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에 걸쳐 효자와 효부를 낸 영양 천씨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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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에 걸쳐 효자와 효부를 낸 영양 천씨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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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석대동 산 73 혹은 부산 해운대구 반송로 643-24에 정려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정려각(旌閭閣)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閭)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한 분들을 모신 각(閣)'을 뜻합니다.

영양 천씨 정려각(潁陽千氏旌閭閣)
해운대구 석대동의 영양 천씨 가문은 효자·효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이곳 석대동 상리 마을에는 영양 천씨 정려각(潁陽千氏旌閭閣)이 있어 효행희 마을로 이름이 높다.

이 정려각은 석대동 영양 천씨 가문의 다섯 효자와 한 효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다른 명칭으로 오효자일효부정려각(五孝子一婦旌閭閣)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에 세워진 여섯 비석은 효자(孝子) 천성태(千聖泰)[1725~1789], 천성태의 아들 천세모(千世慕)[1743~1810], 천세모의 아들 천술운(千述運)[1767~1835], 천술운의 아들 천상련(千相璉)[1795~1855], 천상련의 아들 천우형(千禹炯)[1843~1886]과 천우형의 아내 효부(婦)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효행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이들은 조선조 21대 영조대왕으로부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에 이르기까지 140여 년 동안 효를 실천하며 후세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 당시 오랫동안 이어진 이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도처에서 포창을 천거하였으며, 뜻있는 많은 지역 사림(士林)들이 100여 회에 걸쳐 계속하여 이들의 효행을 조정에 알렸으며 효행천거와 사실조사에 관련된 기록이 후대에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기록(효행행장과 포창건의에 관한 고문서 272점)들은 조선시대의 효행과 관련된 정책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써 문중에서 기증하여 현재는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정려각은 영양 천씨 가문의 다섯 효자와 효부를 통해 우리 고유의 덕목인 효행사상을 다시 한 번 고취할 수 있으며 지역사 복원과 지역민의 긍지를 키울 수 있는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2021년 9월
해운대구

낮은 풀숲을 지나고 저 멀리 돌계단도 올라가면 드디어 영양 천씨 정려각에 도착합니다.

이 정려각은 하나의 건물이지만 2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편엔 '효부김씨정려각(孝婦金氏旌閭閣)'이 오른편엔 '오효자정려각(五孝子旌閭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맨 왼쪽인 효부 김씨 정려각엔 '효자부천우형처유인김해김씨지려(孝子婦千禹炯妻孺人金海金氏之閭)'라고 쓰인 비석이 보입니다.

천우형과 그 부인 김해 김씨의 관계도

효자부인(孝子婦) 천우형(千禹炯)의 처(妻) 유인(孺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여(閭)라는 뜻입니다.

그 옆, 돌벽으로 막아진 부분 오른편 부터는 오효자 정려각입니다.

오효자 정려각의 가장 오른쪽엔 '효자영양천공휘우형지려(孝子潁陽千公諱禹炯閭)'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효자 영양 천씨 우형의 려'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 왼쪽에 있던 효부(孝婦) 김해 김씨의 남편입니다.

'천우형의 려' 오른편엔 '효자영양천공휘술운지려(孝子潁陽千公諱述運閭)'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효자 영양 천씨 술운의 려'라는 뜻입니다. 그는 천상련의 아버지이자, 천세모의 아들이라고 하네요.

'천술운의 려' 오른편엔 '효자영양천공휘성태지려(孝子潁陽千公諱聖泰閭)'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효자 영양 천씨 성태의 려'라는 뜻입니다. 그는 천세모의 아버지이자, 동래 입향조 천찬석의 6세손이라고 하네요.

'천성태의 려' 오른편엔 '효자영양천공휘세모지려(孝子潁陽千公諱世慕閭)'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효자 영양 천씨 세모의 려'라는 뜻입니다. 그는 천술운의 아버지이자, 천성태의 아들이라고 하네요.

'천세모의 려' 오른편엔 '효자영양천공휘상련지려(孝子潁陽千公諱相璉閭)'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효자 영양 천씨 상련의 려'라는 뜻입니다. 그는 천우형의 아버지이자, 천술운의 아들이라고 하네요.

정려각의 상단부에는 오효자일효부정려기문(五孝子一孝婦旌閭記文)이란 글이 걸려 있습니다.

영양 천씨는 명나라의 수위사(守衛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되었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를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집안을 다시 일으킨 조상)로 하고, 천만리의 조상이자 명나라 초기의 신하 천암(千巖)을 시조로 하는 성씨입니다.

 

1636년에 시작한 병자호란(1636~1637)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7세기 후반, 명나라 출신의 천만리의 4세손인 천찬석(千贊鉐)이 관직을 버리고 현재의 부산 해운대구 석대동으로 도망쳐 내려오며, 동래에 입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동래에 들어온 천찬석이 자리를 잡았고, 그의 6세손인 천성태부터 대대로 천우형과 그의 부인 김해 김씨까지의 5대에 걸쳐 5명희 효자와 1명의 효부가 등장했어요. 이를 기리기 위해 많은 사림(士林)이 조정에 문서를 올렸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려(旌閭)를 받진 못했으나, 1919년, 오륜행실중간소(五倫行實重刊所)에서 그 집안에 <포창완의문(襃彰完議文)>이 영양 천씨에게 발급되었고, 이후 1960년 3월,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이 힘을 합쳐 이 영양 천씨 정려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여러 공사로 인해 잠시 철거되었으나, 1988년 4월, 한 기부가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어졌죠.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또 한 컷 찍고 나왔습니다. 효행을 기념하는 건 어느 시대거나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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