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3 - 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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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3 - 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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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사서를 참고함

정시 연간(240~249), 조위 사람 아굴마가(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녕과 정을 통하고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임신을 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고(구)려인 아도이다. (아도본비)

미추왕 즉위 2년 (계미, 263), (아)도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이르러 왕성 서리에 머물렀으니, 고려의 엄장사 자리이다. (아도본비)

(미추왕 즉위) 3년 (264), 당시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이나 의원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왕이) 사방에서 의원을 찾았다. 법사가 급히 대궐로 나아가자 병이 드디어 치료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원하는 것을 물어보자, 법사는 이렇게 답했다. "빈도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에 복을 달라고 기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라고 명을 내렸다. 풍속이 소박하고 검소했기 때문에 풀을 엮어 집을 지었다. 법사는 여기에 머물며 강연을 했는데, 때때로 하늘의 꽃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 절을 흥륜사라고 한다. (아도본비)

소수림왕 재위 2년(동진 함안 2년, 효무제 원년, 임신, 372), (당시 관중에 도읍했던)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보내 불상과 불경을 보냈다. (고려본기)

소수림왕 재위 4년(갑술, 374), 아도가 진(나라)에서 (고구려로) 왔다. (고려본기)

을해(375), 2월, (고구려 소수림왕은) 초문사를 창건하고 순도를 있게 했다. 또 이불란사를 창건하고 아도를 있게 했다. (고려본기)

진(나라) 말(기) 대원 연간(태원의 오기로 보임, 376~396), 려제(고구려와 백제) 2국에 불교가 시작되었다. (양 승전/당 승전/삼국본사)

진 효무제 태원 9년(384), 관중사람 담시(=혜시)는 불경과 율서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삼승을 가르쳐주고 그 자리에서 불교의 계율에 귀의하게 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의 도를 듣게 된 시초였다. (원위 담시전/원위 혜시전)

제14침류왕 즉위 원년(동진 효무제 태원 9년, 갑신, 384), 호승 마라난타(뜻은 동학)가 진에서 오자, 그를 맞이하여 궁궐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승전)

제15침류왕 즉위 원년(동진 효무제 태원 9년, 갑신, 384), 호승 마라난타(뜻은 동학)가 진에서 오자, 그를 맞이하여 궁궐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백제본기)

을유(385), (백제 침류왕이) 새 도읍지 한산주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작이다. (백제본기)

아신왕 즉위 원년(태원 17년, 392) 2월, (백제 아신왕이) 교서를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을 구하라고 했다. (백제본기)

의희 초년(405), 담시(=혜시)가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으며, 비록 흙탕물을 건넌다 해도 발이 젖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백족화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위 담시전/원위 혜시전)

태평 말(450), 담시(=혜시)는 탁발도를 불교로 교화시킬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곧 정월 초하룻날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렀다.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들은 탁발도는 담시를 베어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러 번 베어도 담시를 다치게 할 수 없었고, 탁발도 자신이 직접 베었지만 역시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북쪽 동산에서 기르던 호랑이에게 물게 했지만 역시 호랑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탁발도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는데, 결국 역질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2명도 차례로 독한 질병에 걸렸다. 탁발도는 그 잘못이 저 2명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두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나라 안에 명해 불법을 크게 펼치도록 했다. (원위 담시전/원위 혜시전)

천감 13년 갑오(514), (신라) 제23 법흥대왕이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켰다. 미추왕 계미년(263)부터 252년이 되니 고도령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소량 보통 8년 정미(527), 서천축의 달마가 (양나라) 금릉에 왔으며, (고려의) 낭지법사도 처음으로 영취산에 머물며 불법을 열었다.

대통 원년 정미(527), 양 황제가 웅천주에 절을 창건하고 대통사라 했다.

법흥대왕 즉위 14년(527), (신라의) 하급 신하인 이차돈이 불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죽였다 (신라본기)

법흥왕 정미(527), (신라 법흥왕이 흥륜사를) 다시 짓기 시작했다.

법흥왕 14년 정미(527), (신라 법흥왕이) 처음 절의 터를 잡았다. (국사/향전)

중대통 원년(529), (신라에) 대통사를 창건했다.

법흥왕 21년(534) 을묘(535), (신라 법흥왕이) 천경림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베어내어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다 (국사/향전)

법흥왕 을묘(535), (신라 법흥왕이 흥륜사를) 다시 완성했다.

을묘(535), (성이 모이고 이름이 진인 왕이) 처음 절을 짓기 시작했고,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했다. (책부원귀)

진흥왕 즉위 5년(갑자, 544), (신라 진흥왕이) 대흥륜사를 지었다. (촉향분례불결사문)

진흥왕 5년(갑자, 544), 절(=대흥륜사)이 완성되었다. (국사/향전)

개황 19년 기미(599), (이름이 선 혹은 효순인 백제 제29주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했다. 민가에서 기르던 새매를 놓아주도록 했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도구도 불태워서 일체 금지하도록 했다.

경신(600), (백제 법왕은) 승려 30명을 두고 당시 수도였던 사비성에 왕흥사를 창건하려고 했는데 겨우 터를 잡았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흥왕) 7년(546), 절(=대흥륜사)이 완성되었다. (승전)

태청 초년(547), 양(나라) 사신 심호가 (신라에) 사리를 가지고 왔다.

진흥왕 계유(553),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처음 열었다.

천가 6년(565), 진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이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으며,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았다. 뛰어난 고승들이 이 세상의 복전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이 나라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대업 8년 임신(612), (수 양제가)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고려고기)

건복 31년(614), (신라) 영흥사의 소상이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왕의 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 (국사)

(대업) 10년 갑술(제26대 영양왕 즉위 25년, 614) 10월, 고(구)려왕(=영양왕)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작은 활을 품에 숨겨 사신을 따라 (수) 양제가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고려의 국서를 읽고 있는데,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추었다. 양제가 군사를 돌리며 주변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을 정벌하다가 불리하여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그러자 우상 양명이 아뢰었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싴켜서 폐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고려고기)

무덕 8년 을유(625), (고구려가) 사신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구하였더니, 당 황제가 허락했다 (국사)

무덕(618~626) 정관(627~649) 년간(고구려 말, 618~649), (고구려)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신봉했다. (고려본기)

27대 영류왕 즉위 7년(무덕 7년 갑신, 624), 당 고조가 이 소문을 듣고 도사를 시켜 천존상을 보내왔다. 도사가 도덕경을 강론하자 왕과 나라 사람들이 들었다. (고려본기)

(625) (고구려 영류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겠다고 청하자, 당(황)제가 허락했다. (고려본기)

선덕왕 갑오(634), (신라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처음 열었다.

선덕왕 을미(635), (신라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처음 열었다.

보장왕 원년(정관 16년 임인, 642), (고구려 보장왕이) 유, 불,도 삼교를 함께 일으키려고 했는데, 당시 총애 받던 재상 개소문이 왕을 설득하기를, '유학과 불교는 함께 번성하고 있지만 도교는 아직 그렇지 못하니, 특별히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해야합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 보덕화상이 반용사에 있었는데, 좌도인 도교가 정도인 불교에 필적하면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염려해서 여러 차례 왕에게 간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국사)

영휘 원년 경술(652) 6월, (보덕화상이) 신통력으로 암자를 날려 남쪽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기고 거기에 머물렀다. (국사)

건봉 2년 정묘(667) 3월 3일, (보덕화상이) 신통력으로 암자를 날려 남쪽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기고 거기에 머물렀다. (본전)

총장 원년 무진(668),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 신라 김인문 등이 공격하여 깨뜨리니 나라(=고구려)가 망했다. (고구려)왕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가니, (고구려)보장왕의 서자가 4,000여 가를 인솔해 신라에 투항했다. (고려고기)

총장 원년 무진(668), (고구려)가 멸망했으니, 경술년(650년)부터 19년이다.

문무왕 기묘(679), (신라 문무왕이 천왕사를) 처음 열었다.

원화 연간(806~821), (고려) 남간사 스님 일념이 촉향분례불결사문을 지었다.

원화 12년 정유(제41 헌덕대왕 9년, 817) 8월 5일,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염촉의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 (촉향분례불결사문)

대안 8년 신미(1092), (고려) 우세승통 의천이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 가서 보덕상사의 영정에 예를 올리고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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