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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박물관 ~동래에서 가야를 만나다~ | ||
박물관 소개 |
1996년 개관한 복천박물관은 사적273호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1500년 전 가야의 왕들이 남긴 15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는 고고학 전문 박물관입니다. | |
오시는 길 |
도시철도 동래역에서 하차 => 4번 출구 맞은편에서 6번 마을버스 승차 => 복천박물관 정류장에서 하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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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안내 | 관람시간 | 09:00~18:00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 완료) |
휴관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휴관) | |
관람료 | 무료 | |
전화번호 | 051)554-4263 051)554-4264 |
청동기시대~삼한시대의 동래 온천 |
동래온천 일대는 금정산에서 뻗어나온 낮은 구릉과 온천천 등,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부산박물관은 금강공원 내 생활체육시설 정비와 관련된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삼한시대 환호(還壕) 및 무덤군을 발굴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네모와 긴 네모 모양으로, 총 5기 중 한 집자리에서는 모서리에서 얇은 돌로 만든 배수시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유물로는 무늬없는 토기와 돌끌 등의 도구들과 수정 1점이 출토되었으며, 시기는 기원전 10~9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환호는 구릉 능선에 둥글게 도랑을 파고 흙둑과 나무울타리를 세워 다른 공간과 구분한 것으로, 적이나 동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거나 내부가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경계의 의미를 가진다. 온천동유적의 환호는 2종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환호 안에서는 제사 때 사용하는 굽다리토기와 소형토기, 가락바퀴 등과 함께 일본의 야요이계 토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곳은 무덤 공간으로 이용되어 널무덤이 만들어졌다. 널무덤에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이었던 철검·철창·따비·도끼·끌 등 철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삼한시대에 부산에 존재하였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독로국의 한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온천동유적에서는 동래지역뿐만 아니라 부산의 청동기시대와 삼한시대의 역사를 해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고, 이 유물들은 현재 복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여지도의 동래온천 (1736~1776년·국립종앙도서관 소장) |
따뜻한 온정(溫井)의 고장 |
동래온천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온정(溫井)이라 불리었으며, 신라의 왕과 재상으로부터 고려·조선시대의 왕실·대신들이 찾아와 목욕을 하는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편의 '온천은 (동래)부(府)의 북쪽 5리에 있는데, 그 열이 계란을 익힐 만하고 병자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바로 나아 신라시대에는 왕이 여러번 이곳에 행차하여...'라는 기록에서 동래온천의 효험을 잘 알 수 있다. 동래에 부임한 부사들은 국가적 관심을 받는 동래온천을 관리하고 개발하였다. 1691년(숙종17) 동래부사 김흥복은 새로운 온천을 파고, 온정 옆에는 행랑 5칸이 딸린 7칸 규모의 '온정가(溫井家)'라는 관공서를 세우고, '온정직(溫井職)'이라는 관리를 배치하여 온천의 관리를 맡겼다. 그 후 동래부사 강필리에 의해 1765년(영조41)에 새로 지어진 온정은 '돌로 탕 두 개를 만들고 아홉 칸의 욕사(浴舎)를 지었는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지붕을 덮었다'고 되어 있다. 이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온정개건비로, 현재 동래온천 노천족탕 옆 용각(龍閣) 내에 보존되어 있다. 온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고치고 손질되었다. |
<한강봉산욕행록(조선시대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30일간의 목욕여행 기록)> |
"오시에 온정의 욕소에 도착했다. 주백(동래부사)은 지난 봄에 이미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2실 1청 규모의 초옥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매우 정결하였다. 지금 선생을 따라 오는 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는 다시 임시가옥 2칸을 지어 제자들이 거처할 것으로 삼았으니 그 정성을 족히 알 수 있었다. 정(井, 온정)의 안팎에는 석감(石龕)이 있는데, 세상이 전하기를 신라왕이 만든 것이라 한다. 하나의 감에는 5,6명씩 들어갈 수 있고, 샘은 위쪽의 석공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이 매우 뜨거워 손과 발을 함부로 담글 수가 없다" |
시추작업과 온천유속 시험장치(일제강점기) |
철관으로부터 용출되는 온천(일제강점기) |
근대의 온천장에서 오늘날의 찜질방까지 |
부산이 개항하자 일본인들이 직접 동래온천의 온천업에 뛰어들었으며, 1878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인 전용의 근대 목욕탕이 생기고, 1898년에는 일본인이 위탁 운영하는 여관이 생겼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주도로 일본인들의 휴양과 관광을 목적으로 한 동래 온천장 주변의 시가지 정비, 온천천 제방공사, 전차 개통 등의 사업이 이루어졌다. 부산의 명소를 소개하는 각종 안내서와 지도, 사진엽서에는 '온천장'이 빠짐없이 소개되었다. 일제는 1922년과 1923년 2차례에 걸쳐 동래 온천지역에 대한 지질조사와 온천수의 화학적 분석을 하였다. 온천장 일대에 여관과 욕탕이 증가하자 온천수의 고갈은 피할 수 없었으며,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인 사이에 배탕(配湯, 급탕)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다.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물싸움의 끝에 우리나라 사람은 동래온천 관리 권한을 따냈는데, 일제강점기에 탕원 권한을 우리나라 사람이 소유한 곳은 동래 온천이 유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온천장은 관광유흥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동래온천의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부산에서는 때타올이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전통적 사우나와 현대적 목욕탕을 결합시킨 복합 레저시설이 창안되어 이것이 찜질방으로 유행하게 되는 등 우리나라 목욕문화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
동래온천 벚나무(일제강점기) |
금강공원 |
금강공원은 동래온천의 서쪽, 금정산의 기슭에 위치하는데, 자연적으로 자란 나무들로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이 만든 절경이 금강산에 버금간다 하여 금정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렀다. 금강공원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 192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온천장 개발이 활발해지자, 한 일본인 자본가가 자신의 사재로 온천장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인공연못과 폭포, 탑, 다리 등으로 정원을 꾸몄으며, 1931년 무렵에는 온천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개방하였다. 온천장에서 목욕을 즐긴 관광객들이 이 정원에서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당시의 엽서나 관광안내서에 자주 소개되었다. 1940년에는 정원을 동래읍에 기증하였고, 이 때 금강원으로 명명되었다. 해방 이후 1965년에 '금강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후 동물원과 식물원, 케이블카 등의 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절정기를 맞아 연간 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금강공원에는 최근까지,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조경 목적으로 옮겨졌던 망미루·독진대아문(현 동래부 동헌 외대문)·내주축성비·이섭교비와 같은 중요문화재들이 있었다.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합장한 무덤인 임진동래의총(부산시지정기념물 제13호)은 1970년대에 이장되어 금강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금강공원은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휴식처로 뿐만 아니라 역사 교육의 장으로도 한번쯤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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