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장수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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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장수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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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를 이끈 고구려의 장수왕은 부왕 광개토대왕을 이은 명군이었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나오는 그의 업적 중 극히 일부가 이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나와 있기에 정리해봤습니다.

1. <삼국사기><고구려본기><광개토왕>

1-1. 광개토왕 18년(409)

18년(서기 409년) 여름 4월,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6개의 성[六城]을 쌓고, 평양(平壤)의 백성들[民戶]을 이주시켰다.



8월,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다.

 

1-2. 광개토왕 22년(413)

22년(서기 413)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 다.

그리고 413년, 광개토대왕은 사망하고,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영토 확장을 근거로 들어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삼국사기><고구려본기><장수왕>

2-1. 즉위까지

장수왕(長壽王)의 이름[諱]은 거련(巨連)['련(璉)'이라고 쓰기도 한다.]이며,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맏아들[元子]이다. 그는 체모(體貌, 체면)가 괴걸(魁傑)하고, 의기[志氣]가 호방다[豪邁]. 개토왕(開土王) 18년(서기 409년)에 태자가 되었다. 22년(서기 413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즉위했다.

413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사망하고, 고거련(高巨連/高)이 즉위합니다.

 

2-2. 장수왕 원년(413)

원년(서기 413년),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 317~420)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붉고 흰 말[赭白馬]을 바쳤다. (진) 안제(安帝)가 임금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책봉했다.

지도 원본 출처 :&nbsp;http://geacron.com/

 

2-3. 장수왕 2년(414)

2년(서기 414년) 가을 8월, 이상한 새[異鳥]가 왕궁(王宮)에 모었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천(蛇川)벌[蛇川之原]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12월, 왕도(王都)에 눈이 5자[五尺]나 내렸다.

 

2-4. 장수왕 7년(419)

7년(서기 419년) 여름 5월, 나라 동쪽에 홍수[大水]가 나서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 장수왕 12년(424)

12년(서기 424년) 봄 2월, 신라(新羅, 당시 눌지 마립간 재위)에서 사신을 보내와 수빙(修聘, 예방)했다. 임금이 그를 아주 후하게 예우다.


가을 9월, 큰 풍년[大有年]이 들자 임금이 궁(宮)에서 여러 신하들[群臣]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宴].

 

5. 장수왕 13년(425)

13년(서기 425년), 사신을 보내 위(魏, 386~534)에 조공다.

423년 남북조시대(지도 원본 출처 : wikimedia)

425년부터 장수왕은 중국 국가들에게 조공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우선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386~589)였습니다. 유목민족 위주의 이민족들이 세운 북조(北朝)와 한족이 세운 남조(朝)로 양분된 시대였죠.

 

5세기, 장수왕의 재위 시절, 북조(북쪽에 위치한 이민족의 국가) 중 고구려와 인접했던 국가가 북위(北魏, 386~534)와 북연(北燕, 407~436)이 있었구요. 남조는 송(宋, 420~479) 등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장수왕조>엔 조공 기록이 많이 있는데요. 이 중 송(宋)에게 보낸 2번을 제외하면 대부분 북위(北魏)에게 조공보낸 기록입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는 중국과의 외교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중화 세력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첨부한 지도에 나오는 '연(북연)', '위(북위)', '송(유송)'은 <장수왕조> 기사에서 계속 나오니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6. 장수왕 15년(427)

15년(서기 427년),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

장수왕 시기 고구려의 영역 (출처 : 우리역사넷)

427년, 장수왕은 드디어 평양 천도를 하게 됩니다. 부친 광개토대왕 때부터 준비된 평양 천도를 드디어 이룩한 겁니다. 기존의 국내성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내려오며 남진에 더 힘을 박차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국내성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국가 운영 세력을 모으는 시도를 함으로써 왕권 강화에도 힘쓰게 됩니다.

 

7. 장수왕 23년(435)

23년(서기 435년) 여름 6월, 임금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나라의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다. (위)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제계(帝系,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주도록 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위(魏)에 보내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위(魏)의 사람들이 연(燕, 북연, 407~436)을 자주 공격기 때문에 연(燕)의 형세가 나날이 위태롭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연왕(燕王)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高句麗)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에게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다.

 

8. 장수왕 24년(436)

24년(서기 436년), 연왕(燕王, 북연 왕)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요청다. 위주(魏主, 위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북연을) 토벌하기 직전에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魏)가 연(燕)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장졸(將衆)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사신)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러 연왕(燕王)을 맞이하도록 다. 갈로와 맹광이 (연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弊褐]을 벗게 하고, 연(燕)의 무기고[武庫]에 있는 정교한 의장[精仗]을 내주어 입게 하고는 크게 성 안을 약탈다.


5월, 연왕(燕王)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으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열흘[一旬]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陽伊)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殿後]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다. 앞뒤(의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였다. 위주(魏主, 위왕)이 이를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왕(燕王)을 (위로) 보내달라고 다.
임금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며, (연왕) 풍홍(馮弘)과 함께 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다. 위주(魏主, 위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징발하려 으나, 유혈(劉絜),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간언하니 이를 멈췄다.

 

9. 장수왕 25년(437)

25년(서기 437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10. 장수왕 26년(438)

26년(서기 438년) 봄 3월, 처음 연왕(燕王) 홍(弘, 풍홍)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자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하기를,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이곳까지 와서 야숙(노숙)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홍(弘,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화가 나서, 제(制, 법도)를 들먹이며 임금을 꾸짖었다. 임금은 (그를) 평곽(平郭)에 있게 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북풍(北豊)으로 옮기도록 다. 홍(弘, 풍홍) 본디 우리를 업신여기고, 정형(政刑)과 상벌을 그 나라처럼 하려고 다. 임금은 곧 그의 시종[侍人]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王仁)을 볼모[質]로 삼았다. 홍(弘,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宋, 420~479)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맞아줄 것을 요청다. 송(宋) 태조(太祖)가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우리에게 (풍홍을) 보내줄 것을 요청다.

임금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에게 북풍(北豊)에서 홍(弘,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이도록 다. 백구(白駒, 왕백구) 등이 거느린 병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장수) 손수와 고구[漱仇]를 습격하여 구(仇, 고구)를 죽이고 수(漱, 손수)를 사로잡았다. 임금은 백구(白駒, 왕백구) 등이 단지(=이유없이) 죽였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그를 잡아 (송으로) 보냈다. (송) 태조는 먼 나라 (고구려의) 뜻을 어기지 않게 위하여 백구(白駒,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11. 장수왕 27년(439)

27년(서기 439년) 겨울 11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1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12. 장수왕 38년(450)

38년(서기 450년), 신라인(新羅人)이 습격하여 변방의 장수[邊將]를 죽였다.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출동시켜 토벌하려 으나, 라왕(羅王,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용서를 빌었으므로 이에 멈췄다.

 

13. 장수왕 42년(454)

42년(서기 454년) 가을 7월, 병사를 보내 신라(新羅)의 북쪽 변경[北邊]을 침공다.

 

14. 장수왕 43년(455)

43년(서기 455년), 송(宋, 420~479)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15. 장수왕 50년(462)

50년(서기 462년) 봄 3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16. 장수왕 51년(463)

51년(서기 463년), 송(宋)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임금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았다.

 

17. 장수왕 52년(464)

52년(서기 464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18. 장수왕 54년(466)

54년(서기 466년) 봄 3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위(魏)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 북위 헌문제)의 6궁(六宮)이 미비하다 하여, 임금에게 교서를 내려 그 딸을 천거[薦]하라고 했다. 임금이 표(表)를 올려 '딸은 이미 출가(出嫁)다.'고 말하고, 아우의 딸[弟女]로서 부응[應]하기를 요청다. (위 문명태후가) 이를 허락하고 곧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이때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위(魏)가 이전에 연(燕)과 혼인한 후 얼마 안 되어 (연(燕)을) 쳤으니, 이는 행인(行人)이 그 오랑캐(夷)의 험함(=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멀지 않은 은감(殷鑑, 지난 일을 통한 교훈)을 얻었으니, 마땅한 방편으로 말(=거절)해야 합니다"
임금은 곧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위(魏)는 이것이 거짓말[矯詐]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질책했다.
"만약 (아우의)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의 여자[宗淑]를 선택하는 것을 허락한다."
임금이 말다.
"만약 천자(天子)가 그 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받들겠다."
이즈음 마침 현조(顯祖)가 죽었으므로 이에 그만두었다.

 

19. 장수왕 55년(467)

55년(서기 467년) 봄 3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20. 장수왕 56년(468)

56년(서기 468년) 봄 2월, 임금이 말갈(靺鞨)의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新羅)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영향으로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으며, 신라가 반고구려 입장을 취하자, 468년, 장수왕은 말갈을 이끌고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해 빼앗기도 했습니다.

 

21. 장수왕 57년(469)

57년(서기 469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8월, 백제(百濟)의 병사가 남쪽 변경[南鄙]을 침입다.

나제동맹의 일환으로 백제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친 일도 발생했습니다.

 

22. 장수왕 58년(470)

58년(서기 470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23. 장수왕 59년(471)

59년(서기 471년) 가을 9월, 민노구(民奴久) 등이 위()에 도망가서 투항다. (위는) 그들에게 각각 전택(田宅, 토지와 주택)을 내려주었다. 이 해가 위(魏) 고조(高祖) 연흥(延興) 원년이었다.

 

24. 장수왕 60년(472)

60년(서기 472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이때부터 공헌(貢獻, 공물로 바치는 것)이 앞서보다 배로 늘었으며[倍前], 이에 대한 보답으로 내려 주는 물량[報賜]도 또 점점 늘었다.

 

25. 장수왕 61년(473)

61년(서기 473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26. 장수왕 62년(474)

62년(서기 474년) 봄 3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사신을 보내 송()에 조공다.

 

27. 장수왕 63년(475)

63년(서기 475)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침공하여, 왕(王)의 도읍[所都]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470년대, 장수왕은 개로왕에게 승려 도림을 보내 백제의 상황을 쭉 바라보고, 바둑을 좋아하는 개로왕에게 접근해 친해지며, 백제의 국력을 빼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475년 도림은 몰래 고구려로 복귀합니다. 장수왕은 '얼씨구나'하며 백제 한성을 공격하는데, 결국 백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개로왕까지 사망하게 됩니다. 개로왕이 사망하고 다음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며 웅진 백제 시대를 열게 됩니다.

 

28. 장수왕 64년(476)

64년(서기 476)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9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29. 장수왕 65년(477)

65년(서기 477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했다.


가을 9월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했다.

 

30. 장수왕 66년(478)

66년(서기 478년), 사신을 보내 송()에 조공했다. 백제(百濟)의 연신(燕信)이 와서 항복다.

 

31. 장수왕 67년( 479)

67년(서기 479년) 봄 3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했다.


가을 9월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했다.

 

32. 장수왕 68년(480)

68년(서기 480년) 여름 4월, 남제(南齊)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임금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임금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南齊)와 조빙(朝聘, 통교)하게 는데, 위(魏)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의) 궐(闕)로 압송다. 위(魏) 고조(高祖)가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기를,
'도성(道成, 소도성)은 직접 그 임금[君]을 죽이고, 강좌(江左, 강남)에서 (임금의) 이름(=자리)을 훔쳤다. 짐이 바야흐로 옛 땅[舊邦]에 멸망한 나라[滅國]를 일으키고, 유씨(劉氏)에게 끊긴 세계(世系)를 잇게 하려 하는데, 경()이 (우리의) 경역[境]을 넘어 외교를 하며 멀리 (자신의 임금 자리를) 찬탈한 도적과 통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藩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이겠는가? 지금 하나의 잘못으로 경의 옛 정성[舊款]을 덮을 수 없어 곧바로 (사신들을) 번(藩)으로 돌려보낸다. 그 은혜에 감동하고[感恩]과 허물을 생각하여, 밝은 법[明憲]을 공경하여 받들고, 다스리는 지역을 편안하게 하고 동정을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33. 장수왕 69년(481)

69년(서기 481년)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34. 장수왕 72년(484)

72년(서기 484)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그 때 위나라 사람들[魏人]이 우리나라[我方]가 강하다고 여겨, 여러 나라[諸國]의 사저(使邸, 사신 숙소)를 둘 때, 제의 사신[齊使]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我使]을 그 다음에 두었다.

 

35. 장수왕 73년(485)

73년(서기 485년) 여름 5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36. 장수왕 74년(486)

74년(서기 486년) 여름 4월, 사신을 보내 위(魏) 조공다.

 

37. 장수왕 75년(487)

75년(서기 487년) 여름 5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38. 장수왕 76년(488)

76년(서기 488)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여름 4월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가을 윤 8월사신을 보내 위(魏)에 조공다.

 

39. 장수왕 77년(489)

77년(서기 489) 봄 2월, 사신을 보내 위(魏) 조공다.


여름 6월, 사신을 보내 위(魏) 조공다.


가을 9월, 병사를 보내 신라(新羅)의 북쪽 변경[北邊]을 침공하여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다.

백제를 한 풀 꺾은 고구려는 이후 489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해 호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에만 이렇게 계속 신라와 백제를 압박했던 기사가 나오는데, 다른 사서와 교차적으로 살펴본 결과, 고구려는 이미 신라에 깊이 내정 간섭을 해왔고,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를 안 들쑤신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즉, 장수왕은 한반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펼쳤던 것입니다.

 

40. 장수왕 78년(490)

78년(서기 490년) 가을 7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41. 장수왕 79년(491)

79년(서기 491년) 여름 5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가을 9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나이는 98세였다.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다. 위(魏) 효문(孝文, 효문제)이 이를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素委貌]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布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東郊]에서 애도식을 거행다.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추증하여 책립하고, 시호[諡]를 강(康)이라 다.

결국 491년 장수왕은 사망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8세에 사망했는데, 그 만큼 장수했다고, 장수왕(長壽王)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장수왕은 평양천도 등의 남진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를 벌벌 떨게 하고, 그 두 국가가 나당연합을 만들게 한 계기를 제공했으며, 백제의 수도 한성을 멸망시키고, 백제왕 개로왕까지 죽인 전적이 있고,  신라에는 이미 깊이 내정간섭을 해왔던 고구려 입장에선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설립했다고 전해지며(소수설에 따르면 문자명왕이 지었다고도 함), 호우명 그릇을 제작하기도 했답니다. 또한 지금의 충주 지역을 점령하며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세우기도 했죠. 분열되어 있던 중국 쪽으로는 북조와 남조에 각각 조공하고 인사를 올리면서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서쪽 국경을 안정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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