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사서를 참고함 |
전한 홍가 3년 계묘(-18),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했다. (고전기)
(온조왕) 14년 병진(-5), (온조왕이) 한산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고전기)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계욕일, 그들이 살았던 북쪽 구지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200~300명 정도가 이곳에 모이자 사람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 형체를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났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답했다. "구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길,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위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렇게 하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이 그 말처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 속에 금상자가 있었고,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알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안고 아도가의 집으로 가서 탁자 위에 두고는 모두들 흩어졌다. (가락국기)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망일(=보름), (수로(혹은 수릉)가)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수릉)이라고 했다. 나라는 대가락(혹은 대가야)이라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였다. 나머지 5명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가락국기)
(수로왕) 2년 계묘(43) 봄 정월, (수로)왕이 말했다. "짐이 수도를 정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임시로 지은 궁궐의 남쪽 신답평으로 나아가 사방의 산악들을 바라보다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곳은 땅이 좁아 여뀌잎 같지만 지세가 빼어나고 특이하여 16나한이 살만한 곳이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7을 이루니, 7분의 성인이 머물 땅으로 여기가 참으로 적합하다. 이 땅을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곽성을 쌓고 궁궐과 전각,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 등의 터를 정한 뒤,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와 장인들을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성을 쌓아서 3월 10일이 되어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궁궐과 여러 집들은 농한기를 기다려서 지었으니, 그 해 10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가락국기)
갑진(44), (계묘년(43)에 수로왕이 궁궐과 여러 집들을 짓게 하였고, 이후) 2월에 완성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새 궁궐에 들어가서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여러 업무도 부지런히 처리했다. (가락국기)
건무 24년 무신(48) 7월 29일, 구간들이 조회할 때 (수로)왕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까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청하옵건대,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내 배필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온 것은 천명이고 짐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천명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곧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다시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에 가도록 했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올리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자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 궁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구간들을 보내어 목란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서 그들을 맞이했다. 얼른 궁궐로 모시려고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을 평소에 몰랐는데, 어찌 경솔히 따라갈 수 있겠소" 그래서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후의 말을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고 여기고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행차했다. 궁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 정도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궐로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산 위에서 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예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밖에 따라온 신하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신보와 조광이었고 이들의 아내는 모정과 모량이라고 했다. 또 종까지 헤아리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가져온 수놓은 비단과 옷과 옷감, 금과 은, 주옥과 옥 등의 장신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후가 왕의 임시 궁궐로 점점 다가오자, 왕이나가서 맞아들여 함께 장막으로 만든 궁궐로 들어갔다. 왕후를 따라온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계단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님을 뵙고는 곧장 물러났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신하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나 방 하나씩 주어 편히 머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방 하나에 5~6명씩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잘 수 있도록 하라. 의복과 비단과 금은보화 등은 군사들을 모아서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왕과 왕비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께서 황후와 함께 저를 동라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나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상제를 뵈었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시조 수로를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았으니, 신령스럽고 거룩한 이는 오직 그 사람이 있을 뿐 이다. 그런데 새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배필을 정하지 못했다.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로 삼아라'라고 하시고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눈을 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여전히 귀에 있는 듯 하구나. 너는 여기서 얼른 부모와 작별하고 그 곳을 향해 떠나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 저 멀리와 하늘 저 멀리까지 당신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답했다. "짐은 태어나면서 자못 신성하여서, 공주가 저 멀리서부터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고 청했지만 감히 따르지 않았고. 지금에서야 현숙한 분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오" (가락국기)
건무 24년 무신(48) 8월 1일, (왕과 왕비는) 대궐로 돌아왔는데, 왕은 왕비와 함께 수레를 탔고 왕후를 따라온 신하의 부부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왔으니, 물시계가 정오에 가까웠을 때였다. 왕후는 중궁에 거처했고, 신하 부부와 노비들도 빈 집 2채에 나누어 들어가도록 했다. 그밖의 종자들은 20여 칸 되는 집 1채를 주고 인원수에 따라 나누어 있게 했으며, 날마다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주었다. 그들이 가져온 보물은 대궐의 창고에 보관하고 왕후의 사계절 비용으로 쓰게 했다. (가락국기)
영제 중평 6년 기사(193) 3월 1일, 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수명이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지듯이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가락국기)
헌제 건안 4년 기묘(199), (수로왕이) 세상을 떠났으니 수명이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니, 왕후가 죽었을 때보다 더 심했다. (가락국기)
거등왕이 왕위에 오른 해(기묘,199), (거등왕이 제사를 위한) 별실을 설치했다. (가락국기)
건안 4년 기묘(199), 처음 (수로왕의) 사당을 세웠다. (가락국기)
건안 4년 기묘(199) 3월 23일, (아버지가 수로왕, 어머니가 허왕후인 거등왕이) 왕위에 올라 3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경초 3년 기미(239), (사비=사이)왕이 세사을 떠나자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
가평 5년 계유(253) 9월 17일, (거등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가평 5년 계유(253), (마품왕이) 왕위에 올라 3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가평 5년 계유(253), (마품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영평 원년 신해(291) 1월 29일, (마품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영평 원년(291), (거질미(=금물)왕이) 왕위에 올라, 5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영평 원년(291), (거질미(=금물)왕이) 왕위에 올랐다. (가락국기)
영화 2년(346) 7월 8일, (거질미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영화 2년(346), (이시품왕이) 왕위에 올라, 5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함안 원년(13대 근초고왕 때, 371),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을 뺴앗아 수도를 북한성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고전기)
의희 3년 정미(407) 4월 10일, (이시품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의희 3년(407), (좌지왕(=김질)이) 왕위에 올라, 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영초 2년 신유(421) 5월 12일, (좌지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영초 2년(421), (취희왕(=질가)이) 왕위에 올라, 3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원가 28년 신묘(451) 2월 3일, (취희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원가 28년, (질지왕(=김질왕)이) 왕위에 올라, 4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원가 29년 임진(452),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은) 수로왕과 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창건하고 왕후사라고 했다. 관리를 보내 그 근처의 밭 10결을 측량하고 불법승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가락국기)
22대왕 문주왕 즉위 원년(원휘 3년 을묘, 475년), (문주왕이) 수도를 웅천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고전기)
영명 10년 임신(492) 10월 4일, (질지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영명 10년(492), (겸지왕이) 왕위에 올라,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정광 2년 신축(521) 4월 7일, (겸지왕이) 세상을 떠났다. (가락국기)
정광 2년(521), (구형왕이) 왕위에 올라, 4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가락국기)
양 중대통 4년 임자(532),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 (개황록)
양 중대통 4년 임자(532), 구형왕이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 (삼국사)
양 중대통 4년 임자(532),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건무 18년 임인(42)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532)까지 모두490년이 된다.
(26대 성왕에 이르렀을 때, 538), 수도를 소부리로 옮기고 국명을 남부여라 했는데, 31대 의자왕까지 120년을 지넀다.
백제 성왕 26년(548) 무오(538) 봄, (성왕은)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명을 남부여라 했다 (삼국사기)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바꾼 해는 538년이다. 26년이라 한 것은 '26대 성왕'의 오기거나 '성왕 16년'의 오기로 보인다.)
보정 2년 임오(562) 9월, 신라 제24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의 수가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구형)왕은 형제인 탈지이질금을 보내 본국에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가락국기)
위 보정 2년 임오(562),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건무 18년 임인(42)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오(562)까지 모두 520년이 된다.
건복 8년 신해(591), (진평왕이 처음)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라고 했다.
당 현경 5년(660), (백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째 되는 해이다.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했다. (고전기)
현경 5년 경신(660), 소정방 등이 백제를 정벌했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 설필하력을 패강도 행군대총관으로, 소정방을 요동도 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 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당서 고종기)
(문무)왕이 처음 즉위했던 해(661), 남산에 큰 창고를 지었는데, 길이가 50분이고 넓이가 15보였다. 여기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이다. 또부산성을 처음으로 쌓았다.
(문무)왕이 처음 즉위했던 해(용삭 (원년) 신유,661), 남해에 여자 시체가 있었는데, 키가 73자였고 발의 길이가 6자였으며 음문의 길이가 3자였다.
신유(661) 정월, 소사업을 부여도 총관으로, 임아상을 패강도 총관으로 삼아 3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했다. (당서 고종기)
신라 제30 법민왕(=문무왕)용삭 원년 신유(661), 3월 모일에 (법민)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세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 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짐을 낳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시조 수로왕께서는 과인에게 있어서 15대 시조가 된다. 그 뷴이 다스렸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분을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종묘와 합하여서 계속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관리를 옛터에 보내 사당에서 가까운 상상전 30경을 주어 제사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왕위전이라고 부르고 본래의 토지에 붙여주었다. 왕의 17대 손인 갱세 급간이 조정의 뜻을 삼가 받들어 그 밭을 주관했다. (가락국기)
신유(661) 8월 갑술일, 소정방 등이 패강에서 고구려와 싸우다 패하여 달아났다. (당서 고종기)
(663), 부산성이 완성되었다.
인덕 (3년) 병인(666) 3월 10일, (신라의) 민가의 여종인 길이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
건봉 원년 병인(666) 6월, 방동선, ㅇ고림, 설인귀, 이근행 등이 후원군이 되었다. (당서 고종기)
건봉 원년 병인(666) 9월, 동선이 고구려와 싸워 패했다. (당서 고종기)
건봉 원년 병인(666) 12월 기유일, 이적이 요동도 행군대총관이 되어 6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당서 고종기)
건봉 2년 정묘(667), (문무왕 때) 남해에 여자 시체가 있었는데, 키가 18자였다.
총장 (원년) 무진(668), (문무)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평양에 가서,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 장수 이적이 고장왕(=보장왕)을 사로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총장 (원년) 무진(668) 9월 계사일, 이적이 고장왕을 사로잡았다. (당서 고종기)
총장 (원년) 무진(668) 12월 정사일, 황제에게 (고장왕을) 바쳤다. (당서 고종기)
총장 3년 경오(670) 정월 7일, (신라) 한기부의 일산(혹은 성산) 급간(혹은 아간)의 여종이 네 쌍둥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이 셋이었다. 나라에서 곡식 200섬을 상으로 주었다.
신미(671), 당에서 조헌을 장수로 삼아 또 다시 5만의 군사가 쳐들어왔다. 그래서 또 그 비법을 사용하자 예전처럼 배가 모두 침몰했다.
상원 원년 갑술(674) 2월, 유인궤를 계림도 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쳤다. (당서 고종기)
조로 원년 기묘(679), (사천왕사를) 고쳐지었다. (국사)
(문무)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영륭 2년 신사, 681), (문무대왕이)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소 지의법사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짐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수호하겠소"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째서 그러하십니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만약 추한 응보로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짐이 바라던 바와 맞는다오"
개요 원년 신사(681) 7월 7일, (제31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거룩하신 선대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
신라 제31 정명왕이 왕위에 오른 해(개요 원년 신사, 681), (가야가 망한 뒤) 이곳을 금관경이라 하여 태수를 두었다. (가락국기)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해(개요 2년, 682), (감은사의) 공사를 마쳤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라고 했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라고 했다. (사중기-절의 기록)
임오(682) 5월 초하루,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었습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인 김춘질(=김춘일)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또 김유신 공도 33천(=삼십삼천)의 한 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계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 천수 원년(690)의 일이라는 기록도 존재)
임오(682) 5월 7일, 왕은 기뻐하며 이견대에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혹은 산과 대나무 모두 낮에 갈라지고 밤에 합해졌다). 사신이 와서 이러한 사실을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임오(682) 5월 8일 오시,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했다.
임오(682) 5월 16일, (바닷가의)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다.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서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용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왕이 놀라면서도 기뻐서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했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했는데, 바다에서 나올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 묵었다.
임오(682) 5월 17일,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했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피더니 말했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따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2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이라고 부른다. 왕이 대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천수 4년 계사(효성왕 때, 693), 부례랑이 살아서 돌아오는 이상한 일이 있어서, 다시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
신룡 2년 병오(제33성덕왕 때, 706),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몸시 굶주렸다.
정미(제33성덕왕 때, 707) 정월 1일~7월 30일, (성덕왕이) 백성들에게 벼를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 당 하루에 3되씩 주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보니 300,500섬이었다.
개원 10년 임술(722), (효성왕이) 비로소 보화군에 관문을 쌓았다.
개원 21년 계유(733), 당나라 사람들이 북적을 치기 위해 신라에 군사를 요청했는데, 이 일로 사신 일행 604명이 왔다가 돌아갔다.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24(765), 오악삼산의 신들이 때떄로 궁전 뜰에 나타나 (경덕)왕을
(765) 3월 3일, (경덕)왕이 귀정문 누각에 올라 주변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가 길에서 잘 차려입은 승려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 그런데 마침 위엄 있고 깨끗히 차려 입은 고승이 이리저리 거닐며 지나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이를 보고 곧 데리고 와서 왕을 뵙게 했지만,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하는 잘 차려입은 스님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물러가게 했다. 다시 어떤 스님 한 분이 장삼을 입고 대통을 메고(혹은 삼태기를 등제 지고) 남쪽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은 그 스님을 보고 기뻐하며 맞이하여 누대 위로 올라오게 했다. 그리고 그 통 속을 들여다보니 차를 달이는 기구들로 가득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왕이 묻자 스님이 답했다. "충담이옵니다" "어디서부터 오는 길인가?" "소승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께 드렸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나누어 줄 수 있겠소?" 스님은 곧 차를 달여 드렸다. 차의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도 특이한 향이 진하게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했소. 정말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다시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서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노래를 지어주시오" 스님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에 봉했지만, 스님은 2번 절을 하고 굳이 사양하며 직책을 받지 않았다.
대력 초(766), (신라) 강주 관청 대당 동쪽에 땅(혹은 큰 절 동쪽의 작은 연못)이 점점 내려앉아 연못이 되었는데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잉어 5~6마리가 나타나더니 점점 커졌고 연못도 따라서 커졌다.
(대력) 2년 정미(767), 천구성이 (신라) 동쪽 누각의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 같았고, 꼬리는 3척 쯤 되었으며 색깔은 타오르는 불꽃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했다.
(대력) 2년 정미(767), (신라) 금포형의 논 5경이 모두 벼 껍질이 없는 쌀 낟알로 이삭이 되었다.
호랑이가 (신라의) 궁성에 들어왔는데 쫓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무수히 모여들었다.
(대력) 2년 정미(767) 7월, (신라) 북궁의 뜰 안에 먼저 2개의 별이 땅에 떨어졌고,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는데, 3개의 별이 모두 다 땅 속으로 들어갔다.
(대력) 2년 정미(767) 7월 3일, (신라의) 대공 각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와 5도의 주와 군 등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워졌다. 난리가 석 달이나 지속되었다.
정원 2년 병인(786) 10월 11일, 일본왕 문경(=문덕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어 군사를물리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황금 50냥과 피리를 바꾸자고 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윗세대 진평왕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
(787) 7월 7일, (일본왕 문경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황금 1,000냥을 주면서 청했다. "과인이 원하는 것은, 신물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드리려는 것입니다" 왕이 또한 지난번처럼 말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고 금도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787) 8월, (일본) 사신이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했다.
(혜공)왕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을해, 795), 당의 사신이 서울(=경주)로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795) (사신이 돌아가고 하루 뒤) 두 여인이 궁궐 안뜰로 들어와 아뢰었다. "첩들은 동지와 청지에 살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 사신이 하서국 사람 2명을 데리고 왔는데, 저희들 남편인 두 용과 또 분황사 우물에 살던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저희 남편인 호국용들의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왕이 사신을 쫓아 하양관에 이르러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말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에까지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리라" 그러자 3마리 물고기를 바쳤다. 이들을 3곳에 놓아주게 했더니, 각기 물에서 한 길이나 솟아오르며 기뻐 뛰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하고 성스러움에 탄복했다.
제40 애장왕 말년 무자(808) 8월 15일, (신라에) 눈이 내렸다.
원화 13년 무술(제41 헌덕왕 때, 818) 3월 14일, (신라에) 큰 눈이 내렸다. (병인년(846년)이라는 기록도 존재)
제42 흥덕대왕 보력 2년 병오(826), (흥덕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제46 문성왕 기미(839) 5월 19일, (신라에) 큰 눈이 내렸다.
제46 문성왕 기미(839) 8월 1일, (신라의) 천지가 깜깜해졌다.
함통 8년 정해(867), (견훤이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는데,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을 씨(=성씨)로 삼았다. (삼국사 본전)
광계 연간(885~888),(농사를 지어 살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사불성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사 본전)
(당) 경복 원년 임자(892),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으며 또) 왕이라 일컬었고, 완산군에 수도를 정하고 43년을 다스렸다. (고기)
당 소종 경복 원년(신라 진성왕이 왕위에 오른지 6년, 892), (신라에서는) 총애 받는 신하들이 임금 곁에 있으면서 몰래 국권을 농락하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해이해졌으며, 여기에 기근까지 더해지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러자 견훤은 남몰래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먹고, 무리를 모아 경주의 서남쪽 주와 현의 공격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해 1달 사이에 군사가 5천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공공연히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를 신라서남도통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국개국공이라고 했다. (용기 원년 기유(899)이라는 설도 있다.) (고기)
당 광화 3년(신라 효공왕 4년, 900), 당시 북원의 도적 양길이 강성하여 궁예는 제 스스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를 듣고는 멀리서 양길에서 직책을 내려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렀는데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인심을 얻는 것을 기뻐하며 주위 측근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연 지 600년 만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넜고, 신라의 김유신이 땅을 휩쓸며 황산을 지나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하니 내 지금 감히 수도를 세워 원한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라 칭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어 주었다.
제 52 효공왕 광화 15년 임신(912, 건화 2년), (신라) 봉성사의 바깥문 동서 21간에 까지가 집을 지었다.
신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을해, 천우 12년, 정명 원년, 915), (신라의) 영묘사 안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었고, 까마귀집이 40개나 되었다.
(915) 3월, (신라에) 2번이나 서리가 내렸다.
6월, (신라) 참포 (지명)의 물이 바닷물과 함께 3일이나 서로 싸웠다.
정명 4년(918) 무인(918), 철원경의 민심이 갑자기 변하여 (고려)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공작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견훤이 태조와 속으로는 상극이었지만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척해서 좋은 말을 바치기까지 했다. (고기)
정명 5년(919) 무인(918) (제54 경명왕 때), (신라의) 사천왕사의 벽화 속 개가 짖었다. 그래서 3일이나 불경을 외워 쫓아냈지만 반나절 만에 또 짖었다.
정명 7년(921) 경진(920) 2월, (신라의) 황룡사의 탑 그림자가 금모 사지의 집 뜰에 1달이나 거꾸로 있었다.
10월, (신라) 사천왕사의 오방신의 활시위가 모조리 끊어졌고, 벽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속으로 들어갔다.
제55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 해(동광 2년 갑신, 924),(신라) 황룡사에서 백좌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그리고 선승 300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대왕이 친히 행차하여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로서는 선종과 교종이 함께한 시초가 되었다.
동광 3년(925) 겨울 10월, 견훤이 3,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싸웠으나 견훤의 병사가 날쌔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없었다. 태조는 임시로 화친하여서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 목적으로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그리고 친척인 왕신을 볼모로 보내자, 견훤도 사위인 진호를 볼모로 삼아 서로 교환했다. (고기)
동광 3년(925) 12월, 견훤이 거서 등 20여 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그리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어 번국이라 칭했다. 그러자 당에서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에 제수하고, 예전처럼 도독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사백제왕을 지내게 하고 식읍을 2,500호로 했다. (고기)
동광 4년(926), 견훤의 사위 진호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였다고 의심하고는 그 즉시 왕신을 가두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지난 해에 보냈던 말을 돌려달라고 하자 (고려)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주었다. (고기)
천성2년(927) 정월, 태조가 편서(최치원이 씀)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오월국 사신 반상서가 보낸 편지도 받았고 그대가 길게 써서 보낸 편지도 받았소. 오월국 왕의 편지를 보고 감격스러웠지만 의심스러운 점도 피하기는 어려웠소. 지금 돌아가는 사신에게 내 심정을 말하려 하오. 나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추대되어,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맡아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소. 지난번 삼한에 액운이 들어 전국에 흉년이 들었고 많은 백성들이 도둑떼가 되었으며, 논밭은 황무지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소. 그래서 전쟁의 위험을 없애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고자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려고 우호관계를 맺었소. 그랬더니 과연 수천 리의 농민이 생업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7~8년 간 병사들이 한가하게 쉴 수 있었소. 그런데 을유년(925) 10월에 이르러 갑자기 일이 생겨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소. 그대는 처음에 적을 가볍게 여겨 곧바로 진격하기를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듯하다가,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하게 후퇴하기를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 같았소. 그대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말을 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영원히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만일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소. 나도 또한 전쟁을 그치게 하는 무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을 지키기 위해, 드디어 겹겹이 에워싼 포위를 풀어 지친 병사들을 쉬게하고 볼모를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소. 이는 다만 백성들이 편안해지기만을 바란 것이오.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무리가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과 같은 독으로 백성들을 해치고, 이리와 호랑이 같은 미친 짓으로 경주 주변을 가로막고 신라의 궁궐을 어려운 상태에 빠뜨려 왕궁을 놀라게 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대의를 지켜 주를 높이는데 있어서 누가 환공과 문공이 이룬 패업만 하겠소? 기회를 엿보며 한을 차지하려던 왕망이나 동탁같은 간사한 자만 보았을 뿐이오. 지극히 존귀한 신라왕을 굽혀서 그대에게 아들이라 부르게 했으니, 높고 낮음이 그 차례를 잃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걱정하게 했소. 그러니 크게 보필하는 충성과 순수함이 없다면 어찌 다시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소? 나의 마음은 사악함이 없고 나의 뜻은 간절히 신라 왕실을 높여서, 장차 조정을 안정시키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제하려고 했소. 그런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망각하여 임금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으며,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군사와 백성을 살해했으며 궁녀는 잡아서 수레에 태웠고 보물은 약탈해 수레에 실었소. 그 포악함은 폭군 걸과 주보다 더 하였고 잔인함은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올빼미보다도 더 심했소. 나의 원한은 신라왕이 죽자 극에 달하여, 크나큰 정성으로 큰 매가 참새를 쫓듯이 개와 말이 충정을 다하듯이 다시 군사를 일으킨지 2년이 되었소. 땅에서 공격할 때는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듯이 빨랐고 물에서 공격할 때는 호랑이가 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군대를 일으키면 헛수고한 적이 없었소. 윤경을 바닷가에서 추격할 때는 갑옷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추조를 성 부근에서 잡았을 때는 시체가 들판을 덮었으며, 연산군 (지명) 근처에서는 길환을 군대 앞에서 목 베었고, 마리성 주변에서는 수오를 깃발 아래에서 죽였으며, 임존성을 뿌리 뽑은 날에는 형적 등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청천현을 깨뜨렸을 때는 직심 등 4~5명이 머리를 바쳤소. 동수에서는 깃발만 바라보고도 궤멸되어 흩어졌고, 경산은 항복했고 강주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했으며, 나부는 서쪽으로부터 예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복하는데 어찌 오랜 시간이 걸리겠소? 반드시 저수의 군대에서 장이의 천 가지 원한을 씻어주고, 오강의 언덕에서 한왕이 한 번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풍파가 그치고 영원히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하늘이 돕거늘 천명이 어디로 가겠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이 먼 지방까지 미치고 어짊으로 백성들까지 깊이 사랑하시어, 특별히 대궐에서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에서 전쟁을 그치라고 했소. 이미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 만일 그대도 이 글을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아니라 우리나라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잘못을 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편지를 받은 이후이기에 천성 3년인 928년일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에도 928년 1월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천성 2년 정해(927) 9월, 견훤이 근품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성에 불을 질렀다. 신라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태조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견훤이 고울부를 습격하여 빼앗았다. (고기)
천성 2년 정해(927) 9월, 백제 견훤이 신라에 침입해 고울부에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이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날쌘 군사 1만으로 구원하도록 했다.
천성 2년 정해(927) 10월,(견훤이) (족)시림으로 진격했고, 순식간에 신라의 수도까지 들어갔다. 신라왕과 왕비는 포석정에 나와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더욱 크게 패했다. 견훤은 부인을 끌어다 난행을 하고, 왕의 친척 동생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그런 연후에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나라의 보물과 병기를 빼앗고 자녀들과 기술이 뛰어난 장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고기)
천성 2년 정해(927) 10월, 고려의 구원병이 채 이르기도 전에 견훤이 겨울 10월에 서울(=경주)를 급습했다. 이때 왕은 비빈 및 왕족들과 포석정에서 노닐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치자 창졸간에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왕과 왕비는 후궁으로 달아났고 왕족과 공경대부와 그 외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지만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엎드려서 노비가 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나라와 백성의 재물을 약탈했으며, 왕궁으로 들어가 머물며 왕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왕과 왕비 및 첩 몇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잡혀 군사 속으로 끌려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범했으며 부하들을 시켜 빈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일가 동생인 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웠다. 왕읜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 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했다. 우리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927년) 11월, (고려) 태조는 정예 기병 5,000으로 공산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지만,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했고 모든 군대가 패해 태조만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견훤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그가 맘대로 하도록 둘 수 밖에 없었다. (고기)
(927년) 12월 7일,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견훤에게) 와서 왕의 편지를 전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경은 고려와 오랫동안 화친을 맺고 서로 이웃나라로서 맹약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양국의 볼모가 죽자 드디어 옜날의 우호적인 관계를 깨고 서로 국경을 침략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전담할 사신을 경의 본도에도 보내고 고려에도 보내어서,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 영원히 평화롭게 되기를 바라오" (고기)
무자년(928) 봄 3월, (고려)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행해서 경주 근처에 이르렀다. (경순)왕과 백관이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공궐로 들어와 서로 마주했다. 마음과 예를 다해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얼큰해지니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침략을 당하여 난리를 불러 일으켰고, 견훤이 불의한 일을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니 신하들도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도 눈물을 흘렸다.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정숙하고 조용했으며 조금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도성의 남녀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했다.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이 왔을 때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
무자년(928) 8월,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안장을 한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선물을 주었다.
42년 경인(930), 견훤이 고창군을 공격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석산에 진을 쳤다. (고려) 태조도 100보쯤 떨어져서 그 고을 북쪽 병산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웠지만 견훤이 패했고, 시랑 김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다음날 견훤이 병사들을 수습하여 순주성을 습격하여 깨뜨리자, 성주 원봉이 막아내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순주(성)를 하지현으로 강등시켰다. (고기)
장흥 3년(932), 견훤의 신하 공직이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했다.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고기)
장흥 3년(932) 가을 9월, 견훤이 일길을 보내어 수군으로 고려의 예성강에 침입하여 3일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진주 3주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태우고 돌아갔다. (고기)
청태 원년 갑오(934), 견훤이 (고려) 태조가 운주에 주둔했다는 것을 알고 정예병을 뽑아 새벽 일찍 밥을 먹고 떠나도록 했다. 그러나 태조의 군영에 이르기도 전에 (고려) 장군 금필이 날랜 기병으로 공격해서 3,000여 명을 베어 죽였다. 그러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이 소문을 듣고 (고려에) 항복했다. 견훤의 부하인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 용감한 장수인 상달과 최필 등도 태조에게 항복했다. (고기)
(935), 견훤의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기)
청태 2년 울미(935) 봄 3월,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서, 견훤을 금산사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이게 했다. 그리고 신검이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는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용서해 풀어 주었다. 애초에 견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묻자 신검이 말했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사 불당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했다.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과 시녀 고비녀, 나인 능우남 등과 갇혀 있었다. (고기)
(935) (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고기)
청태 2년 울미(935) 봄 4월, (견훤이)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을 취하게 하고 탈출했다. (고기)
(935)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투항했다. (고기)
(935) (고려) 태조는 소원보, 향예, 오담, 충질 등에게 바닷길로 가서 견훤을 맞이하도록 했다. 이미 견훤이 도착하자, 태조는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많다고 하여 상보라고 부르며 남궁에 모시고, 양주의 식읍전장과 노비 40명, 말 9필을 주고, 그 나라에 먼저 와서 항복한 신강을 아전으로 삼았다.
청태 2년 을미(935) 10월, (신라)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나라의 것이 되었고 나라는 약해지고 형세는 고립되어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곧 왕은 여러 신화들과 국토를 태조에게 바쳐 항복하는 것을 의논했다. 여러 신하들의 찬성과 반대가 분분하여 끝이 없었다. 왕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입니다. 당연히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힘을 다한 후에야 그만둘 뿐입니다. 어떻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를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곧 시랑 김봉휴에게 국서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을 청했다. 태자는 통곡하며 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장 개골산으로 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막내 아들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이라 했다. 후에는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태조가 국서를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어 맞이하도록 했다.
청태 2년 을미(935) 11월, (경순)왕은 모든 관료를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해왔다. 아름답게 꾸민 수레와 호화로운 말들이 30여 리나 늘어서 있어 도로가 꽉 막혔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처럼 늘어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와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을 내주어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장녀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도록 했다.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라고 했는데, 시호는 효목이다.
청태 2년 을미(935) 12월, (경순)왕을 정승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의 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공(=김부)의 식읍으로 삼았다.
병신(936) 정월, 견훤이 아들에게 말했다. "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병사가 북군보다 배나 많은 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도와주는 것 같구나. 북왕(=태조)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3명이 모두 듣지 않았다. (고기)
천복 원년 병신(936) 2월,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가) 사람을 보내 (고려) 태조에게 뜻을 전하며 말했다. "임금께서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대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그러자 태조가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도 고마워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세하여 길에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뵌 다음에 대청에 올라 부인에게 절을 하고, 형님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들도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천복 원년 병신(936) 6월,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말했다. "늙은 신하가 전하에게 투신한 이유는 전하의 위엄을 빌려서 반역한 자식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이 신병을 빌려주어서 그 못된 자식과 신하를 섬멸하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말했다.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천복 원년 병신(936) 가을 9월, (고려)태조가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서 군사를 합하여 일선까지 진군하자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맞섰다.
천복 원년 병신(936) 가을 9월 갑오일, (고려 태조와 신검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태조의 군사는 동북쪽을 등지고 진을 쳤다. 태조가 견훤과 함께 군대의 위용을 보이고 있는데, 갑자기 칼과 창처럼 생긴 하얀 구름이 우리 군사쪽에서 알오너 적진을 향하여 갔다. 이때 북을 치며 전진했는데, 백제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고 등이 군대의 위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군대 앞으로 와서 항복했다. 태조가 항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로하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능환만은 문책하여 말했다. "애초에 양검 등과 몰래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자식을 세운 것은 너의 꾀였다. 신하의 의리가 마땅히 이러한 것인가?" 그러자 능환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명을 내려 목을 베었다. 신검이 함부로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이 위협했기 때문이지 그 본심이 아니었고, 또 귀순하여 죄를 빌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고기)
천복 원년 병신(936) 가을 9월 8일, 견훤은 울화가 치밀어서 등창이 났다. 결국 며칠 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고기)
(진) 천복 원년 병신(936), (신검이) 일선군에서 고려군과 싸웠는데 백제가 패아자 나라가 망했다. (고기)
왕후사를 창건한지 500년이 되는 해(952), (고려가 이 곳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절에 바친 밭과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이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그러자 절의 삼강이 왕후사가 절의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 동남쪽 안에 있다고 하여 절을 철폐하고 농장으로 만들었다. (가락국기)
개보 8년(975) 10월 모일, (겅순왕을) 상보로 책봉했다. 글은 이러하다. "조칙을 내리노라. 주가 나라를 연 초기에 먼저 여망을 봉했고, 한이 나라를 일으킨 처음에 소하를 제일 먼저 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안정되고 기업을 널리 열 수 있었다. 주는 30대를 이어 400년간 이어지면서 해와 달은 더욱 밝아지고 하늘과 땅은 평화로웠다. 비록 무위의 군왕에서 시작되었지만 잘 다스리는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의 지위였다. 영특하고 초탈한 기상을 지녔고 문장의 재주는 땅을 뒤흔들 만하였다. 부유함은 춘추로 계속되었고 귀함은 봉토를 누렸다. 육도삼략같은 뛰어난 지략이 가슴 속에 들어 있어서 제갈량처럼 뛰어난 능력도 그 손바닥 안에 있었다. 우리 태조께서 비로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셨기에 일찍이 그 풍모를 아셨다. 때를 기다렸다가 사위로 맞아들여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하셨다. 국가가 이미 하나로 통일되었고 임금과 신하가 완연히 삼한에 합쳐졌으니, 그대의 훌륭한 이름은 널리 전해지고 그 아름다운 규범은 빛날 것이다. 그대에게 상보 도성령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칭호를 내리노라. 훈작과 봉호는 예전과 같ㄱ고 식읍은 이전 것과 합해 10,000호에 봉하노라. 담당 관원은 날을 정하여서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 8년 10월 모일.
대광 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은 봉행하되, 위와 같은 칙명을 받들어 직첩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하라. 개버 8년 10월 모일. 시중 서명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서명 군부령 서명 없음 병부령 서명 없음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서명 없음 내봉시랑 서명 없음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서명 없음 군부경 서명 병부경 서명 없음 병부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 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 일만호 김부에게 고한다. 칙명이 위와 같으니 직첩이 이르는 대로 봉행하라. 주사 이름 없음 낭중 이름 없음 서령사 이름 없음 공목 이름 없음 개보 8년 10월 모일에 내린다"
신라가 이곳(=가야 지역)에 태수를 둔 뒤 259년(940년), (고려) 태조가 (이 곳을) 통합한 뒤에는 (이 지역을) 대대로 임해현이라 했다. (가락국기)
태평흥국 3년 무인(978),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순이다.
통화 15년 정유(997) 5월 모일, 여주 공덕대사의 수놓은 휘장이다 (자복사의 휘장)
순화 2년(991), (고려) 김해부 양전사였던 중대부 조문선이 이렇게 조사해 아뢰었다. "수로왕릉 사당에 소속된 밭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옛 관례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나누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일을 담당한 관서에서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 왕의 뜻을 알리며 말했다. "하늘이 내린 알이 거룩한 군왕으로 변화해서 왕위에 있으면서 수명이 158세였다. 저 삼황 이래로 이에 비길 만한 이가 없었다. 수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상 때부터 사당에 밭을 소속시켜 왔는데, 지금에 와서 이를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의아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그렇다고 여겨서, 밭의 반은 사당에 소속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래서 절사(-양전사)가 조정의 명을 받아 절반은 사당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 양전사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갑자기 7~8명의 귀신을 보았는데,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 죄가 가장 크니 베어 죽어야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는다는 말에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서 깼다. 그리고 곧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달아나다가 그 병이 더 심해져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양전도장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뒤에 명을 밭고 그 밭을 조사보니, 11결 12부 9속으로, 부족한 것이 3결 87부 1속이었다. 그래서 없어진 밭을 조사하여 중앙과 지방 관청에 보고하자 넉넉하게 지급하도록 명했다. (가락국기)
문묘조 대강 연간(1075~1084), 금광지주사 문인이 (가락국기를) 지었다.
금상(=지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신 지 31년(대강 2년, 1076) : (건안 4년 기묘(199)에 처음 사당을 세운 뒤에) 무릇 878년이나 되었지만, 쌓아올린 아름다운 흙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당시 심었던 아름다운 나무들도 마르지도 썩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그곳에 장식한 수많은 옥조각도 부서지지 않았다. (가락국기)
- 연도 불확실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에는 금관경이라 이름하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태조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이라 하고 배안사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 혹은 김해부라고 하고 도호부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를 둔 것이 64년이었다. (기이2 가락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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