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근대사까지! 양산의 역사를 소개하는 양산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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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선사시대부터 근대사까지! 양산의 역사를 소개하는 양산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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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북정리고분군에서 양산시립박물관과 양산문화원으로 가는 등산로같은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나옵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양산시립박물관 입구가 나오죠~

양산 북정동 683번지 유적 5호 앞트기식돌방무덤
5호분은 반지하식 구조의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무덤의 상부는 모두 유실되고 지하에 축조되었던 시상(시신안치부)과 벽체 일부만 남아있다. 무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내부 돌방의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다. 돌방의 벽은 돌을 가로 및 세로로 눕혀쌓아 축조하였다. 시상은 중앙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설치하였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마무리하였다.

유물은 양쪽 부장칸과 시상의 동쪽 벽 아래에 부장하였는데, 남쪽 부장칸에는 굽다리접시, 손잡이잔, 굽다리긴목항아리, 짧은목항아리 등의 소형토기류가 부장되었으며 북쪽 부장칸에는 굽다리긴목항아리, 굽다리곧선입항아리, 큰항아리 등 대형토기류와 쇠낫, 쇠화살촉 등의 철기류가 부장되었다. 시상 동쪽 벽 아래에서는 굽다리접시, 뚜껑잔과 같은 소형토기류와 귀고리 1쌍이 부장되었은데, 이는 처음 무덤이 축조된 이후 추가로 장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부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 북정동 683번지 유적 9호 앞트기식돌방무덤
9호분은 반지하식 구조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이다. 무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내부 돌방의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다. 돌방의 벽은 돌을 가로 및세로로 눕혀 쌓아 축조하였다. 시상(시신안치부)은 중앙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설치하였는데, 바닥에 넓은 돌을 2~3단 쌓고 자갈로 틈을 메워 넣었다. 무덤의 입구는 벽과 시상의 축조상태로 보아 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양쪽 부장칸과 시상에 부장하였는데, 각 부장칸은 2단으로 축조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매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쪽부장칸에는 굽다리접시, 뚜껑긴목항아리, 긴목항아리 등이 부장되었으며 북쪽 부장칸에는 짧은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의 대형토기류가 부장되었다. 시상 중앙에서도 2차로 매장된 시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칼과 연질작은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양산 북정동 683번지 유적 9호 앞트기식돌방무덤
13호분은 반지하식 구조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이다. 길게 다듬은 돌을 이용해 덮은 뚜껑돌 5매가 남아있으며 1~2매 정도의 뚜껑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과 내부 돌방의 평면형태는 모두 장방형이다. 무덤의 벽은 크기가 큰 돌을 가로로 눕혀 쌓고 작은 돌로 틈을 메워 넣었다. 시상(시신안치부)은 바닥에 넓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마련하고 그 위에 자갈을 깔아 마무리했다. 유물은 양쪽 부장칸과 시상 위에서 총 97점이 출토되었다. 남쪽 부장칸에는 굽다리접시, 굽다리손잡이잔, 굽다리입큰항아리 등의 소형토기류가 부장되었고 북쪽 부장칸에는 긴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의 대형토기류와 철기가 부장되었다. 주구는 무덤에서 2m 정도 떨어진 곳에 초승달 모양으로 조성되었다. 주구의 남쪽과 서남쪽에서 긴목항아리와 큰항아리가 파쇄된 채 출토되어 의례의 흔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3기의 야외 유적을 살펴보고 내려오면 왼편으로는 시청각실 입구가 나옵니다. 이곳은 정문이 아니기에 다른 길로 갑니다.

그렇게 양산시립박물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위치 경남 양산시 북정로 78(경남 양산시 북정동 678)
시간 화~일 09:00~18:00 (마지막 입장 17:00)
(월요일 : 정기휴무)
사이트 https://www.yangsan.go.kr/museum/main.do
주차장 있음

박물관 A동은 4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A동 박물관 B동 문화원
4층 전시실1, 전시실2, 기증실 - -
3층 종합연습실, 회의실, 강의실 3,4
2층 기획전시실, 희청헌 어린이박물관-아우름 원장실, 사무실, 강의실1,2
1층 안내, 대강당 시청각실 안내, 공연장, 향토사연구소

1층에 들어가면 사진쪽 라운지쪽이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실이 나옵니다.

양산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사송 유적과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던 후기 청동기 문화를 담은 양산 소토리 유적에 대해서 볼 수 있었죠.

양산의 선사문화
선사시대(-2000년 혹은 -1500년~-400년경)라 함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 즉 문자 기록이 아닌 남겨진 유물이나 건축물 등의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경관이 좋은 곳, 햇빛이 잘 드는 곳, 자연재해의 피해나 영향을 받지 않은 생활하기 편리한 곳에 터전을 잡기 마련이다. 특히 양산은 낙동강의 잦은 범람은 넓은 습지와 같은 형태가 형성하였으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집단생활이 시작하였다. 때문에 양산의 선사 유적들은 주로 양산천과 회야강 등 강을 끼고 펼쳐진 평야나 나지막한 구릉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양산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 하북면 신평 지산리, 지내리, 순지리유적, 회야강 일대의 평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자리부터 삼한시대 무덤까지 대거 확인되어 선사시대 양산의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소토리, 신기리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지석묘)은 현재 1~2기 정도가 남아있으나 과거에는 주변에 무리지어 분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소토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무덤부터 통일신라,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통토환타지아 유원지 건립 공사 때 발굴된 전기청동기문화를 담은 신평 유적 유물도 확인할 수 있었죠.

통도사, 신흥사, 계원암, 용화사, 내원사, 미타암, 원효암, 홍룡사와 같은 양산의 불교 유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세기 신라 자비 마립간 때 세워진 삽량성(歃良城)을 세우면서 양산 지역 중심의 성이 세워졌고, 이후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양산 시내 평지에 원형의 양산읍성(梁山邑城)을 세웁니다. 이곳엔 동문, 주출입구인 서문, 북문의 3대문이 있었으며, 그 외 관아, 객사, 창포정, 쌍벽루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양산읍성의 축소판 모형을 이곳에서 볼 수 있죠~

 

양산 신흥사의 범자무늬청동거울과 양산 물금 유산리(현 유산동)에서 출토된 양산 금동반가사유상을 포함한 다양한 양산의 불교 유적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중층 전시실로 넘어갑니다.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막하의 참모관으로 임진왜란 처음부터 전쟁에 종군한 정응갑(鄭應甲, 1574~1637)은 왜군을 추격하여 진주까지 가서 활약하는 등 나라일을 다했던 군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건공장군 행부사용 정덕건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인 대호군 장충보의 딸이었다고 하네요. 양산의 임진영웅인 그의 묘비명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양산 명동 솔밭골 백자 가마터(명동 산112번지 일원)에서 출토된 다양한 백자와 그릇, 병도 볼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에 작성된 자호(이름), 토지의 주소, 방향, 넓이, 소유주 등이 기록된 <양산토지명기대장>과 마패도 볼 수 있었습니다.

동시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이원수(李元壽, 1912~1981)의 친필 수첩, 자필동시원고, 안경, 담배파이프도 볼 수 있고, 독일의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도 볼 수 있었죠.

<우리말 쓰기본(1948)>, <우리말 때매김 연구(1971)> 등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우리말을 지켜온 양산의 대표적인 국무학자 나진석(羅鎭錫, 1917~1973)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확인할 수도 있어요~

양산 상북면 소토리의 광주 안씨 사당 소계사(소계서원)이 있을 정도로 양산엔 광주 안씨가 유명했으며, 양산 자체를 본관으로 둔 양산 이씨도 유명하단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 가야진 용신제라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서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행해지는 용신제에 대한 이야기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양산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중 하나죠.

이제 3층 고분실로 향합니다.

이곳에선 삼국시대 영남 지역과 양산 지역의 토기 변화의 흐름을 볼 수 있구요.

1990년에 발견된 북절이고분군의 금조총에서 발굴된 유물들입니다.

부부총과 금조총의 위치도 같이 확인할 수 있어요~

굵은고리금귀걸이(금제굵은고리귀걸이)와 금조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계기가 된 금제새다리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아주 작은데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고대 양산에 지배 계급이 존재했음과 신라가 낙동강 하구와 가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리적 중심에 위치한 양산과의 정치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양산 부부총(북정리 10호분)과 관련된 유적과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2판으로 구성된 1920년 양산 부부총 발굴 조사 이후 1927년 오가와 케이가치(小川敬吉, 1882~1950)가 쓴 <양산 부부총 발굴보고서(본문판/도판)>도 볼 수 있어요.


양산 부부총의 복원 모습입니다. 부부로 추정되는 고위 계급의 사람이 뭍혀 있었고, 그 아랫쪽에는  순장자 추정 유골 3구가 있었습니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변진(弁辰)의 장례 풍습에 대해 적고 있는데,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내는데, 이는죽은 이가 하늘로 날라오르기를 바라는 뜻이다[以大鳥翼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이끈다는 내세관을 엿볼 수 있죠.

6~7세기에 걸쳐 지어진 신라의 신기리 고분군과 5세기 중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법기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볼 수도 있구요.

4~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삼유적(양산 상삼리 590-1번지 유적, 양산 상삼리 590-5번지 유적, 상삼-좌삼 유적)과 양산시립박물관 부지 유적의 유물 뿐 아니라~

6~7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산 명동 명곡유적(양산시 명동 460번지 일대)의 유물들과 북정유적(양산시 북정동 산5번지 일원), 신기유적(양산시 신기동 68번지 일원)의 유물들도 확인할 수 있어요~ 

그 외 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불산 고분군(용당돈 산80번지)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긴 세월의 흔적이 있는 산막·호계유적(천성산 남서쪽 구릉 말단)의 삼국시대 유물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까지 현재의 양산시 중부동 경남은행사거리에 있었다가 언젠가 상북면 소계서원으로 옮겨져 있던 대원군이 세운 양산 척화비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관람을 마치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출입구가 나옵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유물을 위주로 근대사까지 길고 폭넓은 양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양산시립박물관! 시간이 괜찮고, 역사를 조금 더 깊게 알아보고 싶다면 이곳을 한 번 찾아보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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