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60대 노인이 폭탄을 던지지라 예상했겠는가? 왈우 강우규 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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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그 누가 60대 노인이 폭탄을 던지지라 예상했겠는가? 왈우 강우규 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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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사건, 고유명사, 문서 등의 정식 명칭을 최대한 줄여 핵심만 간결하게 스토리라인으로 정리해봤습니다.
전 원래 '공식적인 명칭과 공식적인 내용을 통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길고 장황하고 부가설명이 필요할 법한 글들을 썼는데, 접근성과 난이도가 높아져 쉽게 쉽게 써봤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쓸 계획도 가지곤 있습니다.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斷頭臺上 [단두대상]
猶在春風 [유재춘풍]
有身無國 [유신무국]
豈無感想 [기무감상]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

 

(구)서울역 앞에는 왈우 강우규 의사상이 있습니다.

 

왜 이곳에 그의 동상이 있는걸까요?

강우규 의사 체포 사진(출처 : 다음 직썰)과 암살 시도한 사이토 마코토 제5대 조선 총독(출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건은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정거장 앞(현 (구)서울역 앞)에서 벌어집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더 이상 조선을 무단통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은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 대장을 새로운 조선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렇게 사이토 마코토는 부인과 함께 기차를 타고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수류탄을 던집니다.

 

그 누가 60대 노인이 폭탄을 던지지라 예상했겠습니까?

 

그래서 강우규는 그 자리에선 체포되지 않았지만,

 

며칠 뒤 다른 거사를 준비하다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결국 잡히게 됩니다.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9.06~1920.11) 의사(義士) 
강우규 의사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 요원면 영덕리로 이주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役軍)을 양성하셨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셨다.

그 후 1915년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으로 이주,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와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펼치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의 요하현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1919년 8월 5일 폭탄을 품은 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에 도착, 9월 2일 남대문 역두(驛頭)(현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정신을 알리었다.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제작 - 사단법인 강우규 의사 기념 사업회
후원 -  국가보훈처, 서울특별시
조각 -  심정수
제작일시 -  2011년 8월 8일

 

그는 1919년 지금 동상이 세워진 이곳에서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고

 

그렇게 잡힌 뒤에도 당당하게 재판을 받고 11월 말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 강우규

 

마지막 유언을 남긴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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