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판 로미오와 줄리엣, 황세와 출여의의 이야기가 담긴 경주 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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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판 로미오와 줄리엣, 황세와 출여의의 이야기가 담긴 경주 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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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주차장인 경주 봉황동 유적 주차장(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035)에 주차를 해두고 봉황대(鳳凰臺)로 올라갔습니다.

봉황대에는 황세바위, 관리사무실, 여의각, 가야주거군, 패총(노출전시관)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황대의 서남쪽에는 호수, 기마무사상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를 볼 수 있죠. 이번 답사에서는 일정상 봉황대만 둘러본 뒤 수로왕릉으로 가는 것이었기에 위로 올라갔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다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김해 봉황동 유적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확대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인돌, 조개무지, 항구시설, 봉황토성 등이 발굴되어 청동기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복합 유적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 왕권의 존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회현리패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 및 골각기**, 토기와 탄화미*** 등은 가야시대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화폐 화천(貨泉)은 당시의 국제 교역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봉황대는 조선시대에 김해부사를 지낸 정형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 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 구릉 주변에서는 가야시대의 다양한 생활유적 및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어린 시절 함께 지냈다고 전해지는 황세바위 등이 위치하고 있다. 봉황대 서쪽에서는 가야시대 토성과 대규모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옛 봉황초등학교 남쪽에서는 가야시대의 배가 발견되어 당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2003년에 왕궁 추정지 동쪽에서 봉황토성의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왕궁 추정지 발굴 조사에서는 4세기의 대형 건물터와 화로 모양 그릇 받침, 원통 모양 토기,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굽은옥 등 가야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9년에는 왕궁 추정지 인근에서 대형 적심****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약 20m 높이의 왕궁 관련 시설로 추정되어 가야 왕궁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 패총(貝冢) : 해안, 강변 등에 살던 선사시대인이 버린 조개나 굴 등의 껍데기가 쌓여 무덤처럼 이루어진 유적
** 골각기(骨角器) : 석기시대에, 동물의 뼈, 뿔, 이빨 따위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 탄화미(炭化米) : 유적에서 출토된 곡물의 하나로,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적으로 탄화되어 남아 있는 쌀
**** 적심 : 마루나 서까래의 뒷목을 보강하기 위하여 큰 원목을 눌러 박은 것

잘 닦인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저 멀리 정상같은 곳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상은 아니에요~

조금 올라오면 저 멀리 비교적 평평한 산책로가 잘 닦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른쪽 돌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가락국 천제단(駕洛國 天祭壇)'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한 때 가락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라고 하네요.  

가락국 천제단을 뒤로 하고 조금 더 걸어가면 황세와 출여의가 뛰어 놀고 시합도 헀던 봉황대의 '황세바위'에 도착하게 됩니다.

황세바위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 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 하며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며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다.

황세와 출여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정상에 올라섭니다. 정상의 뷰는 탁 트이는 뷰는 아니지만, 드문 드문 김해의 여러 곳을 볼 수 있어 쉬어가기 좋습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비석 하나가 보입니다.

망해정터[望海亭址]라고 쓰인 비석과 큰 돌에 '봉황대(鳳凰臺)'라고 세겨진 돌을 볼 수 있는데요. 영남매일에 따르면 이곳에 허경윤(許景胤)이라는 사람이 정자를 세웠고 그 아래 작은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가면 저 멀리 작은 전각 하나가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가락국 정절 출여의낭자 여의각 유공회원비'라는 비석도 보이구요. 그 전각의 정체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여의각(如意閣)입니다. 황세를 사모하며 결혼하지 않고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출여의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전각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문지방에 구멍을 뚫어 안쪽에 걸린 출여의낭자의 초상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여의각
여의각은 출여의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출여의낭자는 가락국의 9대 임금인 겸지왕(숙왕) 때 출정승의 딸로서 아버지와 친구 사이인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어릴 적 혼약한 사이였다.
그러나 황세는 신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여의낭자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라는 출정승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황세장군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다.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민들의 힘으로 사당을 건립,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현재의 사당은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보수정비하였다.

여의각 인근에는 경주 이씨 김해 화수정(慶州 李氏金海花樹亭)의 정문인 일원문(一源門)도 볼 수 있습니다.

여의각 아래로 내려가면 복원된 고상가옥들이 보입니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거주용보다는 창고용으로 더 많이 쓰였을 거라고 하네요~

고상가옥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덕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상가옥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니 평평한 산책로가 나왔습니다. 여긴 제가 올랐던 산길을 오르지 않아도 한바퀴 빙 편하게 돌 수 있는 산책로를 잘 만들어뒀습니다~ 어쨌든 산책로를 따라 가다 또 다른 입구를 발견했고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가야 시절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봉황대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많은 기억과 생각을 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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