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5 -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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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5 -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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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사서를 참고함

 

북제 천보 연간(550~559), 나라(=북제)에서 10통을 설치하였는데, 유사가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청하여 이에 (제) 문선제는 법상법사를 대통으로 삼고 나머지는 통통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11년 경오(550), 안장법사를 대서성으로 삼았는데 1인을 두었고, 또한 소서성 2인을 두었다.

다음해 신미(551), 고구려 혜량법사를 국통으로 삼았는데 또한 사주라고도 하였고, 보량법사를 대도유나로 삼아 1인을 두었고 주통 9인, 군통 18인 등을 두었다.

개황 13년(593), (중국) 광주에 어떤 승려가 참법을 행하여서 가죽으로 첩자 2매를 만들고 선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던지게 하여 선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길하다고 했다. 또 스스로 박참법을 행해서 죄를 없앤다고 했다. 그래서 남녀가 모두 함부로 받아들여 몰래 행하니 청주에도 퍼져서 함께 행했다. 관사가 단속하여 살펴보고 이를 요망하다고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 탑참법은 <점찰경>에 따랐고 박참법은 여러 경전에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큰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이 오체를 땅에 던졌다. 이때 주청하여 아뢰니 이에 내사시랑 이원찬에게 칙서를 내려 대흥사로 가서 여러 대덕에게 묻게 했다. 대사문 법경, 언종 등이 대답하였다. ‘<점찰경> 2권이 있는데 첫머리에 보리등은 외국에서 번역하였다고 쓰여 있어 근대에 나온 것 같다. 또한 필사하여 전하고 있는 것은 여러 기록을 조사하여도 역시 바른 이름, 역자, 때, 곳이 없고 탑참은 여러 경전과는 또 다르므로 시행할 수 없다.’ 인하여 칙서로 금하였다. (당승전)

진평왕 22년 경신(600)에 (원광)법사가 장차 지팡이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려 하여 이에 중국 조빙사를 따라 귀국했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하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이르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길 사이를 갔다 돌아오니 어떠한가?” 대답하여 말했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히 돌아오기를 마쳤습니다.” 신이 말했다. “나 또한 신에게 계를 받아 세세생생에 서로 구제하는 약속을 맺었다.” 또한 (법사가) 부탁하여 말하기를 “신의 진용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법사가 만약 나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하늘 끝을 보라.” 법사가 다음날 그곳을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이미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였습니다.” 인하여 이 골짜기를 비장산라고 불렀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으나 무상의 해는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되지 않아 그 고개에 몸을 버릴 것이다.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혼을 전송하라.” 약속한 날짜를 기다려가서 보니 한 검은 늙은 여우가 있었는데 검기가 칠흑 같았다. 단지 헐떡거리다가 숨을 쉬지 않고 조금 뒤에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오니 신라의 왕과 신하가 법사를 공경하며 스승으로 삼았다. 항상 대승경전을 강론했다. 이때 고구려,백제가 항상 변경을 침입하니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수나라(혹은 당나라)에 병사를 청하고자 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을 것을 부탁했다. 황제가 이를 보고 30만 병사로 고구려를 친히 정벌했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학에도 두루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 (고본 수이전 원광법사전)

(<삼국사>에는 다음해 신유(601)에 그가 왔다고 한다.)

건복 30년 계유(신라 진평왕 재위 35년, 613) 가을,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신라에) 이르니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설하고 여러 고승에게 청하여 경전을 강설하였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위치하였다. (삼국사 열전)

정관 연간(627~649), (신라인 석 아리나발마(=야리나발마)는) (중국) 장안을 떠나 오천축국에 이르렀다. (구법고승전-광함 지음)

인평 3년 병신(정관 10년, 636), (자장법사는) 칙명을 받아 문하의 중인 실 등 10여 명과 함께 서쪽으로 당에 들어가 청량산을 찾아갔다. 산에 만수대성의 소상이 있는데, 그 나라에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제석천이 석공을 이끌고 와서 조각한 것이다”라고 한다. 자장이 소상의 앞에서 기도하며 명감을 하고는, 소상이 정수리를 쓰다듬고 범게를 주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도 뜻을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이상한 중이 와서 풀이해 주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를 배우더라도 아직 이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은 자신이 성인의 기별을 꿈꾼 것을 알고, 이에 북대를 내려가 태화지로 갔다. 장안에 들어가니, (당) 태종이 칙사를 보내 위로하였고 승광별원에 안치하고 총애하여 사여하는 것이 자못 후하였다. 자장은 그 번잡함을 싫어하여 표를 올리고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벼랑에 들어가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3년을 거하(기 시작했)다.

건복 58년(641), 그(=원광)가 약간 근심을 느꼈다. 7일이 지나 계를 남겼는데 대단히 맑았고, 살고 있는 황륭사 안에서 꼿꼿이 앉아 죽음을 맞았다. 나이가 99세였으니 곧 당 정관 4년(630)이다. [마땅히 (정관) 14년(640)이라 해야 한다.] (당 속고승전)

정관 17년 계묘(643), 신라 선덕왕이 표를 올려 돌아오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불러 궁으로 들어오게 하고 견 1령과 각종 비단 500단을 사여하였고, 동궁 또한 200단을 주었으며 또한 예물도 많이 주었다. 자장은 신라에 경전과 불상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대장경 1부 및 여러 번당, 화개 등 복리가 될 만한 것을 요청하여 모두 실었다. 귀국하자 온 나라가 환영하였다. 왕은 분황사(=왕분사)에 주석하도록 명하고 지급하는 것과 시중을 많고 극진하게 하였다.

진덕왕 3년 기유(649), (신라에서) 중국의 의관을 입기 시작했다.

다음해 경술(650), (신라는) 또한 정삭을 받들어 처음으로 영휘 연호(650~656)를 썼다. 이후 매번 조공할 때마다 반열이 상번에 있었는데, 자장의 공로이다.

영휘(650~656) 초, 마침 당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신라 의상은)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인덕 2년(665), (신라) 문무왕이 상주(=고려의 상주)와 하주(=고려의 창녕군)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두었다.

함형 원년 경오(670), (흠순 등이 비밀리에 의상에게 고종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치려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의상은 즉시) 귀국하여 사정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신인 대덕 명랑에게 명하여 임시로 밀단법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니 이에 국난을 면하였다.

의봉 원년(676), (신라의) 의상이 태백산에 돌아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총장 원년 무진(668), (신라에 법계도가) 이루어졌다. 지엄도 입적했다.

개원 28년 경진(740), (신라의) 진표가 선계산 불사의암에 석장을 머무르고 삼업을 갖추어 수련하여서 망신참으로 ㅇㅇㅇ했다. 처음에 일곱 밤을 기약하고 오체를 돌에 부딪혀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피를 바위에 흩뿌렸으나 성응이 없는 듯하여 몸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다시 7일을 기약하였다.

개원 28년 경진(740) 3월 15일 진, (총) 14일이 끝나자 (진표는) 지장보살을 보고 정계를 받았다.

천보 11년 임진(752) 2월 15일, (신라 진표의) 교화가 이미 널리 미치자 유람을 다니다가 아슬라주에 이르렀다.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물속으로 맞아들이니 불법을 강의하고 (물고기와 자라가) 계를 받았다.

(다른 본에서는 원화 6년(헌덕왕대, 811)이라고 했다.)

경덕왕 천보 12년 계사(753) 여름, (신라에) 크게 가뭄이 들어 조서를 내려 대현을 궁궐로 들어오게 하여 <금광경>을 강론하여 단비가 내리기를 기도하게 했다. 어느 날 재를 올리는데 바리를 늘어놓고 잠시 있었으나 정수를 바치는 것이 늦어지자 감리가 그것을 꾸짖었다. 공양하는 사람이 말했다. “궁궐의 우물이 말라서 먼 곳에서 길어왔기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대현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어찌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에 이르러 향로를 들고 말없이 있으니, 잠깐 동안 우물의 물이 솟아 나와 그 높이가 7장 가량이 되어 찰당과 더불어 같게 되었는데, 궁 전체가 놀랐고 그로 인하여 그 우물을 금광정이라 이름했다.

다음해 갑오(754) 여름 (모일), (신라 경덕)왕이 또 대덕 법해를 황룡사에 청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고, 가마를 타고 행차하여 향을 피우고 조용히 일러 말했다. “지난 여름에 대현법사가 <금광경>을 강론하여 우물의 물이 7장이나 솟아나왔다. 당신의 법도는 어떠한가?” 법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특히 조그만 일이니 어찌 칭찬하기 족하겠습니까. 바로 창해를 기울여서 동악을 잠기게 하고 경사를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왕은 그것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겼을 뿐이다. 오시에 강론을 하는데 향로를 끌어놓고 고요히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가 달려와서 보고했다. “동쪽 연못이 이미 넘쳐서 내전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이 망연자실하니, 법해가 웃으며 말하기를 “동해가 기울고자 하여 수맥이 먼저 넘친 것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을 했다.

갑오(754) 여름 (모일), 다음날 감은사에서 아뢰기를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서 불전의 섬돌 앞까지 이르렀다가 저녁 무렵에 물러났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더욱 그를 믿고 공경했다.

상원 원년 경자(760), (신라의 진표율사는) 20두의 쌀을 찌고 말려서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으로 가서 변산 부사의방으로 들어가서 5홉의 쌀만 하루에 소비하기로 하고 쌀 1홉을 제하여 쥐를 길렀다.

임인(762) 4월 6일, (진표)율사가 (계법을 3년간 부지런히 구하여도 얻지 못하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로 올려놓았다.

임인(762) 4월 9일, (그 일이 있은 후로)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임인(762) 4월 13일 밤, (그 일이 있은 후로) 7일째 되는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쇠로 된 지팡이를 흔들면서 와서 보호해주자 손과 팔이 예전처럼 되었다.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자, 율사는 그 영험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했다.

임인(762) 4월 27일, (그일이 있은 후로 )21일을 채우자 즉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에 지장·미륵보살이 (그의) 앞에 나타나고,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를 구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를 간절히 구하는도다.” 지장이 <계본>을 주고 미륵은 다시 2개의 생을 주었는데 하나는 '9자'라고 쓰여 있었고 하나는 '8자'라고 쓰여 있었다. 진표에게 일러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 뼈인데, 이는 시각, 본각 2각을 이른다. 또한 9자는 법 자체이고 8자는 신훈성불종자이니 이로써 마땅히 과, 보를 알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의 몸을 받아 후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고 두 보살은 즉 사라졌다.

갑진(764) 6월 9일, 미륵보살이 (신라) 금산사 금당의 남쪽 벽에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위의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림이) 조성되었다.

병오(대력 원년, 766) 5월 1일, (그림이 신라 금산사) 금당에 안치되었다.

(신라) 원성대왕 원년(785), (신라에서는) 승관을 설치했는데 이름이 정법전으로 대사 1인, 사 2인을 관리로 삼았는데 승려 중에 재행이 있는 사람을 뽑아 삼았고 유고시에는 곧 교체했으며 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정원 (15년) 기묘(799). (신라) 승려 범수가 멀리 그 나라(중국)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화엄경> 과 <관사의소>를 얻고 돌아와 연술했다.

청태 4년 정유(937), (신라는) 편액을 내려 운문선사라 하고 가사의 영음을 받들게 하였다.

천복 8년 계유((고려) 태조 즉위 26년. 943) 정월 모일, 청도군 경계 마을의 심사 순영과 대내말 수문 등의 주첩 공문에 운문산 선원 장생은 남쪽은 아니점, 동쪽은 가서현이라고 했고, 그 사원의 삼강전 주인은 보양화상이고, 원주는 현회장로, 정좌는 현양상좌, 직세는 신원선사라고 했다. (청도군사적)

개운 3년(946) 병진(956), 운문산 선원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 장생이 열하나이니, 아니점, 가서현, 묘현, 서북 매현 혹은 면지촌이라 한다., 북저족문 등이라 했다. (운문산 선원 장생표탑 공문)

(대금) 정풍(=정륭) 6년(1161) 신사(고려 의종 즉위 16년-1162) 9월, 청도군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집에 옛사람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하였고, 치사한 상호장 김양신,치사한 호장 민육,호장동정 윤응, 전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 등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으며, 당시 태수 이사로, 호장 양신은 나이 89세이었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70세 이상이었으며 용성은 나이가 60세 이상이다. (군중고적비보기)

승안 4년 기미(1199), (고려에서) 돌(=관동 풍악 발연수)을 세웠다.

정사년(1197) 9월, (나(-무극 일연)는 법사의 뼈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모아 통에 담으니 3홉 가량이 되었다. 큰 바위 아래 두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안장하였다고 했다.

경인(1250), 5도 안찰사가 각 도의 선교 사원의 창건 년월, 형지를 살펴서 장적을 만들 때에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이 살펴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진양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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