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 앞에 선 고태국 음악비와 정상구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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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 앞에 선 고태국 음악비와 정상구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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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으로 들어오기 전에 2기의 음악비와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맨 왼편에 있는 비는 '고태국 음악비'입니다. 이 비는 피아노 모양의 비석과 그 앞에 높은음자리표 석상이 크고 검은 육면체 위에 세워져 있는 형태입니다.

이 비석의 뒤에는 고태국의 연보와 그를 기리는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연보에 적힌 내용을 이 문서로 옮길 때 비문에 적힌 내용을 순서만 바꿔 시간순으로 재정리했음을 참고바랍니다.

연보 비문
1917년
경북고령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시다.

1940년
일본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시고, 이후 (도쿄) '가마다음악연구소(釜田音楽研究所)' 소장과 (도쿄) '네기시 음악학원'의 강사로 계시다.

1944년
대구사범학교 교유(敎諭, 교원)로 초빙되시다.
대구사범학교 교유로 재직 시 대구에서는 최초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Winterreise)> 전곡을 완창하시다.

1946년
부산에서 부산 초유의 독창회를 가지시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동래중학교, 금성고등학교, 동래여자고등학교에서 재직하시다.

1948년
'서라벌합창단'을 조직하시다.

1955년
부산사범대학이 개교되면서 부산 최초의 음악교수가 되시다. 초등학교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 1977년 별세하실 때까지 부산교육대학에서 음악교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다.

1957년
'콜 에오리안(Chor Aeolian) 합창단'을 조직, 여러차례 발표회를 가졌다.

1960년 '부산연합합창단'과 '은성합창단'을 조직, 지도하시다 (위와 같이) 이 고장 합창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시다.

1962년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ie schöne Müllerin)’ 전곡을 부산음악사에는 최초로 완창하시다.

 * 유족으로는 고정화, 진원, 진태, 정률이 있다.
고태국 선생은 훌륭한 음악가였고, 소명감에 불타는 음악교육자였으며, 열정적이면서도 능력이 뛰어난 음악운동가 셨다.

'노래를 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진실하고 순후한 인간됨을 강조했고, '의사는 메스로 사람의 육신을 치료하지만, 음악인은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과 철학을 견지하고 계셨다. 매사에 섬세하고 치밀했으며 자상하고 인자하고 겸허했으나 원칙에는 강직하고 준엄하여 동료 교수나 학생들로부터 항상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다.

선생이 별세하신 지 30년. 이 고장 음악 발전에 초석을 다진 업적과 음악 사랑의 높은 정신과 참교육자로서의 고매(高邁)하고 순결한 인격을 우러러 추념하고 흠모하는 뜻에서 많은 분들의 단성(丹誠)을 모아 여기 자그마한 돌 하나를 세운다.
건립일 : 2008.11.29.
건립주체 : 고태국음악비 건립위원회
비문 : 민립(民立) 김상훈(金尙勲)
조각 : 정희욱(鄭煕旭)

그 옆엔 정상구 시인의 흐르는 소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흐르는 소리

정상구

하늘 꽃 피는 아침 노을 바라보면
내 마음 원형(圓形)되어 굴러 끝간데 없이
보이지 않는 지평 하나되라 이른다

맑은 바람 스쳐가면 웬일인지 웬일인지
아 하늘문 여는 소리 밖의 흐르는 소리 있어
탐욕과 삶의 추 훨훨 버리라 뇌인다

아롱지는 햇살은 자애로움 열쇠련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두 손 모을
역사의 거울 은혜로운 빛이라 흐르는 소리
설송(雪松) 정상구(鄭相九) 선생(先生)

정상구 시비 모습과 설송 정상구 사진(사진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시비의 뒤에는 시인 설송 정상구의 업적과 걸어온 길이 적혀 있습니다.

시비문(詩碑文)
설송 정상구 선생은 1925년경 남창원군 동면에서 출생, 성장하시어 20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부산에서 문학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운동을 하셨고, 지예(知藝)와 예덕(禮德)을 두루 갖추신 분이시다. 선생의 여러 문화적 업적 가운데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 나라 시문학사상(詩文學史上) 서사시의 잔맥(殘脈)을 이어 대하를 이룬 것이다. 선생의 서사시는 사건의 줄기를 따라 인과를 헤아렸으되 지엽을 두루 살피었으며 구성의 극적 장치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점은 서사문학의 진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절제와 압축에 정기를 쏟아 정서를 유발시키고 있음이 더욱 가치로운 예술의 창조라고 하겠다. 이에 또 더함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통열한 비판을 녹여 풍자와 은유를 유발시키고 있으니 이를 어찌 후인들이 기리지 않으료 선생은 서사시뿐만 아니라 서정시도 일품의 수작을 보이셨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 융합은 선불(仙佛)의 경지를 이루었고, 풍부한 감성은 천진의 순수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선생의 차시(茶詩)는 조주(趙州)와 초의(草衣)의 가풍을 이어 선시(禪詩)로 일미(一味)를 이루었으니 이에 정관의 고요가 있는가 하면 혜월(彗月)의 숨결이 들리기도 한다. 이는 가히 무위(無爲)의 빛이요, 무상(無相)의 유상(有相)이라. 이에 누가 찬탄을 아끼료. 이렇듯 선생은 '잃어버린 영가(靈歌)'를 비롯하여 13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하였으니 이는 이 나라 시문학사의 빛이요, 후인들의 큰 교본이 되리라. 이를 길이 기리고자 뜻을 함께하는 후인들이 이 비를 세우노니 비록 강산은 변할지언정 예술이 예술을 알아보는 이 마음 만고에 이어지리라
서기 2004년 갑신 12월 23일
법산(法山) 김용태 지음

설송시비(雪松詩碑) 건립에 뜻을 함께한 분들
고문 김상훈, 김   영, 류찬영, 성기조, 신세훈, 윤병로, 
이태일, 장혁표, 정공채, 정남이, 조봉제,옥치율
추진위원장 법산(法山) 김용태
추진위원 강인수, 김상남, 김영준, 김    철, 박달수, 박송죽,
안도섭, 양왕용, 양원식, 이문걸, 이병석, 이유식,
이해웅, 임수생, 임종찬, 정순영, 정진채, 주강식,
차한수, 최만조, 최상윤, 최진호, 신    진, 전치탁,
박옥위, 이성호, 정해송, 양은순, 임종성, 강정화,
김광자, 문송산, 정영호, 강준철, 최창도, 정옥금,
강달수, 정남순, 손순이, 배기환, 강갑제, 주순보

설송 정상구 시비 옆에 작은 비석은 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뜻을 함께한 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 많은 해설을 할 순 없지만, 고태국 선생, 정상구 선생 모두 일제강점기에 부산이 아닌 타지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미래의 아이들에게 예술을 직간접적으로 가르치신 향토문학가로 남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산의 예술을 발전시킨 이 두 분을 기리는 비석은 부산의 아이들이 많이 찾는 부산어린이대공원의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 서며 많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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