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4 - 탑상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4 - 탑상

728x90

 

-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사서를 참고함

 

(춘추시대) 획린(-477), (천지)개벽한 후 이 때까지 2,760,000세다. (찬고도)

 

전한 원제 건소 2년(-37), 동명성제가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다.

 

성제 홍가 (2년) 임인(-19), 동명성제가 세상을 떠났다.

 

동한 건무 24년 무신(48), 금관국이 있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고려 금관 호계사에 있다)을 싣고 왔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452), (가야 지역에) 처음 절을 세웠다 (본기)

 

양 천감 연간(502~519), (화룡점정으로 유명한 오나라 사람 왕승요는) 무릉왕국의 시랑 직비각 지화사가 되었고, 우장군과 오흥태수를 지냈다.

 

천감 24년 을미(525), 법흥(왕)이 즉위했다. (고기)

 

양 대동(大同) 6년 경신(540). (신라 제24 진흥왕이) 즉위하였다.

 

진흥왕 태청 3년 기사(549)에 양에서 심호를 보내어 사리 몇 낱을 보내왔다. (국사)

 

진흥왕 계유(553), 절(=황룡사)을 창건했다. (국사/사중고기)

신라 제24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바꾸어 짓고 황룡사라 했다.

진흥왕 즉위 14년(개국 3년, 계유, 553), 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지었는데, 여기서 황룡이 나타났다.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신궁을 고쳐 황룡사로 삼았다. (국사)

기축(569), 담장을 쌓아 (황룡사를 짓기 시작한지 ) 17년 만에 완성했다.

 

천가 6년 을유(진흥왕대, 565)에 진의 사신 유사가 승려 명관과 함께 불교의 경론 1천 7백 여권을 실어왔다.

 

대건 6년 갑오(574) 3월, (신라에서) 장육존상을 주조헀는데 단 1번에 성공했다. 그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2,000근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다.(<사중기>는 계사(573) 10월 17일이라고 기록한다.)

 

(575), (신라 황룡사의) 불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까지 이르렀으니 땅을 한 자나 적셨다. 이것은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대건8년 병신(신라 진지왕대, 576년), (신라에서) 비로소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국사)

 

(신라) 진평왕 6년 갑진(584), (신라 진평왕이) 금당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 9년 정미(587), 갑자기 4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 하나가 하늘에서 (신라 죽령 동쪽 100리쯤에 있는)산의 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붉은 비단으로 쌓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그 돌을 보고 절을 하고는 드디어 그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라 했다.

 

무덕 8년(625), 의상이 탄생했다. (부석본비)

 

정관 10년 병신(선덕왕대, 636), (신라의)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당나라에 들어갔다. 처음에 (자장법사가) 중국 태화지 가의 문수보살의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였더니, 홀연히 꿈에 대성이 4구의 게를 주었다. 꿈을 깨고 보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이므로 해독하지 못하여 망연하였다. 다음날 아침 갑자기 한 스님이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이르러서 묻기를, “어찌하여 그리 근심하시오?”라고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꿈에 사구의 게를 받았는데 그 게가 모두 범어이므로 해석할 수 없는 글들이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번역하여서 일러주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囊)은 일체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㘑哆佉嘢)는 자성이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랑(曩伽呬伽曩)은 법성을 이와 같이 해석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라(達㘑盧舍那) 함은 즉 노사나(盧舍那)를 본다는 말이외다.”라고 하고는 이어 그 스님이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본사 석가세존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고, 1만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장차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기를, “옛날 게를 전수한 노승이 바로 참 문수보살입니다.”고 하였다. 또 절을 창건하고 탑을 세울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산중고전/삼국본사)

( <당승전(唐僧傳)>에는 (정관) 12년(638)이라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신라 제27 선덕왕 즉위 5년(정관 10년, 병신, 636), (신라의)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았다. 문수보살이 또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바로 천축(=인도)의 찰리종(=크샤트리아)왕으로 이미 불기를 받았다. 그러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공공의 (종)족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산천이 험하기에 사람들의 성격이 거칠고 사나우며 많이들 미신을 믿어서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문비구가 나라 안에 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편안하고 백성이 평화로운 것이다" 그리고는 말을 끝내자 곧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보살의 화신임을 알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정관 17년(643), (신라의) 자장법사가 삼장 4백여 함을 싣고 와서 통도사에 안치하였다.

정관 17년(643), (자장법사는) 한 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보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다시 원령사에 가서 살다가 문수보살을 뵈니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고려)의 정암사가 이것이다. (산중고전)

정관 17년 계묘(선덕왕대, 643),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두골과 어금니와 불사리 1백 낱과 부처님이 입던 붉은 색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둔 곳이 상세하지 않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 자장법사는 당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승복과 폐백 등을 가지고 (신라로) 귀국해서 탑을 세울 일을 왕께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는데,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했다.

 

선덕왕 13년 갑진(644), (생의가 남산에서 풀을 묶어 놓은 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생의사(고려 때는 성의사이며, 이 절의 부처에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마다 차를 달여 바치는 사람이 충담사)라고 했다.

 

정관 19년 을사(선덕왕대, 645), (신라 황룡사의 9충)탑을 완성했다. (국사/사중고기)

 

 

태화 원년(647) 무신(648) 8월초, (신라의) 왕이 산중에 숨었다. (고기)

태화 원년(647) 8월 5일, (신라에서) 형제(신라 정신태자 보질도와 아우 효명태자)가 함께 오대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영휘 원년 경술(650),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까지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부석본비)

영휘(650~656) 초년, 의상은 당으로 들어가 지엄법사를 뵈었다 (의상전)

 

용삭 원년 신유(661), 의상은 당으로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부석본비)

 

당 용삭 연간(661~663), 요(遼)에 전쟁이 있었다. 장군 설인귀가 수양제가 토벌한 옛 땅을 지나다가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다. 그런데 그 터는 텅 비어 있어 매우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옛 노인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려 서울(장안)로 가지고 왔으며, 그것 모두 약자함에 있다.

 

총장 원년(668),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났다. (부석본비)

 

함형 2년(671), 의상이 신라로 돌아왔다. (부석본비)

 

신라 진골 제31주 신문왕대(영순 2년 계미, 683),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내산국=고려 동래현)의 온천에 목욕을 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쉬었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쫓게 하니 꿩이 날아서 금악을 넘어가는데 간 곳이 묘연하였다. (충원공이 매의)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가 굴정현 관가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핏빛과 같았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었으며, 매도 또한 측은히 여기는지 감히 잡지 않았다. 공은 이것을 보고 슬퍼하며 감동하는 바가 있어 그 땅을 점쳐 물으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공이)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곳에 절을 세워 영취사라고 하였다. (사중고기)

(<본문>에는 영순 원년(682)의 일이라고 했다.)

 

천수 3년 임진(692). (효조(=효소)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16살이었다.

천수 3년 임진(692) 9월 7일, (신라) 효소왕은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따르는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상과 더욱 친했다.

 

천수 4년 계사(장수 2년 계사, 693) 늦은 봄,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으로 출유하여 북명지경에 이르러 적적들에게 붙잡혀 갔다.

천수 4년 3월 11일, 문객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돌아왔으나 안상만이 홀로 그것을 추적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선왕께서 신적을 얻어서 짐에게 몸소 전하여 지금 현금과 함께 내고에 간직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적의 포로가 되었는가? 이 일을 어찌하여야 좋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때마침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니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내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거문고와 피리를 잃게 되었는가?”라고 하면서 창고를 지키던 관리 김정고 등 다섯 명을 가두었다.

천수 4년 4월, (신라)국내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말하기를, “거문고와 피리를 찾는 자는 1년의 조세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천수 4년 5월 15일, 부례랑의 두 분 부모님이 백율사의 대비상 앞에 나아가서 여러 날 저녁 천제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갑자기 향탁 위에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놓여져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도착해 있었다. 두 부모님은 너무나 기뻐서 돌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으니, 부례랑은 말하길 “저는 붙잡혀 간 뒤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도구)의 집에 목동이 되어서 대오라니(=대마)의 들판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모습과 용모와 뜻이 단정한 한 스님이 있었는데,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향생각을 하느냐?’고 하기에, 저는 자신도 모르게 (스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임금과 부모님을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고 하고는 저를 데리고 해변가에 이르렀는데, 또한 안상도 만났습니다. 이에 피리를 두 쪽으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면서 각기 한쪽씩 타게 하고 자신은 그 거문고를 타고 둥둥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이곳까지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모든 일을 급히 알렸더니, 왕은 크게 놀라며 사람을 보내어 낭을 맞아들이고, 거문고와 피리도 대궐 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은) 무게 50량으로 된 금과 은으로 만든 다섯 개의 그릇 두 벌과 마납가사 다섯 필과, 대초 3천 필, 밭 1만 경을 절에 시주하여 대비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국내에 크게 사면을 내리고 사람들에게는 관작 3급을 올려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절의 주지를 봉성(사)에 옮겨 살게 하였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 신라 재상의 관작명으로 삼고, (그의) 아버지 대현 아찬을 태대각간으로 삼았다.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경정궁주로 삼고 안상법사를 대통으로 삼았으며, 창고 관리 다섯 명은 모두 석방하여 관작을 각기 5급씩 올려주었다.

천수 4년 6월 12일, 혜성이 (신라) 동방에 나타났다,

천수 4년 6월 17일,(신라) 서방에 (혜성이) 나타나므로, 일관이 아뢰기를, “거문고와 피리의 상서에 대하여 관작을 봉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신적을 책호하여 만만파파식(萬萬波波息)이라고 하니 혜성이 이내 물러갔다.

 

(신라) 제32 효성왕 즉위 7년(성력 원년 무술, 698) 6월, (황룡사 9층탑이) 벼락을 맞았다 (국사)

(<사중고기>에서는 성덕왕대(702~737)의 일이라고 했다.)

 

장안 2년 임인(702), (신라 효소왕이) 죽으니 그때 나이 26이었다.

장안 2년 임인(702), (신라) 성덕왕이 즉위하니 22이었다.

 

신룡 원년(성덕왕 즉위 4년, 을사, 705), (신라 성덕왕이)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

신룡 원년(당 중종 복위 원년, 성덕왕 즉위 4년, 을사, 705) 3월 초 4일, (신라 성덕왕이)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니, (성덕)대왕이 친히 백료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의 소상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신라 효명태자)재위 10여년(혹은 20여년, 신룡 원년, 705) 3월 8일 비로소 진여원을 세웠다.

 

경룡 3년 기유(성덕왕 즉위 8년, 709) 4월 8일, (신라에) 날이 저물 무렵에 나이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자태를 한 낭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을 풍기면서 뜻 밖에 북암(= 남암)에 와서 묵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쳤다. 박박이 말하기를, “난야는 청정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삼으니, 그대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오. 이곳에 지체하지 마시오”(=“나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으니 (나를) 시험하지 말라”)라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가 낭암(=북암)으로 돌아가서 다시 앞서와 같이 청하자, 부득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로부터 이 밤에 왔소?”라고 하니, 낭자가 대답하기를, “담연하기가 태허와 같은데, 어찌 오고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현사께서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것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게 한 수를 주었다. 부득스님이 게를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수순함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인데, 하물며 궁벽한 산골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홀대할 수야 있겠소?”라고 하고,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하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염송에만 전념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가 (부득을) 불러 말하기를, “제가 불행히도 마침 해산기가 있으니 화상께서는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은히 밝히니 낭자는 벌써 해산하고 또 다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노힐의 마음에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불쌍한 생각이 더욱 더해서 또 통을 준비하여 (그) 속에 낭자를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켰다. 조금 있다가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서고 물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이 깜짝 놀라자,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노힐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좇았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그 옆을 보니 문득 하나의 연화대가 생겼다. 낭자는 그에게 앉기를 권가 통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가 대보리를 성취하도록 도운 것입니다”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박박은 노힐이 오늘밤에 틀림없이 계를 더렵혔을 것이니, 그를 비웃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르러 보니 노힐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몸은 금빛으로 단장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하니, 노힐이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박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업)장이 무거워서 다행히 대성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대덕은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으니, 원컨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마시고 일을 모름지기 함께 했으면 합니다”고 하였다. 노힐이 말하기를,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박박이 또 목욕했더니 역시 앞서처럼 무량수를 이루어 두 존상이 엄연이 상대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드물고 드문 일이다”고 하니, 두 성인이 (그들을) 위해 법요를 설해주고 온 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장안(長安) 2년 임인(702), 의상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였다. (부석본비)

 

개원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하여 감산사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껏 조성하고, 겸하여 개원 이찬, 아우 양성 소사, 현도사, 누이 고파리, 전처 고로리, 후처 아호리와 또한 서형 급한 일길찬, 일당 살찬, 총민 대사, 누이동생 수힐매 등을 위하여 함께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초리부인은 고인이 되어서, 동해 흔지가에 (뼈를) 흩었다.

 

(신라) 제33 성덕왕대 경신(720), (황룡사 9층탑을) 중건했다. (국사/사중고기)

 

개원 26년 무인(738), (신라) 효성왕이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인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봉덕사를) 창건했다.

 

천보 4년 을유(745) 4월 1일, 우금리의 가난한 여자 보개의 아들 장춘은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7일 동안 지극히 기도 드리기 시작했다.

천보 4년 을유(745) 4월 8일,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바다에 회오리바람을 만나 선박이 부서져서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서 들에서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어느날) 고향마을에서 온 것 같은 이상한 스님이 와서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며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서 스님이 겨드랑이에 저를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향음과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 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 초였습니다.”하였다. 경덕왕은 이 소식을 듣고서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천보 13년 갑오(754), 신라 제35 경덕대왕이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다. 길이가 1장 3치였으며, 두께가 9치였고, 무게가 497,581근이었다. 시주한 사람은 효정이왕 삼모부인이었다.

 

을미(755), (신라는)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가 306,700근이었다. 종을 만든 장인은 본피부 강고내말이었다.

천보 14년 을미(755), 신라 경덕왕 405이 즉위하여 (박박과 부득의) 일화를 들었다.

 

(당) 숙종 때(756~762), (신라는) 다시 (황룡사의)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자 8치였다.

 

정유(757), (신라 경덕왕이) 사자를 보내 대가람을 창건하고 백월산남사라고 했다.

 

(신라) 경덕왕 즉위 23년(764), (신라) 장륙존상에 금칠을 했는데, 벼가 23,700석이 들었다. (양지법사전)

(<양지전>에는 불상을 처음 만드는데 들었던 비용이 23,700석이었다고 한다.)

 

광덕 2년 갑진(764) 7월 15일, (신라에서) 절(=벡월산남사)이 완성되었다.

( <고기>에서는 대력 원년(766)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대력 (5년) 경술(770) 12월, (성덕왕의) 아들 혜공대왕 건운이 관리에게 명하여 장인들을 모아 마침내 (경덕대왕이 그의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하여 시작했던 큰 종을) 완성하여 봉덕사에 두었다.

 

태화 원년 정미(흥덕왕대, 827), (당에) 유학했던 승려인 고(구)려의 승려 구덕이 불경 및 상자를 가지고 (신라에) 왔으므로 (흥덕)왕은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의 앞길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태화 연간(827~835), 굴산조사 범일이 당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는데,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사미가 여러 중의 말석에 앉았다가 (굴산)조사에게 말하기를, “저도 역시 고향사람입니다. 집은 명주 지경 익령현 덕기방에 있사오니,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회창 7년 정묘(847), (범일이 총석을 두루 다니더니 염관에게서 법을 얻었고 그 후 이 해에) 고국으로 돌아와 먼저 굴산사(崛山寺)註 430를 창건하여 불교를 전하였다.

 

대중 5년(851), 당에 사신으로 간 원홍이 불경 몇 축을 가지고 왔다.

당 대중 5년 신미((신라) 문성왕대 851), 당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 15일 밤, (범일의) 꿈에 전에 보았던 사미가 창 아래에 와서 말하기를, “옛날 명주 개국사에 있을 때 조사가 약조하여 이미 허락한 바 있거늘 어찌하여 그리 지체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조사가 놀라서 깨어나 수십 인을 데리고 익령 지경에 가서 그의 집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어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 겨우 여덟 살이었던 한 아들이 있는데, 항상 남쪽 돌다리 주변에 나가 놀더니, 그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와 함께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조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들과 함께 다리 밑에 가서 찾으니 물 가운데 돌부처 하나가 있어 꺼내었다.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이전에 본 사미와 같았는데 이는 곧 정취보살의 상이었다. 이에 점치는 괘쪽을 만들어 절 지을 터를 점쳐보니, 낙산 위가 길하므로 (그 곳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보살상을 모셨다.

 

(신라) 제48 경문왕대 무자(868) 6월, (황룡사 9층탑이) 2번째 벼락을 맞았다. (국사/사중고기)

 

(신라) 제48 경문왕대(861~875), (황룡사 9층탑을) 3번째로 중건했다. (국사/사중고기)

(정확히 868년 6월~875년 사이의 일이지만 경문왕이 왕으로 있었던 기간을 다 기록했으며, 그럼에도 이 사건은 2번째 벼락을 맞은 이후의 사건이므로 그 바로 뒤에 기록한다.)

 

지난 병인(906)에 사목곡의 양부화상이 (백엄사를) 고쳐지어 주지가 되었다.

 

정축(917), (백엄사의) 양부화상이 세상을 떠났다.

 

정명 7년 신사(921) 5월 15일, 제석이 홍륜사 왼쪽 경루에 내려와 열흘(=순일) 동안 머물렀는데 전각과 전탑, 풀과 나무, 흙과 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뒤덮었고 남쪽 연못의 물고기와 용이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며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옥과 비단과 곡식 등의 시주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장인들도 제 스스로 찾아와 공사를 하였다.

정명 7년 신사(921) 5월 25일, (절의) 공사가 다 끝났고, 천제가 돌아가려 했는데 두 승려가 아뢰었다. "천제께서 만일 궁으로 돌아가려 하신다면, 거룩하신 천제의 얼굴을 그려 지성으로 공양하여 천제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또한 천제의 진영을 여기에 모셔두어서 길이 인간 세상을 보호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천체가 말했다. "나의 원력은 저 보현보살이 오묘한 교화를 두루 펼치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모습을 그려서 경건하게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승려는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고려시대)까지도 이 화상이 남아 있다.

 

후당 동광 원년 계미(본조(=고려) 태조 즉위 6년, 923),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이 500나한의 상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 왔다.

 

을유(925)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백엄사에) 와서 10년을 살았다.

 

(신)라 마지막 때 천성 연간(926~930), 정보 최은함이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 절(=중생사)의 관음보살 앞에 와서 기도했더니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3달이 못 되어 백제 견훤이 서울(=금성)이 서울을 습격하자(927년경)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은함이 아기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했다. "이웃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일이 급합니다. 어린 아이 때문에 누가 겹친다면 우리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진실로 대성께서 이 아리를 주셨다면, 원하옵건대 큰 자비의 힘으로 이 아이를 길러주시어서,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며 3번 울며 3번 고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보살이 앉은 사자좌 밑에 감추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반 달을 지나 견훤의 군사가 물러가자 돌아와서 아기를 찾았다. 그런데 아기의 살결이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았으며 모습이 더 예뻐졌고 입에서는 아직도 젖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기를 안고 돌아와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바로 승로로 벼슬이 정광에 이르렀다. (신라고전)

 

천성 3년 무자(928), 묵화상이 당에 들어가 대장경을 싣고 (고려에) 왔다.

 

을미년(935), 긍양화상이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신탁화상이 남원 백암수로부터 이 절에 와서 법에 따라 주지가 되었다.

 

개운 3년 병오(946) 10월 29일, 강주 지경의 임도대감의 주첩에 이르기를, “백엄선사는 초팔현(고려 때의 초계)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 상좌는 나이가 39세라고 했고,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지 못한다.” 고 했다.

 

본조(=고려) 광종 죽위 5년(954) 계축(953) 10월, (황룡사 9층탑이) 3번째 벼락을 맞았다. (국사/사중고기)

 

통화 10년(임진, 992) 3월, (중생사) 주지 성태가 보살상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제자는 오랫동안 이 절에 머물며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향불 받들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 땅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 이제 향불도 받들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성태는 잠시 졸았는데,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말했다. "대사는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받아 재에 쓸 비용을 마련하리라" 승려는 기뻐했고 또 감동받아 깨달은 바도 있어, 결국 그곳에 머무르기로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다. 13일 뒤, 갑자기 2명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성태가 나가서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저희들은 금주 사람입니다. 지난번에 한 스님이 저희들에게 찾아와, '나는 동경 중생사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필요한 물건이 없어서 시주를 얻으러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마을에서 시주를 거두어 쌀 6섬과 소금 4섬을 싣고 오는 길입니다" 승려 성태가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아마 잘못 들은 것 같소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일전에 오셨던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현정 우물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절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내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라고 해서 저희들이 뒤따라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절의 스님이 이들을 인도해 법당 앞에 이르렀다. 그 사람들을 관음보살상을 보고 예를 올리고는 서로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오셨던 그 스님이잖아?" 이렇게 말하고는 놀라고 탄복하기를 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이질 않았다. (신라고전)

 

(고려) 현종 13년(1022) 신유(1021), (황룡사 9층탑을) 4번째로 중건했다. (국사/사중고기)

 

(고려) 정종 2년(1036) 을해(1035), (황룡사 9층탑이) 4번째 벼락을 맞았다. (국사/사중고기)

 

원풍 (7년) 갑자(1084), (천지) 개벽한 상원 갑자부터 이 해까지 1,937,641세다. (태일역법-김희령 지음)

 

(고려) 문종 갑진(1064), (황룡사 9층탑을) 5번째로 중건했다. (국사/사중고기)

 

함옹 원년(1065) 11월, (고려에서) 이 절(=백엄사)의 주지 득오미정대사 석 수립이 이 절의 상규 10조를 정하였는데,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알을 맞아 봉안하고 사재로 보를 적립하여 해마다 공양할 것이 제 1조였다.

 

대안 2년( 본조(=고려) 선종(宣宗) 대, 1086), 우세승통 의천이 송에 들어가 천태(종)의 교관을 많이 가지고 왔다.

 

송 원우 (9년) 갑술(1094), 어떤 사람이 (보요선사의) 진영을 기려 찬미했다.

 

(고려) 헌종 말년 을해(1095), (황룡사 9층탑이) 5번째 벼락을 맞았다. (국사/사중고기)

 

(고려) 숙종 원년 병자(1096), (황룡사 9층탑을) 6번째로 중건했다. (국사/사중고기)

 

본조(=고려) 예종 때(1105~1122) 혜조국사가 조칙을 받들고 서쪽으로 유학가서 요나라 판본인 대장경 3부를 사 가지고 왔는데, 한 본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 또 해인사에 한 본이 있고, 허참정댁에 한 본이 있다.

 

송 건화 원년 기해((고려) 예종 14년, 1119), 중국에 있던 정극영과 이지미 등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지고 왔다.

 

정풍 원년 병자(1156) 10월,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 [뜰가의 석탑은 대개 신라인이 세운 것 같다. 제작은 비록 순박하여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 일을 여러 옛 노인들에게서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옛날 연곡현 사람이 배를 갖추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홀연히 탑 하나가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 때문에 어부는 고기를 한 마리도 얻지 못하여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 나는 (이 말에) 놀라고 감탄해마지 않았으나 그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에 있고 중앙에 있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이에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비구 처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문득 (탑을) 뜰 한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 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후에) 일관이 터를 구하러 이곳에 와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였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나 그러나 부처의 위신력을 보건대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와 같이 빠르니 불자된 사람으로서 어찌 잠자코 말하지 아니하겠는가? 때는 정풍 원년 병자(1156) 10월 일에 백운자가 기록한다.]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

 

대정 연간((1161~1189))에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시를 지었다.

 

대정 13년 계사(1173), 점숭이 절(=중생사)에 머물고 있었다. 점숭은 글자는 몰랐지만 마음이 순해서 정성스럽게 부지런히 향불을 받들었다. 그런데 어떤 중이 그 절을 빼앗으려고 친의천사에게 호소하여 말했다. "이 절은 나라에서 은혜와 복을 비는 곳이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를 뽑아 주지로 삼아야 합니다" 천사는 그 말이 맞다고 여기고, 그 사람을 시험하려고 불교의 글자를 거꾸로 주었다. 그러자 점숭은 곧 글을 펼쳐 들더니 물 흘러가듯이 줄줄줄 읽었다. 천사가 탄복하고는 방 가운데로 물러 앉아 다시 읽어보도록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점숭이 입을 다문 채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보살께서 보살펴주는 사람이오" 그리고는 결국 절을 빼앗지 않았다. 당시에 점숭과 함께 살던 처사 김인부가 마을 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전기에도 적었다. (신라고전)

 

대정 20년 경자(곧 명종 11년, 1180), (고려에서) 처음으로 만어사를 창건하였다.

 

대금 정우 7년 기묘(1219), 이 해에서 거슬러서 49,600여세에 다다르면, 반고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이 된다. (역대가-오세문 지음)

 

임진(서울을 옮길 때, 1232) (고려의) 내관이 바쁜 가운데 (부처님 어금니를)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했다.

 

이어강도(移御江都) 4년 을미(1235), (고려)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 때 왕의 명을 받아 강동을 지휘할 때 장절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우러러 예를 하고자 하였는데 절의 스님이 예전의 일로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이것을 들었더니 (그) 속에는 작은 석함이 있고 돌함 속에는 유리통이 들어 있는데, 통 속에는 사리가 다만 네 낱뿐이었다. 서로 돌려보며 우러러 공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하여 금이 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주하여 함께 간직해두게 하고, 그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병신(1236) 4월, 왕(=고려 고종)의 원당인 신효사의 석 온광이 부처님의 어금니에 예경하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에게 칙령으로 궁 안을 두루 살펴보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이때 백대 시어사 최충이 설신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의 방에 물었더니 모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내신 김승로가 아뢰기를, “임진년 어가를 옮길 당시 자문일기를 찾아보소서”라고 하여 그의 말대로 하였더니, 일기에는, “입내시대부경 이백전이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백전을 불러 그를 힐문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도록 해 주겠소?”라고 하고는 집으로 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 김서룡이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은 기록을 발견하고 가져와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또 김승로가 아뢰는 대로 임진에서 지금 병신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과 경영전의 상수( 등을 잡아 가두고 마땅히 심문하였으나, 이렇다 할 결말이 나지 않았다.

병신(1236) 4월 (위 사건으로부터) 3일 후 밤, 김서룡의 집 담장 안으로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있어 불을 켜서 살펴보니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침향합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이며,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이고, 그 다음 바깥 겹은 유리함이며, 또 그 다음 바깥 겹은 나전함으로서 각 (함의) 폭은 서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함을 찾은 것을 기뻐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유사는 (죄를) 논의하여 김서룡과 양전의 상수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니 진양부에서 아뢰기를 “불사 때문에 사람을 많이 상해함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여 모두 면해 주었다. 다시 명을 내려 십원전 뜰 안에 특별히 불아전을 만들어 그것을 봉안하고 장사에게 명하여 지키게 하고, 또 길일을 택하여 신효사의 상방 온광을 청하여 그의 승도 30명을 대궐 내로 들여 재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게 했다. 그날 입직한 승선 최홍과 상장군 최공연, 이영장, 내시, 다방 등이 불아전 뜰에서 시립하여 차례로 정대하여 공경하였는데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의 구멍사이의 사리는 수를 알 수 없었으나 진양부에서는 백은합에 담아 모셨다. 이때 임금(=고려 고종)이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은 부처님 어금니를 잃어버린 이래로 네 가지의 의심이 생겼소. 첫째는 천궁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는가 의심하였고, 둘째는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부처님 어금니는 이미 신물이니 또 인연이 있는 아무 일 없는 평온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셋째는 재물을 탐내는 소인이 함만 훔치고 부처의 어금니는 도랑에 버렸을까 의심하였고, 넷째는 도적이 사리를 훔쳐갔으나 스스로 밖에 들어내놓을 수 없어서 집안에 감추어 놓은 것은 아닌가 의심하였더니 이제 넷째 의심이 맞았소”라고 하고는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온 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고 헌수하며, 연정과 소비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은 당시 내전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전 기림사의 대선사 각유에게서 얻은 것인데, 직접 본 일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그것을 기록하게 하였다.

 

(고려) 고종 25년 무술(1238) 겨울, 서산병(西山兵)이 지른 불로 탑(황룡사 9층탑 등)과 절(황룡사 내의 절들), 장육전이 모두 불에 탔다. (국사/사중고기)

 

서산대병(西山大兵)이 있은 후 계축(1253) 갑인(1254) 사이, (낙산의) 두 보살(=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襄州城)註 432으로 옮겼다.

 

갑인(1254)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자 아행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고 적병이 물러간 뒤 (땅 속에서 보살상들을)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 이녹수가 감창사였는데, 받아서 감창고에 간직하고 교대할 때마다 물려받았다.

 

무오(1258) 11월, 본업의 노숙 기림사 주지 대선사 각유가 (왕께) 아뢰며 말하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당시에 절의 노비인 걸승이 성 가운데 묻어 두었다가 병사들이 물러간 뒤에 창고를 감독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주 군영의 창고 가운데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키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어부로 옮기어 안치하여야 합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윤허하여 야별초 10명을 보내어 걸승을 거느리고 가서 명주성에서 보주를 거두어 내부에 모셔 두었다. 이 때 심부름한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 1근과 쌀 다섯 섬을 주었다.

 

지원 갑자(1264),이 해부터대조(大朝)의 사신과 본국 사신이 다투어 와서 예배하고, 사방의 운수(雲水=행각승)이 몰려와서 참례하였는데 혹은 (돌을) 들어보기도 하고 들어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경오(1270), 환도할 때 난리가 났다. 전패(顚沛)의 심함이 임진(1232)보다도 심하였는데, 십원전의 감주였던 선사 심감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가지고 나왔으므로 적난에게서 화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대궐 내에 알려져 그 공을 크게 포상하여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으니 지금 빙산사(氷山寺)에 거주하고 있으니 이 역시 그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지원 18년 신사(1281), 석(가세)존으로부터 2230년이 지난 해.

 

(지원) 21년 갑신(1284), 국청사 금탑을 보수하고 임금(=고려 충렬왕)은 장목왕후와 더불어 묘각사에 행차하니 대중이 모여 경찬하고는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임금과 신하들과 대중이 모두 떠받들어 예배한 뒤에 함께 금탑 속에 넣었다. 나(=일연) 또한 이 모임에 참례하여 이른바 부처님의 어금니라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가 3촌 가량 되었으며 사리는 없었다. 무극(=일연)이 기록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