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 사서를 참고함 |
전한 지절 원년 임자(-69년) 3월 초하루(=삭), 6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자를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봤는데, 양산 밑의 나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고 왕위를 거슬한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천자께서 히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당연히 덕 있는 왕후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 하리라" 이날 사량리 알영정(=아리영정) 주변에 계룡이 나타났는데 왼쪽 옆구리에서(혹은 죽은 용의 배 안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와 비슷했다. 월성 북천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 시내 이름을 발천이라고 했다.
오봉 원년 갑자(-57년), (두 성인(혁거세와 알지)가 13세가 되던 해에) 남자는 왕으로 즉위했고,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 혹은 서벌, 사라, 사로라 불렸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께림국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4년),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 왕의 죽은 육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이 시신을 합하여 장사 지내려 했지만 큰 뱀이 쫓아 다니며 방해했기 때문에, 결국 오체(머리와 사지)를 따로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 이름을 사릉이라 했다.
전한 원시 4년 갑자(4년), (남해거서간이) 왕위에 올랐다.
천봉 5년 무인(18년), 고(구)려의 속국이던 7개 나라가 항복해왔다.
유성공 경시 원년 계미(23년), (노례왕이) 왕위에 올랐다.
지황 4년(23년) 갑신(24년), (남해거서간이) 세상을 떠났다.
갑신(24년), (노례왕이) 왕위에 올랐다. (연표)
노례왕 9년(32년), (그중 한) 부를 두고(=설치하고) 이름을 급량부라고 했다. 이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내렸다.
건무 18년(42년), (노례왕이)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고(구)려 군사가 와서 (신라를) 침략했다.
광무제 중원 2년 정사(57년) 6월,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영평 3년 경신(60년) 8월 4일 밤, 호공이 월성 서리(=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구림) 속에서 매우 큰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혁거세의 옛 일과 같았다. 그래서 혁거세가 자신을 알지라고 한 일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는 향언(=우리말)로 어린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오면서 기뻐 뛰어놀고 춤을 추었다.
중원 6년(영평 4년, 61년) 8월 4일 밤, 호공이 월성 서리(=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구림) 속에서 매우 큰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혁거세의 옛 일과 같았다. 그래서 혁거세가 자신을 알지라고 한 일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는 향언(=우리말)로 어린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오면서 기뻐 뛰어놀고 춤을 추었다.
탈해 재위 23년(건초 4년 기묘, 79년), 탈해가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 가운데에 장사 지냈다. 그 뒤 탈해의 신령이 나타나서 명하였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해골의 둘레가 3자 2치였고, 몸 뼈의 길이가 9자 7치였다. 치아는 엉기어 하나처럼 되었고, 뼈마디도 모두 이어져 있었으니, 참으로 천하무적 역사(=장사)의 골격이었다. 그 뼈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대궐에 두었는데, 신령이 또 나타낫거 명하였다. "내 뼈를 동악에 두어라" 그래서 동악에 모시게 되었다.
제8 아달라왕 즉위 4년(정유, 157년), 듕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조(=마름)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바위(혹은 물고기)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자 이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그리고 연오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오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 바위도 예전처럼 세오를 태우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세오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렸다. 일관(日官)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이한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라 했다. 그러자 연오가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대신 짐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곧 비단을 내려주었고 사신은 돌아가 이 일을 아뢰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이 났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으며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고 했다. 제천소를 영일현(혹은 도기야)라고도 했다.
제17 나밀왕 즉위 36년 경인(390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 왕을 알현하고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 대왕께서 신성하시다는 말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의 죄를 대왕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원하옵건데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주시어, 저희 임금님께 성의를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왕은 당시 10세에 불과해 말과 행동이 미숙한 셋째 아들 미해(혹은 미토희)에게 내신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함께 왜를 방문하게 했다. 그러나 왜왕이 이들을 억류시켜서 30년 동안이나 돌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의희 9년 계축(413년), 평양주(남평양(=고려의 양주)으로 추측)의 대교(=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눌지왕 3년 기미(419년), (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알현하고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 대왕의 동생 보해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서 특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게 하셨습니다"왕은 이 말을 듣고 두 나라가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구려에 가도록 명하고, 내신 김무알을 보좌관으로 삼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장수왕도 이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426) 을축(425년), 왕이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호걸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3번 돌고 온갖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들을 돌보셨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냈다가 다시는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또 짐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이웃나라의 군사가 너무나 강하여 전쟁을 그칠 날이 없었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하였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고 동생을 구려에 보넀소. 그런데 고구려도 동생을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짐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단 하루 잠시라도 이 일을 잊은 적이 없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소. 만일 두 동생을 만나 함께 선왕의 사당에 감사드릴 수 있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오. 누가 이 일을 이룰 수가 있곘소?" 이때 모든 신하들이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반드시 슬기롭고 용맹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 태수 제상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러 물었는데, 제상이 2번 절하고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 '임금께 근심이 있으면 신화가 욕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는다'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강도를 따지고 행하면 충성이 아니고,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린 뒤 움직인다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못났지만 원컨대 명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칭찬하고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은 뒤 헤어졌다.
(426년) 5월 15일에 (김)제상은 고성의 수구에 와서 배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제21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 무진(488년), (왕이) 천천정에 행차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말로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시오" 왕은 말을 탄 병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쫓아가도록 하였다. 병사가 남쪽으로 피촌(=고려의 양피사촌)에 이르렀는데, 돼지 2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병사는 한참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길가를 배회하는데,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편지를 주었다. 편지 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를 열면 2명이 죽을 것이고, 열지 않으면 1명이 죽을 것이다" 이 편지를 왕께 바치자 왕이 말했다. "2명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 보지 않고 1명이 죽는 것이 낫겠다" 그러자 일관이 아뢰었다. "2명은 서민을 말하는 것이고, 1명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여기고 편지를 열었다. 그랬더니 그 속에는 '射琴匣(금갑을 쏴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궁으로 들어가 금갑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하던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2명은 사형을 당했다.
영원 2년 경진(500년),(지철로왕이) 즉위했다.
영원 3년 신사(501년),(지철로왕이) 즉위했다.
승성 3년(554년) 9월, 백제의 병사가 (신라의) 진성에 쳐들어 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대건(大建) 8년 병신(태건의 오타로 보임, 576년), (제25 사륜왕이) 왕위에 올랐다.
대건(大建) 11년 기해(태건의 오타로 보임, 579년), (제25 사륜왕이) 왕위에 올랐다. (고본)
대건(大建) 11년 기해(579년) 8월, (제 26 백정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자였다.
(백정왕이) 왕위에 오른 첫 해(579년), 하늘에서 천사가 궁전 뜰로 내려와 왕께 말했다. "상황(=상제)께서 저에게 명하시어 이 옥대를 전해주라 하셨습니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자,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교외와 종묘에서의 큰 제사를 지낼 때면 모두 이 옥대를 사용했다.
진평왕 17년 을묘(595년), (김유신공이) 태어났는데 해와 달, 목, 화, 토, 금, 수 등의 칠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으며 신기하고 기이한 일도 많았다.
임신(612년), (18세가 되었던 유신공은)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 그 당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는 백석이란 자가 화랑도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정관 6년 임진(632년), (선덕왕이) 왕위를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3가지의 앞일을 미리 알았다.
정관 15년 신축(641년), (의자왕이) 왕위에 오르자,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영희 5년 갑인(654년),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당사)
현경 4년 기미(659년), 백제의 오회사(=오합사)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6시간 동안 절을 돌며 공덕을 닦았다. (당사)
현경 4년 기미(659년) 2월, 여러 마리의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1마리가 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당사)
현경 4년 기미(659년) 4월, (백제의)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했다. (당사)
현경 5년 경신(660년) 2월, (백제의) 수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 작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현경 5년 경신(660년) 4월, (백제에서)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수도의 백성들은 아무 이유 없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치 누가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놀라서 엎어 죽는 자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재물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현경 5년 경신(660년) 6월, (백제의 )왕흥사 중들 모두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다. 들사슴처럼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해 짖었는데 얼마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성안의 개들이 길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흩어졌다. 어떤 한 귀신이 궁에 들어와서 외쳤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그리고 곧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보게 하니 3자 정도 파 들어가자 거북이 1마리가 있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무당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말했다.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달입니다. 차면 이지러지는 법입니다.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무당을 죽여 벼렸다. 어떤 자가 이에 대해 말했다. "둥근 달은 강성하다는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고 하는 것은 미미하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는 강성해지고 신라는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기뻐하였다. (당사)
(현경) 5년 경신(660년), (신라 태종은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인문을 사신으로 보내 당에 군대를 요청했다. 당 고종은 좌무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 행책총관으로 삼아, 자(字)가 인원인 좌위장군 유백영과 좌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을 거느리고 13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했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신라군을 거느리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은 김유신에게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좌평 의직이 나아가 아뢰었다. "당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지만 물에서 싸우는 것은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군은 대국의 지원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군이 불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빨리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군과 결전하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달솔 상영 등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먼 길을 왔기에 빨리 싸우려고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라군은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한 적 있으므로,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며, 우선 일부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기회를 엿보아 싸운다면 군사를 보전할 수 있고 나라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고민했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에 귀양을 가있었고 왕은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사태가 급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가 말했다.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사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귀양을 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자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당군이 백강(=기벌포)에 들어오게 하여 물결을 따라오면 강의 폭이 좁아 배가 한 줄로올 것이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와 작은 길을 따라오면 말을 한 줄로 타고 올 것입니다. 바로 이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닭장에 든 닭이요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리 될 것입니다" 그제야 왕이 말했다. "그렇구나" 또 당과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으로 나아가 신라군과 싸우게 했다. 계백은 4번 싸워 모두 이겼지만, 병력이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했고, 죽었다. 신라군과 당군은 진군하여 군사를 합해 나루 어귀에 다다라 강가에 주둔했다. 이때 갑자기 새 1마리가 소정방의 군대 위를 빙빙 돌며 날아다녔다. 그래서 점을 쳐보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 하자 김유신이 말했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종하여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떻게 불길한 일이 있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신검을 뽑아 새를 겨누었더니 그 새가 찢어져 자리 앞에 떨어졌다. 그제야 소정방은 백강의 왼쪽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했다. 당군이 밀물을 타고 전선들이 꼬리를 물고 전진하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달려가 30리 밖에서 머물렀다. 성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지만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군이 승세를 몰아 성으로 들이닥쳤다. 왕은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구나!" 마침내 태자 융(=효)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가 그에게 말했다. "임금께서 태자와 함께 탈출하셨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 해도 우리들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문사는 측근들과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탈출했다. 백성들도 모두 뒤따라갔지만 태는 막지 못했다. 소정방이 군사들에게 성을 넘어 당의 깃발을 꽂게 하자 태는 궁지에 몰려 곧 성문을 열고 목숨을 빌었다. 이렇게 되어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과 함께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이때)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 도독부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해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 왕문도를 서웅진 도독으로 삼아 백제의 백성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당 황제를 뵈자, 황제는 포로들을 꾸짖기만 하고 그 죄를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의 작위를 주고 옜 신하들이 조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비석도 세워주었다. (당사)
경신(660년), (태종 춘추공)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점심은 먹지 않고 아침과 저녁만 먹었다.
용삭 원년 신유(661년), (춘추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당사)
(현경) 7년 임술(662년),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가 곧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고구려군을 패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군영으로 만들었다.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사)
(663년), 소정방은 양주 안집대사가되어 토번을 평정했다. (당사)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년) 가을 8월 경자일,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 행차했다. 임시 왕인 부여 융과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을 할 떄, 먼저 하늘의 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연후에 피를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여 말했다. "지난 날 백제의 전 왕이 거역하고 순종하는 도리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사돈인 신라와 화목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파괴하고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할 해가 없었다. 천자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잃어버림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백제는 험한 지세와 먼 거리를 믿고 천도를 업신여겼다. 이에 황제가 크게 화가 나 삼가 정벌을 행하였으니, 그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했다. 마땅히 궁궐과 저택을 무너뜨려 연못으로 만들어 후손들을 경계시키고 폐단의 근원을 아예 뽑아버려 자손들에게 교훈을 보여야 하리라. 그러나 귀순한 자는 회유하고 반역한 자는 징벙하는 것이 선왕들의 훌륭한 전범이며, 망한 자를 일으키고 끊어진 자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전의 서적에 전해온다. 그러므로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옛 땅을 보전하게 하노라. 신라에 의지해 길이 우방이 될 것이며, 각자 묵은 원한을 없애고 우호를 맺어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느니라. 공손히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제후의 나라가 되어야 하느니라.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하노라. 혼인을 약속하고 거듭 맹세하여 짐승을 잡아 피를 바르고, 처음과 끝을 함께 돈독히 하라. 재앙을 함께 나누고 환란을 구할 것이며 형제처럼 은혜를 베풀라. 삼가 천자의 말을 받들어 감히 저버리지 말지어다. 맹세를 한 후 함께 절의를 지켜라. 만약 이를 어겨 그 덕이 한결같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여 변방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이를 살피어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도 보전하지 못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은 혈육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철판에 글자를 새기고 금으로 칠을 하여 종묘에 간직해두고 자손만대에 감히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라. 신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어 복을 내려주옵소서" 피를 바른 뒤 폐백을 신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으로 대묘에 보관했다. (신라별기)
건봉 2년(667년), 소정방이 죽자 당 황제는 매우 슬퍼하며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장이라 했다 (당사)
총장 원년 무진(668년), 우리 신라에서 청한 당군이 평양 교외에 주둔하고, 편지를 보내 급히 군량미를 보내달라 했다. 왕이 신하들을 모아 물었다. "적국에 들어가 당군이 주둔한 곳까지 가자면 그 형세가 위태로울 것이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한 군대가 군량이 떨어졌다는데도 이를 보내지 않는다면 또한 부당한 일이요. 어떻게 하겠소?" 그러자 김유신이 아룄다. "신 등이 군량미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청하옵건데 대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유신과 인문 등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가 군랸 2만 섬을 보내주고 돌아오, 왕은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만나려 했는데, 유신이 먼저 연기와 병천 2명을 보내 만날 날짜를 물었다. 그러자 소정방이 송아지와 난새를 그려서 보냈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서 원효법사에게 물으니, 이렇게 풀이해 주었다. "속히 군대를 돌아오게 하시오. 송아지를 그리고 난새를 그린 것은, 화독(畵犢 : 송아지를 그리다), 화란(畵鸞 : 난새를 그리다)의 반절음으로 '혹한', 즉 빨리 돌아가라는 '속환'의 뜻이 되는 것이오" 그래서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강을 건녀며 군령을 내려 말했다. "뒤에 건너는 자들은 목을 베리라!" 군사들이 앞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와 미처 못 건넌 자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들을 도로 추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 죽였다. (고기)
조로 2년 경진(27세 문무왕 때, 680년) 3월 15일(=보름날) 신유일 밤, 문무왕(宗)의 꿈에 몹시 위엄 있고 무섭게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데 두거라'라고 하여서, (문무)왕은 이 말대로 했다.
대력 14년 기미(제37세 혜공왕 때, 779년) 4월,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공의 총(=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장군과 모습이 비슷하였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릉(=무덤) 속에서 우는 듯한 소리가 진동했고, 혹 호소하는 소리 같기도 했으니, 그 말은 이러하였다. "신은 평생토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가 제 공적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왕께선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이 답했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3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회오리 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유신)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
청태 4년 정유(937년) 5월,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가 10아름이고 아로새긴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을 진평왕의 천사대라고 한다. 태조께서 이를 받아 궁중의 창고에 보관했다.
고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 증흥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잠, 동산, 피상,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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