01, 알렉산드르 3세 서거,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즉위

 

1895.11~1897.02,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Союз борьбы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 1895년 11월에 В. И. 울리야노프(В. И. Ульянов, 후의 레닌) 등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이고 파업적인 인민 운동을 이끌기 위해 설립한 사회민주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정치 조직. 이후 발각되어 1897년 2월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시베리아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대부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입도 금지된다.

 

1896.06.03, 러청 밀약(Союзный договор между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ей и Китаем 1896)

- 일본이 러시아나 청, 조선 중 한 국가를 침공한 경우 상호 방호 및 원조 동맹을 약속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의 이동을 위해 청은 헤이룽장-지린-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 건설(후의 '동청철도')을 허용했으며, 전시와 평시 어느 때든 러시아는 이 철도로 군대와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게 된다. 이 조약은 후의 러일전쟁(1904~1905)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898.03.13~1898.03.15, 제1차 러시아 사민당 대회(I съезд РСДРП)

- 1898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민스크에서 몰래 여러 마르스크주의 단체 대표 9명이 모여 각 단체들이 통합해 하나의 단일 총회를 창립할 것을 결의했고, 그 결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1917)이 창당되었으며, 그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선언문(Манифест Российской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рабочей партии)>이 발표되었으나, 곧 경찰에 의해 대부분의 대표들이 잡혀 들어갔고, 그들의 합당 모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898.03.13~1917.04.24,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08.17~1904.06.17, 보브리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о́бриков), 핀란드 총독

- 핀란드의 자치를 줄여야한다는 입장에서 당시 황제 니콜라이 2세와 뜻이 통해 그는 러시아인 보브리코프를 핀란드 총독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보브리코프를 중심으로 핀란드 대공국의 러시아화가 서서히 진행되며, 그는 1902년경에 러시아인을 핀란드 지역의 관리로 뽑는 것과 같은 그의 정책에 많은 핀란드 인들이 반발했다. 결국 1904년 6월 17일 핀란드 민족주의자 귀족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1899.03, 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 최초 출판

-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경제와 사회 구조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러시아 경제 발전을 분석한 결과를 정리한 모노그래프로, 1896부터 1899년까지 쓰여졌고, 1899년 3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은 출판사에서 첫 출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책은 24,000권이나 팔리는 성과를 냈다.

 

1899.04~1902.02, <노동자의 업무(Рабочее дело)>
- 해외 러시아 사회 민주당 연합(Союза русских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ов за границей)의 비정기 정치 잡지로, 인쇄소는 제네바에, 편집장은 파리에 있었다. 이 잡지의 첫 호는 '노동자의 업무'에 대한 정치적 방향이 언급되었는데, 프롤레타리아 경제 이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사회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선언되었고 정치적 도전은 먼 미래의 문제로 제시되었다.

 

1899.08.17~1904.07.28, 플레베(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핀란드 대공국 국무장관

-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을 가졌으며, 반유대주의자면서 보수주의자, 반동주의자였으며, 대일강경파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민 봉기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핀란드인도 러시아인처럼 병역의 의무를 져야한다는 법안처럼 핀란드와 러시아인들에게 모두 같이 적용되는 법안을 반포하기도 하면서 식민지 핀란드인의 원성을 샀다. 또한 대외적으로 대일강경파였기에 러일전쟁을 해야한다는 입장을 정부에 강력히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1904년 7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르샤바 기차역(Варшавский вокзал) 근처의 이즈마일롭스키 대로(Измайловский проспект)에서 혁명가 에고르 세르게예비치 소조노프(Егор Сергеевич Созонов, 1879~1910)이 던진 폭탄에 맞아 숨지게 된다.

 

20세기

1900년대(1900~1909)

1900.07.17~1900.07.21, 경자안란(庚子俄难, Китайский погром в Благовещенске)

- 의화단 운동(1899.11~1901.09) 중 의화단이 동청철도를 파괴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제국이 블라고베셴스크와 강동64둔에 거주하던 중국 거주민 약 7000명을 살해한 사건. 이로 인해 <베이징 조약(1860)>에 의해 이뤄졌던 강동64둔 주민들의 영주권과 청 정부의 해당 지역 중국 주민 관할권이 상실되었다.

 

1900.12.24~1905.10, <불꽃(이스크라, И́скра)>

 

1901.04~1902.08, <여명(Заря)>

- 마르크스 이론 관련 신문

 

1901.05.20, 오부홉스키 공방전(Обуховская оборона)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부홉스키 공장(Обуховский завод)의 노동자들과 경찰, 군대와의 충돌 사건. 1901년 4월 오부홉스키 제철소 공장은 정부로부터 긴급 명령을 받아, 이로 인해 근무 시간이 단축되고, 초과 근무가 도입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근로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공장에서 조직된 사회민주주의계열과 인문주의 등의 여러 지하 단체들의 대표들이 정치적 파업을 발표했고, 수백 명의 근로자들이 출근하지 않았다. 5월 5일, 공장장 권한대행이던 한 중령은 이 일을 이끈 70명의 선동자들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주동자는 해고 철회, 5월 1일(노동자의 날) 공휴일화, 8시간 근무제 확립, 야근 및 야간 근무제 폐지, 공장 내 근로자 선거인단 협의회 설립, 임금 인상 등을 요구했지만,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마5월 20일 경찰대를 출동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경찰은 총을 쏘고, 근로자들은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뿌리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움이 오고가다 결국 양측은 협상에 이르렀고, 근무일 전체 중 근무 시간을 30분 줄이는 것 등 12개의 조항에 합의했으나, 주동자들 중 일부는 정치재판으로 넘겨져 사형이나 추방당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사상 최초로 상트페테르 인근에서 일어난 러시아 노동자들의 공개 시위로 알려져있다. 

 

1902.04.01, <무엇을 할 것인가?(Что делать?)>

- 레닌

 

1903.06.02, <노동보험법(Закон о страховании рабочих)>

 

1903, 07.30~1903.08.23, 제2차 러시아 사민당 대회(II съезд РСДРП)

- 벨기에 왕국(1830~)의 브뤼셀에서 1903년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그리고 벨기에 경찰에 의해 쫓겨난 뒤 대영제국의 런던으로 옮겨가 8월 23일까지 개최되어 26개의 조직과 57명의 대표단이 참가한 사실상 러시아 사민당(РСДРП) 창당 총회. 이 회의에서 크게 두 파의 의견이 대립했는데, 이후 몇 차례의 대회를 통해 한 파벌은 유리 마르토프(Юлий Мартов, 1873~1923)를 중심으로 한 소수파(멘셰비키, Меньшевики)로 변하며, 다른 파벌은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 1870~1924)를 중심으로 한 다수파(볼셰비키, Большевики)로 변해 노선이 분리된다.

 

1903.08.19~1903.08.20, 키시나우 포그롬(Кишинёвский погром)

- 1903년 6월경 일어났던 14세 아이의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1903년 8월에 현재의 몰도바 지역의 키시나우(Кишинёв)에서 일어난 포그롬으로, 이 이틀 동안 유대인의 약 49명이 죽었고, 586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도시 전체 건물의 약 3분의 1인 1500채 이상의 가옥이 피해를 입게 된다. 일부 유대인들이 경찰에 도움을 청했으나 경찰들 대부분은 이 사건을 방관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군대가 포그롬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체포하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한편 이 제2차 포그롬이라고도 불리는 키시나우 포그롬은 러시아 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러시아 내외부의 도시들에서 약 100만 루블의 성금을 받아 유대인들의 거주지 복원과 신체 및 정신 회복에 쓰였다. 또 대부 유대인들은 이후 러일 전쟁 중 미국에 일본 정부 차관을 배치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그렇게 일본은 러일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낼 심도높은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또 영국의 주도로 아프리카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우간다 계획도 검토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3.08.02~1905.10, 해방동맹(Союз освобождения)

 

1904.02.08~1905.09.05, 러시아-일본 전쟁(러일전쟁,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 한국과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영향권 충돌로 발생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포츠머스 조약(Портсму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905)>를 맺게 되면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이권 대부분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며, 특히 동청 철도와 같은 철도권이나 뤼순 반도 이권도 넘겨준다. 그 외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쪽과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 해 연안의 어업권도 일본에게 양도하게 된다.

 

1904.02.08~1904.02.09, 포트 아서 습격(여순항 해전, Нападение на Порт-Артур)

1897년 청과 러시아 제국은 밀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은 뤼순 항(여순항)과 다롄 만(대련만)을 조차해 부동항을 확보하고, 동청 철도를 설치하고 만주를 점령하는 등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려 협상 시도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그 때 쯤 제1차 영일 동맹(1902~1905) 맺었으며,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과 미국 등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등 뒤에서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1904년 2월 4일, 일본 제국 어전회의(御前会議)에서 전쟁 승인이 난 뒤, 1904년 2월 8일 포트 아서(뤼순항, Порт-Артур)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제국의 태평양 함대(Тихоокеанский флот )를 습격하며 여순항 해전이 펼쳐진다. 약 이틀 동안 진행된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결국 일본 제국 해군의 전략적으로 승리하며, 러일전쟁이 시작된다.

 

1904.02.28~1906.03,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공장노동자조합(Собрание русских фабрично-заводских рабочих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 1905년 혁명(1905~1907)의 시작을 알린 피의 일요일(1905) 사건에서 약 1만 명과 함께 당당히 차르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러 가는 행진을 했던 단체로, 신부 가폰(Гапон, 1870~1906)의 주도로 1904년 2월 28일,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1864~1917)이 1903년에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 기계제작노동자 상호 지원 협회(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ого общества взаимного вспомоществования рабочих в механическом производстве)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단체. 그러나 1905년 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06년 정부는 재산을 정지시켰고, 그렇게 조합은 사라져간다.

 

1904.06.17, 핀란드 총독 암살 사건

- 1904년 6월 16일 저녁, 핀란드 상원 건물에서 핀란드 상원의원 아들이자 핀란드 민족주의자 에우겐 발데마르 샤우만(Eugen Valdemar Schauman, 1875~1904)은 총으로 당시 러시아인 핀란드 총독 보브리코프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그는 6월 17일 새벽에 사망한다.

 

1904.06.21, 시베리아 횡단철도 최초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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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1.22, 피의 일요일(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1905.01.22~1907.06.16, 1905년 혁명(Революция 1905 года)

 

1905.05.27~1905.28, 쓰시마 해전(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 러시아 발트 함대가 영국과의 마찰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빙돌아 겨우 대한해협 쓰시마 섬 인근에 도착했고, 러시아 제국의 병원선을 발견한 일본 함대가 포격을 가하며 시작된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의 배들은 대부분 침몰했고, 그렇게 일본제국 해군의 압승으로 해전은 끝났으며, 이 해전은 러일전쟁을 끝낼 결정적인 해전이었다

 

1905.06.27~1905.07.08, 전함 포템킨 반란(Восстание на броненосце «Потёмкин»)

- 1905년 러시아 혁명(1905) 중 일어난 최초의 군부 전체의 무장 반란. 식량 보급 문제로 시작된 군부 무력 반란으로 선원들은 배를 손에 넣고 일부 장교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배를 오데사로 몰고가 반정부 시위였던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같이 참가했다가 곧 콘스탄차(Констанца) 항구에 정박해 루마니아 당국에 항복했다. 


1905.08.06~1917.04.30, 러시아 제국 국가 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 1905년 창립된 후기 러시아 제국의 대표적인 입법 기관으로, 국가 의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совет)의 하원 역할을 했다. 러시아 제국 국가 두마 소집은 총 4건(1906, 1907(2회), 1912)있었다.

 

1905.09.05, <포츠머스 조약>

러일전쟁(1904~1905)의 결과로 미국이 중재하고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맺은 평화 조약으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이권 대부분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며, 특히 동청 철도와 같은 철도권이나 뤼순 반도 이권도 넘겨준다. 그 외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쪽과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 해 연안의 어업권도 일본에게 양도하게 된다.

 

1905.10.12~1917.09.28, 입헌민주당(Конституцион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Kadets)

사학자이자 정치인이면서 기자였던 파벨 니콜라이 밀류코프(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Милюков, 1859~1943)의 주도로 결성된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원하는 중도주의, 사회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입헌주의, 다원주의 정당으로, 20세기 러시아의 국가두마의 주요 중앙 정당 중 하나

 

1905.10.20~1905.10.30, 10월 총파업

- 1905년 혁명(1905~1907) 중인 1905년 10월 말에 일어난 노동자와 피고용인의 최초의 전러시아적 정치 시위.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경제적 상황 개선, 독재정과 전제정을 전복하고, 민주적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파업 중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컸는데 이들의 파업으로 니콜라이 2세의 <1905년 10월 17일 선언>이 발표되었으며, '소비에트'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소비에트'는 10월 혁명(1917.11)을 거치며 소련 시대를 열게 된다.

 

1905.10.30, <1905년 10월 17일 선언(Манифест 17 октября 1905 года)>

- 1905년 10월 30일(구력 : 10월 17일),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가 발표한 선언문으로, 10월 총정치파업(Октябрьская всеобщая политическая стачка, 1905.10)으로 발표되었다. 선언문에서는 법안을 의회 승인을 통해 통과시키는 두마를 설치하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동맹의 자유, 개인의 불가침과 같은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제공하게 되며, 입헌군주체제로 바꿀 것을 약속했다. 이 선언문은 러시아 제국의 기본법이 개정되는데 영향을 미쳤는데, 그래서 사실상 첫번째 러시아 헌법의 원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1906.07.21~1911.09.14, 스톨리핀 농업 개혁(Столыпинская аграрная реформа)

비테(Витте) 총리 사임 직후 임명된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총리(председатель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이 추진한 농업 개혁. 개혁의 주요 방향은 토지 소유권 이전, 집단 토지 소유자로서의 농촌 사회의 점진적인 폐지, 농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대출, 농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재판매하기 위한 지주 토지 매입, 그리고 농민 경제 양극화 해소를 최적화하는 토지 개발 등이 있었다.

 

1907.02.20~1907.06.03, 제2차 국가두마 소집(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II созыва)

- 혁명가 망명

 

1910년대(1910~1919)

1914.07.28~1918.11.11, 1차 세계 대전(Первая мировая война)
 

1914.08.01~1918.05.07, 동부전선(Восточный фронт)

- 독일의 러시아 선전포고로 시작된 동부전선의 전투들은 독일을 포함한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이 이기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03)>을 맺으며 끝나게 된다.


1914.09.01~1918.10.30, 캅카스 전역(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Кавка́зский фронт)

-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면서 러시아와 아르메이나와 붙게 된 전역으로, 결국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영토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게 되고, 남캅카스 지역에는 하야스탄 공화국(1918~1920), 아제르바이잔 공화국(1918~1920)과 같은 국가들이 생겨나게 된다.

 

1916.12.30, 라스푸틴의 암살

- 1916년 12월 30일 밤, 모이카 궁(Дворец Юсуповых на Мойке)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궁의 여자들을 희롱했던 그리고리 라스푸틴(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1869~1916)이 당시 고위 관료와 귀족들에 의해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 끝에 익사로 삶을 마감한다.
 
1917.03.08~1917.03.16, 2월 혁명(Февральская революция)
- 전쟁 중단, 군주제 타도 및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러시아의 반정부 민중 혁명. 이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해 사실상 러시아의 군주정이 끝나고 명목상 입헌군주체제가 되었으며, 러시아 공화국(1917)이 수립되고, 러시아 임시정부(1917)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군사 대의회(1917~1924)가 다스리는 이중체제(dual power)가 확립되었다.
 
1917.03.12~1917.10.19, 국가 두마 임시위원회(Временный комите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думы)
 

1917.03.14, <명령 제1호(Прика́з № 1)>

- 2월 혁명 기간인 1917년 3월 14일(구력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및 군인 대표자 연합(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Петроградский совет рабочих и солдатских депутатов, Петросовет)이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지역의 수비대를 통해 발행한 문서이자 명령. 명령에 따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법령에 위반 되지 않는 경우에만 군장교와 임시 정부에 복종하도록 지시했다. 

 

1917.03.15, 니콜라이 2세 퇴위

1917.03.15~1917.11.08, 러시아 임시 정부(Времен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России)
-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 퇴위 이후 세워진 러시아 최초의 임시정부
 
1917.03.16~1917.07.22, 이중 권력(двоевластие)
-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 직후부터 국가 두마 임시위원회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및 군인 대리인단(Петроградский совет рабочих и солдатских депутатов)이 권력을 가지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로 사회 전체가 혼란해진 시대. 이후 한시적인 임시 정부를 탄생시키게 된다.

 

1917.04.20, <4월 테제(Апрельские тезисы)>

-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레닌이 제안한 2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 볼셰비키 행동 계획인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 계획. 이 내용은 당시 볼셰비키의 신문 <프라브다(Пра́вда)>에 1917년 4월 20일에 실렸다.

 

1917.09.10~1917.09.13, 코르닐로프 폭동(Корниловское выступлени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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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09.14~1917.11.07, 러시아 공화국(Росси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1917.11.07, 10월 혁명(Октябрьская революция)
- 러시아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고 소련이 권력을 확립하게된 사회주의 혁명. 2월 혁명의 연장선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이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1917~1922)과 러시아국(1918~1920)이 건국되고, 러시아 내전(1917~1922)이 일어나게 된다.
 
1917.11.07~1922.12.30,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RSFSR)

 
1917.11.07~1923.6.16, 러시아 내전(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
 

1917.11.15,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Декларация прав народов России)>

- 1917년 11월 15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СНК РСФСР, 1917~1946)이 채택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장 블라디미르 레닌과 민족문제인민위원부(Декларация прав народов России) 부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동으로 서명한 문서 중 하나로, 러시아 인민의 평등과 주권, 독립 국가의 분리 및 형성까지 러시아 국민의 자유 자기결정권, 모든 국가 및 국가 특권과 제한 폐지, 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과 민족지적 집단의 자유로운 발전이라는 4가지 기본 원칙이 선언되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내 소수 민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이 동등하며, 자주적이며, 분리독립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1918.01)>와 비슷하지만 좀 더 실천적이고 인도적인 권리 선언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1918.03.03, <브레스트 강화 조약(Брес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전선에서 패배한 러시아와 독일이 단독으로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캅카스, 발트 국가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등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고, 조약을 맺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독일 제국에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함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전신이 되는 볼셰비키 당군인 적위군을 해체할 것이라는 조약 내용도 들어 있었다. 흔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라고도 한다.
 
1918.07.04~1918.11.03, 시베리아 공화국(Сибир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1918.09.23~1920.01.05, 러시아국(Россий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
 

1920년대(1920~1929)

1921.03.15~1931.10.11, 신경제정책(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
 

1922.04.10~1922.05.19, 제노아 합의(Генуэз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 1922년 4월 10일부터 5월 19일까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1922년 4월 10일부터 5월 19일까지 제노아(이탈리아)에서 경제 및 금융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이탈리아 공화국,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 독일 , 미국 6개국의 29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당시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한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에 매우 중요했다.

 

1922.12.30, 제1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I Всесоюзный съезд Советов)


1928~1991, 소련 국가 경제 5개년 계획(Пятилетние планы развития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 СССР)
 

1930년대(1930~1939)

1937.08.21~, 소련에서의 고려인 강제 이주, 37사건, Депортация корейцев в СССР)
 

1940년대(1940~1949)

1941.06.22~1945.05.09,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945.02.04~1945.02.11, 연합국의 얄타 회담(Ялти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союзных держав)
 

1950년대(1950~1959)

 

1960년대(1960~1969)

 

1970년대(1970~1979)

 

1980년대(1980~1989)

1985~1991, 재건(Перестройка)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에 의해 시작된 소련의 경제 및 정치 구조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소련 당 지도부의 개혁과 새로운 이념.
 
1988.11.16~1991.12.26, 소련 붕괴(Распад СССР)
-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하며, 15개의 미승인 국가가 탄생했고, 소련 해체 이후의 영토 분쟁이 본격 심화된다.
 

1990년대(1990~1999)

1990.06.12,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주권 선언(Декларация 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м суверенитете РСФСР)
- 소련으로부터의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주권 선언과 헌법 개혁의 시작을 기념하는 정치적, 법률적 선언. 이 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는 매년 6월12일 러시아의 날(День России)이라는 공휴일을 만들었다.
 
1991.08.18~1991.08.21, 국가비상사태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по чрезвычайному положению)
- 소련 정부의 고위 간부 8명으로 구성된 8월 쿠데타 당시 소련의 자칭 권력 기구.
 
1991.08.18~1991.08.21, 8월 쿠데타(Августовский путч)
- 소련 공산당의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에 반대한 보수파에 의해 일어난 쿠데타.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러시아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 России)가 승리했으며, 이 쿠데타를 일으킨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붕괴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직과 대통력직에서 물러났으며, 러시아에서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이 시작되었고, 소련이 붕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1.12.08, <(벨라베자 조약(Беловежские соглашения)>
-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벨라루스 공화국의 비아워비에자 숲(Беловежская пуща)의 별장에 모여 소련 해체 및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에 서명했다.

 

1991.12.08~, 독립국가연합(Содру́жество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НГ)

- 구 소련(СССР)을 구성했던 일부 국가들간의 협력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만든 국제 기구로, 본부는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있다.
 
1991.12.21, <알마아타 조약(Алма-Атинская декларация)>
- CIS의 목표와 원칙과 그 기초에 관한 선언. 구소련 공화국의 15개국 정상 중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11개 공화국이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Алма-Ата, 알마티)에 모여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겠다고 합의하였다. 나머지 4개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조지아는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1세기

2000년대(200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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