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소수림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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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소수림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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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삼국시대 파트에서 4세기 소수림왕은 나라를 말아먹을 뻔 한 부왕 고국원왕을 뒤를 이은 고구려 왕입니다. 그와 관련된 업적 또한 시험에 꽤 보여서 그에 관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기록을 정리해봤습니다.

1.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1-1. 고국원왕 25년(355)

25년(서기 355년)
봄 정월, 임금이 왕자(王子) 구부(丘夫)를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금이 연()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했다. 연왕(燕王) 준(雋,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을 보내 왕모(王母) 주씨(周氏)를 보내어 귀국하게 했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왕은 예전처럼 하였다.

355년, 고국원왕의 아들인 고구부(高丘夫)가 왕태자로 등극합니다.

 

1-2. 고국원왕 41년(371)

41년(서기 371)
겨울 10월, 백제왕(百濟王)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막다가 유시(流矢,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원[故國之原]에 장사 지냈다. [백제(濟) 개로왕(蓋鹵王)이 위()에 보낸 표문[表]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그리고 371년,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침공하며 시작된 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하죠...

 

2. <삼국사기><고구려본기><소수림왕>

2-1. 즉위까지

소수림왕(小獸林王)[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함]의 이름[諱]은 구부(丘夫)이며,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이다. 신장(身長)은 크고, 웅략(雄略, 웅대한 계략)이 있었다. 고국원왕 25년 태자(太子)가 되었고, (고국원왕) 41년 왕이 돌아가시자 태자(太子)가 즉위했다.

아버지 고국원왕이 사망하자, 왕태자였던 구부(高丘夫)가 왕이 됩니다.

전진이 고구려의 숙적 전연을 쳐서 멸망시켰으며, 고구려로 도망친 전연의 고위급 인사를 전진으로 넘겨준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즉위했을 시절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304~439)였는데요. 마침 중국의 북쪽에선 370년, 진(秦, 전진, 351~394)이 연(燕, 전연, 337~370)을 침공해 멸망시킨 직후였습니다. 그래서 370년엔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연(전연)의 고위급 인사가 고구려로 망명하자, 소수림왕의 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바로 진(전진)에게 넘겨준 일도 있었죠.

그렇게 새로 중원 북부를 점령한 진(전진)과 고구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편 남쪽에선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근초고왕이 아직 왕위에 있었을 시기였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도 소수림왕 시절 백제엔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이 전성기를 이어갔기에, 소수림왕 입장으로서는 막 진격하긴 힘들었고, 소수림왕과 근구수왕 사이의 몇 번의 큰 싸움을 지거니 이기거니하며 줄다리기를 했었습니다.

 

2-2. 소수림왕 2년(372)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여름 6월,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과 부도(浮屠,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냈다. 왕(王)은 사신을 보내 답례[廻謝]로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들을 교육했다.

즉위 다음 해인 372년, 진(秦, 전진, 351~394)의 3대 황제 부견(苻堅, 337~385)가 우호관계를 맺은 고구려에게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고구려로서는 최초로 불교를 전파받게 됩니다. 또한 태학(太學)이란 상류자제 위주의 고등교육기관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2-3. 소수림왕 3년(373)

3년(서기 373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그리고 373년엔 율령까지 반포해 국가의 기틀을 다 잡아 5세기의 전성기를 만들어가는 초석을 준비했습니다.

 

2-4. 소수림왕 4년(374)

4년(서기 374년), 승(僧) 아도(阿道)가 왔다.

 

2-5. 소수림왕 5년(375)

5년(서기 375년) 봄 2월, 비로소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고 순도(順道)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로써 해동불법(海東佛法)의 시초가 되었다.

가을 7월, 백제(百濟)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이후 375년에는 성문사(省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고 서쪽에서 건너온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각 사찰에 머물게 합니다. 이렇게 <삼국사기> 기준으로 고구려는 한반도 최초로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하게 됩니다.

 

2-6. 소수림왕 6년(376)

6년(서기 376년) 겨울 11월, 백제 북비(北鄙, 북쪽 교외)를 침공했다.

 

2-7. 소수림왕 7년(377)

7년(서기 377년) 겨울 10월, 눈이 내리지 않았으나 우레가 쳤다. 백성들은 전염병[疫]에 걸리고, 백제(百濟)가 장병 3만으로 평양성(平壤城)을을 침공했다.

11월, 남쪽으로 백제(百濟)를 정벌했다. 사신을 부진(苻秦)으로 보내 조공했다.

 

2-8. 소수림왕 8년(378)

8년(서기 378년) 가물었다[旱]. 백성들은 굶주려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9월, 글안(契丹, 거란)이 북변(北邊, 북쪽 변경)을 침범해  8부락(八部落)을 함락시켰다.

 

2-9. 소수림왕 13년(383)

13년(383년) 가을 9월, 성패(星孛,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10. 소수림왕 14년(384)

14년(384년) 겨울 11월, 왕이 돌아가셨다. 소수림(小獸林)에 장사 지내고, 호(號)를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 했다.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 시절 수도까지 털릴 정도로 쇠퇴했던 고구려에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불교 수용 등의 업적을 내며 향후 5세기 전성기의 기틀을 만들었던 명군이었습니다. 비록 아래로는 백제, 위로는 거란이 침공한 적도 있었지만 거의 다 막아내었으며, 서쪽의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국제 관계에서 안정화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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