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서기> 조메이 천황 기록 원문 번역과 해설 (황위계승부터 백제대궁과 백제대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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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서기> 조메이 천황 기록 원문 번역과 해설 (황위계승부터 백제대궁과 백제대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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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다빈치!지식지도, <일본서기>권23, 조메이 덴노(629-641년)
2. 古代日本まとめ, 日本書紀・日本語訳「第二十三巻 舒明天皇」
3. 동북아역사넷, 일본서기, 권제23, 서명천황

조메이 천황 (출처 : <황국기원2600년사>)

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노스메라미코토(息長足日廣額天皇) 죠메이 텐노(舒明天皇)

 

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노스메라미코토(息長足日廣額天皇, 593?-641)는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스메라미코토(渟中倉太珠敷天皇, 538?-585?)의 손자이며, 히코히토노오오에노미코(彥人大兄皇子, ?-?)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누카데히메노히메미코(糠手姬皇女)라고 부른다. 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노스메라미코토(豐御食炊屋姬天皇, 554-628) 29년(621년), 황태자(皇太子) 토요토미미노미코토(豐聰耳尊, 574-622)가 흉거하였고, (다음) 황태자를 세우지 못하고, (스이코 덴노) 36년(628년) 3월 천황이 붕어하셨다.

 

9월, 장례가 마쳐지고, 사위(嗣位,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때, 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臣)가 오오오미(大臣)가 되었고, 홀로 사위(嗣位)를 정하고 싶어 했으나, 코오리오미(群臣, 군신)가 따르지 않을 것을 돌아보며 두려워하였고, 이에 아베노마로노오미(阿倍麻呂臣)와 함께 논의하고 군신을 모아 오오오미의 집[大臣家]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식사가 끝나고 장(將)이 흩어질 때, 오오오미(大臣)는 아베노오미(阿倍臣)에게 명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지금 스메라미코토(천황, 天皇)가 이미 붕어하시고, 이을 (자가) 없습니다. 만약 급히 결정하지 않는다면,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지 아니한가. 지금 어느 왕을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가. (스이코) 미코토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던 날에 타무라노미코(田村皇子)께 조서(詔)를 내려 말씀하시길, '천하의 큰 임무는 본래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너 타무라노미코(詔田村皇子)여, 삼가 이를 잘 살피고 늦추어서는(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야마시로노오오에노오우(山背大兄王, ?-643)에게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길, '너는 홀로 떠들며 소란을 피우지 말라.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따르고, 삼가 어기지 말라.'' 이것이 스메라미코토의 유언이다. 이제 누가 스메라미코토가 되어야 하겠는가."

 

그때 군신은 침묵하고, 답이 없었는데, 또 (그들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강하게 다시 물었다. 이에 오오토모노쿠지라노무라지(大伴鯨連進)가 말했다.

"이미 스메라미코토의 유언을 듣는다(=따른다). 다시 군언(群言)을 기다릴 수 없다."

아베노오미(阿倍臣) 곧 물었다.

"무슨 뜻인가, 그 뜻을 밝히라."

(그가) 대답하였다.

"스메라미코토께서 무슨 생각으로 타무라미코에게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큰 임무는 늦추어서는(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셨는가. 이에 따라 황위가 이미 정해졌다는 말이니, 구다 다른 말을 하겠는가."

그때 우네메노오미마레시(采女臣摩禮志), 타카무코노오미우마(高向臣宇摩), 나카토미노무라지미케(中臣連彌氣), 나니와노키시무사시(難波吉士身刺)의 네 명의 신하는 말했다.

"오오토모노무라지(大伴連)의 말을 따르겠으며, 다시 다른 말은 없다."

코세노오미오오마로(許勢臣大麻呂), 사에키노무라지아즈마히토(佐伯連東人), 키노오미시오테(紀臣鹽手)의 세 사람은 나아가 말했다.

"야마시로노오오에노오우께서 마땅히 스메라미코토가 되어야 한다."
오직, (후에) 오마사노오미(雄當臣)로 개명한 소가노쿠라마로노오미(蘇我倉麻呂臣)만 홀로 말했다.

"신(臣)은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없다. 다시 생각한 뒤에 답하겠다."

이에 오오오미는 군신이 화하지 않음과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에 앞서, (에미시노) 오오오미(大臣)는 홀로 사카이베노마리세노오미(境部摩理勢臣)에게 물어 말했다.
"지금 스메라미코토께서 붕어하여 이음이 없으니, 누가 스메라미코토가 되어야겠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를 추대해야 한다."

이때,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에 머물면서 이 논의를 몰래 엿들었고, 곧 미쿠니노오오키미(三國王), 사쿠라이노오미와지코(櫻井臣和慈古) 2명을 보내어, 은밀히 오오오미에게 일렀다.
"전해 듣자 하니, 숙부(叔父)께서는 타무라노미코를 스메라미코토로 하고자 한다고 하신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서서도 생각하고 앉아서도 생각했으나 그 이치를 얻지 못했다. 원컨대 숙부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자 한다."

 

이에, (에미시노) 오오오미(大臣)는 야먀시로오오에의 전갈을 받고 홀로 대답할 수 없었고, 이에 아베노오미(阿倍臣), 나카토미노무라지(中臣連), 키노오미(紀臣), 카와베노오미(河邊臣), 타카무코노오미(高向臣), 우네메노오미(采女臣), 오오토모노무라지(大伴連), 코세노오미(許勢臣) 등을 불러, 야마시로노오오에의 말을 조목조목 말했다. 이윽고 곧 다시 마에츠키미(大夫, 대부) 등에게 이르며 말했다.

"그대 대부들은 함께 이카루가노미야로 가서, 마땅히 야마시로노오오에노오우(山背大兄王)께 아뢰기를, "천신(賤臣)이 어찌 감히  홀로 사위(嗣位)를 정할 수 있겠는가, 오직 스메라미코토의 유조(遺詔, 유언)를 군신에게 고했을 뿐이다. 군신은 나란히 말하기를, 유언대로 타무라노미코가 사위(嗣位)함이 마땅하며, 다시 어찌 다른 말이 있겠는가."

이는 군경(群卿)의 말일뿐, 특별히 신(臣)의 마음이 아니다. 다만 비록 신의 사사로운 뜻이 있을지라도, 두려워 전하여 아뢸 수 없으니, 이내 얼굴로 (직접 뵙고) 친히 말씀드리겠다."

 

이에, 대부(大夫) 등이 함께  오오오미의 말을 받들어, 함께 이카루노미야로 다다랐다. 미쿠니노오오키미(三國王), 사쿠라이노오미(櫻井臣)를 부려 오오오미의 말로써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아뢰었다. 그때 오오에노오우(大兄王)가 군대부(群大夫) 등을 부려 전하여 물었다.
"스메라미코토의 유조가 어떠하였는가."

답하여 말했다.

"신등(臣等)은 그 깊음을 알지 못하며, 오직 오오오미가 말해준 상황만을 얻었을 뿐인데, 일컫기를, 스메라미코토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던 날에 타무라노미코(田村皇子)께 조칙으로 말씀하시길, '국정은 가볍고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이로써, 너 타무라노미코(詔田村皇子)여, 삼가 그것(국정)으로써 말함으로써 늦추어서는(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오오에노오우에게 조칙으로 말씀하시길, '너는 간이 어리니, 시끄러운 말을 말며, 반드시 마땅히 군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 하셨다. 이는 곧 가까운 때의 모든 여왕(女王)과 우네메(采女, 채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대왕(大王)께서도 살펴보시는 바이다"

 

이에 오오에노오우는 다시 묻게 하여 말하였다.
"이 유조(遺詔)는 오로지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
답하였다.
"신들은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이윽고 다시 또한 여러 대부들에게 고하게 하여 말했다.

"친애하는 숙부께서 애쓰며 생각하사, 일개 사신이 아니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니 이는 대은(大恩)이다. 그러나, 지금 군경(群卿)이 말하는 바가 스메라미코토의 유언이라는 것은 내가 들은 바와 조금 다르다. 나는 스메라미코토께서 병으로 누우셨다는 것을 듣고 급히 달려 올라가 문하(門下)에서 모셨다. 이때, 나카토미노무라지미케(中臣連彌氣)가 금성(禁省)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스메라미코토께서 명하시어 (그대를) 부르신다. 곧, 합문(閤門)으로 참진(參進, 나아가 뵘)했다. 또, 쿠루쿠마노우네메쿠로메(栗隈采女黑女)가 (나를) 마당 가운데에서 맞이하여 대전(大殿)으로 이끌어 들였다. 이에, 근습자(近習者, 가까이서 모시는 자) 쿠루모토노히메미코(栗下女王)를 우두머리로 하여, 메노와라와(女孺), 시비메(鮪女) 등 8인과 아울러 수십 명이 스메라미코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또, 타무라노미코(田村皇子)도 거기에 있었다. 그때, 스메라미코토는 병이 깊어져 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에 쿠루모토노히메미코가 아뢰어 말하길, '부르신 바의 야마시로노오오에노오우가 와서 다다랐습니다', 곧 스메라미코토가 일어나 그를 마주하여 말하길, "짐은 덕이 적고 엷음에도 오래도록 대업을 수고로이 맡아왔다. 이제 운수가 장차 끝나려 하니, 병으로써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고로, 나는 본래 나의 심복(心腹)이었으며, 애총(愛寵)하는 정(情)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국가의 큰 기초는 짐세(朕世)에 (한정된 것은) 아니니, 스스로 본래부터 힘써야 한다. 너는 비록 간이 어리나, 말을 삼가라." 하셨다. 이에 당시 모시던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대은을 입고 한편으로는 이로써 두렵고, 한편으로는 이로써 슬펐으며, 날뛰며 기뻐하고,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이에 여기건대,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는 중대한 일이니, 나는 눈이 어둡고 젊으며 이로써 현명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당해내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숙부와 군경(群卿)들에게 말하고자 생각하고 바랐으나, 말할 수 있는 때가 있지 않았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예전에 숙부의 병을 문안하고자, 경(京)으로 향하다가 토유라데라(豐浦寺)에 머물렀다. 이날, 스메라미코토는 야쿠치노우네메시비메(八口采女鮪女)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길, '그대 숙부대신(叔父大臣)이 항상 그대 위해 걱정하며 말하기를, 100년이 지난 뒤, 사위(嗣位)는 마땅히 그대에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행동을 삼가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며 아끼라." 이미 명백히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 의심하겠는가. 그러하나, 내가 어찌 천하(天下)를 탐하겠는가, 오직 들은 사실을 밝힐 뿐이다. 곧 천신지기(天神地祇, 천지신명)가 함께 이를 증명할 것이다. 이에 바로 스메라미코토의 유칙(遺勅)을 알고자 간절히 바란다. 또한 오오오미(大臣)가 보낸 바의 여러 군경(群卿)들은 예로부터 이카시호코(厳矛, 엄한 창)[엄모(厳矛), 이를 이가지배허(伊箇之倍虛, 이카시호코)라고 이른다]이며, 거짓을 배제하고 가운데를 취하여 사람들의 청을 아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숙부에게 잘 아뢰어 달라.]

 

이에 (야마시로노오오에의 이복동생) 하츠세노나카미코(泊瀬仲王)는 별도로 나카토미노무라지(中臣連), 카와베노오미(河邊臣)를 불러 일러 말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모두 소가(蘇我)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바이다. 이에, (우리는) 그들을 높은 산처럼 의지한다. 바라건대 사위(嗣位)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에 (야마시로노오오에는) 미쿠니노오오키미(三國王), 사쿠라이노오미(櫻井臣), 다음의(=아래의) 군경(群卿)과 함께 보내며 말했다.

"대답을 듣고 오길 바란다"

그때, 오오오미(大臣)는 키노오미(紀臣), 오오토모노무라지(大伴連)를 보내어 미쿠니노오오키미, 사쿠라이노오미에게 이르며 말했다.

"어제 말을 이른 것 (그대로)이며, 다시 다른 것은 없다. 그러하여, 신(臣)은 감히 어느 왕을 가볍게 여기고 어느 왕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에, 며칠 뒤에, 야마시로노오오에는 또한 사쿠라이노오미를 보내 오오오미에게 고하여 말했다.

"전일의 일은 들은 바를 진술한 것이다. 어찌 숙부를 거스르겠는가."

이날, 오오오미는 병이 발하여, 사쿠라이노오미에게 대면하여 말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오오오미는 사쿠라이노오미를 불러, 곧 아베노오미, 나카토미노무라지, 카와베노오미, 오하리다노오미(小墾田臣), 오오토모노무라지를 보내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아뢰어 말했다.

"시키시마노미야(磯城嶋宮)에서 (긴메이) 스메라미코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경(群卿) 모두 현철하였다. 오직 지금, 신(臣)은 어질지 못하며, 마침 사람이 부족한 때를 맞닥뜨려 잘못하여 여러 신하의 위에 자리할 뿐이다. 이에, (국가의) 기초(=근본)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함으로, 전하여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老臣]는 비록 힘들지라도, 직접 뵙고 아뢰겠다. 것은 오직 (선왕의) 유칙(=유언)을 그르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며, 신(臣)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이윽고 오오오미(大臣)는 아베노오미(阿倍臣), 나카토미노무라지(中臣連)를 통하여 다시 사카이베노오미(境部臣)에게 물었다.

"어떤 왕이 미코도가 되는가?"

(사카이베노오미는) 대답하였다.

"전에 오오오미(大臣)가 친히 물으셨던 날에, 저는 이미 아뢸 것을 다 말했다. 지금 어찌 다시 또 사람을 전하여 말씀드리겠는가."
이에 크게 분노하여 일어나 가 버렸다.

마침 이때, 소가씨(蘇我氏)의 제족(諸族, 모든 일족)들이 모두 모여, 시마노오오오미(嶋大臣, 소가노우마코, 551?-626)를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자 묘소에 줄지어 있었다. 이에, 마리세노오미(摩理勢臣)는 묘소의 초막(墓所之廬)을 허물고, 소가(蘇我)의 타도코로(田家, 전가, 사유지)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오오오미(大臣)는 성내며, 무라노키미카츠시(身狹君勝牛), 니시코리노오비토오카이(錦織首赤猪)를 보내고 가르쳐(=타일러) 말했다.

"나는 네 말이 그름을 아나, 간지(干支,=친족)의 의로 인해 (너를) 해칠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그르고 네가 옳다면, 나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거스르고 너를 따를 것이며, 만일 다른 사람이 옳고, 네가 그르다면, 나는 마땅히 너를 끊고 다른 사람을 따를 것이다. 이에, 네가 끝내 따르지 않으면, 나와 너 (사이에는) 흠(=틈)이 생길 것이다. 곧 나라 또한 어지러워질 것이며, 그러하면 곧 후세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이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후대에 남을 악명(惡名)이니, 너는 삼가 반역의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그러나, 여전히 따르지 않고 마침내 이카루가(斑鳩)로 다다라서 하츠세노미코노미야(泊瀬王宮)에서 머물렀다.

 

이에, 오오오미는 더욱 화냈고, 곧 군경(群卿)을 보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청하여 말했다.

"요즘, 마리세(摩理勢)가 신(臣)을 거슬러, 하츠세노미코노미야에 숨어 있다. 바라건대 마리세를 얻고 그 이유를 심문하고자 한다."

이에 오오에노오우가 답하여 말했다.
"마리세는 본디 성황(聖皇)께서 좋아하던 바, 다만 잠시 와있을 뿐이다. 어찌 숙부의 뜻을 거스를 마음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허물하지 말라."

이에 마리세에게 이르며 말하였다.

"그대,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은 매우 사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그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천하가 마땅히 어지러워질 것이다. 또한 선왕께서 임종에 임하여 모든 아들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나는 이 말을 이으며(=받들며) 영계(永戒, 영원한 훈계)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사사로운 정이 있으나 참고 원망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숙부를 거스를 수 없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 꺼리지 말고 뜻을 고쳐, 무리(군경)를 따르고 물러나지 말라."

 

이때, 대부(大夫)들이 또한 마리세노오미를 타이르며 말하길, '오오에노오우의 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에, 마리세노오미는 나아가도 돌아갈 바가 없어, 이에 울며 다시 돌아가 집에 거처한 지 십여 일(이 되었는데), 하츠세노미코(泊瀬王)가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이에 마리세노오미가 말하길 '내가 살아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오오오미는 사카이베노오미(境部臣) (마리세)를 죽이려 하여 군사를 일으켜 (그를 향해) 보냈다. 사카이베노오미는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둘째 아들 아야(阿椰)를 거느리고, 문 밖으로 나가 호상(胡床)에 앉아 기다렸다. 이때 군대가 도착하니, 곧 쿠메노모노노베노이쿠히(來目物部伊區比)에게 명하여 (그를) 교살하게 하였으니, 부자(父子)가 함께 죽었으며, 곧 같은 곳에 묻혔다. 오직, 맏아들 케츠(毛津)는 비사(尼寺, 비구니 절)의 와사(瓦舍, 기와집)에 숨어 있었는데, 곧 비구니 한둘을 범했다. 이에, 한 비구니가 질투하여 그 일을 드러나게 했다. 절을 포위하여 잡으려 하니, 곧 그곳에서 나와 우네비야마(畝傍山)로 들어갔다. 이에 산을 뒤지니, 케츠(毛津)는 달아났으나 들어갈 곳이 없었고, (스스로) 목을 찔러 (그는) 산중에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며 말하기를

 

무방산은 들어선 나무가 적어도 거기에 의지하려고, 모진이라는 젊은 분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우네비야마(于泥備椰摩)는

나무들이 서 있고 비록 성기건만(虛多智于須家苔)

(그곳을) 의지하려고(多能彌介茂)

모진이라는 젊은이(氣菟能和區吳能)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인가(虛茂羅勢利祁牟)

 

원년(元年, 629년) 봄 정월 계묘 초하루 병오, 오오오미(大臣)와 군경(群卿)은 함께 스메라미코토(천황, 天皇)의 새인(璽印)을 타무라노미코(田村皇子)에게 바쳤다. 이에 (그는) 사양하며 말했다.

"「종묘(宗廟)는 중대한 일이도다. 과인(寡人)은 어질지 못한데, 어찌 감히 (이를) 맡겠는가"

군신(群臣)은 엎드려 거듭 청하며 말했다.
"오오키미(大王)여, 선조(先朝, 선제의 조정)은 (당신을) 종애(鍾愛, 총애)하였고, 유현(幽顯, 저승과 이승)은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땅히 황위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시며, 빛나게 임하여 억조(億兆)(의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그날, 곧 스메라미코토(天皇)가 올랐다.

여름 4월 신미 초하루, 遣

타나베노무라지(田部連) 궐명(闕名, 이름이 빠짐)을 야쿠(掖玖, 야쿠시마)로 보냈다.

그 해는 태세(太歲)가 츠치노토우시(己丑, 기축)이었다.

 

2년(630년) 봄 정월 정묘 초하루 무인, 타카라노히메미코(寶皇女, 고교쿠 천황/사이메이 천황, 594-661)를 황후(皇后)로 세웠다. 후(后)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를 카즈라키노미코(葛城皇子)][오우미오오츠노미야(近江大津宮)에서 천하를  다스린[御宇] 스메라미코토(天皇)(덴지 덴노(天智天皇, 626-672))], 둘째는 하시히토노히메미코(間人皇女, ?-665, 고토쿠 덴노의 황후), 셋째는 오오아마노미코(大海皇子, 덴무 덴노(?-686))[키요미하라노미야(淨御原宮)에서 천하를 다스린 스메라미코토(天皇)]이다. 부인(夫人) 소가노시마노오오오미(蘇我嶋大臣)의 딸 호테노이라츠메(法提郎媛)는 후루히토노미코(古人皇子)를 낳았는데, (그는) 이름을 오오에노미코(大兄皇子)로 바꾸었다. 또 키비노쿠니(吉備国)의 카야노우네메(蚊屋采女)를 아내로 맞았는데, 카야노미코(蚊屋皇子)를 낳았다.

3월 병인 초하루, 고려(高麗, 코마) 대사(大使) 연자발(宴子拔, 안시바이), 소사(小使) 야덕(若德, 냐토쿠), 백제(百濟, 쿠다라) 대사(大使) 은솔(恩率, 온소), 소자(素子, 츠스시), 소사(小使) 덕솔(德率) 무덕(武德, 무토쿠)가 함께 조공했다.

가을 8월 계사 초하루 정유, 다이닌(大仁, 대인) 이누카미노키미타스키(犬上君三田耜), 다이닌(大仁) 쿠스리노에니치(藥師惠日)을 (사신)으로써 오오모로코시(大唐, 대당)에 보냈다.

경자(庚子), 고려(高麗), 백제(百濟)의 손님에게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9월 계해 초하루 병인, 고려(高麗), 백제(百濟)의 손님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달에, 타베노무라지(田部連) 등이 야쿠(掖玖)로부터 도착했다.

겨울 10월 임진 초하루 계묘, 스메라미코토(天皇)가 아스카노오카(飛鳥岡) 곁으로 옮겼고, 이를 오카모토노미야(岡本宮)라고 이른다. 이 해에, 나니와노타이군(難波大郡, 나니와 대군)과 미츠노카라히토노칸(三韓館, 삼한관)을 수리해서 고쳤다.

 

3년(631년) 봄 2월 신묘 초하루 경자, 야쿠인(掖玖人)이 귀화했다.
3월 경신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의자(義慈, 기지)가 왕자(王子) 풍장(豐章, 호우쇼우)를 인질로 들였다.

가을 9월 정사 초하루 을해, 츠노쿠니(津國, 셋츠노쿠니)의 아리마온탕(有間温湯)에 행차했다.

겨울 12월 병술 초하루 무술, 스메라미코토(天皇)가 온탕으로부터 돌아왔다.

 

4년(632년) 가을 8월, 오오모로코시(大唐)가 고표인(高表仁, 코우효우진)을 보내 미타스키(三田耜)를 보냈는데, 쓰시마(對馬)에서 함께 묶었다. 이때, 학문승(學問僧) 영운(靈雲, 료우운), 승민(僧旻, 소우민) 및 스구리노토리카이(勝鳥養), 신라(新羅) 송사(送使) 등이 따라왔다.

겨울 10월 신해 초하루 갑인, 모로코시(唐國, 당국)의 사인(使人) 고표인(高表仁) 등은 나니와즈(難波津)에 묶었고, 이에 오오토모노무라지우마카이(大伴連馬養)를 보내 에구치(江口)에서 맞이했으며, 배 32척과 고취(鼓吹, 북과 피리), 기치(旗幟, 깃발) 모두 갖추어 가지런히 단장했고, 고표인(高表仁) 등에게 곧 고하며 말했다.

"천자(天子)의 명의 사신(使)이 스메라미코토 조정(天皇朝)에 도착하였다고 들었기에, 이를 맞이한다."

이에, 고표인은 대답하며 말했다.

"「바람이 불고 추운 날에, 배들을 꾸미고 정돈하여서 맞이해주어 기쁘고도 부끄럽다."

그떄, 나니와노키시오츠키(難波吉士小槻), 오오시코우치노아타이야후시(大河內直矢伏)를 도자(導者, 안내자)로 명하여, 관전(館前, 관의 앞)에 다다랐다. 이에 遣이키노후비토오토(伊岐史乙等), 나니와노키시야츠시(難波吉士八牛)를 보내, 손님들을 이끌어 관(館)으로 들였다. 그날, 미와(神酒, 신주)를 주었다.

 

5년(633년)  봄 정월 기묘 초하루 갑진, 오오모로코시(大唐, 대당)의 손님 고표인 등이 귀국했다. 송사(送使) 키시노오마로(吉士雄摩呂), 쿠로마로(黑摩呂) 등은 等到쓰시마(對馬)에 다다르고 돌아왔다.

 

6년(634년) 가을 8월秋, 장성(長星)이 남쪽에 보였고, 당시 사람들은 혜성(篲星)이라 말했다.

 

7년(635년) 봄 3월, 혜성(篲星)이 돌아서 동쪽에서 보였다.

여름 6월 을축 초하루 갑술, 백제(百濟)가 遣달솔(達率) 유(柔, 누) 등을 보내 조공했다.

가을 7월 을미 초하루 신축, 饗백제(百濟)의 손님을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 달에, 상연(瑞蓮, 상서로운 연꽃)이 츠루기노이케(劒池)에서 났고, 한 줄기에 두 개의 꽃이 피었다.

 

8년(636년) 봄 정월 임진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3월, 우네메(采女, 채녀)를 범한 모든 자를 꾸짖었고 처벌했다. 이때, 미와노키미오사자키(三輪君小鷦鷯)가 그 추국(推鞫, 신문)이 괴로워,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여름 5월, 임우(霖雨, 장맛비)와 대수(大水, 홍수)가 있었다.

6월, 오카모토노미야(岡本宮)가 불탔고, 스메라미코토(天皇)는 타나카노미야(田中宮)로 옮겨 살았다.

가을 7월 기축 초하루, 오오마타노오오키미(大派王)가 토유라노오오오미(豐浦大臣)에게 이르며 말했다.

"군경(群卿)과 백료(百寮, 백관)의 조참(朝參)이 이미 게으르다. 지금 이후에는, 묘시(卯始, 묘시의 시작)에 조회를 보고, 사후(巳後, 사시 이후)에 물러나며,이에 따라 종(鍾)으로써 기준을 삼는다." 그러나, 오오오미는 따르지 않았다.

이 해에 크게 가물어서, 천하가 굶주렸다.

 

9년(637년) 봄 2월 병진 초하루 무인(戊寅), 대성(大星)이 동쪽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고, 곧 우레와 같은 소리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유성(流星)의 소리라고 말했고, 혹은 츠치노이카즈치(地雷)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소우민소우(僧旻, 승민승)이 말했다. "유성(流星)이 아니다. 천구(天狗)이다. 그 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다."

3월, 을유 초하루 병술, 일식이 있었다.

이 해에, 에미시(蝦夷)가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곧 다이닌(大仁, 대인) 카미츠케노노키미카타나(上毛野君形名)를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에미시에 의해 패배를 당하였고 보루로 도망쳐 들어가니, 마침내 적에게 포위되었다. 군중(軍衆)은 모두 빠져나가 성이 비었고, 장군(將軍)은 갈 곳을 알지 못하여 헤매었으며, 때는 해가 저물었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하였다. 이에, 카타나노키미(方名君)의 아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슬프도다, 에미시(蝦夷)로 인해 장차 죽게 되다니." 곧 남편에게 이르며 말하길, "당신의 선조들은 창해(蒼海, 푸른 바다)를 건너 만 리를 넘어 물 건너편을 평정하여 다스리고, 위무(威武)로써 후세에 전하였다. 지금 당신이 선조의 이름을 갑자기 굽히니, 반드시 후세에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이에 술을 따라, 억지로 남편에게 마시게 하였고, 직접 남편의 칼을 차고는, 10개의 활을 당기며, 여인(女人) 수십을 활시위를 울리게 시켰다. 이윽고 남편이 다시 일어나서, 장(仗, 무기)를 잡고 나아갔다. 에미시는군중(軍衆)이 오히려 많다고 여겼고, 점차 물러갔다. 이윽고, 흩어진 졸(卒)들이 다시 모였고, 또 여(旅, 무리)를 정돈하였다. 에미시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모두 포로로 잡았다.

 

10년(638년) 가을 7월 정미 초하루 을축, 큰 바람이 나무를 끊고 집을 부수었다.

9월, 임우(霖雨, 장맛비)가 있고, 복숭아와 오얏의 꽃(桃李花)이 피었다.

겨울 10월, 아리마노유노미야(有間温湯宮)에 행차했다.

이 해에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那)가 함께 조공했다.


11년(639년) 봄 정월 을사 초하루 임자, 거가(車駕, 임금의 행차)가 온탕(温湯)으로부터 돌아왔다.

을묘, 니시나메(新嘗)가 있었는데, 아마도 아리마(有間)에 행차하였기에 니시나메(新嘗)를 행하지 않은 것인가 한다.

병진, 구름이 없는데 우레가 있었다.

병인, 큰 바람과 비가 있었다.

기사, 장성(長星)이 서북쪽에서 보였고, 그때 민사(旻師, 민시)가 말하길, '혜성이고, (이것이) 보이면 곧 기근이 든다.'

가을 7월, 조서에 이르기를, '올해, 대궁(大宮)과 대사(大寺)를 짓는다. 이에 백제천(百濟川) 가를 궁의 자리로 삼는다.' 이에 따라, 서민(西民, 서쪽 백성)은 궁(宮)을 짓고, 동민(東民, 동쪽 백성)은 절(寺)을 지었으며, 곧 후미노아타이아가타(書直縣)를 오오타쿠미(大匠, 대장)으로 삼았다.

가을 9월, 오오모로코시(大唐, 대당) 학문승(學問僧) 혜은(惠隱, 에온), 혜운(惠雲, 에운)이 신라(新羅) 송사(送使)를 따라 경(京)으로 들어왔다.

겨울 11월 경자 초하루, 신라(新羅) 손님에게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관위(冠位) 1급(一級)을 주었다.

12월 을사 초하루 임오, 아요노유노미야(伊豫温湯宮)에 행차했다. 이 달에, 於백제천(百濟川) 옆에9중탑(9층탑, 九重塔)을 세웠다.

12년(640년) 봄 2월 무진 초하루 갑술, 별이 달로 들어갔다.

여름 4월 정묘 초하루 임오, 미코토는 이요(伊豫)로부터 이르러, 곧 우마야사카노미야(廐坂宮)로 거처하였다.

5월 정유 초하루 신축, 크게 재(齋)를 베풀고, 이로 인하여 혜은승(惠隱僧, 에온소)을 청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을축 초하루 을해, 오오모로코시(大唐, 대당) 학문승(學問僧) 청안(淸安, 센안)과 학생(學生) 타카무코노아야히코겐리(高向漢人玄理)가 시라기(新羅, 신라)를 거쳐서 이르러 (일본에) 다다랐고, 이에 쿠다라(百濟, 백제), 시라기(新羅, 신라)의 조공의 사신이 함께 (그들을) 따라서 왔으므로, 곧 각각 작(爵) 1급(一級)을 하사했다. 이 달에, 쿠다라노미야(百濟宮, 백제궁)으로 옮겼다.

13년(641년) 겨울 10월 기축 초하루 정유, 미코토는 쿠다라노미야(百濟宮, 백제궁)에서 붕어하셨다.
병오, 궁의 북쪽[宮北]에 초빈했는데, 이를 백제대빈(百濟大殯)이라고 이른다. 이때, 동궁(東宮)의 히라카스와케노미코토(開別皇子)가 16세로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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