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고국원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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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고국원왕 관련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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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삼국시대 파트에서 4세기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관련한 지문으로 종종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에 관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기록을 정리해봤습니다.

1. <삼국사기><고구려본기><미천왕>

1-1. 미천왕 15년(314)

15년(서기 314년)
봄 정월, 왕자(王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314년 음력 1월, 미천왕은 아들 고사유(高斯由)를 태자로 삼습니다.

 

1-2. 미천왕 32년(331)

32년(서기 331년) 봄 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미천원[美川之原]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美川王)이라 하였다.

그리고 331년 사망합니다.`

 

2.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원왕>

2-1. 즉위까지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함]의 이름은 사유(斯由)[혹은 쇠(釗)]이다. 미천왕(美川王) 15년(서기 314년)에 태자(太子)가 되었고, (미천왕) 32년(서기 331년) 봄에 임금(미천왕)이 돌아가시자 즉위했다.

아버지 미천왕이 사망하고, 고사유(斯由) 고쇠(釗)가 즉위합니다. 아마 이름은 '쇠~사유' 사이의 발음으로 불렸을 듯 하니 이름 첫 글자가 'ㅅ'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2. 고국원왕 2년(332)

2년(서기 332)
봄 2월, 임금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했다.


3월, 임금이 졸본(本)에서 돌아왔다.

고구려 국왕이 즉위 후 졸본의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나봅니다. 삼국사기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졸본의 시조묘에 제사'라는 구절이 자주 보입니다.

 

2-3. 고국원왕 4년(334)

4년(서기 334년)
가을 8월,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했다.



겨울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현재 학계에서 이 기사에 나오는 평양성(平壤城)이 그 이전에 나온 평양성이나 이후에 나오는 평양동황성, 평양성과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쨌든 평양성을 증축해 국방에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4. 고국원왕 5년(335)

5년(서기 335년)
봄 정월, 나라 북쪽[國北]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276년에 서천왕이 신성(新城)에서 사냥했다가 돌아왔다는 기록과 288년에 서천왕이 신성(新城)에서 돌아왔다는 기록, 293년 연의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봉상왕이 신성(新城)으로 가 적을 피했는데 당시 신성재(新城宰, 신성 지방관) 고노자가 모용외의 군대를 물리쳤다거나, 296년 연의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자, 봉상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다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신성(新城)이 중요한 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서들도 이 신성(新城)이 중요 요충지라고 기록하고 있고, 고국원왕도 그 중요성을 알아 성을 수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2-5. 고국원왕 6년(336)

6년(서기 336년)
봄 3월, 큰 별[大星]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임금이) 사신을 진(晉)에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고국원왕은 훗날 연(燕)이 되는 모용부(慕容部)를 견제하기 위해 진(晉, 동진, 317~420)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2-6. 고국원왕 9년(339)

9년(서기 339년)
연왕(燕王) 황(皝, 모용황)이 침입해 (그) 병사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임금이 걸맹(乞盟, 화의 요청)하자, 곧 돌아갔다.

337년, 모용황(慕容皝)은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연(燕, 337~370)을 건국합니다. 이후 339년 고구려를 침입해 이전에 고국원왕이 쌓았던 신성(新城)까지 다다랐으나, 고국원왕이 일단은 동맹을 요청하자 돌아갑니다.

 

2-7. 고국원왕 10년(340)

10년(서기 340년)
임금이 세자(世子)를 보내 연왕(燕王) 황(皝)에게 조회[朝]하게 했다.

연의 공격이 있고 다음 해인 340년, 고국원왕은 연(燕)에 자신의 세자를 보내 조회하며 연나라에 대해서 온건책을 펼칩니다.

 

2-8. 고국원왕 12년(342)

12년(서기 342년)
봄 2월, 환도성(城)을 수리하고, 국내성(城)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 연왕(燕王) 황(皝)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한(翰,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麗)를 취하고, 이후 우문(文,우문부)를 멸해야 중원(原)을 도모할 수 있다'고 청했다. (당시) 고구려는 2개의 길이 있었는데, 북도(道)는평평하고 넓으며, 남도(道)는 험하고 좁아, 무리는 북도를 골랐다. 한(翰, 모용한)이 말했다.

"오랑캐[虜]는 통상적인 생각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를 경유할 것이라 생각하여 당연히 북도를 중시하고 남도를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왕께서 마땅히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를 따라 (고구려를) 공격하여 불의에 나아가신다면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별도로 소규모 정예 부대[偏師]를 보내 북도로 나아간다면 설령 차질이 있더라도 그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니 사지(四支, 四肢)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皝)이 그 말을 따랐다


11월, (연의) 황(皝, 모용황)이 굳세고 강한 병력[勁兵] 4만을 몸소 거느리고 남도(南道)로 나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前鋒]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왕(王, 왕우) 등에게 병사 1만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가게 하여, 우리나라를 침공하게 하였다. 임금(고국원왕)은 아우 무(武)에게 정예부대[精兵] 5만을 이끌고 북도(北道)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사[羸兵]를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방어했다.

모용한(慕容翰) 등이 먼저 쳐들어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도착한 황(皝)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가 우리 병사가 대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목베어 죽이자, 모든 적들이 그 승기를 타서 마침내 환도(丸都)로 쳐들어왔다. 임금은 혼자 말을 타고 단웅곡(斷熊谷)으로 도주했다. (연)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추격하여 왕모(王母,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王妃)를 잡아 돌아갔다. 마침 왕(王, 왕우) 등은 북도(北道)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皝)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임금을 불렀으나, 임금은 나가지 않았다.

황(皝)이 돌아가려 할 때 한수(韓壽)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왕[主]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지만,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반드시 나머지 병사를 다시 모을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고구려왕) 아버지의 시체[父尸]를 싣고 그의 생모를 잡아 돌아간 후,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묶어 사죄를 하면,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한수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342년, 고구려는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해 환도성을 수리하고 수도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한편, 국내성도 쌓았죠.

 

역시 고구려의 온건책에 연은 전쟁으로 답합니다. 이 전쟁은 연이 중원을 평정하기 전에 고구려와 우문부를 평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뒷세력의 역공을 대비하기 위한 전쟁이었죠. 이 전쟁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는데요. 북도에선 크게 대승했으나 남도에선 크게 패합니다. 반만 이긴 전투에서 모용황이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한수(韓壽)가 왕의 생모와 부왕(미천왕)의 시신을 들고 가서 왕이 사죄하게 하자고 말하니,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을 싣고,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 씨, 왕비를 포함한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전과 환도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린 뒤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전쟁이었죠...

 

2-9. 고국원왕 13년(343)

13년(서기 343년)
봄 2월, 임금이 자신의 아우를 연()에 보내, 신하로 칭하며 조회[朝]하고, 천여 점의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왕(燕王) 황(皝, 모용황)이 곧 그 아버지의 시체[父尸]를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가을 7월, 평양(平壤)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이주했다. 성(城, 동황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중에 있다. 사신을 진(晉)에 보내 조공했다.


겨울 11월, 눈이 다섯 자[尺]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인 343년 고국원왕은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 고려의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으로 도읍을 옮기고, 전연에 아우를 신하를 보내 부친의 시신을 돌려받습니다. 그러면서 진(晉)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습니다.

 

2-10. 고국원왕 15년(345)

15년(서기 345년)
겨울 10월, 연왕(燕王) 황(皝,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공격하도록 하여 남소(南蘇)를 빼앗고, 수(戍, 주둔군)을 두고 돌아갔다.

345년, 연의 모용황이 또 고구려의 남소(南蘇)를 빼앗고, 주둔군을 두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2-11. 고국원왕 19년(349)

19년(서기 349년)
임금이 (연(燕)의) 전(前)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燕)에 보냈다. 연왕(燕王) 준(雋, 모용준)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고 고쳐, 중위(中尉)로 삼았다.

337년 9월, 모용황은 관리 편성을 했는데, 이 때 송황(宋晃)이 장군으로 임명됩니다.

 

이듬해인 338년 5월, 조(趙, 319~351) 3대 천왕(天王) 석호(石虎)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자, 당시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도 이에 응해 항복합니다. 그러자 빡친 모용황이 이들을 공격해 이겼는데, 이때 송황을 포함한 몇 명이 고구려로 투항합니다.

 

시간이 흐른 349년, 고국원왕은 송황을 연으로 보냅니다. 다행히 연왕 모용준은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송활(活)로 고치게 한 뒤 중위(中尉)로 삼는 관대함을 보여줬다고 하네요.

 

2-12. 고국원왕 25년(355)

25년(서기 355년)
봄 정월, 임금이 왕자(王子) 구부(丘夫)를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금이 연()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했다. 연왕(燕王) 준(雋,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을 보내 왕모(王母) 주씨(周氏)를 보내어 귀국하게 했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왕은 예전처럼 하였다.

355년, 그는 왕태자 책봉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의 아들 고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은 것이죠. 고구부는 이후 멸망할 뻔한 고구려를 되살리고 전성기를 만들 기틀을 짠 훌륭한 군주인 소수림왕이 됩니다.

 

그 해 겨울, 고국원왕이 연에 사신을 보내며 어머니 주씨를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의외로 모용준은 이를 흔쾌히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으로 책봉합니다. 그렇게 연과의 악연이 끝날 즈음 시선을 아래로 돌립니다.

 

2-13. 고국원왕 39년(369)

39년(서기 369년)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百濟)를 정벌하려 했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그렇게 369년, 고구려의 서진 좌절과 더불어 백제의 북진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雉壤)을 선빵때리며 치양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백제 근초고왕은 아들 부여구수(扶餘仇首)를 보내 대대적인 반격을 행했고, 결국 고국원왕은 대패해 물러납니다.

 

2-14. 고국원왕 40년(370)

40년(서기 370년)
진(秦)의 왕맹(王猛)이 연(燕)를 격파했다. 이에 연(燕)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秦)으로 보냈다.

370년, 드디어 고구려 고국원왕의 철천지원수 연(燕)이 진(秦)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때 연(燕) 태부(太傅, 섭정급)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항복해 왔는데요. 고국원왕은 그를 그대로 붙잡아 진(秦)으로 돌려보내 마지막 복수를 합니다.

 

2-15. 고국원왕 41년(371)

41년(서기 371)
겨울 10월, 백제왕(百濟王)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막다가 유시(流矢,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원[故國之原]에 장사 지냈다. [백제(濟) 개로왕(蓋鹵王)이 위()에 보낸 표문[表]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371년 겨울, 고국원왕은 다시 한번 백제를 공격하지만, 패하(浿河)에 숨어 있던 백제군에 의해 패배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고구려를 2번이나 이긴 백제 근초고왕은 아들 부여구수(扶餘仇首)와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합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도 직접 이 전투에 참가해 전력을 다해 항전했는데, 누군가가 쏜 화살에 우연히 맞아 쓰러집니다. 그 화살의 상흔으로 인해선지 그는 371년 음력 10월 23일, 사망하고 맙니다....

 

동쪽으로 영토 확장을 꾀했으나, (燕, 337~370)과 오랫동안 대립하며 지지부진했고, 이에 눈을 돌려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의 정복왕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그의 아들 부여구수(扶餘仇首)의 반격(치양 전투(369), 패하 전투(371))에 대패하고, 고구려를 침공하려 올라온 근초고왕과 부여구수가 일으킨 평양성 전투(371)에서 입은 상처로 결국 사망하게 된 비운의 군주면서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던 고국원왕(故國原)의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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