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의 광주 김씨 해수공파의 재실, 향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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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의 광주 김씨 해수공파의 재실, 향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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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129번길 98-23(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667)'에 광주 김씨 해수공파의 재실입니다. 해수공파의 파조 해수(海叟) 김우정(金禹鼎)과 육촌 아우(재종제) 호수(湖叟) 김기(金琦)를 같이 모시고 있습니다.

향경재(鄕敬齋) (안내문)
향경재(鄕敬齋)는 광주 김씨(廣州 金氏) 해수공파(海叟公派) 파조(派祖, 파의 시조) 김우정(金禹鼎) 선생의 학문창도(學問唱導)로 동래(東萊)의 문명을 밝힌 공적을 기리는 재실(齋室)입니다.

해수우정공(海叟禹鼎公)은 신해년(1551년) 8월 13일 동래 산저리(山底里)에서 성균생원(成均生員) 국평공(國平公, 김국평)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경북) 성주(星州) 회연초당(檜淵草堂, 후의 회연서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 문하에서 수학(修學)하고 귀향하여 사숙(私塾)을 열어 인재 양성에 전념(專念)하셨다.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왜적(倭敵)의 침략으로 왜란(倭亂,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창의(倡義)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포로(捕虜)되어 왜도(倭都, 당시 교토) 복견성(伏見城, 후시미 성)에 억류(抑留)되어 갖은 협박(脅迫)에도 조선(朝鮮) 선비의 굳은 기개(氣槪)로 적들에 굴하지 않고 절조(節操)를 지켜 항복(降伏)을 거부하고 적진(敵陣)에서 무서운 박해와 억압 속에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의 심경을 <간양시(看羊詩)>로 남겼다.

임란전(壬亂戰, 임진왜란)이 끝나자 8년 만에 귀국하여 폐허가 된 향리(鄕里)의 민심 수습에 앞장서서 민생을 선도(善導)한 공이 <동래향안(東萊鄕案)>에 등재되어 영원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경사(經史, <경서>와 <사기>)>를 끼고 충의를 논하며 효와 법도를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가 문도(門徒)들의 후예(後裔)들이다. 전란에 부모형제가 왜군(倭軍)의 칼날에 희생(犧牲)되어 생사조차 찾을 길 없는 애통한 심정 어느 산하(山河)에 잠드셨는지 불효한 속죄(贖罪)로 3년동안 소식(素食)하며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박장(薄葬)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팔십성상(八拾星霜, 80년) 세록(世綠)이 다 하시여 경오년(1630년) 8월 1일 영면하셨다. 후에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추증(追贈)되셨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역대 동래부사들이 행록(行錄, 언행기록(言行記錄))을 남기고, 갑자년(1864년) 동래부사(東萊府使) 강로(姜㳣, ?~?)가 유림(儒林)과 합심하여 백민(百緡)을 (거금(巨金)) 출연(出捐)하여 제답(祭畓)을 마련하고 재실(齋室)을 세워 '향경재(鄕敬齋)'라 명명하고 <향경재기(鄕敬齋記)>의 명문대로 유림에서 향(鄕). 불천지위(不遷之位) 향사(享祀)를 모시게 하였다.

신미년(1991년) 유림과 종의(宗義)의 결의로 임란공신(壬亂功臣) 재종제(再從弟, 육촌 아우)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어모장군(禦侮將軍) 호수(湖叟) 기공(琦公, 호수 김기)을 합사하여 청명(淸明) 한식일(寒食日)에 향사를 모신다.
2017년 10월 10일
광주 김씨(廣州 金氏) 해수공파(海叟公派) 후손 일동

지도 원 출처 : 카카오맵

카카오맵 위성 지도를 통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향경재(鄕敬齋)를 중심으로 그 왼편엔 월복당(月伏堂)이, 오른편엔 의수사(義叟祠)가 있습니다.

향경재 전경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에서 광주 김씨 해수공파 문중회가 봄, 가을 2차례 제사를 지낸다고 하네요.

시조 광주군 김녹광으로부터 영남계의 계조인 김남물을 지나, 동래로 들어온 참의공 김차문을 시작으로 동래계 광주 김씨가 등장합니다. 참고로 본관인 광주는 경기도 광주를 말합니다!

 

동래계 광주김씨의 후예 중 호수공 김기와 해수공 김우정을 각각 파조로 하는 호수공파, 해수공파가 등장하는데요. 여기선 해수공파의 파조이자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가서도 끝까지 절개를 지킨 김우정을 우선으로 모셨기에, 원칙적으로는 광주 김씨 영남계 동래계 해수공파의 재실이 되는 겁니다. 다만, 1990년대에 호수공파의 파조 호수 김기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들 모두 사실 신라 왕족인 김씨의 후예입니다. 원랜 김부의 아들 의성군 김석을 시조로 하는 의성 김씨였으나, 세대를 거치며 김녹광이 몽골군의 침입에 혁혁한 공을 세워 광주군으로 봉해지면서 그의 후손들은 의성김씨에서 분적하여 광주를 본관으로 하고 김녹광은 그렇게 광주 김씨의 시조가 됩니다.

여느 재실과 마찬가지로 문이 닫혀 있는 곳입니다. 다만, 주변 풍경과 어울려 그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보통 재실 뒤에는 묘나 위패, 비석 등이 있을텐데, 이 향경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선조의 묘가 어딨냐면, 여기서 동남쪽으로 난 논밭 옆길을 따라 가면 있는 쇠미산의 한 봉우리 입구에 있습니다. 모든 재실을 다 가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재실과 묘를 분리해서 모셔둔 곳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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