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쓰이는 양산 동면 산책 하기 좋은 법기수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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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쓰이는 양산 동면 산책 하기 좋은 법기수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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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법기수원지를 찾았습니다~ 입구의 카페와 식당을 가로지르면 입구가 나오는데요.

입구 앞쪽엔 자전거 보관대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면 이곳에 주차를 하고 가시면 됩니다.

참고로 여기 자전거 주차장에 있는 차는 상수도사업본부 직원인 것 같아요!

 

자동차를 타고 왔다면 입구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이나 입구 골목으로 들어와서 볼 수 있는 유료주차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주차 공간은 많은 편이에요.

이곳에선 생수를 제외한 음료와 음식물은 반입이 금지됩니다~

래서 입구 바로 앞에 쓰레기통과 얼음물 버리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하계(4월~10월)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계(11월~3월)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하는데요.

통제구역은 절대 출입하면 안되며, 어떠한 음식물, 어떠한 돗자리도 들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애완견, 자전거는 출입할 수 없구요. 고성방가나 소음도 내면 안됩니다. 나물(쑥), 씨앗류(편백나무열매 등) 채취도 금지됩니다! 그냥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게 걸어갔다 나오시길 바랍니다.

법기수원지는 크게 정문, 화장실, 댐마루, 취수탑, 도둑골, 곰골, 지봉골, 무덤실, 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중 지도 기준 정문, 화장실, 댐마루 지역까지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회동수원지나 성지곡수원지는 둘레길이 있는 반면 이곳은 제한적 개방을 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법마을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있구요.

본법마을의 유래
본법마을[本法-]은 법기리 고분군 형성시기를 5세기로 추정하고 서기 500년을 전후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1860년대에는 마을의 이름이 지금의 수원지 위에 지동(紙洞)마을이 있었고  아래쪽에는 하리(下里, 아랫마을)가 각각 자리하고 있었는데, 약 100년 전 지동 마을 사람들이 호식(虎食, 범(호랑이)에게 잡아먹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상리(上里 : 새마을)와 중리(中里 : 중마을)로 옮겨 살게 되면서 김해 김씨, 밀양 박씨와 동래 정씨 등 10여 성씨가 사는 마을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최초의 마을 형성시기는 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본격적인 마을 형성시기는 단양우씨 17세손 등이 임진왜란 때 청도 및 기장에서 난(亂)을 피해 이곳 법기(본의곡)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게 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이다.
[마을 구성]
법기수원지, 방개저수지, 본법사지, 주천당, 상리, 중리, 봉천, 하리

인근 지역인 양산과 부산의 관광명소에 대해서도 정리해두고 있는데요~

그래서 법기수원지 다음에 갈 만한 곳을 고르는데 도움을 줍니다.

관광명소 안내
범어사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일원)
신라 문무왕 때(67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10찰(華嚴十刹)이다.
금정산성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일원)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았으며, 전체길이는 약 17km이다.
통도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일원)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한다.
내원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일원)
천성산 기슭에 위치한 내원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천성산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일원)
양산의 최고 명산으로 웅상, 상북, 하북 3개 읍면에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922m이다.
홍룡폭포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일원)
홍룡사 경내에 있는 홍룡폭포는 천룡(天龍)이 폭포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엄청 길고 큰 나무들이 연달아 나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댐마루 좌측 편, 오른쪽으로 가면 댐마루 우측 편이 나옵니다. 2024년 7월 기준으로 댐마루 가운데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둘러가는 나무데크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 길이 끊어져 있어요... 빨리 공사가 되어 어느 방향으로 가든 댐마루를 통해 빙 한 바퀴 돌 수 있길 바랍니다.

법기수원지이야기
수림치 숲 소개
법기수원지 정문을 들어서면 누구나가 아! 하며 감탄사를 먼저 연발합니다. 정면 길 좌우에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장한 모습으로 늘어서서 우리를 반기고 있는 나무,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에 압도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말라시다 안쪽 좌우 숲 속에는 아토피와  스트레스 등에 치료효과가 있는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뿜어져 나온다는 편백나무가 촘촘히 들어서 있어, 이곳을 찾는 우리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법기수원지 수림지 내에 조성되어 있는 대표적 나무는 총 7종 644그루로서 편백 413, 히말라시다 59, 벚나무 131, 추자나무(가래나무) 25, 반송 14, 은행나무 3, 감나무 1그루입니다.

이 모두는 수원지 댐 건설 당시 심어진 나무들로서 수령이 90여 년에서 130년(2020년 기준) 이상 된 나무입니다. 저 멀리 좌측에 보이는 집은 당시 관사로 지어졌던 집입니다만, 지금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아름다운 집(화장실)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수원지 건설의 역사와 개방
법기수원지의 댐은 총길이가 260m이며, 높이는 21m로 흙으로 만들어진 댐입니다. 건설시기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5년간(1927~1932)에 걸쳐 건설된 댐입니다.

지금(2020년)으로부터 93년전인 1927.12.20일 중앙지인 동아일보에 양산 법기리 상수원지 기공식 소식과 함께 수몰지 주민의 이주대책과 생계문제를 거론한 기사가 크게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국가적 대규모 토목공사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법기수원지는 1932년 완공 후부터 근래 2011년도까지 한 번도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2011.7.15일에 전체 680만m2 중 댐과 수림지 2만m2에 한하여 전격 개방함으로써 79년 만에 처음으로 비경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 댐 우측 아래에 보이는 석조 건축구조물은 취수터널로서 출입구 상부에는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1858~1936)가 쓴 源淨潤群生[원전 윤군 생]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독립운동가인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에도 살아남아 우리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교훈으로서의 근대문화유산
비록 일제의 주도하에 이 댐이 건설되었지만 실제 댐 건설의 주역은 댐 건설을 위해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의 선조들입니다. 이제 법기수원지는 93년간(2020년 기준) 근·현대의 격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 온갖 풍상을 견뎌낸 근대문화 유산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현대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발전적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 아끼고 보살펴 역사적 교훈의 본보기가 되는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줍시다.
청정한 곳의 대명사
법기수원지는 부산시 선두구동과 노포동, 남산동, 청룡동 일대 7천 가구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수 없이 먹을 수 있는 청정 수질을 자랑하고 있으며 수원지 안에는 침엽수림인 측백나무와 편백을 비롯해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둑 위에 있는 140년 된 반송나무가 절경으로 꼽힌다.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70여 마리 이상 발견되는 등 희귀 동식물과 반딧불이가 서식하고 풍광이 탁월한 자연생태계로서 수십 년 간 상수원 보호를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돼 왔지만 현재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수려한 자연과 산림욕까지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호수가 그려낸 풍경은 한편의 시(詩)다
댐 중앙에 댐마루를 향해 사선으로 가로지른 123개로 이루어진 계단은 90여년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댐에 거슬리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하늘계단). 이 계단을 따라 댐 위로 올라가면 수원지의 호수면 우측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취수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댐마루에는 우아한 모습으로 자태가 일품인 수령 140년이 된 법기 반송이 7그루 있습니다(칠형제반송). 이 반송을 당시 어른 20명이 목도하여 댐 위로 옮겨 심었다 하니 심을 당시 벌써 나무의 수령이 60년 이상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법기수원지의 아름다움은 댐마루의 반송과 호수가 어우러져 그려내는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더불어 주변 산들이 부르는 미풍의 노래에 은빛 물결로 잔잔히 미소짓는 호반(湖畔)의 풍광들은 바로 한 편의 시(詩)인 것입니다.

우선 댐의 오른쪽으로 향하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 벼락 맞은 나무는 옆의 나무들과 함께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로 불리는 나문데, 안타깝게도 1980년 7월 21일 한여름날 오후 7시경에 벼락을 맞아 57년간의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잔잔한 햇살과 나무와 풀들, 그리고 가끔 보이는 의자들이 반겨줍니다.

앞으로 조금 가면 법기수원지 돌댐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곳에서 왼편의 길로 쭉 가면 댐마루 좌측 편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화장실이 나옵니다.

源淨潤群生[원전윤군생]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기(1910~1945)에 조선총독부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의 글씨이며 왼편의 세로로 새겨진 子爵 齋藤實[자작 재등실, 자작 사이토 마코토]은 글쓴이인 사이토 마코토의 이름이다(자작은 작위명이며 사이토 마코토는 1925년도에 일본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 글은 1932년 법기수원지 댐 완공 시에 석각한 글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정치가이며 해군대장(1858~1936)으로 1919년에 조선총독에 취임하여 문화정치를 시행하였고, 1932년 일본의 5·15 사건 후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2차례의 조선총독(3대 1919~1927, 5대 1929~1931)을 역임했다. 1936년 일본군부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에게 친영미파(親英美派)로 지목되어 암살되었다.

당시 3·1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이 크게 전개되자 일본은 기존의 조선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유화정책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술수를 구상하였다. 이는 허울만 문화정책이고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오히려 군병력을 증강시켰다. 3·1운동과 제1차세계대전 후 세계를 휩쓴 민족자결주의의 조류에 밀려 한때 문화정치라는 핑계로 기만적인 동화정책을 폈는데, 그 본질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식민지 교육정책을 강요하면서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식민지 교육정책을 강요하면서 우리 민족문화를 왜곡하고 그들의 문화를 미화시키는 한편, 우리 어문(語文)의 사용금지, 일본어 사용 강요, 일본식 성명 강요 등 그 수법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하고 야만적이었다. 동화정책이 어떤 형태나 수법으로 행하여지든 간에 지배민족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동화정책을 일정 부분 성공한 예는 세계 역사에 드물다. 이 기간을 이용하여 많은 지식인을 변질케 하였고 우민화정책은 계속되었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할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선생이 폭탄을 투척하였지만 아쉽게도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지 못하고 그 일행 중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비록 이 댐이 일본으로부터 강제통치를 받은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주도하에 건설되었지만 댐 건설을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된 우리 선조의 힘으로 건설되었음은 명백하다.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역사는 역사이므로 알 것은 알아야 하며 이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두 번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부국강병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강우규 의사 항일의거 사건
법기수원지 댐에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라는 기념글을 남긴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이름하여 '강우규의사 항일 의거사건'이다. 3·1운동이 일어난 그 해 1919년 제3대 조선총독 부임을 위해 사이토 마코토 일행이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환영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강우규 선생은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폭탄을 힘껏 던졌다. 사이토 마코토는 죽지 않았으나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 수행원, 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주철도 이사,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65세의 노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던진 이 한 방의 폭탄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알리게 했다.

거사 15일 뒤 9월 17일 강우규 선생은 누하동에서 일제의 앞잡이 한국인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혔다.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는데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이 사건 가담자로 강우규 외 5명(최자남, 허형, 오태영, 장익규, 한인곤)이 더 있었으며 장익규, 한인곤은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지금 그 역사의 현장인 서울역에 강우규 항일의거비가 있다.

* 강우규(1855~1920), 평안남도 덕천 출생, 독립운동가, 1917년 광동학교 설립, 1919년 대한국민노인동맹단 요하현지부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19년 3·1 운동 직후 취임 준비를 하다 강우규 의사 항일의거 사건을 겪었지만 아무 변도 당하지 않고 조선총독의 의자에 앉아 문화통치를 시작했던 사이토 마코토가 1932년 이 법기수원지 댐 완공을 맞아 법기수원지 취수터널 입구에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源淨潤群生)'는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많은 생각이 드는 글귀네요. 

취수터널 오른편의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댐마루 오른편에 다다릅니다~

바로 앞에서부터 취수탑이 보이는데요. 이 취수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취수탑이라고 하네요~

댐 아래와 댐 쪽의 뷰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칠형제반송(7현제반송) 중 한 소나무입니다.

넓게 넓게 뻗은 가지가 그 위용을 잘 보여줍니다.

이 나무를 건너는 다리 데크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니 정말 뻥 뚫린 시원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제 다음 반송 데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가는 길목의 풍경들이 참 이쁘네요~

그러나 아쉽지만, 우회데크 설치가 아직 안되어 있어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뒤쪽도 보기 위해 취수터널이 있는 쪽으로 다시 내려가 직진해서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쪽 방향으로 와서 조금 입구쪽으로 내려와 찍은 사진입니다. 나무계단, 하늘계단이 다 보입니다.

하늘계단입니다. 아쉽게도 막혀 있어 올라갈 수는 없구요. 대신 양쪽의 나무계단을 통해 저수지 댐마루로 갈 수 있습니다.

옛 관사로 쓰였던 화장실 옆의 나무 계단으로 법기수원지 댐마루 왼쪽 편으로 올라갑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댐마루입니다~

법기 반송 안내
자태가 우아한 이 소나무는 수령이 130여 년(2015년 기준)된 반송으로 댐마루에 7그루가 있습니다.(칠형제 반송)

이 반송 7그루를 건설 당시(1927~1932)에 어른 20명이 목도하여 댐 위로 옮겨 심었다 하니 심을 당시 벌써 나무의 수령이 50년 이상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풍경이 참 이쁘죠?

이곳에도 반송이 서 있습니다.

그 다음 반송으로 향하니 아직 데크가 조성되지 않았기에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지역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헬기로 이곳을 지나다 반지를 떨어트렸는데 그 반지를 찾기 위해서 물을 다 뺀 적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마 당시 전두환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농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려와서 출구쪽으로 향합니다. 옛 관사로 쓰이던 화장실이 있죠.

입구쪽에 다다르면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가 많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빼곡한 나무 사이의 길에 서서 가족, 커플, 독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그렇게 약 40분의 산책이 끝났습니다. 날씨 좋은 날에 혼자, 친구와, 가족과, 연인과 같이 방문해보시길 바랍니다~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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