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산에 세워진 기근의 구원자이자 이섭교 설립자 김진한 망고불망비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윤산에 세워진 기근의 구원자이자 이섭교 설립자 김진한 망고불망비

728x90

주변에 있는 구월산 당산(윤산 당산,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825)도 한 번 들려보세요~

 

부산 윤산의 구월산 할매를 모시는 구월산 당산

부산 금정구의 윤산 섯골행복마을 벚꽃언덕쪽 등산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금 가팔라지는 등산로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고개를 등산로의 왼편(북쪽)으로 돌리면, 당산 하나가 보입니다. 안내

mspproject2023.tistory.com

또, 김진한과 김진해 형제가 세운 이섭교와 이섭교비에 대한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38)도 같이 보세요~ 

 

연제구와 동래구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다리, 이섭교. 그리고 이섭교비

동래구 낙민동 연제구 연산1동을 이어주는 다리 중 이섭교라는 보행자 전용 다리가 있다. 그 중 낙민동쪽 낙민파출소 바로 앞에 큰 비석 한개가 있다. 한자로 이섭교(利涉橋)라고 적혀있는 이 비

mspproject2023.tistory.com

지도 출처 : 카카오맵

부산 금정구 윤산로를 넘어가다 보면

윤산 섯골행복마을 벚꽃언덕이 보입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등산로가 나오죠.

출처 : 카카오맵

등산로로 오르기 전 왼편에 보면 비석 하나가 있습니다.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김진한(金振漢) (1637(인조 15년)~1704(숙종 30년))
이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는 경신대기근(1670년(경술년, 현종 11)~1671년 (신해년, 현종 12))과 을병대기근( 1695년(을해년, 숙종 21년)과 1696년(병자년, 숙종 22년)) 나라 전체에 2차례에 걸쳐 대기근이 일어나자 100만명의 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고을주민을 한명도 굶어죽지 않게 하여 이후 고을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은덕을 기리는 만고불망비를 현 서동 부산은행 뒤편에 세웠다. 현재 그 비석은 부러져 지하에 매몰되어 있으며 구륜산에 위치한 이 비석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시대에 무너져버린 비석을 고을주민들이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경주인(慶州人) 한림공(翰林公) 수문(秀文)의 8세손인 회장(晦章) 김진한(金振漢)은 1694년(숙종 20년)  지금은 없어졌으나 1964년에 지금의 동래구 낙민동에서 연제구 연산1동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온천천(溫泉川)에 놓여 있던 다리로서, 3개의 아치 모양의 홍예(虹霓)를 연결한 돌다리인 이섭교(利涉橋)를 동생인 회백(晦伯) 김진해(金振海)와 함께 개축을 처음 시작한 장본인이다. 1915년 일제는 이 다리를 철거하고 시멘트 교각으로 바꾸었다. 이 다리에 관하여는 1945년 처음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다.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33호인 이섭교비(利涉橋碑)완공된 이섭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서, 비문은 회백(晦伯) 김진해(金振海)가 작성하였으며 개축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성명, 그리고 개축에 협력한 각 면(面)의 계()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기록에 따르면 동면 10계, 서면 6계, 북면 8계, 남촌 9계, 동평면 13계, 사천면 9계, 읍내면 14계 등 모두 69계로부터 보조를 받아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돈을 모아 조선 숙종 21년(1695년)에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으며, 김진한이 시작하여 신만재가 완성하였다는 내용도 함께 적고 있다. 

이 비석은 개석(蓋石, 비석 윗부분에 얹는 돌)이 없이 머리 부분이 반달꼴로 되어 있으며, 높이 237cm, 폭 110cm, 두께 28cm의 크기로서 내주축성비와 더불어 부산 지방의 기념비 가운데 가장 큰 것에 속한다. 

원래 동래구 낙민동 이섭교 부근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 반쯤 울에 잠긴 비석이 이섭교 부근에서 발견되어, 현 낙민치안센터 맞은편에 옛터의 위치를 표시한 표석이 세워져 있고 1931년 당시 일본인 히가시하라 카지로오(東原嘉次郞)의 개인정원이었던 금강공원에 멋대로 옮겨져 지금까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2012년 10월에 원래 위치로 추정되는 현재 자리로 다시 옮겨졌기에 그 전에 지어진 안내판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경신대기근 때 고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며 굶어주지 않게 하고 동생 김진해(金振海)와 함께 이섭교까지 건설하기 시작한 경주 김씨 김진한(金振漢)을 기리는 만고불망비입니다.

비문 앞면
유학(幼學) 김진한(金振漢) 덕흡민수(德洽民髓)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비벼슬유생 김진한(金振漢)의 덕이 백성의 뼛골까지 흡족함을 만 세월간 잊지 않겠다는 비

큰 벼슬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선뜻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었던 김진한과 형과 같이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돌다리를 놓기 시작한 김진해. 그 두 형제의 이야기는 이렇게 비석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