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 사서를 참고함 |
원봉 2년(-109년), 한 사신 섭하가 (조선의) 우거왕을 설득했으나 우거는 끝까지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귀국길에 국경의 패수에서 마부를 시켜 조선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했다. 한 천자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하였는데, 조선이 원한을 품고 그를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 양복을 5만 병사와 함께 파견하여 제 (지명)에서 발해를 건너게 하였지만, 우거가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서 그들을 막았다. 누선장군이 제 (지명)의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왕검 (지명)에 먼저 도착했다. 우거가 누선(=양복)의 군대가 적음을 알고 즉시 나아가 그를 공격하자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으로 도망쳤다. 좌장군순체는 조선패수서군 (지명)을 쳤지만 깨뜨리치 못했다. 곧 천자는 위산을 보내어 우거를 타이르자,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 말을 바치겠다 했다. 그리하여 태자가 1만명의 병력으로 무기를 지니고 패수를 건너려고 했지만, 사자(사신)과 좌장군이'태자는 이미 항복했으니 당연히 무기를 지니지 마시오'라고 했다. 태자 역시 사신이 자신을 속일지 모른다 생각해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보고를 받은 천자는 위산의 목을 베었다. 좌장군은 패수상군 (군대 명칭)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와서 성 남쪽에 주둔했지만,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제남태수에 있었던 공손수를 보내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했다, 공손수는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 좌좡군의 군사와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상 노인과 한도, 이계상 삼과 장군 왕겹의 의논 후 항복하려 했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한도와 왕겹과 노인이 도망가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노인만 도중에 죽었다. (전한 조선전)
원봉 3년(-108년) 여름, 이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지만 우거왕의 대신 성기가 또 한나라에 대항했기에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 조선 백성을 타이르게 하여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마침내 조선은 평정되고, (한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두었다. (전한 조선전)
소제 시원 5년 기해(-82년), 2개의 외부를 두었다. (전한서)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59년) 4월 8일,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흘승골성에 내려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신의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고기)
신라시조 혁거세 즉위 19년 임오(-39년), 변한 사람들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건소 2년 갑신(-37년), (12살이던 주몽은) 즉위하여 왕이라고 하였다. (국사 고려본기)
혁거세 30년(-28년), 낙랑인들이 와서 (신라에) 항복했다. (국사)
동명제(=동명성왕) 10년(-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홍가 4년 갑진(-17년), 온조왕이 일어났다(=국가를 일으켰다) (본기)
혁거세 52년(-6년),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지황 3년 임오(22년), 고(구)려 무휼(왕)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온조왕 42년(24년), 남옥저의 20여 집이 백제에 투항했다.
제3 노례왕 4년(27년), 고(구)려 제3 무휼왕이 (낙)랑을 쳐서 멸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 사람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 (국사)
노례왕 14년(37년),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했다.
무휼왕 27년(44년), 광무제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취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살수 남쪽이 한(나라)에 속했다. (국사)
(신)라 제6 지마왕 14년(을축, 125년), 말갈의 군사가 대거 북쪽 국경을 침입하여 대령의 성책을 습격하고 이하 (지명)로 지나갔다. (동명기)
후한 건안 14년(209년), 마한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
조위 때(220~265년),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설치했다.
정관 6년 임진(632년), 이서군 금오촌 영미사에서 밭을 바쳤다. (운문사 제사납전기)
의연 3년 고종 무인(678년),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으로 태백상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했다. (삼국사)
현종 선천 임자(712년), (말갈족은)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불렸다. (통전)
개원 7년 기미(719년),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이라고 했다.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자 명황(=당 현종)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새 왕은 마음대로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통전)
개원 20년경(732년경), 명황(=당 현종)이 군대를 보내 (발해를) 토벌하도록 했다. (삼국사)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734년),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자, 현종이 이를 토벌했다. (삼국사) (* 성덕왕 32년은 733년이라서 오류가 존재함)
제49 헌강대왕 때(875~886년), 성 안에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이웃집과 처마가 서로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있었다. 노래와 피리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했으며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후당 천성(926~930년) 초,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여 깨뜨리자, 그 후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통전)
(고려) 태조 18년(935년), 태조가 딸을 김부(=경순왕)에게 시집보내면서 그녀를 '낙랑공주'라고 불렀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금관, 둘째는 고령, 셋째는 비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 (고려 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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