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한국어 지시사 ‘그’ 연구: 『석보상절』을 중심으로
A demonstrative keu in Middle Korean has been understood from the same perspective as keu in Present Day Korean so far. However, it is hard to understand why the demonstrative system of Korean has remained constant for more than five centuries. Therefore,
www.kci.go.kr

1. 서론

현대한국어 지시사 '이, 그, 저'가 화자와 청자를 기준으로 하여 지시 대상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현장지시와 문맥에 언급한 대상을 다시 가리키는 문맥지시 기능을 수행하며 문맥지시는 현장지시에서 발달되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중세한국어 지시사에 대해서도 현대어와 동일한 설명을 적용하는 것은 타당성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거리 의미를 갖지 않거나(특칭) 중립적인 특성을 보이는 지시사 '그'에 대한 설명이 현대어와 중세어 사이에서 차별성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있죠. 이에 논문은 <석보상절(석상, 1447)>을 통하여, 중세한국어 지시사 '그'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함으로써, 단독으로 대명사적이나 관형사적으로 쓰인 '그'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역사적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2. ‘그’의 형태통사적 특성

<석보상절>에서 '그'는 관형사로서 후행 명사를 수식하는 예가 대부분이며, 명사로 쓰일 때에는 '긔'의 형태 등으로 나타나는 주격 혹은 계사와의 결합형이나 '글로' 등으로 나타나는 도구격 조사와 결합형으로 나타납니다. '이, 저'와 비교했을 때 '그'는 속격 조사와 통합한 예가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 어휘쌍 | 이 | 그 | 뎌 |
| -어긔 | 이어긔 | 그어긔 | 뎌어긔 |
| -에 | 이에 | 그에 | 뎌에 |
| -긔 | 여긔 | 거긔 | 뎌긔 |
| -리 | 이리 | 그리 | 뎌리 |
| -러ㅎ.- | 이러ㅎ.- | 그러ㅎ.- | 뎌러ㅎ.- |
그러나 '이, 그, 저'가 참여하는 다양한 어휘쌍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통사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더라도 한 부류의 어사였음은 분명합니다.
3. ‘그’의 의미적 특성
'그'는 사람과 사물을 모두 지시할 수 있어 지시 대상의 질적 자질을 부호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화시(직시, deixis) 의미를 부호화한 '이, 저'와 달리, '그'는 발화 현장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예가 나타나지 않아 직시 의미를 부호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한문 지시사와의 대응 양상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는데, '그'는 앞선 문맥의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에 선호되는 반면, 발화 현장의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에는 기피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중세한국어 지시사 '이, 그, 뎌'는 현대어와 마찬가지로 화시적(직시적) 자질을 부호화한 단순 형식으로 보이나, 논문은 지시대명사로 쓰일 때 지시 대상에 차이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따라 <석보상절>을 분석한 결과, 중세한국어에서 '이'는 '근칭', '뎌'는 '원칭'의 직시 의미를 지니지만, '그'는 발화 현장의 대상이 아닌 앞선 문맥에 언급된 대상만을 지시하므로 직시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문 지시사를 통해 살펴보면, '이'가 한문 지시사 '之(지), 此(차), 是(시), 斯(사)'에, '뎌'가 '彼(피)'에 대응하는데, '그'는 한문 지시사 '其(기, the)'와 주로 대응하며, 문맥지시 용법인 근칭 '是(시), 此(차)'와 원칭 '彼(피)'와도 대응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조응적 용법에 선호됨을 시사합니다.
'그'가 직시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추정은 이야기 속 화자의 발화나 서술자의 관점이 개입된 지시부사 '그리'의 사례들을 검토해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논문은 밝힙니다. 결과적으로 <석보상절>에서 '이, 그, 뎌'의 지시적 특성을 정리하면, '이'와 '뎌'는 직시적 의미를 포함하는 반면, '그'는 앞서 언급된 대상을 가리키는 문맥지시적 성격만을 띠고 있습니다.
4. ‘그’의 화용적 특성
<석보상절>에서 '그'는 고유한 직시 의미 없이 앞선 문맥에 언급된 언어 표현을 가리키는 조응(anaphora) 기능을 수행하는 문맥지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석보상절>에서 '그'는 더 세부적으로 명사구 조응, 연상 조응, 텍스트적 조응의 세 가지 용법으로 나타납니다.
| 명사구 조응 | 앞서 언급된 대상과 동일한 명사구를 다시 가리키는 조응 용법 |
| 연상 조응 (associative anaphora) |
앞 문맥에 명시되지 않았으나 언급된 대상과 관련하여 해석되는 새로운 대상을 지시하는 조응 용법 |
| 텍스트적 조응 (textual anaphora) |
앞선 절 단위 이상의 내용을 지시하는 조응 용법 |
이렇게 <석보상절>에서 문맥지시사 '그'는 앞서 등장한 선행어를 바탕으로 해석되는 조응 기능을 합니다.
문맥지시사 '이' 역시 '그'의 세 가지 조응 용법을 모두 공유하지만, 연상 조응 용법에서 '그'보다 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빈도를 보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뎌'는 주로 현장지시로 쓰이며 문맥지시로 쓰이는 경우, 3인칭 대명사로 전용된 예도 포함하여, 대부분 명사구 조응 용법으로 나타나는데, 결론적으로 <석보상절>에서 '이, 뎌'가 현장지시와 문맥지시를 모두 수행한 것과 달리 '그'는 오직 문맥지시로만 특화되어 사용되었습니다.
5. 결론
<석보상절> 분석 결과, 중세한국어 '그'는 '이, 뎌'와 달리 직시적 의미 없이 앞선 문맥을 지시하는 문맥지시사로만 사용되었으며, 이는 '그'가 유형론적으로 조응 지시사(anaphoric demonstrative)에 특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문맥지시사로서 '그'는 명사구, 연상, 텍스트적 조응 용법을 모두 수행하는데, 특히 연상 조응에서 '이'보다 높은 빈도를 보이는 등 차별적인 화용적 특성을 지닙니다. 논문은 본 연구는 <석보상절>에 한정된 분석이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향후 다양한 자료와 지시부사 등에 대한 추가 연구를 통해 현대한국어 '그'의 기원과 발달 과정을 규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글을 끝마칩니다.
6. 제언
이 논문은 현대 국어에서 확립된 '이, 그, 저'의 지시 체계가 15세기 문헌인 <석보상절>에서도 이미 뚜렷한 흔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특히 '이'와 '뎌'는 화시(직시)적 기능을, '그'는 문맥지시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고유한 지시 체계가 수 세기를 거쳐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한 것은 언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멋진 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 과거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현대 국어 지시사의 기원을 탐구한 점은 연구 자료의 가치를 극대화한 훌륭한 시도로 평가됩니다.
한편, 외국어 용어인 'deixis'를 '직시'와 '화시' 중 무엇으로 번역하고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학술적 용어의 정립과 수용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연구자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용어를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언어를 분석하는 태도 또한 언어 연구의 본질을 꿰뚫는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직시'라는 단어가 익숙하여, 이 논문에서 '화시'라고 표현한 부분은 처음을 제외하고 다 '직시'로 바꿔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