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중에 한 장교는 다낭의 외곽 지역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갔다. 그는 마을 입구에 좌판을 차려놓고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갖가지 과일을 고른 뒤 그는 남베트남의 지폐인 피아스터(piastre)를 한 뭉치 꺼냈다. 그러자 과일 장수는 말했다. "노, 노, 노 피(피아스트르는 필요 없어요)" - 부자들의 음모 中 |
<부자 아빠 기요사키가 말하는 부자들의 음모>라는 책을 읽으면서 피아스터(피아스트르)는 어떤 화폐인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해 찾아보고 정리해봤다. |
1.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지도에 등장하다. - 베트남의 근대사와 피아스트르
1-1. 대남국과 캄보디아를 얻고, 인도차이나 연방을 설립하다.
1856년, 프랑스는 대남국(1839~1945) 응우옌 왕조(1802~1945)에게 베트남에서의 카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종교적 박해를 중지하고, 선교의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프랑스의 실수로 이 외교적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에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연합해 대남국에 군대를 보냈고, 1858년 9월 1일에 다낭을 점령하고, 1859년 2월 17일에는 수도 사이공을 포위했다. 2년여에 걸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는1862년 6월 5일 대남국과 제1차 사이공 조약(임술화약)을 맺었고, 이 때부터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지역을 손에 넣으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메콩강 삼각주 지역 3개주와 꼰다오 제도를 프랑스에 할양할 것
프랑스의 동의 없이 대남국은 다른 나라에 양도될 수 없음을 명시할 것
크리스트교 포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
에스파냐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
메콩 강과 3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 1862.06.05, 제1차 사이공 조약
제1차 사이공 조약이 맺어진 1862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코친차이나 직할령을 설치했다. 베트남은 10세기부터 전통적으로 반(文)이라는 화폐 단위를 쓰고 있었는데, 1878년, 프랑스는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코친차이나 직할령에 화폐 개혁을 단행했고, 그에 따라 같은 해부터 코친차이나 피아스트르(Cochinchina piastre, 1878~1885)라 불리는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서 피아스트르는 '여덟 조각'이라는 뜻을 지닌 에스파냐 화폐 페소 데아 오초(Peso de a ocho)에서 유래했다. 더 근본적으로 부분(piece)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piastra에서 유래했다.
반(文)을 프랑스어로 사페크(Sapèque)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는 1878년, 1000 동화 사페크(구리 사페크, 1000반)에 해당하는 1피아스트르(piastre)동전을 제조했고, 1879년, 500 동화 사페크(500반)에 해당하는 2피아스트르 동전을 제조해서 배포했다.
'후기 크메르 왕국, 중세 캄보디아, 암흑시대'라고도 불렸던 캄보디아 왕국(1431~1863) 말기는 처참했다. 타이와 대남국 사이에 끼여 힘도 쓰지 못하고, 양국의 간섭을 받으며 국정 운영이 힘들어졌다. 이에 캄보디아는 프랑스에 자진해서 보호를 요청했고, 1863년 8월 11일, 캄보디아와 프랑스 사이의 보호조약이 채결되며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1863~1941, 1945~1947)가 성립되었다. 프랑스는 큰 전투 하나 없이 이렇게 캄보디아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1883년 8월 20일, 베트남 중부 후에 근처 해안에서 프랑스군이 응우옌 왕조를 격파했고, 8월 25일에 통킹과 안남 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제1차 후에 조약(계미화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통킹 보호령, 안남 보호령을 설치했으며, 대남국의 영토를 완전히 얻게 된다. 그러나 아직 대남국이라는 이름과 외교권, 그리고 황제는 존립하고 있었다.
1884년 6월 6일, 프랑스와 대남국 사이에 제2차 후에 조약(보호령 조약, 갑신화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대남국의 명칭은 안남국으로 바뀌었으며, 이 때부터 안남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안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임을 인정하고 수락한다. 프랑스는 모든 외부 관계에서 안남을 대표할 것이다. 해외의 안남인들은 프랑스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다.
- 1884.06.06, 제2차 후에 조약
제2차 후에 조약이 맺어지자 청의 서태후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통킹에 주둔하던 청군의 철수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1884년부터 시작된 청불 전쟁(1884.08.22~1885.04.04)에서 중국에 승리한 뒤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이듬해(1885년), 프랑스는 통화 안정을 위해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새로운 은화 피아스트르 드 커머르흐스(piastre de commerce)를 발행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트르 은화라고 흔히 말하는 그 화폐다. 초기에는 피아스트르는 페소 데아 오초(Peso de a ocho, 여덟 조각)라고도 불리는 에스파냐 달러, 필리핀 페소, 멕시코 페소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어 순은 24.4935g이 1 피아스트르로 정해졌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은화 발행 후 10년이 지난 1895년에 이르러서는 1 피아스트르로 순은 24.3g만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887년 10월 17일, 프랑스는 안남국 지역(안남, 통킹, 코친차이나)과 캄보디아 왕국을 모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설립했다.
1-2. 라타나코신 왕국(타이)와의 충돌
1890년대에 라타나코신 왕국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국경지역에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프랑스는 라오스 동부 지역을 얻고 싶어했고, 라타나코신 왕국는 그런 프랑스를 막기 위해 메콩강 동부 지역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1892년 9월, 프랑스 상인 3명이 라타나코신 왕국에서 마약 밀수 혐의로 추방당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1893년 초에, 주방콕 프랑스대사에 부임되었던 오귀스트 파비(Auguste Pavie, 1847~1925)가 열병으로 사이공으로 복귀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반시암 정서를 자극했다.
1893년 4월, 프랑스에게서 메콩강 동부를 달라는 요구를 받은 라타나코신 왕국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분노한 프랑스는 3개의 부대를 이끌고 접경지역에 다다른다. 1893년 6월, 그로스귀랭(Grosgurin)이 이끌던 소규모 민병대가 키엔 케트(Kien Ket) 마을을 기습했고, 이 기습은 지휘관이었던 그로스귀랭(Grosgurin)이 사망하며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프랑스는 이 전투를 빌미로 라타나코신 왕국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 7월 13일, 프랑스 함대 세 척이 짜오프라야 강을 헤엄쳐가다 팍남 인근의 라타나코신 왕국의 요새를 포격해 승리한 사건(팍남 사건)을 필두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암에서 펼쳐졌던 프랑스-시암 전쟁(1893.07~1893.10)에서 결국 라타나코신 왕국에게 승리했고,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메콩강 동부 지역)을 획득하게 되었다.
1895년 7월 8일과 1898년 4월 14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피아스트르 은화의 무게를 더 낮게 주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895년 당시, 1 피아스트르 은전(은화 동전)의 무게는 27g으로, 50센트 은전은 13.5g으로, 20센트 은전은 5.4g으로, 10센트 은전은 2.7g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시장 원리로 인도차이나 내에서 화폐가 전보다 더 많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1-3. 청으로부터 광저우만 조차지를 얻다
1898년 11월 19일, 청과 프랑스가 맺은 광저우만 조계 조약(广州湾租界条约)으로, 프랑스는 중국 광저우 동남부의 작은 조차지를 얻게 되었다. 이윽고 1900년 1월 5일, 이곳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게 된다.
1-4.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몰락, 그리고 일본 제국의 등장
1921년, 피아스타르 은화의 표준 규정이 복원되었고 이때 1피아스트르는 10프랑의 비율로 고정되었다. 해당 비율은 1930년까지 유지되었다.
중국과 타이, 라오스의 일부, 베트남, 캄보디아 지역을 병합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1940년 7월, 프랑스 제3공화국이 나치 독일에 의해 붕괴되며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다. 이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이 중화민국을 견재하기 위해 나타났다. 1940년 말, 베트남 북부 지역에 진주했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 지역까지 상주 지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수탈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흰 피부가 아닌 같은 살구색 피부를 지닌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1945년 3월, 메이고우 작전(명호작전, 明号作戰)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대미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프랑스 비시 정부가 같이 동참해주지 않자,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을 공격해 명목상 공동 통치했던 인도차이나를 완전한 일본의 지배하에 두게 된다. 명호작전이 진행중이던 1945년 3월 11일, 일본의 원조로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保大)를 황제로 한 베트남 제국이 건국된다. 이 때 황제 바오다이는 1884년에 맺어진 제2차 후에 조약을 파기한다고 선언하며, 완전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꾀했다. 그럼 뭐해... 일본의 괴뢰국인데... 일본 제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각종 자원과 일부 병력을 베트남에서 차출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흉작까지 일어나(1945년 베트남 기근) 민생은 피폐해져갔다. 일본제국이 지배하고 있을 당시, '1 엔 = 0.976 피아스트르'의 환율이 적용되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약칭 월맹(비엣민)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다.
1-5.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등장 - 피아스트르의 몰락
1941년 5월 호찌민(胡志明, 1890~1969)에 의해 설립된 베트남 독립동맹회는 일본 제국이 패망한 8월 중순을 기점으로 8월 혁명(1945.08.14~1945.09.02)을 일으켜 베트남 제국을 전복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켰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과 월맹은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공화 독립 선언(宣言獨立越南民主共和)을 발표하며 베트남 민주공화국(1945~1976)을 건국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설립된 1945년 9월 2일에 공포된 연합국 일반 명령 제1호에 근거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남북으로 나뉘었다. 북위 16도선 이북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게, 이남은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에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맡겼고 양국 군은 프랑스군이 도착할 때까지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을 꺼려했던 베트남은 베트남 공산당을 해산하는 것과 같은 각종 노력을 다해 중국군이 본국으로 복귀하길 바랬다. 다행히 1945년 8월부터 진행된 국공내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곧 복귀했고, 영국군도 인도 제국과 영국령 버마 등의 독립 운동을 막기 위해 그 자리를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후퇴했다.
이 당시 환율은 어땠을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피아스트르는 10프랑의 비율로 다시 거래되었다. 그러나 약 3개월 뒤인 1945년 12월, 프랑스는 프랑스 프랑의 평가 절하를 피하기 위해 고정환율을 1 피아스트르 = 17 프랑으로 바꾸었다.
1946년 1월 31일,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발행된 북베트남 동(đồng)이 도입되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트르와 동등한 비율로 대체했다. 1951년에 발행한 동(1951 đồng)은 1946년에 발행한 동(1946 đồng)의 100배로 뛰기도 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북베트남에서도 여전히 유통되던 피아스트르와 남베트남 동에 대한 환율도 결정하는 문제에 봉착했는데, 여러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1954년, 32 북베트남 동 = 1 피아스트르 = 1 남베트남 동으로 정했다.
1-6.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사라진 피아스트르
동남아시아에서 피아스트르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 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프랑스 제4공화국의 유명한 재정 및 정치 스캔들인 피아스트레스 사건(1950~1953)이 터지게 된다.
1945년 말, 인도차이나 외환청(l’Office indochinois des changes)은 프랑스 프랑의 가치가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1 피아스트르 = 17 프랑의 고정환율을 시행했지만, 당시 1 피아스트르의 실질 가치는 10 프랑이었다. 기준 환율과 실제 환율의 차이가 크게 발생하자 조직 범죄나 정치 부패와 관련된 광범위한 돈세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1950년에 밝혀졌지만, 의원들 간에 전쟁과 식민지에 대한 집중 논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1953년까지도 이 사건은 큰 이슈를 내지 못했으며, 이 기간 중 베트남 공산당 또한 큰 이득을 보았다.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으로 이 환율 문제가 종결되었다.
1946년 12월 19일, 하노이 전투를 시작으로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은 1954년 7월의 제네바 회담을 맺으며 베트민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베트남의 실질적 독립권 확보
제네바 협정(베트남을 북위 17°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프랑스 철수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민주공화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의 독립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
195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라오스 왕국에서도 1 라오스 킵 = 1 피아스트르로 정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으며, 1953년에는 1 피아스트르를 캄보디아 왕국에서는 1 캄보디아 리엘로, 베트남 공화국에서는 1 남베트남 동으로 정해 피아스트르와 동등한 수준으로 도입되었다.
1953년,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환율인 1 피아스트르 = 10프랑의 환율로 회복되었지만, 이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국운은 지고 있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마지막 총독인 앙리 오프노(Henri Hoppenot, 1891~1977)가 1956년 7월 21일 사임되며 인도차이나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 프랑을 담보로 운용되었던 피아스트르는 이제 고철 덩이, 휴짓조각이 되었다.
그럼에도 2 피아스트르 지폐는 1955년까지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1957년까지는 라오스에서도 공식적으로 통용되었지만, 큰 가치를 지니진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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