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광개토대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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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광개토대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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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삼국사기><고구려본기><광개토왕>의 기사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과 비교하면 약 1년 정도 느립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우선'으로 보고 있구요. 이번 글에서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 실린 기년법대로 정리하겠지만, 실제는 '-1년'해서 봐야할 듯 합니다.

원문 번역 아래의 해설엔 '삼국사기 속 연도[실제 추정 연도]'로 표시하겠습니다.

1.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양왕>

1-1. 고국양왕 3년(386)

3년(서기 386년) 봄 정월, 임금이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8월, 임금이 병사를 출동시켜 남쪽으로 백제(百濟)를 공격했다.



겨울 10월,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桃李]에 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두 개였다.

386년, 고국양왕은 아들 고담덕(高談德)을 태자로 삼습니다.

 

 

1-2. 고국양왕 9년(392)

9년(서기 392년) 봄, 신라(新羅)에 사신을 보내 수호(修好, 우호)를 약속했다. 신라왕(新羅王)이 자기의 조카[姪] 실성(實聖, 실성 마립간)을 볼모[質]로 보내왔다.


3월, 불법(佛法,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관리들[有司]에게 명하여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했다.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양(故國壤)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양왕(故國壤王)이라고 했다.

그리고 392년[391년], 고담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사망하고, 그가 왕위에 오릅니다.

 

2. <삼국사기><고구려본기><광개토왕>

2-1. 즉위까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諱]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고[偉],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儻]. 고국양왕 3년(서기 386년)에 태자()가 되었다. (고국양왕) 9년(서기 392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임금의 병사가 남쪽으로 백제(濟)를 공격하여 10개의 성[城]을 점령했다.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글안(丹, 거란)을 쳐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를 출동시켜 백제(濟)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고, 바다로 빙 에워싸여 있었다. 임금이 일곱 방면[道]으로 병사를 나누어 공격하도록 한 지 20일 만에 점령다.

392년[391년], 고담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사망하고, 그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즉위한 해 백제, 거란을 공격시킵니다. 이 때 백제로부터 10개성과 더불어 난공불락의 요새 관미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거란으로부터 많은 인질과 국민들을 데려오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2-2. 광개토왕 2년(393)

2년(서기 393년) 가을 8월, 백제(百濟)가 남쪽 변경[南邊]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했다. 평양(平壤)에 9개의 절[九寺]을 창건했다.

이후 백제에서는 관미성을 빼앗긴 것에 대한 울분으로 복수의 전투를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잘 막은 듯 합니다.

 

이에 더해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기도 했다네요. 불교의 부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2-3. 광개토왕 3년(394)

3년(서기 394) 가을 7월, 백제(百濟)가 침략해왔다. 임금은 정기(精騎,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과 싸워 패배시켰다. 살아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7개의 성[七城]을 쌓아 백제(百濟)의 침범에 대비다.

백제 아신왕이 직접 군사를 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는데, 이 때 광개토대왕도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에서 백제를 패퇴시킵니다. 그 다음 달엔 백제의 지속적인 침략을 대비해 7개의 성을 쌓았죠.

 

2-4. 광개토왕 4년(395)

4년(서기 395) 가을 8월, 임금은 백제(百濟)패수(浿水)의 위[上]에서 싸워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노획(虜獲)했다.

백제 아신왕이 또 복수를 위해 고구려를 쳐들어왔고, 그들은 패수(浿水) 인근에서 마주칩니다. 백제는 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광개토왕조>의 기사에서는 '백제'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백제와의 방어에 성공해 큰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5. 광개토왕 9년(400)

9년(서기 400) 봄 정월, 임금이 연(燕)에 사신을 보내 조공다.


2월, 연왕(燕王) 성(盛, 모용성)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하여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전봉(前鋒,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이후부터 <삼국사기><광개토왕조>의 외세 파트에선 현재는 후연이라 불리는 연(燕, 384~407)과 북연이라 불리는 또 다른 연(燕, 407~436)이 등장합니다.

 

400년, 고구려가 후연에 조공을 했지만, 광개토대왕이 신라 지역을 구원하러 간 틈을 타서 사신의 무례함을 핑계로 요동을 공격합니다. 그렇게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을 점령하고, 700여 리를 개척해 고구려의 수도를 위협하기까지 했죠.

 

2-6. 광개토왕 11년(402)

11년(서기 402),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宿軍, 숙군성)을 공격다. 연(燕)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城)을 버리고 도주다.

이에 고구려는 402년,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략하며 요동 지역을 고구려의 영향권으로 만들게 됩니다. 

 

2-7. 광개토왕 13년(404)

13년(서기 404)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燕)을 침략했다.

또 고구려는 404년 후연을 한 번 더 공격하기도 했죠.

 

2-8. 광개토왕 14년(405)

14년(서기 405년) 봄 정월, 연왕(燕王) 희(熙, 모용희)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희(熙, 묘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그 성이 평정되면 짐(朕)이 황후(皇后)와 함께 수레[轝]를 타고 들어가리라."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嚴備]를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지속해서 밀리는 후연은 재차 고구려가 얻은 요동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연왕 모용희가 자기가 먼저 들어갈거라고 억지를 부리며 시간을 끄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고구려는 오히려 성을 방비할 기회를 마련했고, 결국 요동성 전투(405)는 연왕의 패배로 끝나고 맙니다.

 

2-9. 광개토왕 15년(406)

15년(서기 406) 가을 7월, 메뚜기떼[蝗]가 나오고, 가뭄[旱]이 들었다.


겨울 12월, 연왕(燕王) 희(熙, 모용희) 글안(契丹, 거란)을 습격했는데, 형북(陘北)에 도착다가  글안(契丹, 거란)의 무리를 두려워하여 되돌아가려 했다. 드디어 치중(輜重, 군수 보급품)을 버리고,병사들을 가볍게 하여 우리(=고구려)를 습격했다.
연군(燕軍)은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士馬]이 지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屬路].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후연의 모용희는 406년, 거란을 정벌하러 갔는데, 생각보다 막강해 퇴각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수품 일부를 버리면서까지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또 패배하고 퇴각했죠...

 

2-10. 광개토왕 16년(407)

16년(서기 407) 봄 2월, 궁궐(宮闕)을 늘려 짓고 수리다[增修].

 

2-11. 광개토왕 17년(408)

17년(서기 408년)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왕(北燕王) 운(雲, 모용운)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다. 운(雲,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구려(句麗, 고구려)의 먼 후손인데[支屬],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苗裔]이라 하여, '고(高)'를 씨(氏)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太子)가 되었을 때 운(雲, 모용운)이 무예로써 동궁(東宮,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보(寶,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慕容氏)라는 성을 주었다[賜姓].

407년 폭정을 일삼던 연의 모용희(慕容熙, 385~407)를 시해하고 모용운(慕容雲, ~409)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나라 이름과 시스템은 그대로였으나 왕성(王姓) 모용씨에서 고씨로 바뀌었기에, 현대는 '모용운(혹은 고운)이 즉위한 시점부터는 북연'이라고 여깁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계 할아버지 고화(高和)의 손자로, 후연의 모용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을 '모용씨'로 하사받았다가, 폭정을 일삼은 양아버지 모용보를 죽이고 새로이 등극하며 원래 성씨인 고씨()로 되돌렸다고 합니다.

 

그가 원래 고구려계여서 그런지 광개토대왕이 고운(모용운)이 즉위한 이듬해인 408년에 같은 종족으로써 예를 베풀었다고 하네요.

 

2-12. 광개토왕 18년(409)

18년(서기 409년) 여름 4월,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6개의 성[六城]을 쌓고, 평양(平壤)의 백성들[民戶]을 이주시켰다.



8월,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다.

409년,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아들이자 이후 장수왕이 될 고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나라 동쪽에 독산성(禿山城) 등을 쌓고, 백성들을 평양으로 이주하는 정책도 펼치고 남쪽 지방을 순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393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은 것과 연관지어 이미 고국양왕 말기부터 광개토대왕 재위기 동안 평양 천도를 위한 단초를 쌓은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장수왕이 '나 평양 천도 할거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2-13. 광개토왕 22년(413)

22년(서기 413)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 다.

그리고 413년, 광개토대왕은 사망하고,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영토 확장을 근거로 들어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서 한능검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매우 작은 일부분인 '북진(후연 격파)과 남진(대백제 전쟁)'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 광개토대왕에 대한 내용은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와 호우명 그릇에서 알 수 있는 '영락' 연호 사용, 북진 정책,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북진 정책, 남진 정책
광개토대왕릉비 북진 정책, 남진 정책,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
호우명 그릇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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