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가 바다를 건너기전 제사 지냈던 영가대 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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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통신사가 바다를 건너기전 제사 지냈던 영가대 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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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출처 : 카카오맵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254-8에 영가대 본터가 있습니다.

골목을 지나 U턴하면 작은 공원 하나가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영가대'가 있었던 곳입니다.

철길 옆 방범벽에는 '영가대 본터'라는 이름과 함께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볼 수 있어요.

영가대(永嘉臺, Yeonggadae Pavilion)
영가대는 조선 후기 통신사가 해신제(海神祭, 바다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누각으로 처음 영가대를 건립할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1624년(인조 2)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된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1589~1670]가 순찰사 권반(權盼)[1564~1631]의 본향(本鄕)인 안동의 옛 지명 ‘영가(永嘉)’를 따서 이름 붙였다. 영가대는 1614년(광해군 6) 순찰사 권반이 전선(戰船)을 감추기 위해 선착장을 만들었을 때,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望樓)를 겸해 세운 8칸 누각이다. 이후 영가대는 조선 후기 통신사를 비롯한 역대 대일(對日) 사신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해신제당(海神祭堂)의 역할은 물론, 출발과 귀환의 상징적인 지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가대 앞의 선착장은 경부선 철도 공사 때 일본인들이 매축하였고, 영가대는 부산진-동래온천 간의 전차 선로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1917년 부산의 일본 거류민단장을 지낸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매입하여 그의 별장인 능풍장(陵風莊)으로 옮긴 후 흔적이 사라졌다. 이후 1951년 10월 15일 한청범이동단부(韓靑凡二洞團部)가 옛 영가대 터였음을 알리는 ‘영가대 기념비’를 이곳에 세웠다. 2003년 9월 25일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바다가 보이는 자성대(子城臺) 남쪽에 영가대가 세워졌다.

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이 터는 이제 작은 공원으로 우리 곁에 남겨지게 됩니다.

실제 영가대의 모습을 축소해서 가운데에 두었습니다.

지도 출처 : 카카오맵

 

 

그 축소 모형의 뒷편 모습입니다. 여기선 햇빛이 잘 들어 잠시 앉아있기 좋네요~

그 축소된 영가대 모형 옆에는 서기 1951년(단기 4284년 신묘) 10월 15일에 세워진

'영가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고, 이를 보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영가대 기념비 앞면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부산은 우리 한국의 국방상 중요한 지점에 있는 항구라 아니할 수 없다. 나라를 지키는 많은 장수와 군인들이 항상 진영에 머물면서 외국의 적을 막았던 곳이다.

그리고 자성(子城), 증성(甑城), 정공단(鄭公壇), 영가대(永嘉臺) 등 네 곳이 있는데, 즉, 자성과 증성은 나라를 지키던 곳으로서 높은 곳에 있었는데 지금도 성 위에 쌓은 담이 남아 있다.

정공단이라는 것은 정장군[鄭撥 : 정발]이 전사한 유적지에 비석이 으젓이 서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우뚝했던 영가대는 옛부터 전쟁하던 군함이 정박했던 곳이고 겸하여 무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그 중간에 높이 솟은 곳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조수(潮水)가 넘쳐들면 마음이 흥분되고 의기가 북받치어 분개하거나 애통해져 격하게 된다.

그래서 옛부터 충신이나 우국지사(憂國之士)가 이곳을 거닐면서 시를 읊거나 애통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이따금씩 있었다.

비유컨데 중국 진나라[晋] 때 양숙자(羊叔子, 221~278)의 비가 서 있는 현산(峴山)의 정자와 같으며(이 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는 구름낀 날 달이 나타나 밝듯이, 즉 충의심이 강하고 씩씩하며 열렬한 혼령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노니는 것 같기도 하여 마치 뭔가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영가(永嘉)라고 한 것은 '가(嘉)'는 '돈대[臺 : 대]'라는 뜻이고, '영(永)'은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이다. 나라가 약해지자 왜구가 침입하여 산을 파서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었고, 대(臺) 밖에 있던 도랑도 평평하게 만들었으며, 입구 문도 땅에 넘어뜨렸다. '영가'라는 두 글자도 거의 형체가 없어졌고 오직 고목만이 남아 혼자 그 흔적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무가 마르고 뒤집혀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던 동네 여러분들이 의논하기를 유적지를 지키고 영원토록 잊지 말자는 뜻으로 비석을 세워 표식키로 하였다.

나도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짧고 졸렬하며 망녕됨도 잊고 그에 대한 표지(標識)를 이렇게 저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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