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가족이 살았던 황제의 생가,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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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가족이 살았던 황제의 생가,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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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혹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114-10'에 운현궁(雲峴宮)이 있습니다. 천문과 기상관측을 하던 부서인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던 고개(峴)에 있는 궁(宮)'이란 뜻이죠.

운현궁 내부 지도와 이를 카카오맵 지도로 표기한 안내도입니다. 물론, 실제 운현궁은 이보다 더 컸는데요. 그 규모는 지금의 덕성여자대학교와 운현유치원 일부 지역부터 서울빌딩, 주대한민국일본국대사관 공보문화원 자리까지였다고 전합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직사(守直舍)가 나타납니다. '수직(守直, 건물,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킴)을 하는 집(舍)'이란 뜻으로, 지금의 '경비관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부엔 당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장, 옷 초 등이 있네요.

수직사(Sujiksa, 守直舍)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운니동)
정문 오른쪽에 있는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인들이 많았다.

노안당 수직사 옆의 문으로 들어가면 노안당이 나옵니다.

운현궁(雲峴宮) 노안당(老安堂, Noandang)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시대 :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운니동)
노안당(老安堂)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주된 거처였다. '노안(老安)'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여) 편안하게 하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 1) 3월에 상량(上梁)하고, 같은 해에 완공하였다.

평면은 T자형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실내를 구성하고, 누마루(지면보다 높게 띄워 마루를 깐 구조)인 영화루(迎和樓)를 달아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이고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기둥머리에서 보와 도리가 직교하면서 짜이는 구조로 단면 모양에 따라 원형은 굴도리, 방형은 납도리)이다. 공간 구성과 견실한 목조구조, 세부기법은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

문을 지나 바로 앞에 보이는 T자 건물이 바로 '노인을 편안하게 하는 집'이란 뜻의 노안당입니다.

그 내부 중 한 곳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노안당 서행각입니다.

신기한 수석도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때부터 있었던 것인지 이후 옮겨온 것인진 확실하지 않습니다.

노안당 뒤편의 모습으로, 그 왼편엔 노락당 남행각이 보입니다.

다른 곳으로 나가 행각을 지나면 노락당이 나옵니다.

노락당이라는 현판이 잘 보입니다.

내부에는 당시 쓰던 물건들과

불을 땐 듯한 곳, 항아리, 절구 같은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안채에 있던 물건들도 있었고,

주방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락당 북행각 쪽에 난 작은 입구로 이로당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운현궁 노락당(老樂堂, Norakdang Hall)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 시대 :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 1)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자(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생이다. 노락당은 운현궁 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拱包)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 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나오면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로당이 나옵니다.

이곳은 행각과 행각 사이처럼 보이네요.

조금 더 걸어가 왼편을 보면 이로당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입니다.

오른편엔 이로당(二老堂)이 보입니다. 이 이로당은 ㅁ자처럼 보이는 건물로, 앞에 보이는 곳은 이로당 입구입니다.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Irodang Hall)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 시대 :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府大夫人) 여흥 민씨(흥선대원군의 부인)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에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로 평면은 ㅁ자형이다. 실내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인데, 사면의 가구구조에 차이를 두어 공간의 위계를 드러낸다. 궁궐과 흡사한 평면구성과 창호, 차양같은 세부기법은 노락당, 노안당과 같은 수준으로 품격을 갖추었다. 이로당 뒤편의 '운니동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은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영로당(永老堂)'이라고 불렀다.

운현궁 이로당 안내판 옆엔 큰 수조 하나가 있습니다. 오른쪽에서부터 운하연지(雲下硯池) 그러니까 구름 아래 벼룻물을 담은 못이란 뜻을 가진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로당에서 다른 좁은 문으로 나가면, 작은 뜰이 보입니다. 문 위의 복도로 이로당은 노락당 북행각을 지나 노락당으로 이어집니다. 

뜰로 돌아가면 우물이 보이고, 이로당 뒤편 건물 구조도 볼 수 있습니다. 

벽 한편엔 한 때 냉장고로 썼다는 곳이 보입니다만, 열려있진 않았습니다.

담벼락의 모퉁이에 비석 하나가 보입니다.

경송비(慶松碑)라고 적힌 비석으로, 고종이 어릴 때 타고 놀았던 소나무에게 정2품 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쓰여 있다고 하네요. 현재 그 나무는 어떤 나무인지,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비석을 뒤로하고 운현궁의 뒷편을 빙 돌아갑니다.

담을 따라 쭉 가다가 끝에 있는 문으로 나가면 유물전시관 쪽이 나옵니다.

문을 나와 왼편을 쳐다보니 입출구가 보입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유물전시관이 나옵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은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후기 사회상을 알 수 있도록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전시 공간은 18개로 구분하여, 고종 초기 국내의 사건을 비교한 연대표와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의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대원군의 교의(交椅)*, 척화비**, 당백전***, 운현궁의 각종 생활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복제품이고,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다.


* 교의(交椅) : 제례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단
** 척화비(斥和碑) :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나라 곳곳에 세웠던 비석
*** 당백전(當百錢) : 1866년에 발행한 화폐로, 그 당시에 통용되던 상평통보 100개에 맞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전시관 안에는 운현궁의 실제 크기를 80분의 1로 줄인 모형도 있고,

운현궁의 전체 배치도와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 수직사 등 중요 건물에 대한 설명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운현궁의 문 중 지금은 사라진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에 대한 설명도 볼 수 있고, 노의(露衣), 당의(唐衣)와 같은 조선시대 여성이 입었던 예복용 한복의 모습 등 다양한 당대 시대상을 보여주는 볼거리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나오면 우측에 화장실이 있고, 저 멀리 다시 입출구로 갈 수 있습니다.

한국사상 최초의 황제와 그 부모가 살았던 운현궁. 한 때 대궐같은 느낌이 들었을 이 큰 집에 살던 사람들, 드나들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지금 봐도 일개 양반집과 차원이 달랐던 거대한 사택을 보면서 역시 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 정도 규모는 만들어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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